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5. 12. 03:30
■ 운강사기(雲岡祠記)
울주군의 서쪽 사십 리 운암산 아래에 운강사가 있으니 바로 우리 선조이신 열헌, 동암, 익재, 삼 선생을 배향하여 모신 곳이다. 대저 그 사우의 건립이 신유년 봄부터 시작되었고 나도 한번 그곳에 가서 계획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이듬해 여름 사월에서야 겨우 완성하여 족인 한영 규태 종경이 경향의 제족들과 더불어 낙성봉안하고 서신을 나에게 보내기를, 운강사에 기문이 없을 수 없으니 영감의 한 말씀을 얻어 운강사의 고사로 삼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 이 말을 듣고 감상이 많아 깊이 생각해보니 지금으로부터 삼 선생의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오백 여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러 곳의 서원이 다, 익 재 선생만 봉안 되었을 뿐, 열 헌, 동 암 두 선생은 배향된 곳이 없으니 대개 익 재 선생께서 선대문집을 간행하지 못함을 한탄하셨는데 하물며 나의 뜻으로 마음을 미루어 보더라도 실로 이치로나 인정에 편안하지 않은 일이다.
이 운강 사에서 비로서 조자손 즉, 열헌 동암 익재 세 어른이 다함께 배향되는 쾌거가 있으니 나는 익재 할아버지의 영혼이 이제부터 편안하심을 알 것 같다.
이에 그 기문소청에 답하기를 옛날에 주자가 이원현 학궁에 배향될 때에 먼저 고향도, 부임했던 곳도, 살던 곳도 아닌 문제점을 서술하고 끝으로 숭모하는 뜻을 붙이니 사우를 짓고 제사를 받드는 것은 추모하는 의리에서 기인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울 주에 삼 선생의 사우가 있는 것이 또한 고향도, 부임지도, 사시던 곳 이라는 근거도 없고 오직 숭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사실상 이원현 학궁의 일과 더불어 고금이 똑 같은 방법이다. 다시 논할 필요도 없이 내가 숭모하는 실체를 서술하여 제생들을 권면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옳겠도다.
봄가을로 제례를 받드는 여가에 물러와 강당에 모여앉아 열 헌의 덕업과 동 암의 문장과 익 재의 도덕학술을 서로 권면하고 경계하기를 옛날 어른들은 이와 같이 모두 훌륭하신데 지금 사람은 어찌 이와 같이 모두 부족한가.
대저 덕업과 문장과 도학의 세 가지는 진실로 세상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오직 스스로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어찌 각자 헤아려 반성하고 힘쓰지 않으리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제생들의 오르내리고 읍양하는 절차가 모두 헛된 도구임을 면치 못할 것이네.
제군들은 이 불초의 말이 제생들에게 한 말로 여겨 옳고 그름을 알아듣게 해야 할 것이다.
임술 1922년(倭政 13) 여름 4월 하순에 후손인 전 참판 종필은 삼가 기문을 짓다.
[각주]
◇지은이 : 37世 이종필(李鍾弼)
생졸년 : 1844(헌종 10)~1928년(倭政 19)
초명(初名)은 종의(鍾宜). 자(字)는 은뢰(殷賚). 호(號)는 기당(紀堂). 화곡공(華谷公) 경억(慶億)의 8대손으로 안산군수(安
山郡守)와 돈영부 도정(敦寧府 都正)을 지낸 규창(圭昌)의 아들로 진천에서 태어났다.
1890년(高宗 27年) 문과급제(庚寅 別시 丙科)하고 그해 삼사 응교(三司 應敎)로 등용되고, 1893년(고종 30)에 승통 정 우별
승지(陞通政 右別承旨) 돈영도정 공조참의(敦寧都正 工曹參議).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외직으로 용강 군수(龍岡郡守)를
지내고 1922년 임술(壬戌)에 승가선궁내부특진관(陞嘉善宮內部特進官) 겸 전선사제조(典膳司提調)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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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雲岡祠記(운강사기)
蔚州之西四十里 雲巖山下 有雲岡祠 迺吾先祖悅軒東菴益齋三先生尸祝之所也 盖其建 設 自辛酉春始而予嘗一造
울주지서사십리 운암산하 유운강사 내오선조열헌동암익재삼선생시축지소야 개기건 설 자신유춘시이여상일조
預聞其施措矣 翌年夏四月功才 告訖族君瀚榮圭泰鍾絅甫與 一省人士京鄕諸族 旣行舍菜 走書告予曰 此不可以無
예문기시조의 익년하사월공재 고흘족군한영규태종경보여 일성인사경향제족 기행사채 주서고여왈 차불가이무
記 願得大人一言 以爲祠中故事予 聞而歎賞窃以爲 今距三先生之世 至爲五百餘年之久而 在在建院者 皆益齋之獨
기 원득대인일언 이위사중고사여 문이탄상절이위 금거삼선생지세 지위오백여년지구이 재재건원자 개익재지독
享也悅 東二先生無與焉 盖以益齋所稱先集未刊 矧余小子之意推之 實非神理人情之所愜也始於 是祠 有祖子孫合
향야열 동이선생무여언 개이익재소칭선집미간 신여소자지의추지 실비신리인정지소협야시어 시사 유조자손합
享 之擧 吾知其益齋之靈 自此安矣乎 遂乃復之曰 昔朱子之配嫠源縣學 也 先敍以非其鄕非其官非其寓之嫌而終乃
향 지거 오지기익재지령 자차안의호 수내부지왈 석주자지배리원현학 야 선서이비기향비기관비기우지혐이종내
援之 以寓慕之意 是於祀禮 可曰義起也今夫蔚 州有三先生祠者 亦無有鄕官寓之據 而獨出於寓慕之誠矣則 實與嫠
원지 이우모지의 시어사례 가왈의기야금부울 주유삼선생사자 역무유향관우지거 이독출어우모지성의칙 실여리
學 今古一轍也不復 可論而 予將敍寓慕之實 爲諸生勸可乎 春秋行禮之暇退以聯衿於講舍 爭誦悅軒之德業 東菴之
학 금고일철야불부 가론이 여장서우모지실 위제생권가호 춘추행례지가퇴이연금어강사 쟁송열헌지덕업 동암지
文章益齋之道術 以互相勉戒 曰古之人 何如是卓卓而 今之人何如是淺淺也夫德 業文章道術三者固無防限於世之 汚
문장익재지도술 이호상면계 왈고지인 하여시탁탁이 금지인하여시천천야부덕 업문장도술삼자고무방한어세지 오
隆 而惟在人之造詣如何 盍各諒諸 當汲汲於反省修 飭飭矣 若其不然 諸生之升降揖讓却未免虛文具爾 諸君其以不
륭 이유재인지조예여하 합각량제 당급급어반성수 칙칙의 약기불연 제생지승항읍양각미면허문구이 제군기이불
肖之說 爲道於諸生而以 聽可否也
초지설 위도어제생이이 청가부야
壬戌 夏 四月下浣 後孫 前參判 鍾弼 謹記
임술 하 사월하완 후손 전참판 종필 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