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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혁명(1830)을 묘사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대혁명 배경 당시 프랑스는 계몽사상가인 루소와 백과전서파인 볼테르 등 사회계약설이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국민이 공감하여, 당시의 사회 제도(구체제)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봉 왕가 정부, 특히 국왕 루이 16세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특권 계급과 국민과의 괴리를 채울 수 없었다. 불평등한 사회 체제 이 부분의 본문은 구체제입니다. 국가 재정 파탄왕실의 과도한 지출로 인해 루이 14세부터 프랑스 재정은 휘청이기 시작했고, 영국의 미국진출을 견제하려는 미국 독립 전쟁 참전으로 파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꾸려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졌고, 루이 16세에 이르러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불만이 극에 달하였다. 추가로, 루이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와네트'의 사치로 국가 예산의 3배를 소모하게 되었다. 유명한 사건으로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예약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3배의 가격인 32만 프랑을 주고 구입한 사건(사실은 라 모뜨 부인이 왕비의 이름을 남용하여 돈과 목걸이를 손에 넣었으나 이미 왕비가 오해를 삼)이며, 이로인해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의회에 미움을 사게되고 결국 1793년 10월 16일 교수형을 당한다. 프랑스 민중의 사회 개혁 의지제3계급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전문직 일명 부르주아지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써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1, 2신분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계몽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었다.[1] 프랑스 혁명 당시 육체 노동자, 노숙인, 소상인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장 자크 루소의 공화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사회체제에 항거해야 한다”는 사상에 기초하여 혁명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혁명전통은 유럽 민주주의 역사에 기여하여 유럽 대부분 국가들의 헌법에는 부당한 사회체제에 저항할 권리인 저항권이 명시되어 있다.
혁명의전개과정 삼부회 소집 테니스 코트의 서약 이 부분의 본문은 테니스 코트의 서약, 국민의회 (프랑스 혁명)입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베르사유 행진 이 부분의 본문은 베르사유 행진입니다. 이 시기의 혁명은 온건한 미라보, 라파예트 등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시민군은 자유주의 귀족 라파예트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1790년, 그의 제안에 따라 삼색기(현재 프랑스 국기)가 혁명의 깃발이 되었다. 입법 의회 이 부분의 본문은 입법 의회입니다.
바렌느 사건 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 일가는 국경 앞의 바렌느에서 민중들에게 발각되어, 6월 25일 파리로 되돌아왔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동시에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폭로되었다.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하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8월 27일 《필니츠 선언》을 발표하여, 루이 16세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루이 16세는 국왕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비교적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국왕 옹호파 민중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프랑스혁명전쟁 프랑스 혁명의 사상이 전파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들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프랑스는 《필니츠 선언》과 왕당파와 망명 귀족(에미그레 : 이민이라는 의미)의 선동 활동은 혁명 정부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받아들였다.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을 계속하기 위해 대외 전쟁을 단행한다. 1792년 4월 혁명 정부는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고,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프랑스군 장교들은 보수적인 귀족 계급이기 때문에 혁명 정부에 대한 협력에는 소극적이었고, 프랑스군은 각지에서 전투에서 패배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적들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흘렸다.
