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


라히레 - 바위를 들어올리는 테세우스
아테나이의 왕 아이게우스는 아들을 얻지 못해 델피 신전에 가서 신탁을 물었더니 아테나이로 돌아갈 때까지는 아예 술 부대의 마개를 열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이게우스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아테나이로 돌아오는 도중에 트로이젠 시에 들려 트로이젠의 왕인 피테우스의 집에 잠시 묵게 되었다. 그는 그의 딸이 아이게우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아들을 낳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게우스를 술에 취하게 해 놓고 딸인 아이트라와 하룻밤을 지내게 했다. 다음날 아이게우스는 떠날 때 아이트라를 어느 큰 바위로 데리고 가더니, 바위 밑에다 샌들과 칼을 묻어두고서 아이트라에게 말하기를 만일 아들을 낳아 청년이 되어 이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있게 되면 바위 밑에 넣어 둔 샌들과 칼을 가지고 아테나이로 찾아와 자기의 뒤를 잇게 하라고 하며 떠났다.
세월은 흘러 마침내 테세우스가 장성하자 아이트라는 테세우스를 아테나로 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테세우스를 바위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장정이 된 테세우스는 쉽게 바위를 들어올려 칼과 구두(샌들)을 꺼냈다. 그 무렵 육로에는 도둑들이 횡행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더 가깝고 안전한 길-그것은 해로였다-을 택해 그의 아버지의 나라로 가도록 간청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젊은 마음에 영웅심이 불타올라 자기도 그 당시 저 그리스에 명성이 높았던 헤라클레스와 같이 그 나라를 괴롭히고 있던 나쁜 놈들과 괴물들을 퇴치하여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모험적인 육로를 택했다. 여행 첫날에 그는 에피다우로까지 갔다. 이곳은 헤파이스토스와 아들인 페리페테스라는 자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이 사내는 광포한 야만인으로, 항시 쇠망치를 지니고 다녔으므로 모든 여행자들은 그에게 폭행을 당할까 봐 겁을 먹고 있었다. 테세우스가가까이 오는 것을 보자,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테세우스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자, 그는 돌격하여 왔으나 곧 젊은 영웅의 일격을 받고 쓰러졌다.
테세우스는 그의 쇠망치를 뺏아 최초의 승리의 기념으로 그후 항상 가지고 다녔다. 그후에는 그 지방의 조그만 폭군이나 약탈자들과 이와 비슷한 승부를 여러 번 겨뤘는데, 모두 테세우스가 승리했다. 그중의 하나로 프로크루스테스라고 일컫는 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늘리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는 쇠침대를 가지고 있어 그의 수중에 들어온 모든 여행자들을 그 위에 결박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장이 침대보다 짧은 경우에는 몸을 늘려서 침대에 맞도록 하고, 반대로 신장이 침대보다 길 경우에는 일부분을 잘라 버렸다. 테세우스는 이자도 다른 자와 마찬가지로 처치했다

