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도(道)는
걸음마 수준의 의미에서부터
우리가 보지못한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 폭을 감히 장담하는 이
흔치 않을 것이고
그 끝에 도달한 이
많지 않을 것이다.
도(道)...
사람의 길...
사람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
사람이 살아가면서 배우고 깨달아 가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의미에서 부터
큰스님들이 말씀하시는
한 생각이 시작하기 전
시공이 끊어진 자리를 보는 것...
망상을 일으키기 전
마음의 고요한 순간에 머무르는 것...
마음이 일어나기 전
바로 그 빈자리...
마음이 없으면
생(生)도 없고
사(死)도 없으니
도(道)의 자리는
그래서 생사가 끊어진 자리...
도(道)를 표현하자고 들면
이런저런 수식어가 무궁무진하다.
이 세상 어느 무엇에라도
"이것이 바로 도(道)"
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도(道)는
사람의 본성이며
그만큼
인간의 삶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2년여만에
탄허록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문득 여러 큰스님들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동안 많은 책을 통해
큰스님들의 죽비와 같은 말씀을 접할 때마다
가슴깊이 붙들고 있으려 했지만
어느샌가 온데간데 없고
온갖 고민 걱정 망상 등 다른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니
큰스님들의 말씀을 마음속에 묶어놓기 힘들다.
앞서간
큰스님들의 발자국을 따라갈 수 있는 기회를
매번 놓치고 만 셈이다.
나는 비록 근기가 부족해 놓친 것을
누군가는 붙잡고 늘어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
나 역시 지금이라도
마음에서 놓치지 않도록
글로 매일 보기위해
큰스님의 발자국과 같은
탄허록의 고귀한 말씀 몇 귀절을
옮겨놓을까 한다.
탄허스님도 이해해 주시리라...
~~~~~~~~~~~~~~~~~~~~~~~~~~~~~~~~~~~~~~~~`
도(道)는 진리를 나타내는 대명사다.
한마디로 길을 가르킨다.
이때 도의 근본이란 '바른 것'이다.
따라서 길을 걷되 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름길이든 오솔길이든 외진 길이든 길은 길이다.
그래서 본인은 길이라 여기고 가는데,
그 길이 정도에서 벗어난 곳일 수도 있다.
정도를 걷지않고 길 밖으로 빠져나가면
결국에는 진흙구덩이와 가시밭과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탈선이란 어떤 의미에서든 괴로운 결과를 가져옴을 잊어서는 안된다.
옛 말씀에
도를 잃으면 덕이라도 갖춰야 하고
덕을 잃으면 인이라도 베풀줄 알아야 하며
인을 잃으면 의라도 지킬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잃으면 예라도 차릴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예마저 잊으니 끝내는 법률학이 나오게 되었다.
자의에 의한 길을 걷는 나그네가 아니라
요즘 사람은 타의에 의한 방랑자가 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
나 라는 상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고 잠잠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나 라는 놈이 없는 줄을 바로 알게된다.
~~~~~~~~~~~~~~~~~~~~~~~~~~~~~~~~~~~~~
불교에서는 마음에 생사가 없음을 깨달음으로써 생사문제를 해결한다.
마음이란 그것이 나온 곳이 없기 때문에 죽음 또한 없다고 보는 것이다.
본디 마음이 나온 곳이 없음을 확연히 간파한 것을 도통했다고 한다.
우리 자신의 어디든 찾아보라. 마음이 나온 곳이 있는지 말이다.
나온 곳이 없으므로 죽는 곳도 없다.
따라서 도가 철저히 깊은 사람은
이 조그만 몸뚱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어리석은 중생들이나 죽음을 두려워하며 천년만년 살고 싶어하지,
도인이나 성인은 굳이 오래 살려하지 않는다.
오래살고 싶다는 것은 중생들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도에 통한 사람은 몸뚱이를 그림자로 본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을 간밤에 꾼 꿈과 같다고 생각한다.
간밤에 꿈을 꾸고 다닌 사람이 꿈을 깨고 나면
꿈속에서는 무언가 분명히 있긴 있었으나 헛것임을 알 듯이
삶 또한 그렇게 본다.
삶을 이와 같이 여기는 탓에
육신을 굳이 오래 가지고 있으려 하지 않는다.
