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1. 17. 04:43
■ 유명조선국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공묘갈명 병서
(有明朝鮮國 贈 資憲大夫 吏曹判書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李公墓碣銘 幷序)
정헌대부 예조판서겸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원임 규장각 직각 일찬관 서유훈은 찬하고(正憲大夫 禮曹判書兼 知經筵 春秋館 義禁府事 弘文館提學 五衛都摠府 都摠管 原任 奎章閣 直閣 日撰官 徐有薰 撰)
통훈대부 행 홍문관응교 지제교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조석원은 쓰다.
(通訓大夫 行 弘文館應敎 知製敎兼 經筵侍講官 春秋館 編修官 曺錫元)
제원군(오늘날 제천시) 송한면 송한리 땅에 서너자 높이에 북북동을 등지고 남남 서쪽을 바라보고 자리한 묘는 이조판서를 증직 받은 이름자를 경윤(憬胤)이라 하는 어른이 묻히신 곳이다. 공(公)을 장례 모신지 279년에 이르렀고, 옛날엔 뚜렷이 사적을 새긴 비석이 있었으나, 오랜세월 비바람에 비면이 거의 다 깎이고, 삭아서 그 세상에서의 빛나신 덕을 증거하고, 상고 할수가 없게 되었다.
공의 9대손 교영이 실로 이를 저어하고 여러 집안들과 상의하고 비석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하고 그 집안이 쇠퇴하게 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력들을 대강 적어서 못난 이 사람에게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하여 왔다.
결국 못난 이 사람은 공의 외손이 되는지라 그 어찌 감히 이를 사양 하리요.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자(字)는 군소(君紹)요. 어려서 부터 뛰어나서 남에게 눌려 지내지 아니 하였고, 씩씩한 의기와 절개가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뜻이 깊고, 멀고도 큰 인재(人材)라고 크게 기대 하였다.
원래 공을 낳아주신 생가의 할아버지는 이름자가 원(黿 : 재사당을 말함)자 이신데, 점필재 김종직 선생한테 나가서 글을 배웠고, 무오사화(戊午士禍)에 걸리어 끝내는 참혹한 화를 당하셨다. 뒤에 억울한 죄명을 씻어 주고 승정원 도승지(承政院 都承旨)에 증직한 것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
이로 부터 공은 인간 세상에 생각이 없어 세상에 나서 보려는 뜻을 끊고, 바위굴 속에서 온갖 궁한 고초를 겼으시며 늙어 돌아가시었다. 향년(享年) 53세시다.
이씨(李氏)는 월성(月城)에서 이어 나왔고, 신라(新羅)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이름자를 알평(謁平)이라 하시는 어른을 원조(元祖)로 하여 고려(高麗)에서는 이름자를 제현(齊賢)이라 하고, 호(號)를 익재(益齋)라 하며,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는 분이 있어 어진 덕(德)과 이루어 놓으신 거룩한 공적(功績)과 문장(文章)을 잘 지으셔서 크게 세상에 나타났으며, 5대를 내려와서 이름자를 윤(尹)이라 하시는 분이 있어 조선(朝鮮) 조정(朝廷)에 들어서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내셨고, 이름자를 공린(公麟)이라 하는 분을 낳으셨으니, 현령(縣令)을 지내셨고, 현령공이 여덟마리의 자라를 꿈꾸고서 8형제를 두셨는데, 이름자를 타(鼉)라 하시는 분은 성균 생원( 成均生員)을 하시고, 아들이 없으서 승지공(재사당)의 아들, 이름자 발(渤)이라는 분을 양자(養子)로 하였다.
공에게는 고조할아버님, 증조할아버님, 할아버님, 아버님이 되신다. 정부인(貞夫人)을 증직(贈職)받은 어머님 광주이씨(光州李氏)께서 공을 낳으셨다. 무인(戊寅) 1578년(선조 10)에 궂기셨고, 여러번 증직을 내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으니 손자(孫子)이신 시발(時發)께서 귀하게 되셨기 때문이다.
첫 부인은 정부인을 증직받은 원주이씨(原州李氏)로, 병절교위(秉節校尉)인 은(垠)이라는 분의 따님 이시고, 다음 부인은 정부인을 증직받은 거제신씨(巨濟申氏)로 억령(億齡)이라 하는분의 따님 이신데 모두 함께 왼쪽에 장례를 모시었다.
5형제를 기러셨으니 대수(大遂)는 군수(郡守)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 되셨으며, 대건(大建)은 진사(進士)가 되셨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 되였으며, 대적(大迪)은 생원(生員)이 되셨으며, 대일(大逸)은 진사(進士)가 되였으며, 대린(大遴)은 사용(司勇)이 되었다.
그 후손들은 불꽃이 활활 일어나듯 창성(昌盛) 하여 수백여명의 후손들이 경기도(京畿道)와 충청도(忠淸道)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다 쓸수가 없다.찬성공(贊成公 : 오촌공을 말함)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충익공(忠翼공) 벽오(碧梧) 시발(時發)과 부사(府使) 시득(時得) 두집의 자손이 더욱 더 번성 하기로 잠깐 사령장을 받고 조정(朝廷) 명부(名簿)에 오른 문무관으로 뚜렷하게 나타난 분만을 들어봐도 판서(判書)인 경휘(慶徽) 호(號) 춘전(春田)과, 좌의정(左議政) 경억(慶億), 호(號) 화곡(華谷)과 현감(縣監) 경선(慶善)은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절의(節義)를 지켜 죽음으로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증직 되였고, 참판(參判) 인환(寅煥)과 도정(都正) 인혁(寅爀)과, 교리(校理 인숙(寅 火+肅)과, 감사(監司) 인병(寅炳)과, 판서(判書) 인엽(寅燁)과, 주서(注書) 서곤(瑞坤)과, 부제학(副提學) 석표(錫杓)와 판서 집두(判書 集斗)와, 판서 규방(圭 示+方)과 주부(主簿) 교영(喬榮)은 모두 충익공파(忠翼公派)요.
절도사(節度使) 순곤(順坤)과, 가선대부(嘉善大夫) 석좌(錫佐)는 모두 부사공(府使公派)이요. 정언(正言) 회영(晦榮)은 사용공파(司勇公派)요. 현감(縣監) 명조(瞑朝)는 공(公)의 종손(宗孫)이다. 공이 나세에 있으면서도 절조를 지키고 행동을 깨끗이 딱고 몸을 수고로이 하여 후세에 비친 덕은 후세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아직 다 파해치고 헤아리지 못하였다.
어쩌면 그리도 자손이 많고 번성하랴!
오랜 세대를 지내온 이 때, 옛 사람의 언행과 인격을 논하는 사람들은 이것 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묘의 소재지 충북 제천시 송한면 송한리 계좌(癸坐)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