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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정 선생 신도비명병서 〔桐溪鄭先生神道碑銘 幷序〕
동계(桐溪) 정공(鄭公)이 돌아가시어 장례를 치르고 삼년상을 마친 몇 년 뒤에 공의 맏아들 전 현감 정창시(鄭昌詩)가 안음(安陰)에서 서쪽으로 6백 리를 달려 홍양(洪陽)의 바닷가로 찾아왔다. 가져온 가장(家狀) 한 권을 나 한양(漢陽) 조경(趙絅)에게 주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선친의 묘목이 두 손으로 감쌀 만큼 자랐습니다. 불초한 제가 조석으로 선친을 생각하면서 삼가 스스로 힘을 다하여 비석을 준비해 놓고 감히 집사(執事)께 비문을 부탁하오니, 집사께선 비명을 써주었으면 합니다.”
하였다.
내가 예의상 사양하여 말하기를,
“아, 부족한 제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선군자(先君子)께서는 계축년(1613, 광해군5)에는 상소를 올렸고, 정축년(1637, 인조 15)에는 충렬을 실천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더구나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공부와 돈후한 성품과 드러난 문채가 이에 근본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장차 사관(史官)이 역사책에 누누이 기록할 것이며 서원이나 향교에서는 제사를 받들 것입니다. 미천한 이 사람의 말이 어찌 감히 그 사이를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신중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정창시는 또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불초한 제가 선친을 위하는 도리가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또 어느 누가 집사보다 저의 선친을 깊이 알아서 서문을 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슬픈 마음으로 감히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손을 씻고 가장을 살펴보았다.
공의 휘는 온(蘊), 자는 휘원(輝遠)이며 성은 정씨(鄭氏)이다. 공의 집이 안음 역양리(嶧陽里)에 있었기에 이로 인해 동계(桐溪)라 자호(自號)하였다.
그 선조는 초계(草溪)에서 나왔는데, 고려 시중(侍中) 배걸(倍傑) 때부터 세상에 드러났다. 배걸의 4세 후손인 인습(仁習)은 벼슬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이르렀고 방정한 품성으로 이름이 났는데,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그 전(傳)을 지었다.
이 분이 전(悛)을 낳았는데, 전은 당대 으뜸가는 문학으로 세상에서 팔계 선생(八溪先生)이라 불리었으며,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의 벼슬로 생을 마쳤다. 제학은 생원 제안(齊安)을 낳았고, 생원은 목사 종아(從雅)를 낳았다. 목사는 옥견(玉堅)을 낳았는데, 옥견은 별제를 역임하고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집의는 증 승정원 좌승지 휘 숙(淑)을 낳았다. 승지는 증 이조 참판 휘 유명(惟明)을 낳았는데, 공의 부친으로 진사이다. 공이 귀하게 되었기에 3대가 추증된 것이다.
참판공은 임갈천(林葛川) 임훈(林薰)을 스승으로 섬겨 그 학문을 극진히 익혔기에 함께 나아간 문인 중에 가장 뛰어났다. 금상(今上 인조(仁祖))의 조정에서 효행으로 정려문(旌閭門)을 세워주었다. 장사랑(將仕郞) 진주(晉州) 강근우(姜謹友)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의 오빠 강익(姜翼)은 선비의 행실이 뛰어났고, 부인도 그 오빠의 풍모가 있었다.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2)에 역양리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우뚝하게 두각을 드러내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한번은 죽마(竹馬)를 타고 놀면서, “작은 골짜기에 대인(大人)이
태어났다.”라고 하니, 마을 어른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말이 어눌하여 잘 외우지 못해 또래들보다 뒤처졌으나, 괴로움을 참아가며 잠자코 익혀 남보다 천 배나 더 노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마침내 민첩하게 변화되고 문리가 급속하게 트여 약관이 되기도 전에 큰 재목을 이루어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다.
갈천은 본래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한 번 공을 보고는 곧바로 원대한 성취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공이 비록 나이는 젊었지만, 사람됨이 매우 단정하고 행동이 엄정하며 과묵하게 지내면서 독서에만 부지런히 하니, 종유하는 선비들이 모두 경외하였다.
열아홉 살에 향시(鄕試)에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는데, 참판공이 부인에게 부탁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크게 현달할 것이오. 그대는 그 영화를 누리겠지만 한스럽게도 나는 미처 보지 못하겠구려.”
라고 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 29)에 참판공의 병이 위독해졌는데, 공은 경건하게 서서 밖에서 기도하다가 기절하여 다시 소생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당시 왜구들이 남쪽 지방에 벌 떼처럼 모여들었기에 공이 모부인을 모시고 호남과 영남 사이로 피난하였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생하며 떠돌면서도 공은 질대(絰帶)를 차고 다녔으며, 길에서 빌어먹으면서도 당시 모부인의 음식은 떨어지지 않았다.
만력(萬曆) 을사년(1605)에 영남에서 오현(五賢)의 문묘에 종사(從祀)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때 공이 많은 선비들의 추대로 서울에 들어왔다. 선조(宣祖)께서 가상히 여겨 정시(庭試)를 시행하였는데, 공이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서울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그 문장을 전하여 자자하게 퍼졌다.
병오년(160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술년(1610, 광해군2)에 별시에서 제3등으로 급제하였다. 다음 해에 성균관을 거쳐 춘방 설서(春坊說書)에 제수되었고, 얼마 안 되어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가 곧바로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해에 창덕궁(昌德宮)이 낙성되어 광해군이 거처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요망한 고사(瞽史)의 말에 현혹되어 곧바로 정릉(貞陵)의 궁으로 되돌아가려 하였다.
공이 홀로 아뢰어 강력하게 간쟁하니, 광해군이 진노하여 즉시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보임시켰다. 공이 서울을 떠날 때에 일송(一松) 심 상공(沈相公 심희수(沈喜壽))이 전송하며 손을 잡고 말하기를,
“공은 마땅히 할 말을 하였소. 나라가 장차 어찌 되려는가.”
라고 하였다.
공은 임지에 가서 주장(主將)을 섬기고 아전과 백성을 대함에 있어 각각 그 도리에 맞게 하였다. 이해에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었고 경성은 더욱 굶주림이 심했는데, 공의 구황(救荒) 정책에 힘입어 소생하였다. 갑인년(1614)에 공이 심리에 회부되자 경성 사람들이 서울로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으며,
“우리에게 덕을 베푸신 분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자년(1612)에 광해군이 무신년(1608, 선조 41)에 상소한 사람들의 공을 책훈(策勳)할 때에 공도 포함되어 장악원 첨정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공은 공훈이 없다는 이유로 힘껏 사양하였다. 이이첨(李爾瞻) 등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정 아무개가 이 공훈을 사양하는 것은 국군(國君)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여겨서인가.”
라고 하니, 공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서 묵묵히 물러났다.
계축년(1613) 여름에 무뢰배 서양갑(徐羊甲) 등이 붙잡혔는데, 마침내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을 끌어들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자전(慈殿)에게 화풀이하려던 자들이 선동하여 화를 조장하였는데, 공경 대신들은 그것이 무고임을 잘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하루는 공이 이이첨을 만나 꾸짖기를,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가 어찌 역모를 알겠소. 자전께서 상식(尙食)을 폐하신 채 대군을 붙들고서 ‘네가 죽으면 나도 죽으련다.’라고 하신다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누가 그 허물을 감당할 것이오.”
라고 하니, 이이첨이 발끈하여 소리 높여 말하기를,
“설령 대비까지 함께 폐위한들 누가 안 된다고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이 즉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니, 이이첨은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5월에 공이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집이 정인홍(鄭仁弘)의 거처와 가깝고 또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으므로 편지를 보내어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를 처벌하도록 청하니, 온 조정이 모두 잔인한 사람이오.”라고 극언하였다.
또 정인홍이 손을 써서 대군을 구해주기를 바랐으나 정인홍은 공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겨울에 시강원 필선에 제수되었으나, 당시 의론과 너무 맞지 않아 휴가를 청하여 체직되니, 정권을 장악한 자들이 공을 역당(逆黨)으로 지목하기까지 하였다.
갑인년(1614) 2월에 영창대군이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에 죽었으니, 이는 강화 유수(江華留守) 정항(鄭沆)이 조정의 논의에 영합하여 죽인 것이다. 공이 부사직(副司直)의 신분으로 천 수백 자 되는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 인륜의 변고를 당하여 그 대처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고자 하셨으나 끝내 거칠고 사나운 무부(武夫)의 손을 빌리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것이 너무 크지 않겠습니까. 죄 없는 보통 사람을 죽여도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데, 하물며 우리 임금의 동기(同氣)를 죽인 것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정항을 처형하지 않으면 전하께서는 선왕의 묘정(廟庭)에 설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대비께서 비록 전하에게 자애롭지 못하더라도 전하께서야 어찌 대비에게 효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지금부터 참소하여 무함하는 길을 배척하여 끊어버리고, 전하께서도 마땅히 자식 된 직분을 공손히 다하여 안부를 묻고 밥상을 살피는 예를 폐하지 말아 대비의 환심을 얻도록 힘쓰신다면, 오히려 이전의 잘못을 덮고 새로운 교화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대간 정조(鄭造), 윤인(尹訒), 정호관(丁好寬) 등이 처음으로 대비를 폐위하고 왕제(王弟)를 죽이자는 의논을 일으켰으니, 신하가 되어서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모자간의 은혜를 존속하려 하신다면 속히 세 사람을 잡아 먼 변방으로 쫓아내어 나라 안에 함께 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이라야 참언(讒言)하는 자들이 일어나지 못하고 삼강오상(三綱五常)이 우주에 밝게 드러난 것입니다.”
