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형(李尙馨)
[생졸년] 1585년(선조 18)~1645년(인조 23) / 향년 60세
조선시대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홍문관부수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선(德先), 호는 천묵재(天默齋).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욱(李昱)이며, 어머니는 임대영(任大英)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
교리 이공 묘지명(校理李公墓誌銘)
남쪽 지방 학자들은 천묵(天默) 이공(李公)을 성대하게 추대하는데, 공은 인조조(仁祖朝)의 강관(講官)으로 학술에 조예가 깊고 특히 역학(易學)에 밝았다고 한다.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는 우리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별자(別子)인데, 그 후손 서원군(瑞原君) 휘 친(𡩁),
고림군(高林君) 휘 훈(薰), 칠산군(漆山君) 휘 선손(璿孫)이 3대를 이어 군(君)을 습봉(襲封)하였다.
공의 부친 휘 욱(昱)은 칠산군의 증손이다. 효성으로 알려졌는데 어버이의 장례에 직접 흙을 날라 무덤을 만들었다. 모친 장흥 임씨(長興任氏)는 대영(大英)의 딸이다. 공은 8세에 영남으로 피난하였는데, 어떤 중국 사람이 공의 관상을 보고서 대인(大人)의 상이라고 하였다.
관례를 올리기 전에 활계(活溪) 이대유(李大㕀)에게 경서(經書)를 배웠다. 발분하여 먹는 것도 잊고서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였으며 여력으로 제가(諸家)의 서적을 두루 관통하였다. 만년에 또 사계(沙溪) 문원(文元)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선생이 배움에 민첩하다고 칭찬하였다.
임자년(壬子年,1612, 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을축년(乙丑年,1625, 인조 4)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보임되었다. 하루는 가주서(假注書)로 강연에 들어갔는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공과 계곡(谿谷) 장유(張維,1588~1638) 공이 모두 공의 경학(經學)을 추천하였다.
성상께서 강연에 참여하라고 명하고,《상서(尙書)》의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주석 및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는 이치를 묻고 이어 다른 경전의 의문점을 묻자, 공은 묻는 족족 즉각 대답하였다. 공이 물러간 뒤에 성상께서 환관을 보내어 이 아무개의 집안이 어떠한지 알아보게 하였다.
얼마 뒤에 시강원 설서에 제수되었다가 사서로 옮기고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가 체차되어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병조에 들어가 좌랑과 정랑을 지내고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다. 문학을 거처 정언이 된 것이 두 번이었고 지제교를 맡았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자원하여 나갔다. 모친상을 당하였고 상기(喪期)를 마친 뒤에는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안으로 정치를 닦고 밖으로 적을 물리치는 대책을 아뢰었는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것을 인재를 얻는 요체로 삼았다.
병자년(丙子年,1636)에 오랑캐가 도성을 침범하자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다. 독전 어사(督戰御史)가 되어 차자를 올려 성을 지키는 방략을 논하는 한편 머뭇거리는 여러 장수들의 죄를 청하였다.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김경징(金慶徵), 장신(張紳), 이민구(李敏求)의 죄는 죽여 마땅하다고 극력 말하였다.
그러나 양사(兩司)에서 세력에 빌붙어 법을 폐하자 곧바로 병을 핑계대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다시 수찬에 제수되고 지평으로 옮겼다. 밀소(密疏)를 올려 아뢰기를,
“대의(大義)란 삼강(三綱)의 윤리와 오상(五常)의 질서이니, 이것을 버리면 인류가 금수가 되고 중국이 오랑캐가 되니 하루도 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2백 년간 명나라 황실을 섬겼으니 의리로는 군신(君臣) 사이이고 은혜로는 부자(父子) 사이와 같습니다.
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불행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황조의 조공로(朝貢路)를 곧바로 끊어서는 안 됩니다. 속히 국내에 애통함을 보이고 천하에 진실한 충정을 드러내어 비통하기 그지없는 뜻을 알게 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교리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보덕에 제수되어 심양(瀋陽)으로 가야했는데, 공은 병이 심하여 수레에 실려 도성에 들어왔다. 얼마 뒤 면직되어 사간과 교리에 제수되고 또 춘방(春坊)의 직임을 겸하였다. 다시 병으로 돌아갔다.