8월 10일 사건
La Marseillaise 라 마르세예즈 프랑스는 대혁명의 나라 답게 그 국가도 혁명가를 채용했으니, 스트라스부르에서 작곡된 노래의 제목이 '마르세예즈'가 된 이유는 '라 마르세예즈'는 1795년 7월 14일 프랑스 공화국의 국가로 선포되었습니다만, '라 마르세예즈'가 다시 프랑스 국가로 지정된 것은 제3 공화국 때인 1879년이었으며,
이때 마르세이유의 의용병이 노래한 ‘라 마르세예즈’는 이후에 프랑스 국가가 되었다. 파리 시민과 의용병은 프랑스군이 패배한 원인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8월 10일에 튈르리 궁전을 공격하여 왕권을 중지시키고, 내부의 적인 국왕 일가를 모두 떵플 탑에 유폐했다 당시 튈르리 궁전에는 스위스 용병대가 국왕 일가의 신변 경호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민중에게 발포를 금지했기 때문에, 그 대부분이 민중에게 학살되었다. 스위스 용병대 이외에도 일부 귀족이나 군인이 국왕 일가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분전했는데, 그 중에는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과 프랑스와 드 샤레트, 루이 드 레스큐르, 장 니콜라 스토프레 등 후 방데 반란에서 지도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학살
발미 전투 한편, 흑인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전 유럽 수요의 절반 이상을 공급한 설탕이나 커피의 재배로 프랑스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오고 있던 카리브 해의 식민지 생 도맹그(Saint - Domingue)에서는 인권 선언에 의해서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에게 자유인으로 선거권이 인정되는 지를 둘러싸고 현지의 백인 크리올과 물라토 사이에 항쟁이 발생하고 있었다. 1791년 8월 22일에 부두교의 고위성직자 듀티 브쿠만이 흑인 노예를 이끌고 해방을 요구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생 도맹그는 영국, 스페인의 개입을 불러 대혼란에 빠졌다. 생 도맹그가 혼란스런 정세에 빠져있는 동안 프랑스 입법 의회는 1792년 4월 4일에 유색인 자유인의 평등을 결의하여, 물라토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식민지의 대다수를 차지한 흑인 노예의 불만은 수습되지 않았다
한편 혁명 전쟁은 민족주의를 자극시켜 지방에서 의용군이 조직되어 파리로 모이게 하였고, 프랑스군은 마침내 9월 20일에 프로이센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날 입법의회가 해산되었다. 그리고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제도화되고,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여,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1791년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됐다. 공화국 정부는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다. 국왕이 전쟁 때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많이 제출되어 1793년 1월 14일 국민 공회는 찬성 387, 반대 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했다. 그러나 찬성 중 26표는 집행유예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이 26표를 반대표로 의결하면 찬성 361 대 반대 360로 찬반 동수가 되기 때문에, 18일 집행유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다. 찬성 380 대 반대 310로 집행유예 없음으로 의결되었기 때문에, 사형이 확정됐다. 1월 21일, 2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 광장(현재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10월 마리 앙투아네트도 뒤로 손이 묶여 퇴비수레에 태워져 시내를 돈 이후 처형되었다. 국왕에게 사형 투표한 의원들은 "국왕 살인"으로 이후 보복을 받게된다. 그들은 이후의 왕정복고에서 권좌에 복귀한 왕당파로부터 원수로 백색 테러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화국의성립 공포 정치 이러한 위기 외에도 지롱드파가 하층민의 식량 위기에 대해 아무런 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면서 하층민의 분노가 폭발한다. 6월 2일, 하층민이 지지하는 자코뱅파가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추방하고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을 장악했다. 7월 13일 자코뱅의 지도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장 폴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을 당하는 등 테러리즘도 연발하여 프랑스 정세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코뱅파는 독재 정치를 시작한다.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통해 공포 정치를 했고, 반대파를 차례로 단두대로 보냈다. 로베스피에르는 당통, 에베르, 라부아지에, 카미유 데뮬랭, 뤼실 두플레시 등 에베르 파와 당통 파를 숙청했고, 농민에 대한 토지의 무상 분배 등 자기의 이상으로 하는 독립 소생산자에 의한 공화제의 수립을 목표로 했다. 법에 의한 보호와 신체의 자유, 소유의 권리를 담은 “인권 선언”은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자코뱅 파는 8월 23일에 “국가총동원”을 선포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정돈하고 외국의 간섭 전쟁에 반격에 성공했다. 이처럼 프랑스 본토에서는 공포 정치가 진행되었지만, 한편 생 드망에서는 1793년 8월 29일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된 국민 공회 의원 레제 프리시테 손토나가 노예 제도의 폐지를 독단으로 선언 하고 이 선언을 추인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 파는 1794년 2월 4일 국민 공회에서 푸뤼비오즈 16일 법을 통과, 서구 세계 최초의 식민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다. 이렇게 루이지애나, 기아나, 산토 도밍고(현재 아이티),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등 대륙의 광대한 지역에서 《흑인법》 아래 농장 농업에 묶여 있던 흑인 노예는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다. 이것은 영국에 저항하고 있었던 산토 도밍고의 흑인 실력자 투생 루베르튀르의 프랑스 복귀를 이끌어내는 등 자코뱅 파를 통해 자유와 평등이 실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장내에서 탈리앵 등이 “폭군을 타도하자!”라는 연설을 하였으며, 로베스피에르 파의 체포를 요구하여, 오후 3시 로베스피에르, 쿠통, 생 쥐스트 등의 체포 결의가 통과했다. 다음 날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 등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다.
