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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목사의 생애 1부 | 나환자와 걸인들의 아버지
이은아 목사
최흥종은 1880년 5월 4일 광주시 불로동에서 최악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렸을 때 이름은 최영종이었습니다. 6살 때 어머니를 잃은 영종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서운 새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는 이복 동생 영욱이 있었는데 새 어머니는 영종을 야단칠 때마다 이복동생 영욱과 비교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11살이나 어린 동생과 비교되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습니다. 새 어머니로부터 “너는 11살이나 아래인 영욱이에 반만 닮아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영종은 새 어머니로부터 꾸지람을 들을수록 자꾸만 비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9살 때 유일하게 그의 그늘이 되어 주었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가슴에 쌓인 분노를 주먹으로 풀었습니다. 장날이면 시장에 나가 시골에서 올라온 장사꾼들을 못 살게 굴고 돈을 강제로 빼앗아 밤늦도록 술을 마시는 게 일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패를 만들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못된 짓을 하는 글을 사람들은 최 망치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21살이 되자 새 어머니는 얼굴 한 번 마주 보지 못한 새색시를 맞아 혼인을 시켰습니다. 그는 가정이 생기자 주먹을 쓰지 않고 처 자식을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한편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광주 양림동산은 기독교 복음의 터전이 되고 있었습니다. 벨, 오원 선교사 등의 입성을 계기로 양림동 동산에 선교사들의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빈둥대던 청년들은 양림동산에서 하루 종일 집 짓는 일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을 싫어했기에 마을 사람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틈틈이 마을에 내려와 사람들을 붙잡고 설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죄를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죄를 졌길래 회개하라고 하는 거냐며 화를 냈습니다. 최망치 역시 양림촌에 들어온 선교사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영종은 그렇지 않아도 심심하던 차에 친구 몇몇을 불러내어 양림동산으로 향했습니다. 영종은 건축 공사가 한창인 마당에 들어서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팔을 걷어 올린 영종은 불에 굽기 위해 햇빛에 말리고 있던 벽돌 더미를 와르르 무너뜨리고 목수들에 대패며 끌 톱 자귀 등 연장을 마구 빼앗아 던지는 등 한참 난동을 피웠습니다. 순식간에 공사판은 난장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부들은 최망치에 대해서 익히 들었던 터라 아무도 대들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위엄 있는 얼굴에 건강한 체구를 지닌 중년의 남자가 영종을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김윤수 집사라고 하네. 지금 마을 사람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 집을 짓는 일은 나를 위해서도 선교사들을 위해서도 아니고 바로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사들을 보내신 거네. 앞으로 선교사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지켜보다가 만약 마을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거든 그때 선교사촌을 무너뜨리게.” 이후부터 영종은 구경삼아 양림동 선교사촌의 건축 현장에 자주 들렀습니다. 그는 여전히 양림동산 주변에서 싸움꾼들과 몰려다니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돈을 빼앗아 술을 마시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윤수 집사에게 놀러 갔다가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그도 영종처럼 주먹을 휘두르며 건달로 살던 사람이었는데 어머니의 병을 고치러 교회에 갔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제는 오로지 선교사님들을 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몸과 마음을 바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최영종은 친근감을 느꼈습니다. 1904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양림리의 배유지 목사 사택에서 열린 광주교회의 첫 예배에는 최영종도 참석했습니다. 김윤수 집사의 권유에 못 이겨 약간의 호기심을 갖고 참석한 영종은 잠시 얼굴만 내밀었다가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벨 목사의 선교가 시작되자 영종은 맨 앞자리로 자리를 옮겨 차분하게 앉아서 끝까지 설교를 들었습니다. 설교 내용 중에서 선한 일을 하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와 영생을 얻는다는 대목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던 영종은 왠지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벨 목사의 선교는 그가 살아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만 같았지만 그 길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막연했습니다. 