상소가 들어가자 광해군이 크게 진노하여 승정원을 엄중히 문책하고 상소를 받들어 올린 승지를 조사하여 파직시켰다.
이에 삼사(三司)가 공에 대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절도(絶島)에 안치하는 것으로 논죄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오히려 처벌이 가볍다고 노여워하며 삼사를 준엄하게 꾸짖으니, 이에 곧바로 잡아들여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옥에 갇히게 되자 의금부에서 관례에 따라 여러 대신의 평결을 청하였다.
우의정 정창연(鄭昌衍)과 원임(原任) 이원익(李元翼)이 의견을 올리기를,
“정 아무개가 참으로 광망하여 기휘(忌諱)를 모르기는 하지만, 어찌 임금을 무시하고 도리에 어기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부디 너그러운 법을 따르소서.”
라고 하였고, 상국(相國) 심희수(沈喜壽)의 의논도 그러하였다.
광해군이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에게 답하기를,
“정 아무개의 상소는 글자마다 음흉하니, 임금을 무시하고 도리를 어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때에 삼사와 관학(館學)이 까치 떼처럼 너도나도 일어나 ‘무장법(無將法)’, ‘불병역(不兵逆)’ 등의 말로 잇따라 소장을 올리니, 공의 처지가 예(羿)의 과녁 속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태로웠다. 6월에 광해군이 친히 국문하여 공초를 받은 뒤에 하옥시켰고, 가을에 다시 공초를 받고 이어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감옥에 갇힌 것이 모두 다섯 달이었는데, 처음 감옥에 나아갈 때 한 노파가 길에서 축원하기를,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부디 이 어진 분이 감옥에서 죽지 않게 하소서.”
라고 하였고, 옥졸들도 서로 주의를 주며 공경하였다.
정항도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저는 공의 의로운 공초에 감복하였으니, 결코 공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정호관도 공의 상소문을 보고 말하기를,
“나는 천고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하겠구나.”
라고 하고, 마침내 날마다 술을 마시다가 병들어 죽었다.
선생이 감옥에서 나오던 날, 도성 사람들이 모여들어 보느라 골목마다 군중으로 가득하여 압송하는 수레가 막혀 갈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공이 살아난 것을 기뻐하면서도 공이 유배되는 것을 슬퍼하였다. 이때 어린아이나 종들까지도 공의 이름을 외지 않은 자가 없었고, 아녀자들은 공의 상소문을 언해하여 집집마다 전하며 외기까지 하였다.
공이 해남(海南)에 도착하자, 호남의 유생 송흥주(宋興周) 등이 소를 올려 임금에 대한 공의 충성과 사랑을 극언하였고, 정언(正言) 오장(吳長), 이언영(李彦英), 강대수(姜大遂)도 공의 일을 거론한 죄로 유배되거나 벼슬에서 쫓겨났다. 공은 대정(大靜)에 위리안치되어 세상에 나가지 못한 것이 10년이었으나 천명(天命)처럼 편안히 여겼고, 오직〈백운사(白雲詞)〉를 지어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았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금상이 반정(反正)하여 혼조(昏朝 광해조) 때 정도를 지키다가 쫓겨난 사람들을 발탁하였는데, 공이 그 첫 번째에 해당하였다. 처음 헌납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제주(濟州)를 떠난 뒤 며칠 되지 않아 사간으로 승진하였으니, 왕명을 받든 관리가 도로에 이어졌다.
이때부터 해마다 제수되고 옮겨서 붉은 비단옷을 입고 금대(金帶)를 차는 당상관의 반열에 이르렀다. 사간원에서 헌납과 사간을 한 번씩 지냈고, 대사간을 지낸 것이 일곱 번이었고, 사헌부에서 대사헌을 지낸 것이 네 번이었다. 부제학을 네 번 지냈고, 도승지를 세 번 지냈고, 이조에서는 참의와 참판을 세 번씩 맡았다.
그 밖에도 예조, 병조, 형조의 참판과 한성 좌윤(漢城左尹), 경상 감사(慶尙監司),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지냈는데, 혹은 특별한 은혜로, 혹은 모친 봉양의 편의를 위해, 혹은 호종한 공로로 제수된 것이었다. 그러나 공은 대부인이 매우 연로하셨기 때문에 한 번도 한 관직에 여러 달씩 머물지 않았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년 인조 2)에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상이 남쪽으로 행차하자, 공이 이조 참의로 호종하였다. 정묘년(1627년 인조 5) 1월에 서쪽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상은 강화도로 행차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분조(分朝)는 호남으로 내려갔다.
이때 공은 집에 있다가 변란 소식을 듣고는 그날로 문안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길에서 만난 조정 선비들의 말이, “지금 오랑캐 기병이 마구 날뛰고 있으니, 가더라도 필시 행재소에 이르지 못할 것이오.”라고 하고, 공의 맏아들도 분조로 달려가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꾸짖으며 말하기를,
“사태를 관망하여 편한 대로 하는 것은 신하의 의리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당시 산직(散職)에 있던 사대부들은 모두 편한 대로 전주(全州)로 달려갔고, 곧장 강화도로 달려간 사람은 오직 공 혼자였으니, 온 조정 관원들이 마치 초(楚)나라 사람이 섭공(葉公)을 본 것처럼 찬탄하였고, 민심도 이로 인해 안정되었다. 이에 공이 소를 올려 먼저 화의(和議)의 잘못됨과 강홍립(姜弘立)의 죄를 말하고, 말미에 적과 우리나라의 형세를 논하니, 사실에 근거하여 옳은 방법을 찾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상이 평소에 공의 곧은 절개를 중하게 여겨 공을 예우함이 다른 여러 신하들보다 남달랐고, 조정의 사류들도 모두 공을 흠모하고 신뢰하였다. 간혹 몹시 시기하는 자도 없을 수 없었으나 공은 태연하게 개의치 않았으며, 더욱 예전의 절조를 가다듬어 매섭고 강직하게 하였다. 어려운 일이건 쉬운 일이건 만나는 일마다 반드시 간쟁하였고, 남들이 꺼리는 일도 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하였다.
공이 사간으로 있을 때에 광해군의 세자가 도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법으로 다스리라는 삼사(三司)의 논의를 공이 계속 저지하였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인성군(仁城君)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거론되었는데, 삼사가 합동으로 죄를 청했으나 공은 은혜를 온전히 베풀 것을 힘껏 주장하였다.
이에 공과 부제학 홍서봉(洪瑞鳳)이 성상 앞에서 쟁론할 때에 홍서봉이 공을 모욕하는 말을 하였으나 공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자신의 의견을 지키며 따르지 않으니, 성상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사간의 말이 옳다.”
라고 하였다.
공이 처음 도승지에 임명된 때는 병인년(1626년 인조 4)이었는데, 성상이 막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을 당하였다.
공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고례(古禮)를 어기고 사친(私親)을 위해 삼년상을 단행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라고 아뢰니, 성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경오년(1630년 인조 8) 봄에 태묘의 소나무에 벼락이 치자, 공이 간언을 구하는 주상의 말씀에 ‘형옥(刑獄)이 적절하지 않다’라는 내용으로 인하여 수백 자로 자세하게 공족(公族) 중에서 연좌되어 유배된 노약자들을 용서해 주도록 청하였다. 이에 양사(兩司)에서 역적을 비호한다고 탄핵하여 여러 날 논죄하였으나 체직에 그쳤다.
계유년(1633년 인조 11)에 무고(誣告)로 인한 옥사가 있었는데, 공이 대사헌으로서 논하여 무고한 자는 처벌을 받고 체포된 자는 풀려나게 되었다. 또 어려운 시기에 대군(大君)이 궁가(宮家)를 짓느라 백성을 수고롭게 한다고 논하니, 성상이 즉시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동지경연사에 제수되었을 때 소를 올려 부친의 묘소를 보수하겠다고 청하니, 성상이 특별히 역마(驛馬)를 내려 주고,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제물을 갖추어 예를 지극하게 하도록 하였다. 이해 가을 대명전(大明殿)에 벼락이 치자, 공이 고향에 있으면서 임금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소를 올려 군주의 중요한 근본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그 뜻은 오로지 임금의 마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약석(藥石) 같은 말을 띠에 적어놓고 잊지 않겠다는 비답을 받았다.