Keuninck Kerstiaen - 아테나로 여행중인 테세우스
도중의 모든 위험을 정복하고서 테세우스는 마침내 아테네에 도착했는데, 이곳에도 새로운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마법사 메디아가 이아손과 이별한 뒤에 코린토스에서 도망해 온 테세우스의 아버지 아이게우스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메디아는 마법에 의해 젊은이가 누구인가를 알고 만약 테세우스가 아이게우스의 아들로 인정되면, 자기가 낳은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메데이아는 오래 전에 스퀴티아 해변에서 따온 바곳이라는 독초로 독약을 제조하여 이로써 테세우스를 죽이고자 했다. 이 약초는 저승궁을 지키는 개 케르케로스의 이빨에서 생겨난 풀로 알려져 있다. 스퀴티아에 이 약초가 있었던 것은, 이곳에 있는 한 동굴이 저승 세계로 통하기 때문이다. 티륀스 영웅 헤라클레스가 저승으로 내려가 몸부림치는 이 케르베로스를 사슬로 묶어 나온것도 이 동굴을 통해서였다.
당시 날빛을 쐰 적이 없는 이 개는 날빛 나래로 나오자 세 개의 머리를 내두르고 몸부림치면서 몹시 짖었는데 이 바람에 이 개의 입에서 들은 침이 바닥을 적셨다. 이 침이 굳어졌다가 기름진 대지에 뿌리를 박고 풀로 돋아나니 이 풀이 바로 그 유명한 독초가 된 것이란다. 이 풀이 단단한 바위 위에서만 자란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것을 <아코니톤-바위꽃>이라고 부른다. 메데이아는 아이게우스의 심중에 젊은 객에 대한 의구심을 충만케 하여, 객에게 독배를 대접케 하도록 권유했다.그리하여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가 독약을 타서 건네준 술을 테세우스에게 권했다. 테세우스는 영문을 모르고 이 독약이 든 술을 마시려 했다. 그러나 아이게우스는 그 순간 테세우스가 찬 칼의 상아 자루에 자기 왕가의 문장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달려들어 잔을 빼앗아 버렸다. 메디아는 간계가 발각되자, 주문을 외어 검은 구름을 일으키고는 그 안으로 숨어들어 아시아 지방으로 도망쳤다. 이 지방은 후에 메디아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은 그녀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w. Russell Flint - 테세우스에게 술잔을 권하는 메데이아
테세우스는 그의 아버지에 의하여 인정을 받고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아이게우스 왕은 아들이 무사하게 된 것을 기뻐하는 한편 자기가 지을 뻔했던 죄에 대하여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몹시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는 제단에 불을 밝히고 신들에게 많은 제물을 바쳤다. 목에 꽃다발을 두른 수많은 황소들이 끌려나와 그 튼튼한 목으로 제단의 도끼날을 받고 쓰러졌다. 아테나이 사람들로서는 처음으로 누려보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수많은 도시국가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이 잔치에 참석했다.
포도주가 입을 열게 하자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테세우스를 찬양했다. "전능하신 테세우스시여, 그대는 그 뛰어난 무용으로 크레타의 황소(헤라클레스가 크레타에서 끌고와 마라톤 평야에 풀어놓았던 황소)를 죽임으로써 마라톤 평원에다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제 그대의 공덕에 힘입어 크로미온의 농부들은 멧돼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에피다우로스 사람들은 무지막지한 쇠몽둥이를 휘두르던 불카누스의 아들이 그대의 손에 거꾸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웅이시여, 그대는 케피소스 강가에서는 프루크루스테스를 죽이셨고, 테메테르의 땅인 엘레우시스에서는 케르퀴온을 처단하시었습니다. 소나무 가지를 휘어 이를 줄로 단단히 묶고, 길손을 붙잡아다 가랑이를 이 소나무에 각각 하나씩 묶었다가 줄을 끊어 길손의 가랑이를 찢어 죽이는 저 악명높은 시니스 역시 영웅의 손에서는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영웅께서 저 도둑 스키론을 잡아죽이신 이래로 알카토에와 메가라로 가는 길에서는 이제 근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자의 뼈는 땅도 바다도 거두어주기를 거절하였다지요. 오랫동안 굴러다니다 그대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바위를 <스키론-석회석>이라고 부른다지요. 누가 그대의 나이를 듣고 그대의 공적을 믿으려 하리요. 그대는 어리신 연치에 참으로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영웅이시여,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우리가 드리는 잔을 받으소서" 궁전은 환호성과 백성이 부르는 노래로 떠나갈 듯했다. 아테나이 온 도시에 근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으나 그 무렵, 아테네 사람들은 크레타 왕 미노스에게 바치도록 강요당한 조공(조공)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 조공이라는 것은 일곱 명의 소년과 소녀들로서, 이들은 소의 몸뚱이와 인간의 머리를 가진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의 밥이 되기 위해 매년 보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단히 억세고 사나운 짐승으로서, 다이달로스라는 사람이 만든 미궁 속에 갇혀 있었는데, 그 구조가 대단히 교묘하여 그 속에 갇힌 자는 누구나 혼자 힘으론 탈출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마노타우로스는 그속에서 돌아다니며, 인신(인신)의 희생물로써 사육되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죽을 각오를 하고 이 재난으로부터 국민을 구하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조공을 할 시기가 다가와서, 희생될 소년과 소녀들이 관례에 따라 추천에 의하여 결정될 때, 테세우스는 그의 아버지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희생될 포로들과 함께 크레타로 떠난다. 테세우스가 소년과 소녀들틈에 섞여 크레타에 도착하자, 미노스 왕 앞으로 나갔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임석한 크레타의 왕녀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의 잘생긴 모습을 보자 첫 눈에 반해버린다. 그리하여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괴물을 찌를 칼과 미궁에서 빠져나올 실 한타래를 주었는데, 테세우스는 괴물을 죽인 다음에는 실타래의 실을 따라 무사히 라비린토스(미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로인해서 [아리아드네의 실]이라고 하면 난문을 푸는 실마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아리아드네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테세우스는 아테네로 향하는 항해도중 네소스 섬에서 그녀가 잠든사이에 달아나 버렸는데 이것은 꿈 속에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는 테세우스의 아이를 잉태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후 아라드네의 운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난산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고 또 비탄한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디오니소스가 살려내어 아내로 삼았다고 하기도 한다

