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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성산 용주사 원문보기 글쓴이: 현림
이미 포스팅한 <사성제(四聖諦)의 허(虛) 와 실(實)>에서
사정제에 대한 교리(敎理)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사성제의 교리 속에 어떤 교훈을 담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사성제의 구조를 보면 결과를 먼저 말하고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고(苦)가 결과라면 집(集)은 원인이 되고,
멸(滅)이 결과라면 도(道)가 원인이 된다.
왜 불타는 이런 논리적 구조를 택했을까?
불타를 호칭하는 열 가지 이름이 있다. 그중 하나가 <천인사(天人師)>다.
하늘 사람(천신)과 모든 중생의 스승이라는 의미다.
하늘 사람도 중생도 부처님은 그들의 속성을 너무 잘 알기에
그 속성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이를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속성을 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태어난 자는 죽는 것이 필연이다.
인연으로 생한 것은 인연이 다하면 멸하는 것이다.
그것이 고통이며 번뇌임을 모든 중생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중생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우리 몸속에 위(位)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위가 아프지 않으면 먹고 마시면서도
위(胃)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물속에 빠져야 공기의 중요함을 인식하듯
중생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는 이미 문제가 발생했을 때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 때야 관심을 가지고
그 원인을 살펴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결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중생의 이런 마음을 알고
먼저 결과를 말하고 그다음에 원인과 해결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문과 연각과 같은 중생들의 근기에 맞춘 것이다.
그러나 대승의 보살 수준에 이른 자에게 가르침에서는
처음과 끝을 동시에 보고 다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말은 원인과 결과를 따로 떼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본다는 말을 직시(直視) 한다는 의미다.
사물의 실체를 파악함에는 사물을 그 자체를 직시(直視)하여야 하는데
이를 원인과 결과로 분석한다는 것은 전체와 부분을 분리하여
분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에 빠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의 경에서 이를 경계하기 위해서
“보리가 번뇌이고, 번뇌가 곧 보리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 경전에서 이를 밝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경에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아야 한다.”라는 말은 이를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다.
시작은 소승에서 했지만, 의미의 완성은 대승에서 이룬 것이다.
사성제는 중도를 말하는 것이다. 중도를 공부함에는 유의할 것이 있다.
이는 법애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사성제에서 말하는 고(苦)와 멸(滅)에 대한
법애(法愛)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고(苦)에만 집착하면 무상(無常)에 빠지게 되고
멸(滅)에만 집착하면 공(空)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사성제의 진리가 위대한 성인의 가르침이긴 하지만
한편에 치우치면 도리어 번뇌가 되고 고(苦)가 된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설탕은 고에너지를 주는 식품이다.
결핍되면 저혈당으로 빈혈이 초래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섭취하면 당뇨병을 유발한다.
소금은 모든 음식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미료다.
결핍되면 음식의 맛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섭취하면 고혈압을 유발한다.
불교의 진리가 번뇌를 이야기하고, 공(空)을 이야기하고
무상(無相), 무원(無願), 무작(無作)의 열반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기에 법애(法愛)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
사성제가 주는 삶의 교훈이며, 이는 곧 중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성제의 멸(滅) 즉 열반을 공부하면서
세속의 삶에서 왜 중생들은 세속법을 여의지 못하는가?
모든 인간은 자유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죽을 때는 속박 속에서 죽는다.
삶의 시작은 완전히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세속의 삶 즉 인간 사회로 들어오면서 규칙과 도덕,
그리고 계율 등 다양한 지식과 훈련 속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여유로움, 자연스러움, 그리고 자발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중생은 자신의 둘레에 방어벽을 쌓기 시작한다.
그래서 점점 더 경직되기 시작한다. 내적인 유연성은 사라져 버린다.
중생은 자신의 주변에서 남에게 공격당하지 않도록 방어하기 위하여,
안전을 꾀하기 위하여 일종의 城과 같은 방어벽을 만든다.
그리하여 존재에의 자유, 즉 근원적인 자유를 상실해 버린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認定과 거부, 그들의 명령과 가치 부여에 더욱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래서 가치 기준이 달라져 他者의 가치의 기준이 나의 삶이 가치가 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을 모방하고 추종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참된 행복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진리와 등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경계하는 것이 사성제에서 말하는 도(道)의 경지이며
이를 세부적으로 나열한 것이 팔정도인 인 것이다.