이듬해에 또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미처 사은숙배(謝恩肅拜)하기 전에 도승지로 전직되었다. 이는 당시에 전례(典禮)가 거의 결정될 무렵이라 조정에서 공이 언관을 맡게 되면 반드시 이 문제를 쟁론할 것이라 염려했기 때문이다. 승정원에 들어가서 즉시 소를 올려 전례(典禮)를 논하였는데, 경사(經史)에서 증거를 갖추어 말한 것이 모두 예법을 논한 여러 유신(儒臣)들이 일찍이 말하지 못한 것이어서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을해년(1635년 인조 13) 여름에 목릉(穆陵: 선조의 능)과 유릉(裕陵: 고려 예종의 능)에 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리는 재해가 있었다. 상이 대신을 보내어 능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대신이 돌아와 아뢴 말이 중론(衆論)과 달랐다. 공이 봉사(封事)를 올려 피하지 않고 실상대로 말하였다.
또 두 능에 재앙이 생긴 날에 예관이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예를 거론한 것은 그 죄가 임금을 속인 것이라고 탄핵하자, 듣는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고 경탄하였다. 가을에 또 번개가 치고 폭풍이 부는 변고가 있자, 공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폭풍이 사직과 종묘의 나무를 뽑아 버리니, 이 무슨 하늘의 경계란 말입니까. 전하께서 마땅히 몸을 반성하고 깊이 두려워하시어 견책당한 대신을 소환하고 간언하다 처벌받은 신하를 모두 석방하신다면, 거의 하늘이 경계한 바에 실제로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바깥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말하기를, ‘금원(禁苑)에 못을 파는 것은 배를 띄워 유락을 즐기려는 조짐으로, 성상의 마음을 몹시 미혹시킬 것이다.’라고 합니다. 과연 이와 같다면 태풍은 재앙이라고 말할 것도 못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경계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서민(庶民)은 오직 별이니, 별은 바람을 좋아하는 것이 있고 비를 좋아하는 것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서민이 제자리를 잃은 것이 오늘날 매우 심하니, 큰바람과 미친 듯이 퍼붓는 비는 아마도 그 부류에 따라 반응한 것일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재해를 입은 지역의 금년 세금을 면제해주어 넉넉히 구휼하는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특진관으로 입시하여 매우 간절하게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하유하기를,
“경처럼 충직한 사람이 조정을 떠나서야 되겠는가. 지금 정경세(鄭經世)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장현광(張顯光)은 매우 늙었는데, 경이 또 떠나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경은 이처럼 혹독한 풍해를 본 적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아직 보지 못했으나 사람들이 모두 신묘년(1591, 선조24)에 풍재가 있고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였다.
겨울에 부제학으로서 시강(侍講)하였는데,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옛사람은《시경》을 해석하는데 굳이 장구(章句)를 인용하지 않고 뜻으로 깨우친 경우가 많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유녀동거(有女同車)〉장을 강론하게 되자 말하기를,
“〈유녀동거〉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진실한 감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옛말에 ‘현현역색(賢賢易色)’이라 하였으니,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옮겨 어진 이를 좋아한다면 어진 이를 좋아하는 것이 진실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고,
〈탁혜(蘀兮)〉장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나무가 시들어 잎이 떨어지려하는데 바람이 불면 쉽게 떨어집니다.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또 좋지 못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 밖의 장에서도 모두 인용하여 깨우치는데 경계하고 간하는 뜻을 깊이 얻었으니, 상이 거듭 좋다고 칭찬하였다. 진강이 끝나고 공이 또 나아가 아뢰기를,
“시사(時事)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사태가 급해지면 지존께서 어느 곳으로 피하시겠습니까. 오직 사직과 함께 죽으려는 마음을 가져야만 나라를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병자년(1636년 인조 14) 2월에 청(淸)나라 사신이 화를 내고 달아나는 바람에 조야(朝野)가 한창 흉흉하였는데, 공이 옥당에 있으면서 차자(箚子)를 올려 세 가지 조목을 논하였다.
첫 번째로는,
“‘쇠퇴한 나라를 일으키고 난리를 평정하는 군주는 영무(英武)한 이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강(李綱)의 말입니다. 전하께서 아직도 소선(素膳)을 행하시며 한갓 아녀자의 일을 본받고 계시니, 쇠퇴한 나라를 일으키고 난리를 평정하는 영무한 군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당시 인열왕후(仁烈王后 인조의 비)가 승하한지 얼마 안 되어 산릉(山陵)의 공사를 겨우 끝냈으므로 공이 성상의 몸을 매우 염려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두 번째로는,
“절개를 지키고 의리를 위해 죽는 선비는 임금의 안전에서 직간(直諫)하는 사람 중에 찾아야 하니, 이는 불변의 정론입니다. 원종(元宗) 추숭의 전례(典禮)를 논의할 때 그 일에 관해 말한 신하야말로 안전에서 직간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무리는 서둘러 선별하여 서용해야 마땅합니다.”
라고 하고,
세 번째로는,
“아문(衙門)의 군관(軍官)과 훈련도감의 포수(炮手)와 살수(鎩手)를 기르는 것은 바로 위급할 때 쓰기 위해서니, 정예병을 뽑아 적을 막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의주(義州)에 효사과(效死科)를 설치한다면 또한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말이 모두 타당하였으나 당시의 여론이 우활하다고 여겨 쓰이지 못했다.
이해 12월에 적이 조약을 어기고 쳐들어오니, 며칠이 되지 않아 황주(黃州)와 봉산(鳳山)을 뚫고 송도(松都)에까지 이르렀다. 급보가 화살처럼 날아들자 어가가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는데, 공은 이조 참판으로 호종하였다. 산성이 포위된 와중에 네 차례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요(大要)는 군신과 부자가 성을 등지고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이 흔들리지 않고 자기 뜻을 굳게 지켰으므로 화의하려는 조정의 의론에는 몹시 거슬렸다.
24일에 공은 적이 척화(斥和)를 주장한 신하를 보내라고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먼저 가겠다고 청하였다. 이날 밤중에 난병(亂兵)이 칼을 뽑아들고 행전(行殿) 밖에 이르러 척화를 주장한 신하를 내놓으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10명의 성명을 나란히 쓰고 그들을 묶어서 적의 진영으로 보내려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성상에게 말하기를,
“척화를 주장한 여러 신하는 모두 당대에 백성의 신망을 받고 있으니, 후세의 평가에 대해선 어찌하시겠습니까.”
하니, 성상께서 두려워하여 즉시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정축년(1637년 인조 15) 1월 27일에 당국자가 국서를 가지고 적의 진영에 들어갔는데, 국서의 내용은 비밀에 부쳐져 세간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공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임금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가 감히 죽음을 아끼겠는가.”
하고, 새벽에 일어나 통곡한 다음 침구를 정돈하고 눕더니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배를 찔렀다.
모시던 사람이 이불을 걷어보니, 칼날이 배에 깊이 박혀 있었다. 놀라 부르짖으며 칼을 뽑아내자 선혈이 마구 솟구치고 한참 동안 숨이 끊어질 듯이 컥컥 대었는데, 알고 지내던 조정의 관원들이 모두 달려와서 구원하였다. 성상이 소식을 듣고 측은히 여겨 내의(內醫)를 보내 치료하게 하자 거의 죽었다가 회생하였다.
성상이 또 하교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하여금 정성을 다하여 의약(醫藥)을 제공하게 하였다. 당시 공의 상처를 살펴본 어의가 말하기를,
“뒷날 혈전(血栓)이 생겨 구제하기 어려울 것이오.”
라고 하였는데, 공이 세상을 떠날 때 과연 그러하였다.
공이 병 때문에 어가를 따를 수가 없게 되자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한결같이 의리에서 나온 말로 이해(利害)가 섞이지 않았다. 그러나 처리하지 않고 모두 그대로 두었다. 2월에 공이 가마에 누운 채로 남쪽으로 돌아왔으나 집안에 거처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가 남한산성에서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편안히 처자의 봉양을 받겠는가.”
라고 하고는 마침내 덕유산(德裕山) 남쪽 기슭 어떤 마을 골짜기로 들어가 초가를 짓고 기장밭을 일구며 세월을 보냈다.
신사년(1641년 인조 19) 6월 21일 기축(己丑)에 세상을 떠나서 모년 모월 모일에 모산(某山)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공은 백 척의 장대 같은 정정한 곧음이 있고, 가을 서리와 빛나는 해처럼 만고에 불변하는 깨끗한 절개가 있었다.