그날 밤 아기 옆에 누운 영종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살지는 않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에 밴 죄의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그는 시장에서 만난 한 장사꾼을 두들겨 팬 다음 돈을 빼앗고 그 돈으로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종은 깊은 시름의 나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이렇게 남에게 피해나 주면서 벌레처럼 살다가 그냥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는 갑자기 지난번에 설교를 들었던 것이 생각나 벨 선교사를 찾아갔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영종이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장차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는 아시다시피 못된 깡패입니다. 저 같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벨 목사는 책상에서 성경을 가지고 와서 그에게 읽어주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애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영종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개 같이 살아온 저 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저도 김윤수 집사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시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모든 고통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를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평생 남을 괴롭히기만 한 제가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귀한 메시지 중에 하나가 바로 당신은 완전히 변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 우리 계속 성경을 읽읍시다.” 벨 목사는 성경을 읽으며 그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습니다. 최형종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더니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솟구쳐 올랐습니다. 오랫동안 무거운 바위 덩어리에 짓눌려 있었던 것 같은 답답함이 사라지고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기쁨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영종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만 한다면 앞으로는 보람 있고 떳떳하게 살겠습니다.” 영종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세상이 이토록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다음 날부터 영종은 배 목사가 준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온종일 방 안에만 붙박혀 꼬박 엿새 동안 성경책을 읽었습니다. 이제 그는 허랑방탕한 건달 생활을 청산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기 위해 매일 양림동산 선교사촌에 출근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 영욱이 그에게 찾아와 “형님! 언제까지 이렇게 사실 거요. 주님 말씀 믿고 사는 건 좋지만 가장으로서 식솔 권사는 해야지요. 언제까지나 어머니 그늘 밑에서 살 수는 없지 않나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종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당신은 을사조약 체결로 세상이 시끄러웠습니다. 각 지방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 을사조약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영종은 광주 경무청의 순검이 되어 의병 잡는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벨 목사님과 김윤수 집사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뜻을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순검을 왜 하냐며 말렸습니다. 그러나 영종은 이것 말고는 먹고 살 길이 없다며 순검이 되고자 하는 결단을 굳혔습니다. 영종은 순검이 되어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거나 특별하게 하는 일 없이 경무청 부근을 어슬렁거리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가 순검이 된 것은 의병을 때려잡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난세를 맞아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순검 생활은 특별히 지탄받을 만한 것도 칭찬받을 만한 일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영종은 다른 순검 한 명과 같이 12명의 체포된 의병을 화순으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영종은 명령을 받는 순간 12명의 의병들은 틀림없이 모진 고문 끝에 총살을 당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종은 곁에 있는 동료 순검 몰래 그들을 풀어주어 의병들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총살 직전에 의병 6명을 살려주었습니다. 그 무렵 국채보상 사건이 터졌습니다. 통관부가 설치되고 이또오가 부임하자 일본은 소위 시정 개선을 한다고 1천3백만원의 차관을 들여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정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실권을 잃고 말았습니다. 