에버린 드 모르간 - 낙소스 섬에 버려진 아리아드네
 테시우스와 아리아드네, 실타래를 따라 미궁을 빠져나감
앗티카의 해안에 접근했을 때, 테세우스는 그의 아버지와 한 약속을 깜박 잊고 흰 돛을 달지 않았다. 테세우스는 아테네를 떠날 때 아버지인 왕에게 약속을 했었다. "무사히 괴물을 퇴치하고 돌아올 때는 배에 흰 돛을 달겠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올 때는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검은 돛을 그대로 달고 있었다. 부왕은 바닷가에서 이를 바라보곤 슬픔을 못이겨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후에 아이게우스왕이 자살한 바다를 아이게우스의 이름을 따서 아이게우스해(에게해)라고 부르게 된다. 이렇게 하여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이 되었다. 테세우스의 모험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존족의 원정이다. 그는 그들이 헤라클레스에게서 받은 타격으로부터 회복되기도 전에 엄습하여 여왕 안티오페를 납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마존족들이 아테네에 침입하여 시중(시중)에까지 쳐들어왔다. 테세우스가 그들을 정복한 최후의 전투도 다름아닌 이 아테네 시 가운데서 행해졌다. 이 전투는 고대의 조각가들이 즐겨 선택하는 제재(제재)의 하나로서, 현존하는 몇 가지 예술 작품 중에 그 모습이 남아 있다.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오스의 우정은 가장 친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전쟁 중에 시작된 것이었다. 페이리토오스는 마라톤 평야에 침입하여 아테네 왕이 소유하고 있는 소떼를 약탈해 가려고 했다. 테세우스는 약탈자를 격퇴하러 갔다.페이리토오스는 그를 본 순간 감동했다. 그는 화평의 표시로서 손을 내밀고 부르짖었다. "처분을 하시오. 무슨 배상을 원하시오?" "그대와의 우정을!" 하고 테세우스는 대답했다.
그래서 그들은 변함없는 우정을 서약했다. 그후 그들의 행동은 이 서약에 충실했고, 진정한 전우로서 우정을 언제까지나 계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제우스의 딸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테세우스는 그때는 아직 어렸던 헬레네를 선택했고 후에 그것이 트로이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페이리토오스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납치했다. 페이리토오스는 하계의 여왕을 원했다. 테세우스는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대망을 품은 그 벗과 더불어 하계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하계의 왕 하데스에게 잡혀서 궁전의 문 옆에 있는 마법을 가진 바위 위에 방치되었다. 그들은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마침내 헤라클레스가 와서 테세우스를 자유의 몸이 되게 했지만, 페이리토오스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안티오페가 죽은 뒤 테세우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딸 파이드라와 결혼했다. 테세우스에게는 힙폴리토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파이드라는 아버지와 같은 매력과 미덕을 겸비하고 또 나이도 자신과 비슷한 이 의붓 아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힙폴리토스는 자신에게 구애하는 새어머니의 부도덕함을 단호히 꾸짖었고,거절당한 사랑에 대한 수치심과 증오심으로 제 정신이 아닌 파이드라는 테세우스 앞에 나아가 힙폴리토스가 어머니인 자신을 범했다고 음해하고 그 자리에서 자결한다. 이에 분노한 테세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패륜아인 아들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게 된다. 테세우스의 간청을 들은 포세이돈은 힙폴리토스가 해안가에서 이륜마차를 몰고 있을 때, 바다 괴물을 보내어 힙폴리토스의 이륜마차를 산산이 부숴버려 힙폴리토스의 목숨을 거둔다. 그러나 후설에 의하면 죽은 힙폴리토스를 아르테미스의 조력에 의하여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살려내게 되고, 아르테미스는 힙폴리토스를 온전한 정신을 잃은 아버지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이탈리아에 데려다 놓고, 에게리아라는 님프로 하여금 보호케 했다고 한다