앞서 계축년(1613, 광해군 5)에는 간신들이 내란을 일으켜 권력을 훔치고 법망(法網)을 펼쳐서 공에게 감옥에서 곤액을 치르게 하였다. 반년 가까이 죄수복을 입히고 형틀에 채웠다가 결국은 풍어(風魚)와 장독(瘴毒)이 모인 곳으로 유배 보냈는데, 죽을 가능성이 아홉이고 살 가망은 겨우 하나였지만 공의 강직함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뒤에 병자년(1636, 인조 14)에는 철갑을 두른 수십만의 기병이 고립된 성 아래로 육박해 왔을 때, 팔도의 근왕병(勤王兵)이 패배하거나 달아난 바람에 외부에서 개미 한 마리의 원군(援軍)조차 없었다. 이에 문관과 무관을 막론하고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서로 이끌고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였지만, 이런 상황 또한 공의 절개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 강직함과 이 절개는 양성한 뿌리가 있고 나온 근원이 있었으니, 공자가 말한
“삼군(三軍)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
는 것이 아니겠으며, 맹자가 말한 부귀로도 방탕하게 할 수 없고 위협으로도 꺾을 수 없다는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일개 강직한 신하로만 공을 개괄하고 일개 절개 있는 선비로만 공을 드러낸다면 이는 장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공의 학문은 가정에서 보고 듣고서 훈도 받은 것도 얕지 않았지만, 약관에 이르러 조월천(趙月川 조목(趙穆))과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 두루 유학하면서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의 학문의 실마리를 듣고서 기뻐하여 사숙(私淑)한 것도 많았다.
그러나 독실하게 실천한 공부로 말하자면 모두 스스로 터득한 데서 말미암았으니, 평생토록 ‘직방대(直方大)’ 세 글자를 일신(一身)의 부절(符節)로 삼았다. 본원(本源)을 경계하고 두려워한 것은 《심경(心經)》에 근본하였고, 의리에 젖어든 것은 정주(程朱)와 같은 여러 선생들의 글에 근본하였는데,《성리대전(性理大全)》에 가장 일찍부터 힘을 쏟았다.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며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일 외에는 털끝만큼도 생각이 밖으로 내달림이 없었고,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있을 뿐 종일토록 몸을 기울이거나 기대지 않았다.
한번은 선배들의 인품의 차이를 논하였는데,
“사람의 성품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강(剛)과 유(柔)일 뿐이다. 강은 양(陽)에 속하고 유는 음(陰)에 속하니, 강유(剛柔)의 바름을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지나치게 강(剛)한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주역》에서 양강(陽剛)한 군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마음은 작게 가지고 담력은 크게 가짐으로써 한 몸을 세우는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 속수씨(涑水氏 사마광(司馬光))가 ‘평생 남에게 말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라고 한 것은 담력이 컸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이 훗날 이 한 구절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공의 사람됨은 밝고 뛰어났으며 겉과 속이 한결같았다. 남과 함께 있을 적에는 공손하고 화락하여 날카롭게 굴거나 거리를 두지도 않았고 각박하고 괴팍한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전적으로 ‘요순(堯舜)도 보통 사람과 똑같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 서서 시비를 다투게 되면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하여 태산교악(泰山喬嶽)처럼 우뚝하였으니, 비록 자신을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처럼 여기는 자라도 그 뜻을 빼앗지 못했다.
또 평소에 하는 말이 오직 효제충신(孝悌忠信)뿐이었으며, 심오한 이치와 은미한 말은 가볍게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공을 본 사람들은 모두 공이 독실한 참된 선비임을 알지 못했다.〈원조자경잠(元朝自警箴)〉과〈구중설(求中說)〉과〈덕변록(德辨錄)〉 같은 글은 공이 중년과 만년 이후에 저술한 것이니, 여기에서 공의 일신(一身)의 덕과 도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고한 견해를 볼 수 있다.
십년 동안 제주에 살면서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의 글을 끊임없이 읽었으니, 심지어 밤을 새워 읽는 날도 있었다.《주역》은 날마다 한 괘(卦)를 외웠고, 문장은 맹자(孟子)와 한유(韓愈)의 글을 가장 좋아하였는데 만년에는 구양수(歐陽脩)를 좋아하였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구상할 필요도 없이 글을 풀어내어 잠깐 사이에 수천 글자를 지어내는데 이치가 뛰어나고 말이 통달하니, 남의 문장을 잘라 이어붙이는 자는 감히 그 규모를 엿볼 수가 없었다.
선생은 효도와 우애를 타고난 분이었다. 10세에 참판공을 모시고 여막에서 생활하며 전(奠)을 차리고 제사 지내는 일을 한결같이 어른처럼 하였다. 또 참판공과 똑같이 대상(大祥)을 마치도록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모부인이 고기를 권해도 소용없었다.
참판공은 기일이 되면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반드시 목욕재계하였는데, 공은 아이로서 감히 어른과 함께 목욕할 수 없어 차가운 우물에서 목욕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병에 걸려 배 아래에 응어리가 맺혀 평생의 질환이 되었지만, 이 역시 부모가 알지 못하게 하였다.
모부인이 평소에 설사병을 앓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공은 반드시 설사를 맛보아 그 차도를 살폈다. 돌아가시던 해에 또 설사를 하자 공이 맛보고 나서 울며 말하기를,
“맛이 예전과 다르구나.”
하였는데, 끝내 모부인이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가 62세였다. 묘 아래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는데, 채소도 맛있는 것은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고 잠시도 최질(衰絰)을 푼 적이 없었으며,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참배하는 일도 비바람이나 추위와 더위 때문에 그만둔 적이 없었다.
이렇게 상기를 마쳤는데도 몸이 상하지 않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비록 신명이 도와주었겠지만, 이 사람은 타고난 튼튼한 몸이 본래 보통 사람과 다르다.”
라고 하였다.
선생은 맏형을 섬기고 동생을 보살필 적에도 능히 공경하고 우애가 있었다. 형제와 밥상을 함께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백발의 여윈 얼굴로 날마다 서로 화목하게 지내느라 화락한 기색이 확연하였다. 대개 공의 도는 효성이 극진했기 때문에 충성으로 옮겨 갔고, 충성이 극진했기 때문에 절의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 절의는 변란을 만나 드러난 것이다.
선생이 인묘(仁廟)에게 지우(知遇)를 입은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누가 이를 저지했기에 그 도가 끝내 세상에 크게 행해지지 못하고 끝내 위태로운 때를 만나 그저 의열(義烈)로만 이름이 알려졌단 말인가. 아, 하늘의 뜻이로다!
금상(今上) 3년 임진년(1652, 효종 3)에 이조판서 겸 지경연사 의금부사 춘추관사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에 추증되었고, 정유년(1657)에 문간공(文簡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인 윤씨는 파평(坡平)의 저명한 성씨로, 충의위 아무개의 따님이다. 성품이 곧고 굳세며 맑고 밝았으며, 노복을 거느리고 집안을 다스림에도 모두 법도가 있었다.
공이 제주도로 귀양 갔을 때에는 집이 훼손되거나 살림이 줄어들지 않았고, 세 아들이 때에 맞게 제주도를 왕래하도록 노자를 마련해 주었으니, 그 현명함을 알 수 있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공보다 한 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신사년(1641, 인조 19)에 거창(居昌)의 치소 북쪽 주곡(主谷)에 장사 지냈는데 선생의 묘와 같은 곳이었다.
신묘년(1651, 효종 2)에 무덤을 옮겨 합장했으니, 바로 거창 용산(龍山)의 선비(先妣) 묘소 앞 오향(午向)의 언덕이다. 아들이 셋이다. 장남 창시(昌詩)는 공조 정랑을 지냈고 네 번 현감으로 나가 모두 치적이 있었다. 창훈(昌訓)과 창모(昌謨)는 모두 재주와 덕행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연이어 일찍 죽었다. 측실 소생으로 창근(昌謹)이 있는데 사과(司果)를 지냈다.
정랑은 충의위 이희옹(李希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아들 기수(岐壽)는 지금 성현 찰방(省峴察訪)으로 있고, 딸은 최서옹(崔瑞翁)에게 출가하였다. 창훈은 먼저 유영정(柳永貞)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낳았다. 딸은 이휘(李𧃸)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기헌(岐憲)과 기장(岐章)이다.
뒤에 신전(愼諯)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창모는 대군사부(大君師傅) 박공구(朴羾衢)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다. 아들은 기윤(岐胤)이다. 장녀는 조하현(曺夏賢)에게 출가하였으나 일찍 죽었고, 차녀는 윤형귀(尹亨龜)에게 출가하였다. 창근은 도사(都事) 이서(李𥳕)의 서녀(庶女)에게 장가들어 딸 넷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찰방은 목사 나위소(羅緯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장녀는 강휘만(姜徽萬)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기윤은 장령 허목(許穆)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다. 나는 선생보다 열입곱 살이 적기 때문에 선생을 어른의 항렬로 모셨지만 선생은 내가 후배라 하여 다르게 보지 않았다.
서로 잇따라 근시(近侍)의 반열에 출입한 지가 10여 년이 되므로 선생의 덕을 직접 뵙고 마음으로 도취된 것이 참으로 적지 않다. 그러나 선생이 진퇴를 용감하게 하고 큰 절개를 세움에 있어 나는 뒤에서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놀랄 뿐이었으니, 어찌 감히 선생을 안다고 하겠는가. 예전에 내가 선생께서 사시는 마을로 찾아뵈었는데, 띳집 오두막에서 질그릇에 거친 밥을 드시고 계셨다.