멸(滅)은 과(果)이고 도(道)는 인(因)이라 한다.
멸(滅)은 곧 열반이니 이에 이르는 도(道)를 팔정도라 했다.
사제의 구경(究竟) 목표는 열반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단지 열반에 오르는 것으로는 무언가 허전하다.
고통과 번뇌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삶이 허전하다.
사제의 도리는 고통과 번뇌를 없애고 팔정도를 통하여 멸에 이른다는 것은
자리(自利)는 분명하나 이타(利他)의 행(行)이 없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무루지(無漏智)에 의한 영원한 평안(平安)을 찾은 경지다.
이를 <무위지안(無爲之安)>이라고 한다. 이는 무분별(無分別)한 경지다.
그래서 대승의 구경 목표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에 두고 있다.
상구보리(上求菩提)는 위로는 보리를 구한다는 의미다.
이는 자리(自利)를 말한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은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한다는 의미다.
이는 이타(利他)를 말하는 것이다.
지혜(보리)가 중생 구제 보다 앞서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앞서는 것은 믿음(信)이다.
그래서 『반니원경(般泥洹經)』은
“믿음이 있어야 바른 법을 보고 즐거워한다.”라고 했고
『비로자나성불경(毘盧遮那成佛經)』은
“일체지지(一切智智)는 비심(悲心)을 근본으로 삼으니,
비(悲)로부터 대 보리심이 발생하고
그런 연후에 모든 방편을 일으킨다.”라고 했다.
도(道)를 말하는 팔정도에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이 있지만
이를 통해 유추할 수는 있지만 믿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믿음(信) 위에서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를 가지고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것을 불교는 이를 공덕(功德)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화엄에 이르기를
「信爲道源功德母 長養一切諸善根」이라고 한 것이다.
믿음(信)은 道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로서
모든 선의 뿌리를 길러낸다는 의미다.
절이나 교회 등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 하고,
많이 듣고 배워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을 지식인이라 말한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다는 사람들을 보면 머리는 집에 두고 몸과 입만 가지고
절이나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에 지식인이라는 사람은 몸은 집에다 두고
머리와 입만 가지고 밖으로 나대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지식을 자랑하고, 신앙심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우월감을 나타내고
또한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유발하려는 방편일 뿐이다.
그것은 자비도 사랑도 아니다. 단지 세속 사람들의 존경심을 유발하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기 위한 귀에 듣기 좋은 소리일 뿐이다.
그들의 소리란 나무를 모르면서 숲을 이야기하는 것 같고
사람을 모르면서 인류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추상적인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모 종합병원에서 30여 년을 근무한 수간호사가 있었다.
갑자기 한밤중에 남편이 발작을 일으키자, 얼떨결에 주사기를 들었지만
눈앞이 멍해졌다.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에게는
습관적으로 놓던 것이 주사인데 갑자기 남이 아닌 자기 남편이
원인 모르게 발작을 일으키자, 모든 생각이 멈추어 버린 것이다.
찰나에, 무심(無心)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하는 소리 “이걸 어떻게 놓지?”
범부들이 이런 경우 하는 말 “하던 대로 해!”
믿음은 습관적으로, 관습적으로 행하는 행위가 아니다.
내 안에서 나오는 참된 믿음이어야 한다.
지혜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들은 아무리 많아도 지혜가 아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지혜가 되어야 한다.
<법성게>에서 “證智所知非餘境)”이란 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유루지(有漏智)가 아닌 무루지(無漏智)를 말하는 것이다.
@유루지(有漏智)란 일체의 유위(有爲) 무위(無爲)의 법을 관(觀)하나
그러나 흔히 세속의 법을 대상으로 중히 여기기 때문에
또한 세속지(世俗智)라고 한다.
@무루지(無漏智)란 사유(思惟)를 벗어나 진리를 증득하고
모든 번뇌를 여읜 청정한 지혜를 말한다.