총재 정부 1795년 10월 5일 반대파가 일어킨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대파의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후 이집트 원정과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총재정부는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민심을 잃었다. 안개달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은 통령정부(또는 집정정부)를 수립하여 독재 권력을 장악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태어난 프랑스 제1공화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 최초의 제정으로 10여년의 단명으로 막을 내렸다. 또한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혁명으로 붕괴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 (부르봉 왕정복고)
통령 정부
혁명 정신 “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 한편,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속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존중, 인간존엄이라는 천부인권사상이 전제되어 있고 이는 곧 인도주의, 박애주의와 연결되어 이미 혁명정신인 우애, 박애정신을 당연히 포함한다고 하겠다.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 박애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편집] 혁명의 의의와 영향프랑스 혁명은 일시적인 충격을 넘어,결코 소멸될 수 없는 확고한 성과를 남겼다. 여러 '혁명문서'가 그것을 선언적으로 제시했다. 1789년 8월 26일 '인권선언', 1791년의 헌법, 1793년의 헌법, 1795년의 헌법이 바로 그것이다. 1791년의 헌법이 입헌군주제를, 1793년의 헌법과 1795년의 헌법이 공화주의를 선언했는가 하면, 보통선거제를 규정한 1793년의 헌법과 1791년과 1795년의 헌법은 진일보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드러냈다. '인권선언'과 세 헌법은 자유,평등,박애라는 자연권의 보편적 적용을 통해 새로운 사회 및 세계가 나아가야 할 실질적이고 위대한 원리를 천명했다.
프랑스 제국의 성립 또한 나폴레옹 1세는 본인이 직접 황제관을 썼으므로 교황 비오 7세는 꼼짝없이 축복기도를 하고 그를 포옹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로써 프랑스 제국이 출범하게 된다.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 유럽 열강의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 제국의 등장은 나폴레옹 1세의 권력 강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혁명이 자국에까지 미칠 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동시에 군사적인 면에서의 위협도 증가하였다. 열강 각국은 조속히 대(對)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 제국에 대항하였다. 프랑스 국내에서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왕정을 타파하고 공화정을 세운 것에 역행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친자코뱅파의 반발을 불러들였다.
프랑스 제국의 번영 1805년 나폴레옹 1세는 아미앵 조약을 파기한 영국을 침공하고자 도버해협에 인접한 불로뉴 쉬르 메르에 군대를 집결시켰으나 영국의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군이 바이에른을 공격하자 라인 강 방면으로 보냈다. 프랑스군은 곧바로 빈을 함락시키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연합군과 충돌하였다(아우스터리츠 전투). 그 결과, 나폴레옹 1세의 교묘한 작전 덕분에 프랑스군은 완승을 거두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 1세에게 항복을 선언하였다. 다음해, 나폴레옹 1세는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고, 독일의 서남쪽 나라들을 합쳐 친프랑스 성향을 띤 라인 동맹을 성립시켰다. 더불어 독일 황제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사임하여, 오스트리아 황제가 되었다. 프랑스의 패권이 독일 중부에까지 미치자, 마침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도 이를 지지하여 1806년에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러시아 두 나라를 상대로 전쟁상태에 돌입하였다. 베를린을 크게 포위한 형태로 프로이센군과 대치한 프랑스군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승리로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프랑스군이 러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폴란드를 거칠 수밖에 없었는데, 폴란드인들의 협력을 구하고자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영토 분할로 인해 와해된 조국을 재건시켜주겠노라 약속하였다. 1807년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함으로써 마침내 러시아를 굴복시키게 된다. 나폴레옹 1세와 알렉산드르 1세는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이미 프랑스의 세력하에 있던 폴란드를 바르샤바 공국으로 분립,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지정하였다. 