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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실천현장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두번째, 1997~1999 총무팀과 재가복지팀 사회복지사로서의 경험)
태화법인의 여러 가지 소용돌이 속에서 태화본부(현재의 법인 빌딩사무소)를 중심으로 태화기독교복지관, 태화샘솟는집, 태화장안복지관, 태화은평복지관이 한 기관 통합 운영할 당시에는 인사 호환과 사업 연계, 직원교육 등이 함께 진행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것은 1997년 6월전까지의 태화법인의 상황이었다. 1997년 7월이후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너무나 태화법인의 내부적 문제와 이유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음) 기존의 태화의 통합 체계는 각 기관별 독립운영이라는 형태로 구분되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태화재단산하 지방기관들의 목소리와 법인 전입금 배분이 더 포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된 시기였다. 사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장안(은평, 샘솟는집, 1997년이후로는 태화장안, 태화은평이라는 기관명을 사용하지 않고 장안, 은평으로 불리게 됨)복지관으로 발령받았던 기존의 직원들에게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서의 통합 인사이동에 대한 기회가 있었고 이 기회에 좀 더 큰 기관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장안에서의 실천은 마무리하고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발령 받게 되었다(이후로는 인사호환이 이루어지지 않았음, 형식적으로는 태화 법인으로 묶여 있었으나 개별기관로 운영됨).
1997년 7월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발령 받아 온 부서는 총무팀이었다. 사실 총무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고 장안동의 청소년 복지 영역에서 너무 재미있게 실천을 하던터라 사실 청소년부서로 발령 나기를 원했기도 했었다. 그러나 발령받아 온 부서는 총무팀이었고 비품관리, 전산관리, 실습 행정 등을 주 업무로 배정받았다.
그리고 1997년 7월이후 몇달동안은 선임사회복지사가 있었고 그 밑에서 열심히 시키는 데로 배우면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총무팀장으로 발령날 것을 기대했던 선임은 은평에서 온 선임에서 팀장자리를 내줘야 했고 이후 여러 가지 고민하다가 태화를 사직하게 되었다. 사실 그러면서 태화에서의 첫 번째 위기가 찾아 오게 되었다. 총무팀장으로 온 사람은 남자였고, 은평에서 함께 온 여직원과 총무팀의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고, 그런 과정에서 사실 그 관계속에서 나는 소외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기도하고 자문도 받아 보고 하였지만 그 팀장과 그 직원은 더욱 강하게 그들의 생각과 색깔을 강요했고 여러 가지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어 의도적으로 내 위치를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하였다. 기관 내부적으로도 소문이 나서 그 당시 직원이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여직원과 팀장은 출퇴근을 같이 하였고 대학원도 비슷한 방향이어서 같이 가곤했다. 그래서 인지 그들의 결속은 더욱 강해졌고 그 속에 끼어들기는 더욱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사실 태화 입사해서 처음으로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녔던 때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그들에 대한 원망도 있긴 하지만 스스로 부족하고 어려서 잘 대처하지 못한 나의 모습도 반성이 된다.
항상 그 팀장이 이야기했던 것은 “우리는 한배를 탄 가족이다. 함께 해야 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시간을 많이 나누어야 한다”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팀원이 누구든 퇴근을 하지 못하면 함께 남아서 같이 해야 하고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먼저 퇴근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물론 퇴근을 하라고는 했지만 여지 없이 다음날 다른 것으로 어렵게 만들곤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정말 서로에게 불행한 추억(?)이었던 1년간의 총무팀의 생활이었다. 훗날 이러한 악연(?)이 길게 지속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리고 사실 그 팀장과 계속 같이 근무했다면 태화를 떠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곤한다. 다행이었던 것은 내가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났다는 점이었고, 그 팀장도 태화에서의 여러 문제로 인해 사직하게 되면서 나에게 태화에서의 20년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때 나름데로 컴퓨터관련 수리와 정비를 체계적으로 하면서 많은 부분들을 배웠으며 shipsoft의 라석구 선생님과 전산프로그램밍 언어를 배우면서 다양한 시도를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습매뉴얼을 내부적으로 제작하여 직원들이 보다 실습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이것은 훗날 태화실습지도지침서라는 책으로 출간되는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태화의 비품을 엑셀로 잘 정리하여 태화 건물에 비치되어 있는 방대한 비품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데 기어하기도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1년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긴 시간처럼 느껴지며 잘가지 않고 있을 당시 우연하게도 재가복지팀에 충원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고 이러한 관계를 알고 있던 그 당시 팀장(이용창)님께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을 주셨고 동의가 이루어져 바로 재가복지팀으로 발령이 나게 되었다. 거의 1년만의 팀 이전이었다. 그곳에서는 스마일학교라는 학업중단 청소년들을 위한 검정고시 대비반(비인가 대안학교)을 담당하였고, 일부 재가복지 사례관리를 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함께 했던 선배, 동료 사회복지사들이 조기원, 오유진, 고뢰자, 정정호 등이 기억해 남는다.