영종은 이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순검의 사직서를 써서 경무 고문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총수는 다음 날 집으로 찾아와 순검을 그만두면 이전에 의병을 풀어준 일에 책임을 물어 감옥에 집어넣겠다며 협박하였습니다. 영종은 아침도 먹지도 않고 양림동산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비굴하게 살지 말게 하옵소서. 진실을 찾고 지키며 살게 하시고 의롭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용기와 양심의 자유를 잃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물질만을 허락하옵소서” 그는 비굴하고 욕된 인생을 길게 살다 가는 것보다는 짧더라도 떳떳하고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서 욕심 없이 살다 가는 것이 더욱 아름다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배 목사와 함께 진료 사업을 도왔던 오원 의사가 심하게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몇 년 전에도 과로로 몸이 쇠약해져 일시 귀국했었는데 1년 후에 한국에 돌아와 몸을 아끼지 않고 진료 봉사를 하다가 심한 오한과 함께 눕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광주 선교 병원을 맡고 있던 윌슨은 목포에 있는 포사이트 의사를 급히 광주로 오도록 하여 최영종과 김윤수 집사가 함께 마중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북풍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는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습니다. 포사이트 선교사는 한때 쿠바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분으로 얼마 전 전주에서 환자를 치료해 주고 있는데 의병이 들이닥쳐서 일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오른쪽 귀가 잘려진 일도 있었습니다. 산모퉁이로 돌아서자 멀리 들길 위해 나귀를 타고 오는 포사이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오자 김윤수의 말대로 그의 오른쪽 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윤수 집사는 포사이트 선교사에게 영종을 소개시켰습니다. 김윤수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포사이트는 나귀에서 내려와 허리를 구부리며 영종의 손을 덥썩 잡았습니다. 영종은 나귀에서 내리는 글을 보자 너무 면괴스러워 허리를 깊숙이 꺾었습니다. 포사이트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참 말씀을 함께 실천할 형제를 만나게 되어 정말로 반갑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형제와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종은 낯선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따뜻한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광주를 향해 갈 길을 재촉했습니다. 마을 옆 산모퉁이를 돌자 곧 쓰러질 것 같은 폐가가 보였습니다. 그 폐가 앞에는 거렁뱅이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첫눈에 나병 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영종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살려주세요.” 거렁뱅이는 더러운 누더기로 감은 손을 무겁게 들어 올려 흔들어 보이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애원했습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여인은 얼어죽고 말 상황이었습니다. 영종은 김 집사의 팔을 잡아 끌며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데 그때 포사이트가 나귀에서 내리더니 거렁뱅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영종과 김윤수도 하는 수 없이 포사이트 옆에 걸음을 멈춰 섰습니다. 양복에 모자까지 쓰고 정장을 차려 입은 포사이트는 두 손을 벌려 눈 위에 짚을 얇게 깔고 앉아 떨고 있는 나병 환자의 팔을 잡았습니다. “자매여, 내 외투를 입으십시오.” 포사이트는 자기가 입고 있던 짙은 밤색의 두꺼운 털 외투를 벗어 환자에게 입혔습니다. 영종은 그러한 포사이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나병 환자들과 거인들은 어디에나 득실거렸고 아무도 그들을 돌봐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거리에서 나병 환자를 만나면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침을 뱉거나 돌멩이를 던지고 모래를 뿌리기까지 했습니다. 영종과 김윤수도 그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했으나 그저 천형을 받아 저러겠거니 하고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 낯선 미국인 선교사는 한 핏줄도 아닌데 꽤 값나가 보이는 외투를 벗어 손수 입혀주고 있었습니다. 포사이트는 손짓으로 나귀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김윤수에게 광주 선교사촌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자 한 10리 남짓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결심이라도 한 듯 다시 피고름이 엉켜 붙은 누더기에 감긴 나병 환자의 손을 잡았습니다. 여인의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매여, 나귀 등에 오르십시오.” 포사이트는 여인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습니다. 여인의 머리는 몇 달 동안 감지도 빚지도 않았는지 숙대밭처럼 엉클러져 있었고 몸에서는 엮겨운 고린내가 심하게 풍겼습니다. 