이 육신을 벗으려고 들면 향 한개 피워놓고
그것이 다 타기 전에 마음대로 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중생에게는
나서 멸함이 있고
몸뚱이에게는
나고 죽음이 있으며
1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세상에는
일었다가 없어짐이 있으나
오직 도인에게만 생사가 붙지 않는다.
혹자는 도인도 죽는데 어찌 생사가 없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겉을 보고 하는 소리다.
옷 벗는 모습을 보고 죽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은 이'옷'을 자기'몸'으로 착각한다.
그러다 보니 죽음의 경계에 걸린다.
그러면 도인이나 성인은 무엇을 자기 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몸 밖의 몸, 육신 밖의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좀 어렵게 말하면
시공이 끊어진 자리, 이것을 자기 몸으로 안다.
시공이 끊어진 자리란
죽으나 사나 똑같은 자리,
몸을 벗으나 안 벗으나 똑같은 자리,
우주가 생기기 전 시공이 끊어진 자리,
생사가 붙지 않는 자리를 뜻한다.
부처는 바로 이'자리'를 가르켜 주기 위해 오셨다.
이 세상이 한바탕 꿈이란 것을 가르켜 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꿈속에서 덥고 춥고 괴로운 경험을 했을 것이다.
꿈을 만든 이 육신이 한 평도 안되는 공간에 누워
10분도 안되는 시간의 꿈속에서 몇 백년을 산다.
그러다보면 우주의 주체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곧 '내'가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우주 속에서 내가 나온 것이 아니다.
세간의 어리석은 이들은 꿈만 꿈인줄 알지 현실도 꿈인줄을 모른다.
그러다보니 간밤의 꿈만 꿈으로 보고,현실을 현실로 보니
몇 백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어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성인은 이런 현실을 간밤의 꿈으로 보아 버리기 때문에
현실이 꿈이자 환상인줄 알아서 집착하는 바가 없다.
결국 천당도 지옥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
경허선사는 다 아는 바와 같이 근대 한국 불교의 선맥을 중흥시킨 조사다.
계룡산 동학사 강원에서 학인에게 경을 가르치고 있던 어느 해,
경허선사는 은사 스님을 찾아뵈러 길을 나섰다.
해가 저물었는데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한창 유행병이 돌고 있던 터라
어느집에 찾아들어 쉬고자 하여도 주인장은 유행병 때문에 재워줄 수가
없다며 거절했다. 경허선사는 열집넘게 돌아다녔지만 끝내 잘 곳을 얻지못하고
바깥에서 밤을 새울 수 밖에 없었다.
유행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집집마다 초상을 치르며 울고 몸부림치는 것을
목격한 경허선사는 무상함이 뼈에 사무쳤다. 강원에 돌아온 경허선사는 조실에
혼자앉아 전등록을 모두 뒤져보았지만 막히는 구절이 없었다.막히는 구절을 찾아
그것을 참구하며 참선하고자 한것이다.그러다가 다음 공안에 이르러서 꽉 막혔다.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온다.'
이때 옆방에서 어떤 처사가 젊은 스님에게 거침없이 법담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주들의 정성들인 공양을 받아먹고서 공부 잘 못하면 죽어서 그 집의 소가 된다는데,
그렇게 되면 어쩔테요?"
젊은 스님이 대꾸를 못하고 머뭇거리자, 처사가 말을 이었다.
"소가 되어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면 되지 않겠느냐고 왜 답을 못하시오?"
경허스님이 옆방에서 이 말을 듣고,
종전에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다가온다'는
공안에서 꽉 막혔던 것이 확연히 풀렸다.
이와 동시에 심지가 밝게 드러났다.
이때 경허스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나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노라.
~~~~~~~~~~~~~~~~~~~~~~~~~~~~~~~~~~~~~~~~
불교인은 아니지만 장자는 다음과 같이 생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죽고 사는 문제가 크다지만 생사가 변하지 아니하며,
비록 천지가 무너져 없어진다 해도 정신을 잃지 않는다"
중생은 끝까지 몸과 마음이 둘로 보이기 때문에
마음에는 생주이멸의 사상,
몸에는 생로병사의 사상,
1년엔 춘하추동의 사시,
세계엔 성주괴공 사상 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은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줄 철저하게 각파했기 때문에
마음의 생주이멸은 묘용으로 변하고,
몸의 생로병사는 거구착신(생사에 자유자재한 것)이 되며,
1년의 춘하추동은 일원기로,
세계의 성주괴공은 무애삼매로 변한다.