사실 재가복지팀으로 발령나면서 그동안의 어려움과 고민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태화내부적으로도 어려운 시기가 있었으나 개인적인 총무팀에서의 어려움과 갈등 그리고 팀장과의 어려움은 기관의 어려움을 생각하기에 여유를 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재가복지팀에서의 학업중단 아이들과의 만남은 사회복지사로서 도약하는 기회를 마련해 준 기회가 되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 부모가 있으나 방임속에서 자라난 아이들, 경제적 어려움, 가정 폭력 등의 여러 가지 어려움속에서 학교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을 스마일 학교라는 이름하게 품게 되었다. 때론 이러한 자유로운 학교규정 속에서도 적응하지 못하여 방황하거나 나태해지는 아이들을 아침, 저녁으로 찾아 다녔고, 형처럼, 오빠처럼, 아빠처럼 그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내 전임자(여자 선생님)와의 전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민철이도 생각나고, 아빠없는 속에서 아빠의 자리를 찾고자 힘들어 했던 희정이도 생각나고, 뺀질거리며 규칙을 어기고 문제를 지속적으로 일으켰던 찬수도 생각나고, 소년소녀가장으로 본드, 가스를 하다가 화상을 입고 어려움에 처했었던 경철이도 생각난다.
그런 아이들중 유독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한 아이가 있다. 지금은 벌써 30대의 가장이 되어있지만...
민철이는 외할머니 밑에서 이복동생인 쌍둥이들과 함께 사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지방에서 일하시면 1년에 3-4번정도 집에 오는 그런 관계였다. 민철이와 쌍둥이 동생 모두 학교를 중퇴하고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내던중 민철이만 스마일학교와 인연이 되었다. 그런 민철이를 담당했던 여자선생님(전 담당자)은 이런 아이들에게 누나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찾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선생님이라는 호칭보다는 누나라고 부르기 까지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서부터 나타났다. 여자선생님 후임으로 내가 그 자리에 가게 되었고 그 선생님은 다른 부서로 발령받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중 민철이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아마도 그 선생님은 좋은 누가, 좋은 엄마, 좋은 이성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던 아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술과 방탕한 생활을 했고 문제가 심각해지자 우울증세로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내가 스마일학교를 맡게 되면서 새벽마다 민철이 할머니에게 전화를 받았던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민철이는 검정고시도 합격하고 연기자의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우연히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사람을 만나 정착하게 되었다. 최근 2년전까지만해도 30대의 가장으로 장안복지관에 찾아 왔던 민철이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스마일학교에서 기억나는 일중에 하나가 아이들의 기초 학력을 높이기 위해 개별과외 선생님을 자원봉사자로 연결하기도 하고 매주 영어 단어 시험을 통해 영어에 대한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해 날마다 잔소리와 시험감독을 했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아이들을 동기화시키기 위해 매달 우수한 아이에게 문화상품권을 시상품으로 주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리고 학교를 중단한 아이들이기에 좀 더 자유롭게 문화 활동과 여행을 다녔던 기억도 있다. 특히 1998년 5월인가 아이들과 그 당시 기관차인 타우너를 타고 7명이 동해를 다녀왔던 기억도 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여행이었다. 그 작은 차에 덩치 큰 아이들을 태우고 긴 시간을 홀로 운전하면서 힘들게 다녀왔던 여행... 그 가운데는 부모와 한번도 바다에 직접 와본 경험이 없었던 아이도 있었다. 그래서 바다를 보고 무척 신기해 한 아이도 있었다.