포사이트의 부축을 받고 일어설 때 거칠게 불어온 바람이 머리에 뒤집어 쓴 누더기를 펄럭이게 한 순간 얼핏 본 여인은 코와 귀 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문드러져 흉측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 자매는 우리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포사이트는 나환자를 두 팔로 번쩍 안아 올려 나귀 등에 태웠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영종은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외투를 벗어준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문들어준 나환자를 온몸으로 안아올려 낙 위에 태우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환자를 나귀에 태운 포사이트는 스스로 고삐를 잡고 견마잡이가 되어 끌었습니다. 그때 불안한 자세로 나귀의 등에 타고 있던 여인은 피고름이 말라붙은 누더기에 감긴 손끝으로 자신의 지팡이를 가리켰습니다. 그때 포사이트는 순간 영종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형제요 저 지팡이를 집어서 나귀 등에 올라타 있는 이 불쌍한 병자에게 주시오.” 포사이트는 영종에게 말했습니다. 영종은 꼼짝 않고 그대로 서서 포사이트를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김윤수가 대신 지팡이를 집어주려 하자 포사이트는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미스터 최가 집어주십시오.” 포사이트의 재촉에도 영종은 여전히 발이 땅에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그것을 짚는다면 틀림없이 나병이 옮을 것만 같아 손을 대지 않고 건네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김윤수에게 손수건이 있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습니다. “갈 길이 바쁩니다. 미스터 최 무엇을 망설입니까? 어서 지팡이를 집어주십시오.” 재촉하는 포사이트의 말에 영종은 결심했습니다. ‘피가 다른 외국 사람도 자기 외투를 벗어주고 안아서 나귀 등에 태우는데 자신이 지팡이 하나쯤 집어주지 않는다면 무슨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싶은 생각에 지팡이를 집어 들어 그 환자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광주로 향했습니다.
서양 사람이 얼굴이 문드러지는 여자 나병 환자를 나귀에 태운 모습은 진귀한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광주 사람들로서는 그 같은 장면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문둥이는 보리밭에서 아기를 잡아먹는다고 하여 가까이 하지도 않고 집 가까이 오면 모래를 뿌리며 쫓아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구경꾼들은 포사이트를 정신 나간 양코배기라고 비웃고 손가락질을 하며 나귀에 탄 나병 환자에게 돌을 던지고 모래까지 뿌려댔습니다. 포사이트는 구경꾼들을 향해 서투른 우리말로 소리쳤습니다. “이 환자는 우리들의 자매입니다. 어떻게 자매에게 모래를 뿌릴 수 있습니까?” 영종은 효천에서부터 포사이트를 따라오는 동안 그의 말과 행동에서 뜨겁게 가슴을 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행동과 말에는 조금도 허식이 없었고 오직 진실 그것이었습니다. 곧 피고름 묻은 지팡이를 집어주는 것을 망설였던 자신의 행동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너의 이웃에게 작은 예수가 되어 줄 때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다는 말씀’을 직접 보여준 포사이트의 행동은 최영종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포사이트는 나귀에 태워온 나병 환자를 두 팔로 안아내려 진료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진료소 안에 일반 환자들이 나병 환자와 같이 있을 수 없다며 반대해 선교사들의 집을 짓기 위해 만들어 놓은 벽돌 굽는 기와막으로 옮겼습니다. 윌슨과 벨 선교사도 쾌히 승낙하여 나병 환자를 기와막에 기거하게 하였고 오원 부인은 남편의 침대와 침구까지 환자를 위해 내주었습니다. 포사이트는 머리빗을 가져와 쑥대머리처럼 헝크러진 여인의 머리까지 빚어 주었습니다. 그는 끼니때마다 직접 음식을 날라다 주기도 했습니다. 때때로 영종에게 나병 환자의 음식을 가져다주도록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영종이 조금 머뭇거리자 포사이트는 웃음을 띤 얼굴로 영종에게 말했습니다. “미스터 최 나병이라는 것은 혈관에 피가 섞이기 전에는 옮고 싶어도 못 옮기는 병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포사이트의 말에 영종은 안심이 되어 나병 환자가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 밥도 갖다 주고 대화도 주고받았습니다. 여인의 나이는 스물다섯이며 이름은 김복실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병에 걸려 소식도 없는 남편의 이름은 문치근이며 5살짜리 딸이 있는데 외가에 맡겨놓고 너무 보고 싶어서 마을 상여집에서 숨어서 보다가 사람들한테 들켜서 쫓겨났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딸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하던 여인은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7일 만에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여인의 죽음은 선교사촌을 슬프게 하였지만 곧 새로운 역사를 낳았습니다. 선교사들이 모금을 하여 병원 뒤편에 세 칸짜리 집을 짓고 나환자 7명을 수용하고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양림리 동산에서 나병 환자들을 치료해 준다는 소문은 곧 광주 시내에 퍼졌습니다. 광주 거리를 배회하던 나병 환자들이 몰려와서 자기들에게도 약을 주고 주사를 놓아달라고 했습니다. 포사이트는 이들 모두를 받아들여 기와막에 함께 기거하도록 하고 음식을 주고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영종은 아침에 일어나면 저절로 발걸음이 선교사촌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는 참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 일찍 선교사촌에 갔다가 포사이트 옆에서 나병 환자들을 돌보느라면 하루해가 순식간에 기울곤 했습니다. 