참으로 괴로우시겠다고 선생께 여쭈자 빙그레 한 번 웃으실 뿐이었으니, 내가 감히 선생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명(銘)을 지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맑은 기운 동방으로 무성히 뻗어 / 中州淸淑迤東蔚
덕유산과 용문산에 넓고 깊게 맺히더니 / 德裕龍門瀜而結
땅의 신령과 짝하여 위인을 낳았다네 / 鍾生偉人地靈匹
지난날 혼조를 만나 옥설처럼 깨끗하였으니 / 往當幽國作玉雪
혹독한 길망에도 입을 다물지 않고 / 吉網如荼不含噦
대정현에 귀양 가서도 찌꺼기 술 안 마셨네 / 載遷之靜醨羞啜
교룡과 뱀 마주하며 삼분오전을 보았으니 / 蛟蛇與對典墳閱
환난이 도운 덕과 지혜 그 누가 업신여길까 / 疹相德慧光誰衊
성상이 무너진 윤리 일으키니 공이 풀려났네 / 聖奮斁倫公脫絏
대각에서 직간한 말은 계피보다도 매웠나니 / 騫于臺閣桂愈辣
복의가 한 번 일어나 여러 입 떠들었는데 / 濮議一起衆喙吃
예법 근거한 높은 주장 용 소리인양 우렁찼네 / 據禮酋酋龍喉屹
벼슬 맡아 수행함에 어찌 말이 부드러우랴 / 當官而行安柔舌
매사에 쟁론하니 급암조차 무색하였고 / 靡事不爭汲猶劣
임금 잘못 보완하니 중산보에 비하겠네 / 靡闕不補甫可埒
굳세게 홀로 서니 강철 같은 마음이라 / 介然無徒肝鑄鐵
임금만이 귀 기울여 목마른 듯 자문하니 / 天獨下耳咨如渴
그 계책한 바가 직과 설을 본받았네 / 其所規畫本稷卨
병자년 봄에도 방어책을 올렸나니 / 于丙子春亦獻說
계책이 분명하여 위난 막을 수 있었다네 / 顜筴指掌可輓臲
누가 선비더러 대비책이 어둡다 했던가 / 孰謂儒迂桑土撤
하늘 틈 갈라져 막기 어려움을 어찌하랴 / 柰何乎天隙難窒
고삐 잡고 호종했으나 군사들이 고립되니 / 覊靮以從戈之孑
싸움 한번 못해보고 적은 기세등등하였네 / 宵攻不試鯨噴渤
산성 가득 울부짖음은 정강의 전철이라 / 滿城嗷嗷靖康轍
임금의 치욕에 신하가 죽음은 옛날의 충렬이니 / 主辱臣死古爲烈
내 칼을 내가 갈아 단번에 배를 찔렀네 / 吾刃吾礪腹一抉
절명했다 다시 소생하매 붉은 피가 솟아나니 / 絶而復甦丹迸血
성상께서 그 충정 안타까워 어의와 약 하사했네 / 上憫其忠藥醫挈
열성조에서 배양한 의기를 그 누가 더럽히랴 / 列聖培養氣孰涅
허나 공이 간직한 것이 어찌 한 절개뿐이랴 / 然公抱負奚一節
낙수 물줄기에 몸을 씻어 깊이가 끝없으니 / 澡身洛派汲毋竭
경이직내 의이방외로 평생의 요결을 삼았네 / 直內方外百年訣
서원 향교에서 제향 올리며 위패를 모시니 / 序庠芬苾柏板揭
천년 세월 후학들이 드높이 우러를 것이라 / 千秋蛾子仰嵽嵲
내 명을 지어 전현과 같은 분임을 보이노라 / 我銘示後媲前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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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동계 …… 신도비명 :
이 글은 정온(鄭蘊, 1569~1641)에 대한 신도비명이다. 정온의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ㆍ고고자(鼓
鼓子)이다.
[주02] 계축년에는 상소를 올렸고 :
강화도에 잡혀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한 강화 부사 정항(鄭沆)을 처벌하라는 주장과 폐모론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
리고 사직한 일을 가리킨다. 《光海君日記 6年 2月 21日》
[주03] 정축년에는 충렬을 실천하여 :
병자호란의 끝에 화의가 성립되어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절명시(絶命詩)를 짓고 나서
칼로 배를 찔러 자결을 시도했으나 중상만 입고 살아난 일을 가리킨다.《仁祖實錄 15年 1月 28日》
[주04] 공의 …… 자호(自號)하였다 :
《서경》〈우공(禹貢)〉에 “역산 남쪽에 우뚝 자란 오동나무를 조공한다.〔嶧陽孤桐〕”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역양은 산동성(山東
省)에 있는 역산(嶧山)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마을 이름과 같으므로 고동(孤桐)에서 동(桐)을 취해 호를 삼은 것이다.
[주05] 질대(絰帶)를 차고 다녔으며 :
1596년(선조 29) 겨울에 부친상을 당하였기 때문에 질대를 차고 다닌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허목(許穆)이 “선 선생(정온의 부친)
이 돌아가시자 곡하며 울다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으며, 비록 난리 중에 피난 다니면서도 상중의 예절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
다.”라고 하였다.《桐溪集 附錄 卷1 桐溪先生行狀》
[주06] 무신년에 상소한 :
1608년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하자 정인홍(鄭仁弘)이 유영경을 베어죽이도록 청
하면서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글을 올렸는데, 이후로 여러 사람들이 정인홍의 편을 드는 소를 올렸으며 정온도 상소하
여 정인홍을 옹호하고 유영경을 공격한 적이 있다.《萊庵集 卷4》《宣祖實錄 41年 1月 28日》
[주07] 무장법(無將法) :
불온한 저의만 가지고 있어도 처벌하는 법을 말한다. 무장(無將)은 장차 무슨 일을 하려는 의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인데,《춘
추공양전(春秋公羊傳)》장공(莊公) 32년에 “임금과 부모에 대해서는 장차 도모할 의사가 없어야 하니 장차 도모할 의사가 있으면
반드시 주벌(誅罰)한다.〔君親無將, 將而必誅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8] 불병역(不兵逆) :
병기를 들지 않은 역적이라는 뜻인데, 정온의 상소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관학 유생 민정(閔瀞)이 정온을 편든 고을 유생 정옥(鄭
沃)을 두고 “병기를 들지 않은 역적.〔不兵之逆〕”이라고 논척하였다.《光海君日記 12年 1月 26日》
[주09] 예(羿) :
중국 상고 시대 유궁국(有窮國)의 임금으로,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
[주10] 초(楚)나라 …… 것 :
섭공은 춘추 시대 초(楚)나라 섭현(葉縣)의 영(令)을 지낸 심제량(沈諸梁)을 말한다. 초 혜왕(楚惠王) 10년, 백공 승(白公勝)과 석
흘이 정변을 일으키자, 심제량은 변방의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죽이고 조정을 안정시켰다. 당시 초나라 사람들
은 심제량을 부모처럼 보았다고 한다.《春秋左氏傳 哀公 10年》
[주11] 광해군의 …… 일어났는데 :
강화도에 위리안치된 광해군의 폐세자(廢世子) 이지(李祬)가 땅굴을 70여 척이나 파 울타리 밖으로 통로를 낸 뒤 밤중에 빠져 나가
다가 나졸에게 붙잡힌 사실을 가리킨다.《仁祖實錄 1年 5月 22日》
[주12] 인성군(仁城君) :
이공(李珙, 1588~1628)이다. 선조의 일곱째아들이며 정빈(靜嬪) 민씨(閔氏)의 소생이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왕은 숙
부의 예로써 대우하였으나,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고 그때 잡혀 들어온 자들이 모두 인성군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웠으므
로 왕도 할 수 없이 강원도 간성(杆城)으로 귀양 보냈다.《仁祖實錄 3年 2月 25日》
[주13] 이에 …… 하였다 :
이 때의 논쟁과 인조의 입장은《인조실록》2년 12월 2일의 기사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주14] 전례(典禮)가 …… 무렵이라 :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가 반정 후에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존되었는데, 다시 왕으로 추존하는 문제로 많은 논란
끝에 결국 원종(元宗)으로 추존된 사실을 말한다.《仁祖實錄 12年 7月 14日》
[주15] 승정원에 …… 논하였는데 :
원문에는 ‘入政院卽疏 ’라고만 되어 있으나 의미가 불충분하여 ‘入政院卽疏論典禮’라고 되어 있는 시장(諡狀)을 따라 보충하여 번
역하였다.《龍洲集 卷22 贈吏曹判書桐溪鄭公諡狀》
[주16] 서민(庶民)은 …… 있다 :
《서경》〈홍범(洪範)〉에 나오는 말이다.