이처럼 생사문제를 자유자재하게 하였던 33조의 선사들은 물론이고
그 후에 송나라 등은봉 선사는 죽을 때
엉금엉금 걸어가다가 거꾸로 서서 곤두박질한 채로 몸을 벗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과연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또 관계지한 선사는 제자들에게 화장할 나무를 준비해서 쌓아 두도록 한 다음
가사, 장삼을 입고 주장자를 짚고 장작더미에 올라선 후 동서남북에 불을 지르라고 명하고
장작더미에 불이 붙기 전에 몸을 벗어 버렸다.
또 우리나라 고려 때 보조국사는 상당법문을 열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오늘 세상을 떠날 터이니 마지막으로 무엇이든지 물어보라."
그런 다음 백가지 질문에 백가지 답변을 하고는
법상에서 내려와 마루 끝에 앉은채 입적하셨다.
이것이 생사해탈의 면목이다.
우리가 고요한 곳에서 도 닦는 것은 시끄러운데 쓰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돈벌이하는 것은 가난한데 쓰자는 것이요,
깨달음은 얻어서 수많은 중생 구제를 하기 위함이다.
고통스러움을 어떻게 벗느냐 하는데 있어 성인의 구원을 받는 방법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스스로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
시끄럽고 고통스러운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사의 큰 문제를 자유자재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라 하겠다.
~~~~~~~~~~~~~~~~~~~~~~~~~~~~~~~~~~~~~~~~~~~
중국 당나라 때 육조 혜능스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차라리 생사 속에 머물러 중생을 교화하면서 도를 닦을지언정
소승의 적멸에 파묻혀 자리(自利)만을 구하는 해탈은 하지 않겠다.
그러니 항상 자신의 허물만 보고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훗날 조선시대 선조 때 서산대사는 육조 혜능스님이 남긴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전자는 선가의 눈이요, 후자는 선가의 발이다."
과연 그러하다.
눈만 있고 발이 없어서도 안되고 발만 있고 눈이 없어서도 안된다.
만일 눈만 있고 발이 없다면 목적지에 갈 수 없으며
발만 있고 눈이 없다면 갈팡질팡하여 함정에 빠지거나 개천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눈과 발이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두고 유교에서는 지행합일이라고 한다.
지행합일은 잘 못 알아서는 실행할 수가 없다.
참되게 안다면 실행은 그 앎 가운데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색이 좋은 줄 알면서도 취하는 행동이 없다면 잘못된 앎이요,
똥이 구린 줄은 알면서 피하려는 행동이 없다면 역시 진실로 아는 앎이 아니다.
경국지색의 서시와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참되게 안 까닭에 취하고자 하는 행동이 나온 것이며,
포사(냄새가 흉한 곳)나 측공(변소)과 같은 악취 나는 곳을 보고
누구나 멀리하는 것은 포사와 측공의 더러움을 참되게 알기 때문에
멀리 하려는 행동이 나온 것이다.
"이 세상은 꿈과 같이 무상하다."
이 문장에 대해 단지 이해하는 수준에만 그친다면 무상관이 드러난 것이 아니다.
꿈을 꾸다가 깨어난 이후에 비로소 꿈인줄 아는 것처럼
무상관이 완전히 드러나야만 망상이 끊어진 행동이 나올 수 있다.
따라서 불법의 진리를 세간(世間)에서 세간 망상을 끊어 내지 않고,
또 세간을 외면한채 보리를 찾는다면 마치 토끼한테서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
마치 현대의 삼단 논법과 같다.
콩을 콩이라고 긍정한 다음에 콩 씨를 심어서 나오면
그 심은 콩은 완전히 없어지고 똑같은 새 콩이 나온다.
그러나 새로운 콩은 심은 콩과 같은 콩이로되
긍정 속에서 완전히 한번 부정을 거친 부정 속의 긍정인 콩이기에
심은 콩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콩이다.
따라서 무상관이 드러난다고 하는 것은
부정을 거쳐 바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이 끊어진 행동이란
부정 속의 긍정인 콩과 같이 부정을 거친 긍정적 행동을 말한다.
도가에 여동빈이라는 유명한 선생이 있었다.