이제야 자신이 가야 할 길이 확연하게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최영종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봉선리 땅 1천 평을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봉선리 동산에 나환자들을 집단으로 수용할 수 있는 임시 거처를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포사이트와 벨 목사 부부 등 선교사촌 사람들은 영종이 유산으로 받은 땅을 희사하겠다는 말에 감동을 받고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특히 김윤수 집사가 누구보다 기뻐하였습니다. 집 안에서는 아무리 상속을 받는 땅이라고 해도 가족과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기증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 환자 수용 시설까지 만들겠다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내와 가족들은 그를 옆에 오지도 못하게 하며 나환자들 피고름을 닦은 손으로 누구를 만지려 하냐며 구박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로서는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힘없는 자들의 돈을 빼앗던 깡패 최망치가 문둥병 환자의 피고름을 닦아주는 거룩한 손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최영종은 이제 새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이름을 최흥종으로 바꾸었습니다. 어느 눈이 펑펑 오는 주일 포사이트 선교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날 여관마다 손님으로 가득 차고 머물 곳이 없는 아기의 수는 거절당해야만 했습니다. 이 아기가 몸들 곳이라고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뿐이었습니다. 욕심으로 차고 넘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더더욱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오직 있을 것이라고는 거절당한 사람들의 텅 빈 마음속에 허술한 거쳐 남아 빼앗기고 쫓겨난 사람들의 빈손 안에, 아니면 없는 와중에도 나눌 줄 아는 가난한 사람들 틈 밖에는 없었습니다. 아기 예수는 지금도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나십니다. 포사이트의 설교를 들으며 흥종은 저 밑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벅차 올랐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모두가 떠난 예배당에 홀로 남은 흥종은 차가운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높은 하늘 윗자리를 마다하시고, 세상에 사람 되어 오셔서 우리의 종이 되신 주님! 세상 밑바닥에 고통당하는 이들을 높여주심을 감사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내어주시고도 모자라 물과 피마저 쏟아내시니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이 가난해지신 주님 그러하여 움켜진 것을 풀어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자신이 생명의 밥으로 오시고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먹이셔서 모든 사람을 배불리신 주님! 그러하여 밥은 나누어 먹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당신의 뒤를 따르겠나이다. 저도 십자가를 지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밥을 나누어 먹으며 저 낮은 곳에 처하여 평화의 일꾼으로 행동하겠나이다. 힘을 주소서 주님!”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기도의 말이 술술 흘러 나왔습니다. 기도한 것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그의 몸속에서 한 것 같았습니다. 1907년 벨 목사로부터 북문안 교회 최초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흥종은 뜨거운 마음으로 성부 성자 성령을 받아들였으며 앞으로는 자신보다 작은 예수의 삶을 살리라 결심했습니다. 1년 뒤 집사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포사이트가 흥종을 불렀습니다. 내가 목포에서 처음, 광주로 올 때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나는 그때 미스터 최에게 일부러 나환자의 지팡이를 주어 달라고 했습니다. 미스터 최가 지팡이를 집어준 순간 나는 하나님께 다짐했습니다. 앞으로 미스터 최를 친형제처럼 생각하고 함께 좋은 일을 하겠다고 말입니다. 최흥종은 존경하는 포사이트 선교사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포사이트는 그를 데리고 제중원으로 갔습니다. 제중원 앞에는 수많은 나환자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즐비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더러운 누더기로 몸을 감싼 그들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손발이 썩어서 저절로 떨어져 나가고 코와 눈두덩이와 입술과 턱이 문드러진 그들은 길바닥에 퍼지르고 앉거나 누워서 통증 때문에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은 지옥보다 더 참담했습니다. 포사이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성경책을 흥종에게 내밀며 길가에 누워 있는 환자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라고 했습니다. 