경진년(庚辰年,1640)에 성상의 체후가 편치 않아, 집의로 한번 소명에 응하였다. 이후로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부르는 명이 있으면 조복(朝服)을 걸치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병중에는 오직 주자(朱子)의 서적만 읽으며 때때로 책을 덮고 탄식하였으니 그 은미한 뜻을 알 수 있다.
공의 휘는 상형(尙馨)이고 자는 덕선(德先)이다. 태어나고 죽은 해가 모두 을유년이다. 공은 돈후하고 주밀하였으며 겸손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평생 남의 죄악을 말하지 않았으니 온화한 군자였다. 그러나 큰일에 임하여 대의(大義)를 지킴에 있어서는 빼앗을 수 없는 확고한 절조가 있었다.
그 진퇴와 출처의 올바름은 아마도《주역》의 시의(時義)에서 터득함이 있었으리라.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양(陽)이 1분(分) 자라면 음(陰)이 1분 줄어드니, 천리(天理)와 인욕(人慾)도 마찬가지로 서로 소장(消長)한다. 공자(孔子)는 건괘(乾卦)에 이르렀고 안자(顔子)는 태괘(泰卦)에 이르렀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주역》은 성인이 사람들로 하여금 선(善)을 진실하게 행하고 허물을 보완하게 하고자 만든 것이다. 사람이 능히 선을 행하는 데 진실하다면 허물을 보완할 수 있다.”
하였다.
이 때문에 그 학문은 한결같이 진실하고 속임이 없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승정원에 재직할 때 《주역》에 대해 말하자, 승지 윤지경(尹知敬) 등이 대번에 일어나 절하였다. 배위 선산 임씨(善山林氏)는 부정 극립(克立)의 딸이다. 공보다 15년 앞서 세상을 떠나 임실(任實) 종산(鍾山)에 안장되었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문헌(文獻), 문원(文源), 참봉 문재(文載), 문영(文英), 진사 문계(文啓)이고, 사위는 사인(士人) 윤지(尹砥), 참봉 양운거(楊雲擧), 사인 오첨희(吳添喜)이다. 성시(聖蓍), 성호(聖虎), 성귀(聖龜), 성봉(聖鳳)은 장남의 소생이다.
차남의 외동딸은 지평 최치옹(崔致翁)의 처가 되었다. 성린(聖麟), 성진(聖眞), 성원(聖元)은 삼남의 소생이다. 성기(聖麒), 성란(聖鸞)은 사남의 소생이다. 오남의 아들은 성헌(聖憲)이고 사위는 승지 윤홍리(尹弘離)이다. 증손 이근(頤根)은 조정에서 초빙하여 세자 자의(世子諮議)로 삼았고, 이정(頤正)도 가학(家學)을 계승하였다.