그가 득도 전인 예순네살 때 일이다.
길을 가다가 점심때가 되어 어느 주막에 들러 점심을 주문하고
잠시 정자나무 밑에 누워 쉬다가 홀연히 잠이 들었다.
꿈에서 7,80년을 살았는데 슬하에 여러 자식을 두고 조정에서는
청요의 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헌천동지하는 부귀공명을 누렸는데
깨어보니 점심으로 부탁한 황량(조밥)이 아직 익지 않았다는 것이다.
10분도 안된 시간동안에 한평도 안되는 공간에서 7,80년동안
각부 장관을 두루 역임하면서 살았던 그 세계는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그는 이 한 생각을 통찰하여 그 자리에서 무상을 깨닫게 된다.
꿈속에서 1백년을 산다해도 꿈속의 일은 역시 꿈인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세간사를 모두 정리하고 주장자를 짚고
도를 구하러 나섰다가 신선 종이옹을 만나 수백년을 사는 선도를 성취한다.
그후 3백년 뒤에 황룡선사의 도량에 몰래 들어가 설법을 도청한다.
황룡선사가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주장자를 굴리며 말했다.
"이 중에 법을 훔치는 사람이 있구나."
그러자 순양(여동빈의 호)이 일어나 예를 올리면서 사죄하고 신분을 밝혔다.
황룡선사가 물었다.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한 곳이 어떠한고?"
순양이 대답을 못하고 다시 예를 올리며 황룡에게 물었다.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한 곳이 어떠합니까?"
황룡이 "황룡 출현"이라고 답하니,
순양이 홀연히 대오하였다.
꿈으로 인해 선도를 얻은 것이 완전한 부정이라면,
3백년 뒤에 황룡선사를 만나 불법을 철저히 깨달은 것은
부정을 거친 긍정인 것이다.
~~~~~~~~~~~~~~~~~~~~~~~~~~~~~~~~~~~~~~~~
중국에 훤제 라는 왕이 있었다.
하루는 꿈풀이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훤제는 그가 얼마나 해몽을 잘하는지 시험해 보려고 한가지 꿈을 지어냈다.
만약 해몽가가 꿈풀이를 억지로 할 것 같으면
혹세무민 죄를 덮어 씌워서 목을 칠 작정이었다.
"네가 꿈풀이를 잘한다고 하니 묻겠다. 간밤에 내꿈에 궁전 처마의
기왓장 하나가 난조(봉황새 종류)가 되어 날아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것은 무슨 꿈인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해몽가가 대답했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지금 궁중에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해몽가가 훤제의 꿈을 해몽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폐하, 아뢰옵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 궁중에서 두사람이 싸우다 한사람이 죽었습니다."
훤제는 기가 막혔다. 꾸며낸 꿈으로 해몽가를 시험해 보려 한 것인데
어떻게 꾸며낸 거짓꿈까지 이렇게 잘 맞히는가.
훤제는 그만 놀라서 해몽가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계략을 털어놓았다.
"네가 해몽을 잘한다고 해서 한번 시험해 보기위해 꿈을 거짓으로 지어낸 것인데
어떻게 귀신같이 그 꿈이 잘 맞을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해몽가가 말했다.
"폐하,꿈이란 정신이 노는 것입니다. 꿈속의 꿈만이 꿈이 아닙니다.
폐하가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 또한 이미 꿈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꿈이 생겨나고
꿈이 있으면 이 우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우주의 주체는 무엇인가?
우주의 주체는 곧 우리의 한 생각이다.
만약 우리의 마음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몸뚱이는 송장에 불과하고
이 우주 또한 공각(곡식이나 열매따위의 빈 껍질)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의 본체를 알게 되면
우리의 한 생각에서 생겨난 모든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서
더이상 시비분별을 하지 않게 된다.
~~~~~~~~~~~~~~~~~~~~~~~~~~~~~~~~~~~~~
토정 이지함 선생은
'부자는 욕심 안 내는 것이 제일 부자요,
귀인은 벼슬 안하는 것이 제일 귀한 것이요,
강한 것은 다투지 않는 것이 제일 강한 것이요,
신령한 것은 아는게 없는 것이 제일 신령한 것이다.