또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대폭 빼앗아, 이들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나폴레옹 1세는 이 날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해방 전쟁 전개 프랑스 제국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을 차례대로 굴복시킴으로써 국력이 절정기에 다다랐지만, 대륙 밖에서는 아직도 영국이 반프랑스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굴복시키고자 영국의 경제적 고립을 노린 대륙봉쇄령을 발동시켰다. 대륙봉쇄령은 당시 산업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 경제의 세계적 중심지로 떠오르던 영국을 대륙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는커녕 반대로 영국이라는 교역상대를 상실한 대륙 각국의 경제가 피폐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나폴레옹 1세의 정복활동은 계속되었으며 새로운 타깃은 서쪽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였다. 당시 스페인 왕실 내의 내분을 이용한 그는 1808년 군대를 파병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침공하였다. 스페인 국왕과 포르투갈 국왕은 국외로 도피하였다. 얼핏 프랑스가 두 나라를 모두 차지한 것처럼 보였지만,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스페인 국민들이 반(反)프랑스 게릴라전을 개시하였고, 영국도 이들을 지원하였다. 이후 프랑스는 이베리아 반도에 군을 계속 주둔시켜야만 하였다. 이렇게 이베리아 반도의 정세가 불안해짐에 따라, 완벽히 제압했다고 생각한 동쪽에서도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809년의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항거하자, 나폴레옹 1세는 순식간에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빈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에게 다시는 자신에게 반항하지 않게 하도록 그의 딸 마리 루이즈를 자신의 아내(실질적으로은 인질)로 줄 것을 억지로 강요하였다. 당시 나폴레옹 1세와 조제핀 사이에는 후계자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세습을 통해 정권의 존속을 바랐던 나폴레옹 1세에게 있어서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확고한 후계자 확보는 반혁명을 막기 위해(구체적으로는 부르봉 왕조의 부활 저지) 자신의 즉위를 지지해준 국민에 대한 의무이기도 했다. 나폴레옹 1세는 오스트리아 점령 직후에 조제핀과 이혼한 후, 오스트리아와 혼담을 주고받았다. 1810년 나폴레옹 1세와 마리 루이즈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며, 곧이어 나폴레옹 2세가 탄생하였다. 적자에 탄생에 기뻐한 나폴레옹 1세는 갓 태어난 아기를 로마왕에 임명하였다. 1812년 러시아는 프랑스 육군원수 베르나도트가 섭정으로 있는 스웨덴과 공조하여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재개하였다. 결국 두 나라는 1813년에 틸시트 조약을 파기함으로써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맞게 되었다. 이 때, 러시아군은 침공하는 프랑스군에 대항해 방어공세로 나섰다. 그러나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연달아 패하였으며, 결국 그해 초가을에 수도 모스크바를 프랑스에 내주게 되었다.
프랑스 제국의 종식 당초 나폴레옹 1세는 프랑스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폴레옹의 안이한 생각을 뒤집은 것은 또다시 프랑스 혁명의 수출품인 민족주의의 발흥이었다. 조국이 유린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러시아인들은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고, 반나폴레옹의 상징이 된 알렉산드르 1세에게 강한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지지를 배경으로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에 대해 강하게 저항했으며, 또한 프랑스군이 지나가는 길마다 농민들이 게릴라전을 개시하게 된다. 한편 프랑스군은 예상이 빗나가자 다음 군사 목표를 명확히 정하지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철군 타이밍마저 놓치게 되었다. 결국 10월에 프랑스군은 모스크바 철군을 개시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프랑스 병사들은 러시아군 또는 농민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죽거나 굶주림과 추위로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12월에 파리에서 쿠데타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나폴레옹 1세는 병사들을 내팽개치고 파리로 귀환해 버렸다. 그러나 이때 벌써 러시아 원정 시 100만 명에 달하던 프랑스군은 완전히 괴멸한 상태였다. 이리하여 나폴레옹 1세의 러시아 침공은 러시아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전세를 만회한 알렉산드르 1세는 기세를 올려 패주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할 것을 명령하여 서쪽으로 계속 진군하였다. 여기에 프로이센이 동참하였으며, 오스트리아는 황후 마리 루이즈 문제로 대놓고 나서지는 못하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대해서 호의적인 중립으로 입장을 굳혔다. 프랑스 국내에 있어서 나폴레옹 정권은 나폴레옹 1세의 천재적인 군사 능력과 그가 전쟁에서 연거푸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정권 존속을 보장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에서의 대패는 나폴레옹 정권의 기반을 흔들기에 충분하였다. 