피에르 게랭 - 테세우스와 파이드라, 히폴리토스
테세우스는 마침내 국민의 지지를 상실했으며, 스키로스의 왕 뤼코메데스의 궁전으로 은퇴했다. 뤼코메데스는 처음에는 그를 따뜻이 맞았으나 뒤에 배반하여 그를 죽였다. 후년에 아테네의 키몬 장군은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것을 아테네로 옮겼는데, 유해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테세이온이라 불리는 신전에 안치했다. 테세우스가 자기의 아내로 삼은 아마존족의 여왕은 일설에는 힙폴뤼테였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속에서 이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그리고 이 작품의 주제는 테세우스와 힙폴뤼테의 결혼식에 따르는 흥겨운 잔치이다. 테세우스는 반(반)역사적인 인물이다. 그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그 당시 앗티카 지방을 점유하고 있던 여러 종족을 한 나라로 통합했는데, 그 수도가 아테네였다는 것이다. 이 대사업의 기념으로 그는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를 위해서 판아테네라는 축전을 창시했다.
이 축전은 그리스의 다른 축전과 주로 두가지 점에 있어서 상이하였다. 그것은 아테네 사람들에게만 한한 축전으로서 그 중요 행사는 엄숙한 행렬을 지어 페플론, 즉 아테나의 성의(성의)를 파르테논에 가지고 가서 여신의 상 앞에 걸어놓는 일이다. 페플론에는 전면에 수를 놓았는데, 그것은 아테네 최고의 명문의 처녀를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만들게 한 것이었다. 행렬에는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참가했다. 노인들은 손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들고, 젊은 남자들은 무기를 들고 행진했다. 젊은 여자들은 성기(성기)와 과자와 기타 제물을 올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행진했다. 행렬은 파르테논 신전이 외부를 장식한 부조(부조)의 주제가 되었다. 이 조각의 상당한 부분이 지금 영국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엘긴 대리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조각 중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이곳에서 그리스의 다른 유명한 국민 경기에 대해서 말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다. 최초에 시작되었고 가장 유명한 것은 올림피아 경기로서, 제우스 자신이 창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경기는 엘리스 지방에 있는 올림피아 평원에서 행해졌다. 많은 관람객들이 그리스에서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시켈리아로부터 모여들었다. 경기는 5년에 한번 성하(성하)에 열려 닷새 동안 계속되었다. 이 경기를 표준으로 하여 올림피아 해[년]라는 연대 구분의 관습이 생겼다. 제1회 오림피아 해는 보통 B.C. 776년에 해당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피티아[피톤] 경기는 델포이 부근에서 행해졌고, 이스트미아 경기는 코린토스 지협(지협)에서, 네메아 경기는 아르고스 지방에 있는 네메아에서 행해졌다.이러한 경기에 있어서의 운동의 종목은 다섯 가지였다. 경주 · 도약 ··레슬링 ·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혹은 권투가 그것이었다.이러한 육체적인 힘이나 민첩성의 경기 이외에 음악 · 시 · 웅변대회도 있었다. 이러한 경기는 시인 · 음악가 · 작가들에게 그들의 작품을 대중 앞에 보일 가장 좋은 기회였으며, 그 결과 승리자들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퍼졌다

안토니오 카노바 - 켄타우로스를 때려잡는 테세우스
디오니소스, 바커스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 아기로 묘사

디오니소스, 폼페이, 주전50년경

디오니소스, 루브르박물관

바커스, 1497-98, 피렌체 바젤로국립박물관
술을 맛보는 바커스와 어린 목신 새티루스가 포도를 훔치는 장면이다

산소비노 작

디오니소스 상, 로마시대, 2세기 , 큐레네, 디오니소스 신전,
리비아, 대리석 ,높이 171, 대영박물관
현재 리비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그리스 식민도시 큐레네는 로마제국 밑에서 번영했는데, 이 아름다운 조각상은 바로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덩쿨과 포도송이로 이 신상이 주신 디오니소스임을 알 수 있다. 디오니소스는 샌들을 신고 긴 히만티온(망토)을 왼쪽어깨에서 등으로 늘어뜨려 몸을 감싸고 왼손을 들어올려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들고 있다. 부드럽지만 남성적인 몸매이고 그의 성기는 노출되어 있다. 두텁게 접힌 망토의 질감이 매우 정교히 표현되었다. 뒷면이 평편하게 처리된 것으로 미루어 벽감이나 벽면에 안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2세기의 한 유능한 조각가가, 기원전3세기 그리스 조각상을 모델로 모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모든 고대 조각상들이 그랬듯이 이 조각상도 적어도 부분적으로 채색되어졌다고 보여진다. 눈과 덩쿨에 붉은색 안료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대에는 유두 같은 세부적인 것 이외에 몸 자체는 채색을 가하지 않고 피부의 부드러운 감촉을 대리석 표면으로 충분히 살리고, 채색된 옷과 아름다운 대비를 이루도록 했다. 이 조상과 함께, 디오니소스의 시자인 포도 덩쿨을 두른 표범상과 본상이 세워졌음을 추측케하는 대좌도 발견되었다. 이 조각이 발견된 건물은 디오니소스 신전으로 밝혀지고 있다