그러나
알지도 못하고 신령하지 못한 것은 어리석은 자가 가지고 있고,
다툼질도 하지 않고 강하지도 못한 것은 나약한 놈이 가지고 있고,
욕심도 안 내고 부자도 못되는 것은 빈궁한 인간이 가지고 있고,
벼슬도 하지 않고 귀하지도 못한 것은 미천한 놈이 가지고 있으니,
벼슬 하지 않고도 능히 귀하며,
욕심 안 내고도 능히 부하며,
다투지 않고도 능히 강하며,
아는 것 하나 없고도 능히 신령한 것은
오직 대인이라야 가능하니라.'
이처럼 토정 선생에게는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현인 이라는 평가를 듣는 것이다.
조선 5백년의 유교에서는
정북창 선생을 제일가는 술객이라 칭한다.
정북창 선생 또한 술객을 넘어선 도의 경지에 이른 분이다.
그가 스무살이 되어 입산하여 공부하던 때의 일이다.
'입산삼일에 지천하사라.
산에 들어간지 사흘만에 천하의 일을 알았네.'
무소부지, 즉 모르는 것 없이 다 알았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갔는데,
중국사람을 만나면 중국말을, 소련사람을 만나면 소련말을
유창하게 잘했다고 한다.
천재 중에 천재인 사람이 정북창 선생이다.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유래가 없는 사람이다.
동서 어학을 배우지 않고도 즉각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마흔네살에 요절했다.
정북창 선생은 자신의 만장을 스스로 쓴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북창자만의 시다.
'하루에 천 잔 술을 다 마셔 버리고
일평생에 만 권의 책 다 읽었어라,
고상하게 복희씨 이상의 일만 이야기 하고
세속의 얘기는 종래로 입에 걸지 않았도다.
안연(공자의 으뜸 제자)은 삼십에 아성(공자의 다음 가는 성현)이라 불렸는데
선생의 삶은 어찌 그리 긴가.'
안연은 서른두살에 일찍 죽었는데
북창 자신은 마흔넷까지 살았으니
그것으로 족하다는 내용의 만장을 쓴 것이다.
그리고 좌탈 즉 앉아서 몸을 벗어 버렸다.
그는 불교에도 매우 조예가 깊었다.
그런데도 유교에서는 그를 술객이라고 한다.
유교에서는 그의 아는 것만 보았지,
아는 게 끊어진 자리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소강절 선생은 백원산에 들어가서 40년간 주역 공부를 했는데
얼마나 많이 알았던지 천지가 한번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원(원,회,운,세,년,월,일,시 하는 원은 제일 큰 수를 일컬음)이라고 하는데
일원(一元)의 수를 그는 우리가 하루 보듯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천지 밖에 달리 천지가 있다면 모르지만
이 천지 안의 일은 내가 모르는게 없다."
그런데 천지가 한번 생겼다 없어지는 햇수가 12만9천6백년이다.
그것을 우리가 하루 보듯이 아는 분이라지만,
그렇게 아는 것만 가지고는 이 역시 술객이라 하여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강절 선생은 무엇으로 인정받았을까?
마지막에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를 보았기 때문에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면 그는 그 끊어진 자리를 어떻게 보았을까?
'이 몸뚱이는 하늘과 땅이 생긴 뒤에 나오고,
우리 마음자리는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네.
하늘도 땅도 다 나로부터 나왔으니,
그 나머지 만물이야 말할 게 뭐 있을까.
한 물건이 말미암아 한 몸뚱이가 생겼으니,
한 몸뚱이에는 또한 한 건곤(하늘과 땅)이 있음이라.
만일 우주 만물이 나에게 갖춰진 것을 안다면
어찌 삼재(하늘과 땅과 사람)를 잡아서 따로 뿌리를 세우랴.
하늘은 하나(眞理)를 향하는 가운데 조화를 나누고,
사람은 마음 위에 경륜을 일으킨다.
하늘과 사람에 어찌 두가지 뜻이 있겠느냐?
도는 헛되이 행하지 않는지라, 다만 사람한테 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를 보았기 때문에
소강절 선생이라 칭송하는 것이다.
'지'와 '각', 즉 아는 것과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
그렇다면 스스로의 가치는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이 가치를 회복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예수,공자,석가다.
이들 3대 성인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심에서 본래 끊어진 자리를 본 것이다.