여기서 진리는 진여의 이치를 증득한 무분별한 지혜를 말하며
또한 인연으로 일어난 모든 만상(萬象)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는 세속에서 얻은 지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내가 깨달은 진리라는 소리다. 그래서 불교 사회학자들은
이를 감응(感應)과 반응(反應)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한다.
“감응(感應)은 상황과 같이 살아 움직이는 불꽃이다.
그러나 반응은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다.
관념의 옛 습관에 따라 반응한다면
그 반응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상황이 행동을 만들어 낼 때
그대는 자각된 상태에서 여기 응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고의 강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옛 스님 또한 이르기를
“믿기만 하고 알지 못하면 무명만 자라나고,
알기만 하고 믿지 않으면 사견만 늘어난다.”라고 말한다.
(信而不解 增長無明 解而不信 增長邪見)
그래서 초기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말하지만
대승에서 육바라밀을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바라밀은 지식이나 사유(思惟)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를 먼저 설하고 다음에 원인을 설한 것은
문제의식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질문이 분명하지 않으면 정확한 바른 답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은 질문에는 관심이 적고 오로지 답만을 갈구하는 것이다.
병이 발생하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서 치료법을 찾는 것이다.
삶이 무상(無常)하고 허망(虛妄)하게 느껴지면
무상이 무엇인지 허망함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답만 구하는 것이다. 질문은 삶이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답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이 분명하지 못하니 답 또한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행복을 찾고 영생불사를 꿈꾸지만, 행복이 불행이 되고
영생(永生)이 찰나가 되는 것이다.
@중생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보면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단지 남의 답을 끌어내기 위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답을 긍정하는 수단을 삼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행복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 대답은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상대에게 질문은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고 의문을 제기하는 그것에 불과하다.
이런 질문은 단지 속임수이고 자신을 기만하는 수단일 뿐이다.
두 번째 질문은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에서 하는 질문이다. 이때는 질문자의 마음은 무심이다.
비어 있는 마음이기에 상대방이 내는 답에 경청하게 된다.
그래서 바르면 호념(護念)하고 그릇되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사물의 <실재>를 파악함에
직관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모순을 해결했고,
중관파는 변증법을 통해 이성이 이성 그 자체에서 벗어나게끔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오랜 수행을 거쳐서 성취한 것이라 심오한 설법은
중생이 바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떤 말은 불가사의하기도 하다.
그래서 중생은 이성(理性)에 의지하게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용수보살이 설하는 변증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성(理性)을 이성(理性)을 파하는 방법이다.
비유하자면 손에 박힌 가시를, 가시를 이용해서 뽑아내는 것이다.
경전 공부는 경전을 벗어나기 위해서 읽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목적은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 목적이란 무엇이나?
지식을 갈구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왜 지식을 탐닉하지 말아야 하는가? 지식은 말이다.
말이 반복되면 그 말이 갖는 상징이 실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듭거듭 반복되면 반복을 통해 자동으로 최면에 걸리게 된다.
계속된 반복으로 관념이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성제를 단지 지식으로만 이해하면 이러한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말은 결코 실재가 아니다. 희대의 독재자로 알려진
아돌프 히틀러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진실과 거짓말 간의 오직 한 가지 차이점만을 안다.
즉 여러 번 반복된 거짓말은 진실이 된다는 것이다.”
목적이란 마음의 일부이지만, 삶은 마음 없이 존재한다.
모든 지식은 욕망의 거름이 되고, 마음으로 흘러나온다.
이 흘러나오는 것을 루(漏)라 한다.
루(漏)란 번뇌라는 말이다. 그래서 세속의 번뇌를 유루(有漏)라 하고,
세속을 벗어난 지혜를 무루(無漏)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고,
경(經)의 글자만 보고 따른다면 번뇌가 또 다른 번뇌를 낳을 뿐이다.
사성제의 법문은 실로 위대한 진리의 소리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단순하다.
병이 있으면 원인이 있고, 치료가 필요하고 치료 방법을 설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런 단순한 말을 위대한 진리 사성제라 말하는가?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지 않으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진리는 평범한 소리다. 그러나 그 진정한 의미는
깊고 심오하다.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말만 따라가는 것은
빈 산에 울리는 메아리를 쫓는 것과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