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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修理山) 산행기/ 포토 에세이
(2005.9.6 나비 태풍 맞으며/명학역-관모봉-태을봉-칼바위-슬기봉-군부대정문-수암봉-병목골/산내음 10명과 함께)
*. 군포의 진산(鎭山) 수리산(修理山)
산내음 화요산악회 회원10명과 함께 수리산을 간다. 우리들의 오늘 일정은 1호선 명학 역에서 만나서 관모봉(426.2m), 태을봉(489m), 슬기봉(451.5m), 수암봉(395m)으로 해서 병목안유원지로 하산하는 약 6시간 산행을 하게 된다.
등로가 막 시작되기 직전에 빙 둘러서서 자기소개를 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새롭고 정겨운 광경이었다.
수리산(修理山)은 안산시, 군포시와 화성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지만, 최고봉 수리산(489m, 태을봉)과 슬기봉(451.5m)이 군포시 서측에 있으니 군포시의 진산(鎭山)이라고 하여야 하겠다.
*. 왜 수리산(修理山)이라 하였을까
수리산의 어원 유래담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이야기로는 수리산의 빼어난 산봉의 방위가 마치 독수리 같아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이에 대하여 1864년에 간행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이런 글을 들 수 있다.
“동오리의 산을 일컬어서 태을산 또는 견불산이라고 한다. 자못 크고 높은 취암봉[수암봉]이 있어 그 독수리 ‘취(鷲)’자로 인연하여 지방 사람들이 수리(修理)라 불렀다.(東五 一云太乙山 一云見佛山 頗峻高 有鷲岩峯 方言 謂鷲爲修理)”
이런 ‘취암(鷲岩)’이란 말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나온다.(本朝因之. 鎭山. 曰鷲岩)
이 ‘취암(鷲岩)’을 ‘대전(大田)’을 순우리말로 ‘한밭’이라고 하듯이 ‘수리암’이라 하다가 수리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암봉(秀岩峰)이란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이고.
*. 태풍 '나비'와 함께 관모봉 가는 길
관모봉 가는 길은 태풍 일본을 강타하고 동해안으로 빠져가는 태풍 '나비'의 영향으로, 강한 바람과 함께 하는 등산으로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이재민에게는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
태풍을 일컫는 말은 동서양이 달랐다.
동남아에서는 '태풍(typhoon)', 필리핀에서는 '바가오(baguios)', 인도양에서는 '사이클론(cyclone)', 북아메리카 카리브 해에서는 '허리케인(hurricane)',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윌리윌리(willy-willy)'라 부르고 있다.
태풍의 이름은 '괌 미군태풍경보센터'에서 명명하고 있다. 광복 후부터 1978년까지는 여인처럼 부드럽게 지나가라고 여자의 이름 84개를 알파벳순서 따라 명명하다가 1979년부터는 남녀 이름을 혼용하여 써오다가 최근에는 동식물의 이름 등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여성계의 항의에 이어서, 남성들의 항의가 빗발치듯하였기 때문이란다.
집에서 떠나올 때에는 수리산은 489m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산으로 알고 부담 없이 왔는데 수리산에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명학역의 등산고도가 40m밖에 안되어서 그런가. 수락산은 시원한 전망을 주는 능선을 보여주는데 왜 그리 인색한지-. 가도 가도 능선이 나타나지 않는다.
능선까지만 고생하고 가면 그다음부터는 안양시, 군포시는 물론 멀리 서해안까지 조망할 수 있는데-. 능선 길에서는 나비 태풍이 더 시원하게 불어줄 것이고 게다가 비 없이 바람만 강하게 불어주는 초가을 도심에 묻혀있는 산이니 전망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 CQ! CQ! 여기는 관모봉 오버
처음 나타나는 철탑 옆을 지나니 낯익은 안테나가 나타난다. 핸드폰이 생기기 전 일만은 DS2 EFB 콜사인으로 활동하던 아마추어 햄이었다. 그 햄 시험을 보고 자유로를 달려오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쓴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그 후 한강이 바라보이는 우리 아파트 옥상에 안테나를 세워 놓고 방송국을 개설하여 놓아서 지금도 충청도까지 교신이 가능하다. 건강한 취미에 몰두하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우리 일행들은 그 바로 위 관모봉에서 가장 늦게 오르는 이 아마추어 햄을 기다려 주고 있었다.
*.태을봉(太乙峰) 가는 길
관모봉에서 태을봉(太乙峰)까지는 능선 따라 900m로 통나무 층계 내리막길이었다. 산에 와서 애써 땀 흘리고 올라온 길을 비록 다음 봉을 가기 위해서라지만, 내려가는 것은 왠지 손해를 보는 것같이 아까운 생각이 든다.