바커스, 로마 캐피톨리네박물관

바커스, 주후2세기, 런던 대영박물관,

바커스 신, 바티칸 박물관

바커스 신, 바티칸 박물관
 디오니소스(소년), 귀도 레니 작
디오니소스를 표현할 때는 거의 대부분이 머리에 포도 덩쿨을 쓰고 있다. 이유는 그는 술의 신이며, 사람들에게 포도 제배법과 포도주 담그는 법을 가르치며 동시에 자기의 신앙을 전파한다. 디오니소스가 헤라 여신 때문에 미쳐서 돌아다닐 때 제우스와 헤라의 어머니인 레아가 디오니소스의 병을 치유해 주고 후에 디오니소스의 축제 때 행해질 종교 의식을 전수해 주었다. 그 때는 새끼사슴의 가죽옷을 입어야 하기에 디오니소스의 옷은 사슴털 가죽옷이다. 성인이 된 디오니소스의 손에는 삿갓 모양의 손잡이가 달리고 덩굴장식이 화려한 튀르소스(Thyrsos)라는 막대기가 들려져 있다.
 디오니소스의 항해, 뮌헨 고대 박물관
 디오니소스, 4세기경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카라치 작
테세우스에게 반해 조국 크레타를 배반하고 실타래로써 영웅 테세우스를 구한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는 그를 따라 나서지만 결국 버림 받아 낙소스섬에 남겨진다. 낙소스섬은 디오니소스에게 받쳐진 섬이다. 그녀 앞에 나타난 디오니소스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그녀를 아내로 삼는다. 지금 요정이 아리아드네에게 씌어주는 금관은 디오니소스의 사랑의 선물이다. 후에 디오니소스는 그 왕관을 하늘에 던져 영원한 영광의 징표인 별자리로 박아준다. 왕관에 박혀 있던 진주가 별이 된 것이다. 이 별자리가 왕관자리다.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샤를 드 라 포스 작
 디오니소스와 미다스
 디오니소스와 데메테르
 디오니소스
 레오나르드 다 빈치 작
 디오니소스 축제, 주카넬리 작
 디오니소스 축제, 티치아노
디오니소스 축제의 주신제는 차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광기와 난행에 가득한 것이었다고 한다. 광신도 여성들은 술에 취하면 발광하는 건 물론이고 곁에 있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저질렀다. 펜테우스가 어머니와 이모들 손에 찢겨 죽은 것도, 오르페우스가 트라키아 처녀들에게 맞아 죽은 것도 모두 디오니소스 축제 때였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12월에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죽음을 통한, 죽음의 극복에 의한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의미라고 한다. 바코스란 말 자체가 씨앗이다. 그러니 씨앗이 겨울이라는 죽음의 시간을 통해 몸을 썩히고 싹을 내고 대지에 생명을 퍼트려 열매를 맺는것이다
 디오니소스 신의 비의(秘儀) , 폼페이 벽화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폼페이 베티에르의 집 벽화
네로 황제 시대(54∼68)의 벽화. 신화에 전해지는 디오니소스 의식을 그렸다. 의식을 받고 있는 헤르마프로디토스(가운데 반라의 인물로 양성이다)의 오른쪽에 서 있는 디오니소스의 신녀 마이나데스가 성욕을 증진시키는 약과 디오니소스의 상징인 솔방울 지팡이 티르소스를 들고 있다. 이 의식을 마치면 여자들은 격렬한 춤을 추며 여러 상대와 성관계를 갖게 된다
디오니소스 신
그리스신화에서 매우 이색적인 성격을 가진 신으로 로마신화에서는 바쿠스라고 한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올림푸스의 신들 가운데서 그 내력이 분명하지 않은 신이며, 호메로스에서도 단지 포도를 재배하는 신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는 본래 북방의 트라키아 지방에서 온 신으로 식물의 생성과 번성의 신격이었던 듯하다. 그리스에서는 포도재배와 더불어 술의 신이 되어, 격렬한 도취상태가 따르는 종교적 광란의 제례는 오르페우스교 등의 신비적인 밀의(密儀)와 결부되었다. 디오니소스는 판·사티로스·실레노스 등을 종자로 하고, 횃불과 티르소스라는 담쟁이덩굴을 감은 지팡이를 흔들며 난무(亂舞)하는 신녀(바카이·마이나데스)를 거느리고 산과 들을 헤맨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세멜레는 질투하는 헤라의 말에 속아, 제우스에게 헤라한테 갈 때와 같은 모습으로 자기 앞에 나타나도록 요구했다. 할 수 없이 제우스가 뇌성벽력과 함께 침실에 나타나자, 그녀는 그 작열에 타서 죽는다.
그때 제우스는 세멜레의 태내에서 6개월된 디오니소스를 꺼내 자신의 넓적다리에 넣고 꿰맸다. 달이 차서 태어나면서부터 헤라의 박해를 계속 받은 디오니소스는 급기야 미치게 되어 이집트와 시리아로 헤매다닌다. 그러나 프리기아의 여신 레아에 의해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그녀로부터 비교(秘敎) 의식을 배웠다. 그때부터 그는 열광적인 신자를 거느리고 포교를 위한 편력과 박해에 대한 싸움으로 세월을 보냈는데, 그것은 이 신의 승리와 영광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의 종교를 업신여기는 자에게는 가혹한 징벌을 내렸는데 많은 어둡고 비참한 이야기 중에 테베왕 펜테우스의 죽음은 에우리피데스의 《바쿠스의 신녀(信女)》에 잘 묘사되어 있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론과 대치되어 예술의 격정적·본능적인 창작충동을 구현하는 것으로 취급되며, 특히 연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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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우스(영웅, 그리스)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 바티칸 박물관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 바티칸 박물관 벨베데레 뜰