12월의 쿠데타 미수 외에 정권 내부의 반역, 징병에 대한 반발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1813년 여름에 군을 재편하고, 서쪽으로 향하는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을 드레스덴 주변에서 맞아 진격 저지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전 교섭으로 시간을 지체하면서, 그 동안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에게 재편할 시간을 주게 되었으며 거기에다가 오스트리아군마저 적으로 돌린 일은 프랑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실패였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스웨덴 등 4개국 연합군은 동맹을 맺고 라이프치히에서 대접전을 벌였다. 나폴레옹은 18만 5000명에 달하는 프랑스군과 기타 및 군인들의 군대와 4개국 동맹군은 32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라이프치히 전투는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이났으며, 이는 제국의 결정적인 몰락을 가져왔다. 이 전투 이후 라인 연방 등 라인 강 동부의 프랑스 제국이 붕괴되었다. 1814년의 파리 침공전에서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교묘한 기만 공작으로 인해 파리로의 입성을 허락해 버렸다. 프랑스 제국 의회는 나폴레옹의 퇴위를 요구하였으며 나폴레옹 1세 휘하 장군들도 의견을 모아 퇴위할 것을 간청하여 나폴레옹 1세는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4월 4일 퇴위 문서에 서명하여, 엘바 섬으로 떠났다. 나폴레옹 1세가 퇴위한 후 프랑스에는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왕당파에게 있어선 1792년의 왕권 정지 이래부터의 염원이었던 복권이었지만, 오랫동안 외국에서 생활해 온 루이 18세로서는 혁명으로 진전된 프랑스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옛 제도의 부활을 기획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의 지지를 전혀 얻을 수 없었다. 한편, 유럽 열강은 나폴레옹 1세 이후의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결정하기 위해 빈 회의를 열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대립한 채로 전혀 진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의 틈을 노려 나폴레옹 1세는 1815년 엘바 섬에서 탈출하였다. 엘바 섬에서 벗어나 프랑스 남해안에 상륙한 나폴레옹 1세는 젊은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휘하 장수들의 대부분을 소집하였다. 그런 다음 시대에 뒤떨어진 루이 18세에 대해 실망했던 파리 시민과 병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순식간에 파리로 입성했다. 나폴레옹 1세의 갑작스런 귀환에 경악한 각국 열강은 다시 나폴레옹 1세에 저항하기로 뜻을 모으고,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연합군은 벨기에 지방에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을, 라인 방면과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오스트리아군을 주둔시키면서 광범위한 나폴레옹 포위망을 형성했다. 한편 나폴레옹 1세가 인솔한 프랑스군은 벨기에 방면을 침공하여, 영국군-프로이센군과 대치했다. 당시 영국군을 인솔한 사람은 웰링턴 공 아서 웰슬리로,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을 끈질기게 유지하며, 프로이센의 원군을 기다렸다. 한편 프랑스군은 지원 부대가 전투가 늦었는 데 반해, 영국군은 프로이센군이 합류하면서 반격에 나섰다. 나폴레옹 1세는 다시 패배하여 파리로 패주하였다. 나폴레옹은 재차 퇴위 문서에 서명하였고, 대서양의 멀리 떨어진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에 유폐됨으로써 나폴레옹 정부는 완전히 실각하여 제국은 붕괴하고 만다.
프랑스왕정복고 1792년 8월 10일 , 프랑스 혁명 정부는 국왕 루이 16세 체포권을 정지시켰다. 이듬 해인 1793년에 국민 공회가 루이 16세의 처형을 의결 단두대에서 처형했다. 이후 프랑스는 첫번째 공화국이 되었으며, 첫 제정으로 이행했다. 1814년, 나폴레옹 전쟁에 패한 황제 나폴레옹 1세 가 퇴위하고,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즉위하여 부르봉 왕가가 부활했다. 이듬해 나폴레옹이 엘바 섬 탈출하여 루이 18 세는 다시 국외로 망명했지만, 나폴레옹의 지배가 백일천하로 끝나자 귀국했다. 부르봉 왕조는 1830년 단절되었고, 오를레앙 왕조가 성립되었지만, 2월혁명에 의해 왕정은 멸망했다. 이후 둘째 제정의 시기를 거쳐 프랑스에 공화정이 정착했다.
프랑스7월혁명 1830년 샤를 10세는 해외 원정을 단행하여 군사적 위력을 과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할 의도에서 알제리로 출병했다. 이것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시위 운동이었다. 그러나 새로 선출된 의원은 반대파가 압도적이었다. 그는 무모하게도 아직 소집되지 않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새 선거법에 의해 선거권을 제한하려 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 혁명의 결과 성립된 왕정을 7월 왕정이라 부른다. 그러나 7월 왕정의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정치로 인하여 18년 뒤에 2월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벨기에 독립 혁명
폴란드11월 봉기
이탈리아 통일 빈 체제는 전반적인 붕괴는 면했지만, 부분적으로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또한 빈 체제가 전면적으로 붕괴된 것은 1848년 혁명의 때 였다.