[주17] 현현역색(賢賢易色) :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진실한 마음으로 어진 이를 좋아하라는 말이다.《論語 學而》
[주18] 이강(李綱) :
송나라 소무(邵武) 사람으로 금나라가 침입해 왔을 때 주전(主戰)을 주장하다가 귀양 갔고, 고종(高宗)이 남도(南渡)한 뒤 재상으
로 기용하자 국력을 회복하는 데 힘을 다했다.《宋史 卷358 李綱列傳》
[주19] 효사과(效死科) :
정온이 임의로 붙인 무과(武科) 이름으로,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의하면 정식 명칭은 ‘효사수성과(效死守城科)’이다.
《仁祖實錄 14年 3月 15日》
[주20] 삼군(三軍)의 …… 없다 :
《논어》〈자한(子罕)〉에 나오는 말이다.
[주21] 부귀로도 …… 대장부 :
《맹자》〈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주22] 직방대(直方大) :
곤덕(坤德)의 쓰임을 형용한 말로, 곧고 방정하고 위대하다는 뜻이다.《주역》〈곤괘(坤卦) 육이(六二)〉에 “곧고 방정하고 크니,
익히지 않아도 이롭다.〔直方大, 不習, 无不利.〕”라고 하였다.
[주23] 평생 …… 없었다 :
사마광이 “나는 남보다 뛰어난 것은 없고, 다만 평생 한 일 중에 남에게 말하지 못할 일은 없었을 뿐이다.” 하였다.《宋史 卷336 司
馬光列傳》
[주24] 요순(堯舜)도 …… 똑같다 :
《맹자》〈이루 하(離婁下)〉의 “요순도 보통 사람과 똑같다.〔堯舜與人同耳〕”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25]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 :
용맹하고 힘이 세기로 이름난 고대의 장사들이다.
[주26] 일신(一身)의 덕 :
본서 권22〈증이조판서동계정공시장(贈吏曹判書桐溪鄭公諡狀)〉에는 “날로 새로워지는 덕〔日新之德〕”으로 되어 있다.
[주27] 길망(吉網) :
당(唐)나라 천보(天寶) 초년에 정승 이임보(李林甫)의 앞잡이가 된 어사 길온(吉溫)이 무고한 사람을 해치고 형벌을 가혹하게 내려
당시에 이를 길망이라고 하였다.《舊唐書 卷186 酷吏列傳下 吉溫》《新唐書 卷209 酷吏列傳》
[주28] 찌꺼기 …… 마셨네 :
세상에 영합하지 않고 깨끗한 지조를 지킨다는 말이다. 굴원(屈原)의〈어부사(漁父辭)〉에 “뭇 사람들 다 취했거든 어찌 그 술지게
미를 먹고 찌꺼기 술을 마시지 않는가.〔衆人皆醉, 何不餔其糟而歠其醨.〕”라고 한데서 나온 표현이다.
[주29] 삼분오전(三墳五典) :
옛 전적을 통칭하는 말이다. 삼분은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의 글이고, 오전은 소호(少昊)ㆍ전욱(顚頊)ㆍ고신(高辛)
ㆍ요(堯)ㆍ순(舜)의 글이다.
[주30] 환난이 …… 지혜 :
힘든 환경이 오히려 그 사람을 도와 지혜와 재능을 가지게 한다는 말이다. 맹자가 “사람 중에 덕스러운 지혜〔德慧〕와 기술적인 지
능〔術知〕을 가진 자는 항상 재환(災患)속에 있게 마련이다.〔人之有德慧術知者, 恒存乎疢疾.〕”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주31] 복의(濮議) :
인조의 생부모에게 시호를 추존하여 종묘에 배향하려는 의논을 말한다.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복안의왕
(濮安懿王) 윤양(允讓)의 아들 월서(越曙)로 뒤를 잇게 하였는데 그가 영종(英宗)이다. 영종이 즉위한 이듬해에 조칙을 내려 생부
(生父) 복안의왕의 숭봉(崇封) 문제를 의논하도록 하면서 발생했던 논의를 복의라 한다.
[주32] 급암(汲黯) :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직간(直諫)을 잘하던 신하로, 성정이 매우 엄격하여 무제가 옛날 사직(社稷)의 신하에 가깝다고 하였
다.《史記 卷120 汲黯列傳》
[주33] 중산보(仲山甫) :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의 명신으로 선왕을 도와 중흥의 공을 이루고 번국(樊國)에 봉해졌다.《시경》〈증민(烝民)〉에 “곤직에
이지러진 곳 있거든, 중산보가 이를 돕는도다.〔袞職有闕, 惟仲山甫補之.〕”라고 하였는데, 곤직은 임금의 직무를 말한다.
[주34] 직(稷)과 설(卨) :
순(舜) 임금의 어진 신하인 후직(后稷)과 설(卨)을 말한다. 순 임금을 잘 보필하여 천하를 태평하게 하였다. ‘卨’은 흔히 ‘契’로도 쓴
다.
[주35] 정강(靖康) :
북송(北宋) 흠종(欽宗)의 연호이다. 정강 2년에 금군(金軍)이 남하(南下)하여 송의 수도 변경(汴京)을 함락하고 휘종(徽宗)과 흠
종(欽宗)을 인질로 잡아갔다.
[주36] 낙수(洛水) …… 씻어 :
낙수는 정자(程子)가 살던 곳으로, 정자(程子)의 학문 연원에 들어 주자학에 침잠했다는 말이다.
[주37]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 :
《주역》〈곤괘(坤卦) 문언(文言) 육이(六二)〉에 “군자가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김하라 김재영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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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桐溪鄭公神道碑銘 幷序
桐溪鄭公旣卒之葬而喪之卒若而年, 嗣子前縣監昌詩自安陰西走六百里, 至洪陽海上, 手家狀一卷授漢陽趙絅, 泣而言曰 “先人之墓木拱矣。 不肖蚤夜以思, 斤斤自祗力治牲繫石, 敢以不朽屬執事, 惟執事賜之銘。” 絅禮辭曰: “惡不佞惡敢當子之先君子, 于癸丑抗疏, 于丁丑蹈烈, 赫赫照人耳目。 況修齊之學、樹惇而文者, 爲之本哉將太史氏書諸筴不一, 書序、庠塾俎豆之矣, 傖父語惡敢慁其間子其愼哉” 昌詩又作而泣曰 “不肖之爲先人道, 惟在於是。 世且知吾先人之深, 疇出執事外而文之” 於是愴然, 不敢復辭, 遂盥而按狀。