이것을 과덕(果德: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공덕)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나무 열매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닦을 때 바로 3대 성인의 깨달아 얻은
이 과덕을 가지고 씨앗으로 삼아야 한다.
만일 과덕 밖의 다른 것으로 씨앗을 삼는다면
그것은 미신이요, 외도가 된다.
그러므로 과(果)가 없는 인(因)이 없고, 인이 없는 과가 없다.
부처님께서<법화경>을 설한 것은 인과동시(因果同時)를 밝힌 것이다.
자연에서 그 예를 찾는다면 모든 초목이 선인(先因:꽃) 후과(後果:열매)인데 비해
오직 연꽃만은 꽃 속에 열매가 맺어 있어 인과동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성불한 과덕과 일체중생의 망상심(거짓과 삿됨)이
둘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마음의 생멸은 본래부터 일어나는 곳이 없는데
일어나는 것으로 망집(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일)하여
일체 중생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누구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한 생각을 돌이켜 다시 돌이킬 것이 없는 데로 돌아간다면
2,500년전 석가가 먼저 성불한 것이 아니요,
3천년후 중생이 뒤에 성불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참으로 자신을 회복하는 길이다.
~~~~~~~~~~~~~~~~~~~~~~~~~~~~~~~~~~~~~
율곡선생은 유교학자라 유교를 자랑하고
율봉선사는 불교학자라 불교를 자랑하다가
율봉선사가 먼저 율곡선생에게 물었다.
"우리 불교에는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있는데
유교에도 그런 말이 있소?"
율곡선생이 답했다.
"물론 있지요.<맹자>의 '도성선' 장이 있습니다.
그러자 율봉선사가 다시 물었다.
"우리 불교는
'색(色:우주 만유의 모양 있는 것)도 아니고,
공(空:모양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색이 즉 공이요, 공이 즉 색이다.
모양이 끊어진것이 곧 모양이 있는 것이고
모양 있는 것이 곧 모양 끊어진 것이다.
(非色非空, 空卽是色, 色卽是空)
공과 색이 둘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유교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까?"
율곡선생이 <시전>을 인용해 답하였다.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고기는 못에서 뛴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비색비공과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율봉선사가 율곡선생에게 시를 지어 답례하였다.
'고기가 못에서 뛰고 솔개가 하늘에서 나는 것이 위아래가 같으니,
이것이 색도 아니고 또한 공도 아닌 소식이라.
등한히 한번 웃고 신세를 돌아보니,
기우는 햇살이 일만 나무 가운데 홀로 섰도다.'
그러면서 율곡선생을 참으로 대학자라고 칭찬했다.
첫댓글 큰뜻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본문내용을 되도록 빠짐없이 원래대로 옮겨 적으려다 보니 무척 시간이 걸리네요. 많은분들이 한번쯤 읽었으면 하는 내용이 아직 조금 더 남아있는데 시간 나는대로 빠른 시간내 옮겨 적어놓겠습니다.금쪽같은 시간 투자해서 올려놓는 것이니 부디 시간있을 때마다 읽으면서 큰 성취 이루시길 바랍니다...^^ 즐겁고 행복한 하루되세요...^^
어제 글 읽고 답글 달려다 몇번 더 읽고 답글을 씁니다... 아직 제 머리가 짧아서 잘은 모르지만 제가 몇년전에 무심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말이.... 현실에서 이루어진걸 느꼈습니다.... 생각이 현실이 되고...지금 현제 제 자신이 되어버린것 같아서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좋은인연이 되어서 좋은말씀 이렇게 듣는 행운~!도 생겨서 정말 고맙습니다~! 수십번이될지 수백번이 될지 읽고 또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제가 고맙습니다...저 역시 그동안 막연히 생각해 오던 이런저런 생각들이 옛 성인들의 말씀과 큰스님의 말씀을 통해 뭔가 가닥이 잡히는 듯 합니다...예전에 큰스님들의 말씀을 읽을 때와는 또다른 느낌이네요...이 나이가 돼서야 뭔가가 잡히는 심정입니다...글로 저리 이끌어주는데 못 따라가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읽고 또 읽으며 마음속깊이 붙잡고 늘어지려고 합니다...즐겁고 행복한 하루되세요...^^
오늘 옮긴 부분까지 탄허록의 귀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즐겁고 행복한 하루되세요...^^
귀한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