흥종은 포사이트가 말한 대로 누가복음 17장 11절로 16절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 환자 10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중에 한 사람이 자기가 낳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최흥종이 성경을 읽는 동안 포사이트는 환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기도를 해주기도 하고 피고름을 짜고 환부를 어루만져 주기도 했습니다. 순간 흥종은 형언할 수 없는 뭉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병 환자 여인에게 피고름 묻은 지팡이를 집어주고 나서 한참 만에 느낀 감정이었습니다. 그는 제중원에서 포사이트 선교사와 함께 나환자들을 돌보고 다음날 밤에야 집에 돌아와 김복실의 지팡이를 꺼냈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소맷자락으로 지팡이의 먼지를 닦아낸 다음 가슴에 안았습니다. 제중원에는 연일 수많은 나환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윌슨과 포사이트가 치료를 맡았고 김윤수 부부가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흥종은 윌슨으로부터 의학 수업을 받아 간단한 환자는 직접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중원의 나병 환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일반 환자들은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급한 환자들이 지계해지고 왔다가도 나병 환자들을 보고는 겁에 질려 도망치듯 되돌아가곤 했습니다. 제중원을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는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흥종은 항의하러 오는 주민들에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존재들이며 남의 아픔이나 고통을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환자들을 돌보는 서양 사람들과 흥종도 곧 문둥이가 될 것이라며 수근거렸습니다. 아내까지도 흥종이 가까이 오는 것을 한사코 싫어했습니다. 새 어머니와 형제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그럴수록 더욱 병원에서 환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점점 늘어가는 나환자들의 수용을 위해 윌슨은 영국 나환자 선교협회에 도움을 청했고 마침내 1912년 11월 15일 봉선리에 한국 최초 나환자 집단 정착촌이 마련되었습니다. 흥종은 이제 직접 나환자들에게 주사를 놓고 투약할 정도였고 윌슨은 흥종에게 나환자촌 관리 책임을 맡겼습니다. 최흥종이 집에 숨겨두었던 김복실의 지팡이를 나환자촌으로 가지고 나와 그의 방에 걸어두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에서 온 제중원의 간호과장 서서평 선교사가 나 환자 치료를 돕기 위해 왔다가 지팡이를 보고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는 포사이트가 광주에 오던 날 만났던 김복실에 대한 이야기와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남긴 말을 했습니다. 서서평은 그 말을 듣고는 감동하며 김복실의 딸을 데려다 양녀로 키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최흥종은 김복실의 친정을 찾아가서 김복실이 몇 년 전에 죽은 이야기와 마침 그의 딸을 양녀로 맡겠다는 선교사가 있어 데려간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외숙모는 그동안 키운 돈을 요구하며 그냥 데려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송아지 한 마리 값을 계산해 주고 보영이라는 김복실의 딸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서평은 반갑게 맞았고 보영을 양녀 삼았습니다. 한편 윌슨과 최흥종은 그동안 나환자촌을 마련하고 그들을 치료하면서 환자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복음을 뿌리 깊게 심어주기 위해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이제 환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어떤 고통이라도 감내하고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의 힘을 찾아냈습니다. 환자들은 33살의 최흥종을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따랐습니다. 처음에 그를 비안냥댔던 주민들도 그의 헌신적인 삶에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도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진심으로 그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이제서야 당신이 참말로 훌륭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구만요. 집안 걱정은 마시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셔요. 새 어머니도 며칠 전 그가 나 환자 수용시설에서 밤을 새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봉사도 좋지만 잠은 집에 들어와서 자도록 하소.” 라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1911년 5월 이승만 박사가 광주에 왔습니다. 이즘 최흥종 집사는 나날이 정신없이 바쁜 일과 속에 묻혀 살았습니다. 주말이면 양림리 교회에 가서 교회 일을 받들고 주중이면 나환자촌의 각종 시설 보수 공사를 비롯하여 환자 치료와 면담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쁜 일과 속에서도 이승만 박사의 강연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남대리 선교사 집에 모인 청년들에게 광주에도 YMCA를 만들어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모두들 이승만 박사의 말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최흥종은 1912년 8월 양림리 교회에서 거행된 광주 최초의 임직식을 통해 김윤수 집사와 함께 광주 북문안 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습니다. 