公諱蘊, 字輝遠, 姓鄭氏。 其家卽安陰之嶧陽里, 仍自號桐溪。 其先系出草溪, 自高麗侍中倍傑顯。 倍傑之后, 四世至習仁, 官右散騎常侍。 以方正名, 李文靖穡爲之傳。 是生悛, 文學爲一時最, 世稱八溪先生者。 官卒寶文閣提學。 提學生齊安, 生員: 生員生從雅, 牧使: 牧使生玉堅, 別提、贈司憲府執義。 執義生贈承政院左承旨諱淑。 承旨生贈吏曹參判諱惟明, 進士, 公之考也。 以公貴推恩三代。 參判師事林葛川, 薰盡其學, 同進門人皆出其下, 今上朝, 以孝行旌其閭。 聘將仕郞晉州姜謹友之女, 兄翼優於儒行, 夫人有乃兄風。 隆慶己巳, 生公于嶧陽里第公生而頭角嶄然, 異凡兒。 常騎竹戲嬉, 曰 “小谷生大人”, 里中父老咸奇之。 始公入學也, 口訥, 倍文後同隊, 然伏習忍苦, 有人十己千之志。 故卒輒變爲敏, 文理驟進, 未冠輒成大材, 聲稱藉甚。 葛川素有水鑑, 一見公, 輒期以致遠。 公雖少, 器宇峻整, 制行方嚴, 寡言自可, 惟讀書是勤, 從遊之士皆敬畏之矣。 十九, 鄕解高等, 參判公屬夫人曰: “此兒必大顯, 子享其榮, 恨吾不及見。” 丙申, 參判公疾革, 公雀立露禱, 絶而復蘇者累。 時倭寇蜂屯南徼, 公奉母夫人避之嶺、湖間, 流離顚沛之謂何而猶絰而行, 行乞於道, 時母夫人食飮節無匱。 萬曆乙巳, 嶺南請五賢從祀封疏, 多士推公入京。 宣廟嘉之, 爲設庭試, 公居第二名, 京師人口相傳其文藉藉。 丙午, 成進士。 庚戌, 登別試第三人。 明年, 自成均館拜春坊說書。 俄陞司書, 旋除司諫院正言。 是年, 昌德宮成, 光海居未幾, 惑妖淫瞽史說, 便欲還貞陵宮。 公獨啓爭之强, 光海震怒, 卽令補鏡城判官。 公之去京也, 一松沈相送而執手曰: “公得言矣, 國將如何” 公之任, 事主將臨吏民, 各以其道。 是歲, 北路侵, 鏡尤菜色, 賴公荒政獲蘇醒。 至甲寅, 對吏, 鏡人走人起居, 曰: “於我有德。” 壬子, 光海策戊申上疏人功, 公與焉, 以掌樂僉正徵還。 公辭以無功甚力, 李爾瞻等慍曰: “鄭某之辭此勳, 爲國之不久耶” 於是公知無奈何, 悶默而退。 癸丑夏, 無賴賊徐羊甲等被執, 遂誣引延興府院君金悌男謀擁立永昌大君。 於是甘心慈殿者, 煽而媒孼, 公卿大臣頗知其誣, 而噤不敢吐一言。 公一日見爾瞻責之曰: “八歲童子, 安知逆謀聞慈殿廢尙食, 拊大君曰‘汝死吾亦死’, 如有不諱, 誰當其咎” 爾瞻勃然厲聲曰 “籍幷大妃而廢之, 誰曰不可” 公卽望望而去, 爾瞻嗛之次骨。 五月, 公被劾還鄕。 家與鄭仁弘居近, 且有舊, 抵書極言 “請罪八歲童子, 擧朝, 忍人也。” 且望仁弘出手救, 仁弘不能用。 冬, 除侍講院弼善, 與時議大不適, 謁告遞。 當道者至目以逆黨。 甲寅二月, 大君死於圍籬中, 江都留守鄭沆蓋附朝議殺之也。 公以副司直上封事, 凡千有百言。 其略曰 “殿下遭人倫之變, 欲盡處變之道, 終未免假手於麤悍武夫, 其爲聖德累, 不旣大乎殺凡人無辜, 猶且罔赦, 況殺吾君同氣之親乎臣以爲不斬鄭沆, 殿下無面目立於先王廟庭也。 大妃雖不慈於殿下, 殿下安得不盡孝於大妃願自今斥絶讒邪交搆之路, 殿下亦宜恭爲子職, 無廢問安視膳之禮, 務得大妃懽心, 猶足以掩前失而明新化矣。 頃者臺官鄭造、尹認、丁好寬等首發廢妃、殺弟之議, 爲人臣子而是可忍耶殿下如欲存母子之恩, 亟取三人者, 投諸四裔, 不與同中國, 然後讒說者不得作, 而三綱五常昭揭於宇宙矣。” 疏入, 光海大憑震怒, 切責政院, 勘罷捧疏承旨。 於是三司幷論以削奪絶島安置, 光海猶怒其罰輕, 誚責三司峻, 於是直請拿鞠。 公就獄, 禁府例請議諸大臣斷讞。 右議政鄭昌衍、原任李元翼獻議曰 “鄭某誠狂妄, 不知忌諱, 夫豈有無君不道心願從寬典。” 沈相喜壽之議亦然。 光海答李完平曰 “鄭某之疏, 字字陰兇, 非無君不道而何” 是時三司、館學鵲起, 以“無將法”、“不兵逆”等語將疏相銜, 羿之彀中, 不足喩其危也。 六月, 光海親鞠, 招訖下獄。 秋再招, 仍命安置大靜。 公在圄者凡五閱月, 初就獄時, 有一老嫗當路祝曰 “天乎天乎願使賢人毋死於獄。” 獄卒亦相誡加敬。 鄭沆亦送人言曰 “沆服公議招, 絶不及公。” 丁好寬見公疏, 亦曰 “吾不免千古罪人。” 遂日飮病死。 及先生出獄, 都人聚觀, 街巷成群, 車爲枳。 咸咨齎涕洟, 喜公生而悲公謫也。 當是時, 兒童、走卒, 無不誦公名, 婦孺至繙公疏, 家傳誦之。 公到海南, 湖南儒生宋興周等上疏極言公忠愛, 正言吳長、李彦英、姜大遂亦坐言公事, 或竄或黜。 公居大靜荐棘中, 不見天日者十年, 安之若命, 唯作《白雲詞》, 以寓思親意。癸亥, 今上反正, 拔擢昏朝時直道見逐者, 則公其首也。 始以獻納徵, 離濟未數日, 陞司諫, 將命之吏相望於道。 自是年除歲遷, 以至衣緋帶金, 於諫院爲獻納、司諫者一, 大司諫者七, 於憲府爲大司憲者四。 四爲副提學, 三爲都承旨, 吏曹則參議而參判者三。 其他禮・兵・刑三曹參判、漢城左尹、慶尙監司、南原府使, 或以特恩, 或以便養, 或用扈從勞也。 然公以大夫人甚老故, 未常居一職數月淹。 天啓甲子, 平安兵使适反, 上南幸, 公以吏曹參議從。 丁卯正月西聳, 上幸江都, 昭顯世子分朝下湖南。 公方家居, 聞變卽日發奔問行。 遇朝士於途, 言“虜騎方橫, 雖行必不達行在”, 公胤子亦固請赴分朝。 公叱曰 “觀望就便, 非臣子義。” 時大夫士在散者, 率皆便道趨全, 直赴江都, 唯公一人。 擧朝贊歎, 若楚人之見葉公, 人心亦以坐牢。 於是公上疏, 首言和議之非及弘立之罪, 末論敵與我國形勢, 無非實事求是。 上雅重公以直節, 禮待公異於群臣, 朝之士流亦皆靡然慕用公矣。 間有堅忮者則不能無也, 而公則夷然不屑也, 益厲舊操, 棘棘亢亢。 事無難易, 遇則必爭, 人所憚爲, 勇往不避。 其爲司諫也, 光海世子跳出事起, 公連柱三司按律論。 爲大司諫也, 仁城君出逆招, 合司請罪, 公力主全恩。 與副提學洪瑞鳳爭論於上前, 瑞鳳語侵公, 公凝然不顧, 愈執不阿, 上頷之曰: “大司諫之言是也。” 公始拜都承旨也, 其年爲丙寅。 上方遭仁獻王后喪, 公上疏言“違古禮, 爲私親斷行三年喪不宜”, 上嘉納之。 庚午春, 太廟松震, 公因求言中刑獄失中者, 反復累百言, 請宥公族之坐遷者老弱。 兩司劾以庇逆論累日, 只遞職。 癸酉, 有誣告獄, 公以大司憲論之, 誣者坐, 逮者釋。 又論大君於時詘營室勞民, 上卽命停。 拜同知經筵也, 上疏乞脩父墳, 上特給傳, 且令本道備物禮登。 是年秋, 大明殿震, 公在鄕應旨極言人主大本上, 意竱先格君心也。 有“藥石書紳”之批。 明年, 又拜憲長, 未及謝, 移知申。 蓋時典禮垂定, 朝廷慮公當言責則必爭故爾。 入政院卽疏, 備證經史, 皆議禮諸儒所未嘗言者, 物論韙之。 乙亥夏, 穆、裕兩陵有雷雨災。 上遣大臣奉審, 所奏與衆議之異, 公上封事, 質言不避。 又劾禮官擧祔廟禮於兩陵災日, 罪在罔上, 聞者吐舌。 秋, 又有震風變, 公獻言 “風拔社樹、廟木, 此何等天警也 殿下宜反躬兢惕, 召還被譴大臣, 盡釋言事之臣, 庶幾哉應天以實。” 又曰 “外人譁言‘禁苑鑿池, 方舟盤樂之漸, 頗蠱上心’, 審若此, 大風不足言災也。 願殿下戒之。” 又曰 “《書》曰 ‘庶民維星, 星有好風、好雨。’ 民之失所, 於今甚, 震風、狂雨, 迨類之應乎。 願殿下賜被災地今年租, 以示優恤焉。” 居無何, 以特進官入侍, 請老甚懇, 上溫諭曰 “如卿忠直, 豈宜去朝右今鄭經世已死, 張顯光甚老, 卿豈可又去” 仍問 “卿曾見風災之酷如此否” 對曰 “臣未之見也。 人皆言辛卯有風災, 壬辰亂作。” 冬, 以副提學侍講。 公進曰 “古人於《詩》, 不必引章句, 以義諭之者多。” 至講《有女同車》, 曰 “《有女同車》乃男女相悅之至。 