신재(愼齋 김집(金集)) 선생이 일찍이 공의 묘갈(墓碣)을 지었고, 이후 공의 아들 문재(文載)가 남은 일을 모아 참봉 방두천(房斗天)에게 청하여 행장을 지었다. 이정(頤正)이 내게 와서 묘지를 청하는데 나 또한 공의 명성과 행실을 사모하는 사람이기에 그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장릉(인조(仁祖))이 즉위하시니 / 長陵御極
원로와 준걸이 조정에 가득하였네 / 耆俊盈廷
공은 그 사이에 우뚝 솟아 / 公挺其間
붓을 꽂고 경전을 논하였네 / 珥筆談經
여러 현인들이 공을 천거하고 / 衆賢推轂
왕은 어느 집 자손인지 물으셨네 / 王曰誰子
남쪽에 태종의 지손(支孫)이 있어 / 太支于南
3대 동안 벼슬하지 않았네 / 三世不仕
매우 엄중한 옥당에 / 玉堂深嚴
마침내 숙유가 처하였네 / 乃處宿儒
창황히 어가의 고삐를 잡고 / 蒼黃執靮
강개하여 장수의 북채를 잡았네 / 慷慨援桴
외로운 성이 삼판의 위기에 처해 / 孤城三版
땅이 찢기고 하늘이 기울었네 / 地裂天傾
공은 말하였네, 아 / 公曰於戲
감히 명나라를 잊으랴 / 敢忘大明
저 흘러가는 물을 보건대 / 相彼流水
또한 동쪽으로 흐르네 / 亦流于東
공의 한마디 말이 아니었다면 / 微公一言
아, 우리는 오랭캐가 되었으리 / 噫吾其戎
그 말이 시행되지 않았으나 / 雖言不行
의리는 해와 별처럼 빛났네 / 義則日星
병석에 누워 나직이 읊조린 것은 / 伏枕幽吟
산의 개암나무와 진펄의 감초였네 / 山榛隰苓
《주역》에는 상이 있으니 / 維易有象
나아가고 물러남을 시대와 함께하였네 / 進退偕時
아름다움 머금어 곧음을 지키니 / 含章守貞
공이 실로 이를 본받았네 / 公實以之
많은 재물 남겨줄 필요 있으랴 / 豈必籝金
후손이 잘 계승하였네 / 後孫其承
내가 그 행적을 명에 새겨 / 我銘其行
백세토록 증험하노라 / 百世于徵
-------------------------------------------------------------------------------------------------------------------------------------------------------
[脚註]
[주01] 교리 이공 묘지 :
이 글은 이상형(李尙馨, 1585~1645)의 묘지이다. 이상형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선(德先), 호는 천묵재(天默齋)이다.
[주02] 양(陽)이 …… 이르렀다 :
한국문집총간 21집에 수록된《천묵유고(天默遺稿)》권3〈쇄언(瑣言)〉에서 이 구절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천리와 인
욕의 소장(消長)은 음양(陰陽)의 소장과 같다. 한 달은 30일로 나뉘는데 양이 1분 자라면 음이 1분 소멸한다.
동지(冬至)에서부터 4월에 이르면 음이 모두 소진되어 순양(純陽)의 건괘(乾掛)가 되니 바로 공자이다. 동지에서부터 1월에 이르
면 삼양(三陽)이 점차 자라 태괘(泰卦)가 된다. 천리가 주장하면 인욕이 물러나 공부가 이미 성인(聖人)의 영역에 나아갔으니 자연
히 2월의 대장괘(大壯卦)와 3월의 쾌괘(夬卦)를 지나 건괘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안씨의 아들이 도에 거의 가까웠으리라. 불선이 있으면 알지 못한 적이 없었고 알기만 하면 다시 행한 적이 없었
다.’라는 것이고, 《주역》의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기에 후회에 이르지 않으니 크게 길하다.’라는 것이다.”
[주03] 신재(愼齋) …… 지었고 :
한국문집총간 82집에 수록된《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권8에〈사간원 사간 이공 묘갈명(司諫院司諫李公墓碣銘)〉이 실려 있
다.
[주04] 붓을 꽂고 :
사관(史官)은 기록할 일에 대비하여 항상 관(冠) 옆에 붓을 꽂았다.
[주05] 삼판(三版) :
몹시 위태로운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전국책(戰國策)》〈조책(趙策)〉의 “지백이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공격하면서 진양을 포위하고 물로 공격하니, 성에서 잠기지 않은 부분은 삼판이었다.[智伯從韓魏以攻趙, 圍晉陽而水之, 城下不
沈者三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6] 저 …… 흐르네 :
중국의 모든 강물이 천번 만번 굽이쳐 흘러가도 결국은 동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는 뜻으로, 명나라에 대한 존모의 뜻이 변하지 않
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07] 산의 …… 감초 :
《시경》〈간혜(簡兮)〉의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진펄에는 감초가 있도다.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서방의 미인이로다.[山有榛, 隰
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라는 구절을 말하는데, 임금을 그리워하는 뜻이다.
[주08] 아름다움 …… 지키니 :
《주역》〈곤괘(坤卦) 육삼(六三)〉에 “아름다움을 머금어 곧을 수 있다.[含章可貞]”라고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