무엇보다 1997년 재가복지팀에서 또 잊을 수 없는 사업 중의 하나가 그 당시 IMF로 인한 실직 노숙자들을 위한 희망의집 운영이었다. 서울시에서 강제로 복지관에서 운영할 것을 강요하였고 그것을 담당하는 부서를 정할 때 어떤 팀에서도 하려하지 않았고 그 당시 재가복지팀 팀장님이였던 이용창 팀장님이 “우리 부서에서 하자, 그리고 김용길선생님이 그 업무를 담당하면 좋을 것 같은데~”라고 하였고 “네 제가 해 볼께요”하면서 그 사업은 우리팀으로 배정되었다.
사실 숙직도 해야 하는 상황도 있고 거친 노숙자들을 상대한 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였다. 때로는 야간에 거리 상담을 나가기도 하였고, 공공근로 이후에 늦게 들어오는 회원들을 상담하기 위해 10시가 넘어 퇴근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힘든 만큼 배우는 것도 많았고 작은 시설을 운영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실직 노숙자중에는 IMF로 인해 실직하여 노숙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여러 가지 문제로 노숙자로 전락하거나 숨어 지내는 경우도 있었고, IMF와 상관없이 그 이전부터 노숙생활을 하면서 노숙자로 지내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문제와 어려움들이 희망의 집 내에서 상존하였고 항상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희망의집 회원들에게 조금 더 좋은 음식과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인근 S병원 직원 식당에서 배식하였으나 거의 먹지도 않고 새것으로 나온 음식을 공수하기 위한 노력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 당시 태화희망의집은 회원들 사이에서 호텔로 불리었다.
그래서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태화입사 후 처음으로 임상논문집에 “희망의집 운영 사례”를 발표하게 되었고, 이러한 실천에 대한 노력과 헌신을 인정받아 그 당시 서울시장인 고건 시장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재가복지팀에서 또 했던 업무중에 하나가 지역협력 사업이었다. 이 당시에는 지역기관들과 유기적인 협력을 통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선례로 찾기 어려웠고 새로운 도전이어서 어렵지만 참 재미있었던 업무였다.
정신장애인 가족지원사업, 약물청소년예방지역협의체, 수서지역장애인자활협의체의 3가지가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사실 이 당시에는 초보사회복지사였기 때문에 선배들의 하는 모습을 따라 그냥 열심히 했던 기억만 난다. 쉽지 않았지만...
그리고 스마일학교 아이들과 함께 경주여행을 기획하다가 그 여행은 결국 이루지 못하고 1999년 기획홍보팀으로 발령 나면서 재가복지팀과는 이별하게 되었다.
1997년 이후 태화에도 내부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김경희관장님은 여러 가지 이유로 관장직을 사직하시고 새로운 관장으로 김현숙 관장님께서 부임하셨다. 그러나 이때 시기적 요인으로 인해 태화의 재정 위기도 찾아 오게 되었다. 초기에 잘 모집되어 운영되던 문화사회교육 프로그램의 한계와 거대한 규모의 기관을 운영하기에는 IMF와 법인의 산하기관 법인 전입금 지원 기준이 달라짐으로 인해 태화로 들어오던 전입금의 축소로 인해 더욱 운영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100여명의 직원들과 지하2층 지상 6층의 실내체육관과 수영장등을 잘 관리 운영하는 비용이 너무나도 큰 무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직원들의 급여와 복리후생은 입사전 당시보다 현저하게 낮아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입사 당시만해도 직원들 보너스가 730%였고 다양한 수당과 복리후생 차원의 각종 지원제도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재정의 어려움은 그러한 여러제도를 하나둘씩 사라지게 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많은 직원들이 태화를 떠나게 되었다. 직원들에 대한 처우도 문제였고, 사업은 줄어들지 않은 상황속에서 직원들은 줄어들고 업무량과 태화의 예전 명성을 찾고자 전문성을 추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이유가 가장 큰 이유인 듯 싶었다.
그 당시 태화의 관리자들은 사회복지적 사업에 대한 관심보다는 수익을 더 낼 수 있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과 대안을 요구했고 직원들은 점차 지쳐갈 수 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 말단 직원이었던 나로서는 내게 맡겨진 사업에만 충실하면 되었기에 사실 큰 어려움이나 고민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99년초부터 후원사업의 확대와 홍보사업의 확대를 위한 새로운 조직개편에 대한 움직임이 생기게 되었고 새롭게 후원홍보팀이 신설되었고 사회교육사업을 통합하여 총 7명의 직원이 전진배치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후원홍보팀의 심정식팀장님께서 함께 할 것을 요청하셨고 1999년 후원홍보팀으로 이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