古語曰‘賢賢易色’, 以好色之心移於好賢, 則好賢誠矣。” 至《蘀兮》章曰 “木枯將落, 有風吹之, 則其落也易。 國將亡, 又有政事之不善, 豈非促之亡乎” 其他章皆有引喩, 深得箴諫之義, 上稱善再三。 講畢, 公又進曰 “時事甚可慮也。 事若急, 至尊避之何處唯以同死社稷爲心, 然後國可保矣。” 丙子二月, 敵使怒逸, 朝野方洶。 公在玉堂, 上箚條論凡三。 一曰 “‘興衰撥亂之主, 非英武不足當之’, 李綱之言也。 殿下猶行素膳, 徒效兒女子事, 其可謂興衰撥亂之英乎” 時仁烈王后新陟, 山陵才畢, 公深爲聖躬慮故云然。 二曰: “伏節死義之士, 求之於犯顔中, 不易之論也。 典禮時言事之臣, 庸非犯顔者乎如此等輩, 宜急甄敍。” 三曰 “畜衙門軍官及訓鍊砲鎩, 正爲緩急用, 抽精銳當敵, 不可遲也。 於義州設效死科, 亦壯軍聲之一助。” 言皆中端, 而時議以爲迂, 不能用。 是歲十二月, 敵敗盟入寇, 不數日, 穿黃、鳳綴松京。 報急如羽, 大駕避之廣之南漢城, 公以吏曹參判從焉。 圍中上箚者四, 大要以君臣父子背城借一, 死執不撓, 大拂廟議。 二十四日, 公聞敵求斥和臣, 請以身先之。 是日夜半, 亂兵露刃詣行殿外, 請斥和臣。 於是廟堂列書十人姓名, 將縛送敵營。 有言于上者曰 “斥和諸臣皆一時民望, 如後世議何” 上惕然, 卽命止之。 丁丑正月二十七日, 當事者持書往敵營, 書辭秘, 世莫得以聞。 公憤曰 “主辱至此, 臣敢愛死” 晨起痛哭, 正其衣衾而臥, 拔佩刀剚其腹。 侍者開衾視之, 則刃沒腹矣。 驚號而拔刃, 鮮血逬出, 氣咯咯絶者良久, 朝紳相識者咸來救。 上聞而斯惻, 遣內醫救藥, 殊而回生。 又下敎, 令廣州牧專意供醫藥。 其時御醫之視公創者曰 “後成血癰難救。” 公之沒也果然。 公旣病不能從駕出, 乃上箚以辭, 其辭一出義理, 不雜利害, 皆留中。 二月, 公臥箯輿而南, 不處其家, 曰 “吾不死於南漢以答國恩, 何面目自安妻子之奉” 遂入德裕山之南麓某里谷, 結茅舍易秫田, 以度朝夕。 辛巳六月二十一日己丑卒, 某年某月某日, 葬某山之原。
嗚呼! 公有百尺亭亭之直, 有秋霜皎日萬古常鮮之節。 前之癸丑, 群奸內奰, 竊大阿而擧文網, 阨公于保宮。 服囚服關木索, 半載于幾, 竟投之風魚、瘴毒之聚, 其死九而生堇一也, 然不能奪公之直也。 後之丙子, 浴鐵之騎數十萬, 肉薄孤城之下, 八路勤王師, 或衄或遁, 外無蟻子之待。 亡論文吏、介冑, 震怖悼慄, 相率而入乞憐中, 然亦不能撓公之節也。 之直之節, 其養有根, 其出有源, 夫子所稱“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者非耶孟軻氏所言“富貴不能淫, 威武不能屈, 大丈夫” 者非耶然以一直臣槪公, 以一節士颺公, 是淺之爲丈夫哉公之學, 耳目濡染於家庭者旣不淺, 及其弱冠, 徧遊趙月川、鄭寒岡之門, 聞退陶李先生之緖, 悅而淑之者亦多。 然其踐履篤實之功, 則皆自於自得, 平生以 “直方大” 三字爲一身之符。 警惕于本原, 則本之《心經》浸灌乎義理, 則本之洛、建諸老書, 於《性理大全》着力最早。 夜深而寢, 鷄鳴而寤, 盥櫛、定省之外, 無毫髮念走外, 對案危坐, 終日不跛不倚。 嘗論先輩人品之不同曰 “人性有二, 剛與柔爾。 剛屬陽, 柔屬陰, 與其不得剛柔之正, 寧失於剛。 故《易》貴乎陽剛君子。” 又曰 “學者當以心小膽大爲一身立脚地。 涑水氏平生無不可對人言者, 以膽大也。” 故公后日受用處, 多是一節云。 公爲人光明俊韙, 表裏如一。 與人恂恂愷悌, 不爲牙角, 不爲畦畛, 不爲嶄截、矯激, 全有堯、舜與人同底意思。 至其立朝廷爭是非, 謇謇諤諤, 屹如喬嶽, 雖自謂賁、育不能奪。 且所雅言, 惟在孝悌忠信中, 奧理、微言, 不肯輕說, 由是世之見公者, 皆不知篤實眞儒也。《元朝自警箴》若《求中說》若《德辨錄》卽公中晩後所著也, 於是可見公一身之德、見道之明且確也。 居濟十年, 經史百家, 咿唔不輟, 至焚膏繼晷。 《大易》則日誦一卦, 於文章最喜孟、韓, 晩好歐陽。 凡爲文辭, 渙若不思, 頃刻就數千言, 理勝辭達, 割裂點綴者, 不敢規其際。 孝友天植也。 年十歲, 侍參判公于廬所, 執奠拜獻, 一如成人。 又絶肉以終再朞, 一如參判公, 母夫人勸之肉, 不可。 參判公於終身之喪, 雖隆寒必沐浴澡潔。 公則以兒子不敢同長者浴湯, 浴氷井, 遂媒疾, 塊結腹下, 爲平生患, 亦不使父母知。 母夫人素患泄積有年, 公必嘗泄以驗谻歇。 及歿之年又泄, 公嘗而泣曰: “味與疇昔異。” 竟不起。 是時公年六十二, 廬墓下終三年, 菜之美者亦不近口, 衰絰未嘗暫釋, 朝夕拜墓, 不以風雨寒暑或廢。 服闋亦無演門之毁, 人以爲“夫夫也, 雖神明所扶, 稟賦之遒, 固異夫人”云。 事伯兄畜其季, 能敬而友, 與之連案飮食無虛日, 蒼顔白髮, 日相對怡怡, 和樂之色可掬。 蓋公之道, 孝之盡, 故移於忠: 忠之盡, 故節義乃著。 然節義卽變之遭也。 先生之受知於仁廟, 可謂不世事, 而誰使尼之其道終不能大行於世, 終値危難, 只以義烈鳴, 於乎天哉! 今上三年壬辰, 贈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 丁酉, 賜諡文簡公。 夫人尹氏, 坡平著姓, 忠義衛某之女。 性貞毅淑明, 御婢使、治家第, 皆有法。 當公之謫濟也, 宅不翦而業不鏟, 資三子往來海外以時, 賢可知也。 與公同年生, 先公一年卒。 辛巳, 葬于居昌治北主谷, 同先生竁。 辛卯, 遷寢合葬, 卽居昌龍山先妣墓前午向原。 丈夫子三人: 長曰昌詩, 仕爲水曹正郞, 出爲縣監者四, 俱有治績。 曰昌訓、昌謨, 咸有才行, 不幸相繼早歿。 側室子曰昌謹, 司果。 正郞娶忠義衛李希雍女, 生一男一女: 男岐壽, 方爲省峴察訪。 女適崔瑞翁。 昌訓前娶柳永貞女, 生一女二男 女李薇, 男岐憲、岐章。 後娶愼諯女, 生一男, 幼。 昌謨娶大君師傅朴羾衢女, 生一男二女: 男岐胤。 女長適曺夏賢, 蚤歿; 次適尹亨龜。 昌謹娶都事李𥳕庶女, 生四女, 幼。 察訪娶牧使羅緯素女, 生四女一男: 長適姜徽萬, 餘幼。 岐胤娶掌令許穆女, 生三男。 不佞少先生十七歲, 以丈人行視先生, 先生則不以先後輩致異。 踵相接出入邇列者, 十有餘年, 覿德而心醉, 固不淺淺矣。 而至其勇進退、立大節處, 瞠若乎后, 其敢曰知先生乎? 昔不佞訪先生于某里, 編茅矮屋, 土型脫粟。 問先生良苦, 則猶然一笑而已。 不佞其敢曰知先生乎? 遂爲之銘, 銘曰:
中州淸淑迤東蔚, 德裕、龍門融而結, 鍾生偉人地靈匹。 往當幽國作玉雪, 吉網如荼不含噦, 載遷之靜醨羞啜。 蛟蛇與對典墳閱, 疹相德彗光誰衊聖奮斁倫公脫絏。 騫于臺閣桂愈辢, 濮議一起衆喙吃, 據禮酋酋龍喉屹。 當官而行安柔舌靡事不爭汲猶劣, 靡闕不補甫可埒。 介然無徒肝鑄鐵, 天猶下耳咨如渴, 其所規畫本稷、卨。 于丙子春亦獻說, 顜筴指掌可輓臲, 孰謂儒迂桑土撤奈何乎天隙難窒羈靮以從戈之孑, 宵攻不試鯨噴渤。 滿城嗷嗷靖康轍, 主辱臣死古爲烈, 吾刃吾礪腹一抉。 絶而復甦丹逬血, 上憫其忠醫藥挈, 列聖培養氣孰涅然公抱負奚一節澡身洛派汲毋竭, 直內方外百年訣。 序庠芬苾柏板揭, 千秋蛾子仰嵽嵲, 我銘示後媲前哲。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