당시 북문안 교회에는 흥종을 비롯한 믿음이 강하고 헌신적인 교회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이 교회에는 500여 명의 교인들과 함께 애국지사들이 모인 이 교회에서는 구국운동의 대열에 앞장을 섰고 훗날 3.1운동 때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을 강압적으로 합병한 이래로 제일 먼저 황해도의 천주교 민족주의자들을 소탕하는 아낙 사건을 일으켰으며, 곧바로 평안도에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는 105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승훈을 비롯한 김구, 윤치호 등 6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체포되고 105명에게 징역이 언도되었습니다. 기독교인 지도자들을 탄압함으로써 사회 저변으로부터 반대의 목소리를 잠재운 일본은 곧바로 전국의 토지 조사를 실시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토지를 빼앗았습니다. 이때 흥종은 1896년 일본인 장교를 죽이고 전라남도 보성에 잠시 숨어 지내던 김구 선생이 중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최흥종은 죽은 듯 국내에서 춤을 죽이고 사느니 보다 해외에 나가서 조국을 떠난 동포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가 있는 북간도 선교사를 자청했으나 그 꿈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그가 존경하고 따랐던 포사이트 선교사가 과로로 병이 들어 귀국하자 흥종은 부모와 생이별을 한 것만큼이나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북간도 선교사의 꿈이 좌절되자 흥종은 신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14년 그는 평양신학교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평양신학교는 1년에 3개월 동안은 집단 합숙 강의를 하고 현장 실습 과정인 9개월 동안은 맡은 교회에서 목회 활동에 전념하도록 했습니다. 첫 해의 3개월 합숙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자 윌슨은 나환자촌 운영 외에 선교부에서 주관하고 있는 주일 학교까지 맡도록 권했습니다. 흥종은 교회가 없는 지역을 돌며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무렵 천도교와 기독교가 고종의 서거를 계기로 손을 잡고 함께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광주에서의 거사를 맡길 사람을 물색하던 전라노의 회장 김필수 목사는 흥종에게 거사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흥종은 당시 광주의 유망한 지식인 청년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이 아니어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교회 일도 그렇거니와 나환자촌은 잠시라도 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흥종은 자신이 그동안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독립운동에 합류하기로 하였습니다. 3월 1일 최흥종은 남대문에 모여 있는 군중들을 이끌고 파고다 공원으로 갔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국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 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망국의 설움을 안고 살아야 합니까? 이제는 우리 스스로 빼앗긴 국권을 되찾아 떳떳한 독립 국가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흥종의 목소리는 어느덧 울부짖음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만세! 대한독립 만세!” 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터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고다 공원을 향해 걸어가면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얼마 후 일본 경찰들이 덮쳤고 맨 앞장을 서던 최흥종은 종로 경찰서로 연행되었습니다.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1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감옥에서는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비로소 차분한 마음으로 그동안 살아온 일생을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수감된 지 두 달 만에 새 어머니는 거의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면회를 왔습니다. 새 어머니는 따뜻한 말로 건강 걱정을 해주었습니다. 한때 영종은 새 어머니에게 원망을 품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원망도 미움도 없고, 그저 집안의 어른으로 가족을 품어주는 큰 그늘이 되어 주는 것이 고맙기만 하였습니다.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진 아내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아이들의 소식을 묻자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여섯 자녀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소상하게 소식을 말해주었습니다. 동생 영욱도 색시를 데리고 면회를 얻습니다. 최흥종이 나라를 위해 나환자들을 위해 전심전력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데에는 동생 영욱이 가족을 돌보아 준 덕분이었습니다. 사실 최흥종은 가정의 행복에 대해서는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의 핏줄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고 처자식에 대해서도 그다지 정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라는 성경 말씀을 중요시 했을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