안양시현충탑과 만남의 광장과 태을봉 갈림길에서 630m를 오르니 6헬기장이 보이고 거기 돌로 쌓은 탑 근처에 일행이 모여 있다.
나보다 평균 20년이나 젊은이들인데다가 생업까지 제쳐놓고 달려올 정도로 산행이 생활이 되고, 목적이 된, 그분들의 말을 빌리면 산을 사랑하는 것으로 폐인이 된 건장한 젊음들이니 나의 이 느린 산행이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다음에 다시 부르지 않을 것 같아 두렵기만 하다.
여기가 바로 이 수리산에서 제일 높다는 489m의 태을봉(太乙峰)으로 어느 산악회에서 만든 정상석이 있다.
정상석이란 산의 가장 높은 봉에 세우는 것이기에 꼭 있어야할 것이 그 높이인데 관모봉도, 태을봉도 이상하게도높이가 빠져있다. 그걸 세운 등산회 이름만 요란할 뿐이다.
그런데 수리산의 정상은 어디인가.
혹자는 둥근 아치의 조형물이 있는 군부대가 있는 저 봉이 수리봉이라고 하고, 태을봉이 정상이라고도 하고, 이 산 전체가 수리산이라고 편하게 말하기도 한다. 이 산의 이정표도 잘 모르는 이가 쓴 듯하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이 산에서 제일 높은 태을봉이 수리산 정상이라고. 설악산 주봉이 대청봉이듯이, 지리산 주봉을 천왕봉이라 하듯이.
*. 수리산의 하이라이트 수암봉 가는 길
1980대였다. 지금은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는 초등, 고등, 대학교 동창인 죽마고우 노(魯)교수와 함께 눈 덮인 겨울 수리산을 찾았을 때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그 아름답던 암릉 길이 바로 이 수암봉 가는 길이었다. 아슬아슬한 절리(節理)로 이루어진 단단한 흰 규암 절벽은 길지는 않으나 심산 바위를 릿지 하는 흥분을 갖게 한다.
태풍 나비가 그 청명한 하늘을 열어주어 더할 나위 없이 맑게 갠 하늘 아래 우리의 강산을 굽어보며 가는 자리에 선 바위에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는 며칠 전이건만 벌써 흘러간 옛날처럼 다시오지 오지 못할 추억 같아 아련한 그리움이 앞선다.
수리산을 오르다가 육산이로구나 하다 보면 암릉이 나타나고, 돌산이로구나 하면 다시 또 오솔길이 시작된다.
슬기봉(451.5m)은 군부대 태을봉 가는 길의 이정표가 있는 만남의 광장, 안양시, 통제구역의 갈림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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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부대를 지나 수암봉 가는 길
군부대를 지난다. 분단의 사각지대. 골육상쟁의 뼈아픈 현실이 되는 산의 정상 군부대 철조망을 돌아간다. 우리들은 세계에 오직 하나뿐인 분단의 슬픔을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민간인이 갈 수 없으니 이름마저 잊혀진 슬픈 봉이다.
통행금지 구역이라고 되어 있어 등산객들이 발길을 돌리는 곳이지만 거기서 직진하여 철조망을 우측으로 돌아가면 군부대 정문으로 오르는 임도(林道) 길이 나타난다.
*. 산꾼들의 노하우
함께 등산하는 분 중에 닉네임이 '만우'라는 영관급으로 제대한 남자다운 분이 있다. 오늘은 모자 뒤에 등산 스카프를 대롱대롱 매달고 나왔다. 처음 보는 편리한 모습이어서 어디서 보고 따른 것인가, 독창적인가를 물었더니 특허를 내야겠다고 허허- 웃는다.
산에 오면 유난히 힘들어하며 땀이 뒤범벅이 되는 사람이라서 땀으로 모자를 쓰고 벗고 다니다가, 외국 여행 중에 산 귀한 산 뱃지를 단 모자를 수없이 잃고 다녔는데 그분이 없는 산행에 가서는 나도 써 먹을 작정이다.
산에 가서 등산복을 벗을 수도 없고 더워서 안 벗을 수 없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 쪽 팔만 빼고 다니는 것이 내가 발견한 노하우다.
우리 아파트에 사시면서 함께 만나 등산 이야기를 안주 삼아 함께 마시는 산꾼이고 술꾼 한 분과 산에 갔더니, 정상 주라면서 시원한 캔 맥주를 건넨다. 어떻게 이리 시원한가를 여쭈어보았더니 대답이 이렇다.
