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원 (姜孝元)
[생졸년] 1603년(선조 36) ~ 1639년(인조 17)
조선 후기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간 시강원 서리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아버지는 겸사복(兼司僕) 강희룡(姜希龍)이다.
아들로 강후정(姜厚精), 강이정(姜二精)이 있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후금(後金)의 인질로 심양으로 끌려갈 때에 시강원(侍講院) 서리(書吏)로 따라갔다.
본래 조선인이었지만 후금으로 넘어간 통역관 정명수(鄭命壽)가 오랑캐 앞잡이로 무도하게 행동하였다. 이에 시강원 필선(弼善) 정뇌경(鄭雷卿)이 분노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강효원 등 몇 사람이 동참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일이 누설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혐의를 부정했고, 정뇌경은 모든 책임을 지고 홀로 죽으려 하였는데, 오직 강효원만 그 책임을 인정하여 정뇌경과 함께 죽었다. 1639년(선조 17) 4월 18일에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가 37세였다. 강효원은 죽임을 당하는 자리에서 정명수를 비호한 관직자들을 크게 꾸짖었다.
소현세자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정명수와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등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했다. 조선과 청의 관계 때문에 조선 조정도 상황에 개입하지 못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자신들의 옷으로 두 사람의 시신을 덮고 제사를 지냈다. 시신이 조선으로 돌아오자 조정은 시신을 가족에게 주어 동대문 밖 경기도 광주(廣州) 해동리(海東里)에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강효원의 처는 여종으로 당시 20여 세였다. 인조는 강효원의 어머니와 처에게 매달 쌀 6말을 종신토록 지급하게 하였다. 현종은 1668년(현종 9)에 강효원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아들 강후정(姜厚精)과 손자 강차석(姜次碩)을 천인에서 벗어나게 했다. 또 강효원 자손들을 대대로 도성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수문부장(守門部將)에 임명하도록 조처하였다.
강차석의 아우인 강승석(姜承碩)은 사노(私奴)였다. 송시열이 유생들에게 모금하게 해서 금 30냥을 주인에게 주고 면천(免賤)시켜서 몸종처럼 데리고 다니면서, 그를 충신의 후손으로 대우하였다. 사후 정3품 판결사(判決事)에 추증되었다가, 종2품 한성부좌윤에 추증되었다. <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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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봉집 제9권 / 묘표(墓表) / 민정중 저
강효원의 묘표 후기(姜孝元墓表後記}
효원(孝元)은 하급 관리로서 청나라에 들어가 충의(忠義)에 찬 분한 마음을 격발한 나머지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그 세운 바가 뛰어났으니, 고금(古今)에 목숨을 아끼고 의리를 저버리는 무리를 부끄럽게 만들 만하다.
우재(尤齋) 송 선생(宋先生)이 이를 기록하고 그 묘에 표(表)하도록 했는데, 그 집안이 가난하여 돌을 준비할 수가 없자, 우리 백씨(伯氏) 강도 유수(江都留守) 민공 시중(閔公蓍重)이 봉급을 덜어내 작은 비석 하나를 샀다.
선생께서 정중(鼎重)에게 그 글씨를 쓰도록 분부하셨기에 정중이 이미 앞면에 글씨를 크게 써 놓았다. 지문(識文)은 이미 선생께서 손수 초안을 써 놓았는데, 필법이 예스러우면서 웅건하였으니 문하의 여러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이어 비석 위에 아울러 전말을 기록하였다. 11년 뒤인 경신년(1680, 숙종6)에 그 아들 후정(厚精)이 원종훈(原從勳)에 참여하여, 은전을 내려 주는 예법에 따라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추증되었다. <끝>
ⓒ전주대학교 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서종태 이주형 김건우 유영봉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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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姜孝元墓表後記
孝元以小吏入虎穴。發忠憤嬰慘禍。其所立卓爾。足以愧古今貪生負義之徒。尤齋宋先生爲之識。俾表其墓。而其家貧不能具石。我伯氏江都留守閔公蓍重捐其俸。爲買一小碣。先生命鼎重書之。鼎重已大書其面矣。其識文旣有先生手草。筆法古健。非門下諸人所可及。仍以上石。幷記顚末云。後十一年庚申。以其子厚精從勳恩例贈掌隷院判決事。<끝>
ⓒ한국문집총간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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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一百九十 / 墓表 - 송시열
姜孝元墓表 - 송시열 찬
丁丑。昭顯世子質虜中。講院陪從。而孝元以院吏隨行。弼善鄭公雷卿震伯。憤俘虜命壽爲倀鬼行胸臆無不至。欲以計除之。察孝元忠信可仗。往復謀議之際。孝元必與焉。及其洩敗。知其事者。無不媕娿懼及。而獨孝元挺然不懾。不諱其初。崇禎己卯四月十八日。遂與震伯同死。死時大罵宰臣之反復覆右命壽者曰。爾何忍爲此也。朝家返其尸。葬之國東門外海東里。其妻婢也年時廿餘歲。守節不嫁。至誠事姑。戊申。上聞孝元事。爲之惻然。命有司出官隷二人。脫其子厚精及孫次碩賤籍。俾奉孝元祀。孝元次子曰二精。女一人。孝宗大王嘗召見震伯之子維岳。撫恤甚至。今殿下復如此。二聖之德。可謂無能名焉。賤臣宋時烈懼此事爲時諱而或泯焉。敢私識于震伯及孝元之墓石。孝元晉州人。其父兼司僕希龍云。時崇禎庚戌五月日。<끝>
ⓒ한국문집총간 |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