Benvenuto CELLINI: Perseus with the Head of Medusa, bronze, 1545-54, Loggia dei Lanzi, Florence





메두사의 목을 베고 있는 페르세우스, 팔레르모 고고학 박물관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루벤스

메두사의 목을 베는 페르세우스, 마페이

페르세우스, 레이튼

피네우스와 싸우는 페르세우스

메두사와 페르세우스, 존 싱어 서전트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모로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모라존

페르세우스의 무장, 번 존스
페르세우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으로 주신(主神) 제우스와 아르고스의 왕녀 다나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딸에게서 낳은 자식에게 살해될 것이라는 신탁(神託)을 믿고, 다나에를 청동으로 만든 밀실(密室)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제우스가 황금의 비로 변신(變身)하여 지붕으로 스며들어가 페르세우스를 낳게 하였다. 왕은 그 모자(母子)를 방주(方舟)에 실어 바다에 떠내려보냈는데 방주는 세리포스에 표착하여 이 섬의 왕 폴리데크테스의 보호를 받았다. 그 후 폴리데크테스는 다나에를 사랑하게 되면서 청년이 된 페르세우스를 방해물로 느껴, 그로 하여금 괴물 고르곤 중의 하나인 메두사의 목을 베어 오도록 명하였다.
그는 여신 아테나와 헤르메스 신의 안내로 먼저 메두사의 자매뻘인 그라이아이가 있는 곳으로 가, 하늘을 나는 신발과 자기의 모습을 안 보이게 하는 마법의 모자를 손에 넣었다. 메두사를 보는 자는 그 자리에서 돌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는 잘 닦은 방패 속에 괴물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서 접근하여 괴물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하였다. 돌아오다가 에티오피아에서 왕녀 안드로메다가 괴수(怪獸)의 제물이 될뻔한 것을 구해 아내로 삼았고, 또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아틀라스를 돌로 바꿈으로써 그를 고통에서 풀어주었다고도 한다. 어머니 곁으로 돌아온 그는 메두사의 목을 폴리데크테스에게 보여 돌이 되게 하고, 때마침 열리고 있던 경기대회에서 원반을 던졌는데, 그 원반이 아크리시오스 왕에게 맞아 왕이 목숨을 잃음으로써 예언이 실현되었다. 메두사의 목은 여신 아테나에게 바쳐져 여신의 방패에 부착되었다. 그 후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를 떠나 티린스로 가서 아르고스의 땅과 교환하여 티린스의 국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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