등산 가기 전에 시중에서 파는 생수 통에 3/4 정도 물을 넣고 냉동실에 넣어서 꽁꽁 얼린다. 배낭 속의 그 두 병 사이에 냉장고에 있던 맥주 두병을 넣고 온다는 것이다.
함께 간 청파 원장님도 산에 와서 시원한 소주 마시는 비법을 말한다.
비니루에 든 소주병을 냉동실에다가 꽁꽁 얼리면 술이라서 절대로 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름에 마실 물을 담은 통이나 막걸리를 신문지로 둥글게 싸고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으면 보냉(補冷)이 된다. 물론 꽁꽁 얼려야 정상까지 시원한 물을 마실 수가 있다. 그것은 신문지의 글자들은 기름으로 찍은 것이라서 자연히 보온, 보냉이 된다는 것이다.
등산하면서 신발 끈이 풀리지 않게 매는 방법이 있다. X자의 신발 끈을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묶지 않고 아래서 위로 묶는 것이다.
처음 가는 산길에서 길을 확인하고 싶을 때는 리본으로 하고, 두 갈래 길이 나왔을 때는 리본이 많은 쪽으로 간다.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우선인가? 올라가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산에 있는 박히지 않은 돌이 굴러내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산하다가 길을 잃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나? 계곡을 따라 하산하지 말고 다시 돌아 위로 가면서 길을 찾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길로 내려와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누가 더 큰 누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등산하면서 산에 오래 다닌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그 옷차림이나 배낭을 유심히 살펴보는 습관을 갖었다. 그분의 등산에 관한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다.
*. 수암봉(秀岩峰)의 여정
우리들의 마지막 목표의 봉인 수암봉 아래 네거리 쉼터에 왔더니 가을의 전령사 억새가 무성하였다. 가을이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도 동심이 되어 청파님의 디카에 쏘옥 들어가 보았다.
수암봉 정상은 이름처럼 뛰어나게 아름다운 바위는 없다, 수암봉이란 뛰어난 경관을 살필 수 있는 바위라는 말인 것 같다. 전후좌우로 탁 트인 전망에다가 친절하게도 안내판에 그림과 경치의 위치와 설명이 있지만 그 옆에 있는 위험 표지판이 정상석보다 몇 십 배나 커서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해치고 있다. 사람들에게 주의 사항을 너무 크게 말하는 격으로 조화를 잃었다.
우리들은 안양 명학 역에서 관모봉, 태을봉, 슬기봉를 지나 수암봉까지 산 속에서, 가을을 맞으며, 태풍 속에서 산이 그리운 사람들과 더불어 하루를 살았다. 우리가 지나온 곳에서 지금 하산하려는 금단터널이 지나가는 병목유원지까지는 'U'자 형으로 수리산을 'U'턴 하여온 격이다.
수리산에 나는 두 번 왔다. 언제 다시 찾아와서 천년 사찰 수리사(修理寺)도 가고, 담배촌도 가보고 싶다.
담배촌은 수리산 속에 있었던 '뒷듬이' 마을로 헌종 때 천주교인들이 기해박해(1839년) 때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몰래 숨어 살며 옹기를 굽거나 담배를 심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었던 곳이라서 담배촌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이 마을을 유서깊은 교우촌으로 개척한 최경환(프란치스꼬, 1805-1839) 성인께서 옥사로 순교하시고 묻히신 수리산 성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수리산에서 6시간 동안이나 오늘을 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런 산을 바라보며 사는 이 고장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로구나. 똘배가 주렁주렁 익어가는 초가을이었다.
첫댓글 수리산에 대한 유래와 자세한 설명을 보며 읽으니 더욱 정감이 갑니다...연세에 비하여 정말 사진도 많이 찍으시고 산행도 젊은사람 못지않게 잘하시니 대단하시다는것을 느낌니다...아름다운 사진과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저도 한국의 산하로 달려가서 되도 않은 감사의 댓글을 달고 왔네요 우리들이 베워야 할 분야가 너무도 많고 읽으면 읽을 수록 느낌이 많은 산행기 정말 감사합니다
뵙적은 없지만 연세가 많으신걸로 알고있습니다~~사진작업과 수락산의 자세한 설명에 너무 놀라와요~~나중에 이자료 필요할때 스그랩하도록 허락하여 주세요~~~좋은글 감사합니다~
한국의산하 초창기부터 산행기/에세이 쓰시는 문인협회 정식 소설가이시며 내년에 칠순이십니다..산행시는 람보처럼 멋진 복장에 재미있는 말씀 많이 해주시는데, 인천이 고향이시죠..ㅋㅋㅋㅋ ^^**
일만 선생님 산행기는 역시입니다...항상 건강하세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