프랑스7월왕정 7월 왕정(영어: July Monarchy, 프랑스어: Monarchie de Juillet)은 1830년 7월 29일 프랑스에서 발발한 7월 혁명 이후 오를레앙의 루이 필립을 국왕으로 하는 입헌군주제의 왕정이다. 오를레앙 왕조라고도 부른다. 1848년 2월 23일 발발한 2월 혁명으로 타도되었다. 1830년부터 1848년까지 프랑스의 국명은 프랑스 국민의 왕국(프랑스어: Royaume des Fran?ais)이었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지배 체제에서 귀족제의 폐지와 세습제의 폐지 등을 실행되는 한편, 선거권자는 전대의 복고 부르봉 왕가에 비해 두배로 늘어났지만, 그래도 전 국민의 0.6% 밖에 되지 않았다. 노동자는 권리가 없는 것과 같았고, 그들을 억압하는 형태로 산업 혁명이 프랑스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그것이 2월 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2월혁명 프랑스 2월 혁명은 1848년 2월 22일부터 24일에 걸쳐 일어난 의회 내 반대파의 운동이며,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성립하였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루이 필립가 입헌 군주로서 즉위하였다. 하지만 입헌 군주정은 소수 부유한 지주층이 권력을 잡은 체제였다. 1840년대 프랑스에서 산업혁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노동자와 산업자본가가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이들은 보수내각의 사임을 요구하면서 2월 혁명을 일으켰다. 2월 혁명중 치러진 보통선거에서 온건 공화파가 의회를 독점하자, 일부 과격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으며, 결국 나폴레옹의 손자 루이 나폴레옹이 공화정의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되었다. 2월 혁명은 7월 혁명보다 유럽 사회에 혁신적 변화를 몰고 왔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추방되고 빈체제가 붕괴 되었으며, 벨기에는 네덜란드 왕국에서 독립하였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통일 운동이 일어나,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고, 독일자유주의자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회의를 열고 통일을 논의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이 등장하였다.
프랑스 제2공하국 프랑스 제2공화국(프랑스어: Deuxi?me R?publique)은 프랑스의 두 번째 공화정이다. 프랑스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를 몰아내고 세운 정권이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851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정권을 장악하고 1852년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제2제국을 수립함으로서 제2공화국은 폐지되었다.
프랑스 제2제국 프랑스 제2제국 (1852년-1870년) 또는 제2제정은 나폴레옹 3세 통치기간의 프랑스의 정부 체제이다. 프랑스 제2제국은 대내적으로 공공사업·철도 건설·은행 사업을 비롯해 공업과 농업발전을 촉진시켰다. 대규모의 기술개발에도 열정을 쏟아 후원했으며 발명가들을 지원했다. 또 파리를 근대적으로 재건한 파리 개조 사업도 이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대외적으로 팽창 정책을 지지하였으며, 크림 전쟁등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하여 폐지되었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프랑스 제3공하국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어: Troisi?me R?publique fran?aise)은 1871년 보불전쟁(프랑스-프러시아 전쟁) 이후부터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게 점령당하고 해방될 때까지의 프랑스 정부를 말한다.
프랑스는 1870년에 일어난 보불전쟁에서 패배해 제2제정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를 내쫓고 1871년 아돌프 티에르 를 대통령으로 하는 제3공화국을 수립했다.같은 해에 일어난 코뮌주의자들의 자치적 사회주의 정권을 진압하고(파리 코뮌) 해군을 함정정비에 대한 계획을 세워 해군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보불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또는 보불전쟁(普佛戰爭)은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여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목적으로 일으킨,프랑스와 독일간의 전쟁이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가 먼저 전쟁을 선포한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이는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책동에 의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1871년 1월, 파리 시 교외에 위치한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프로이센 국왕이었던 빌헬름 1세가 초대 독일 제국 황제로 추대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외에 독일은 알자스 및 로렌 지방을 획득하였으며 많은 전쟁 보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전쟁 후 독일-프랑스 관계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까지 적대적인 사이가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의 견제를 위해서 프로이센이 필요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앞서 전쟁에서 진 후유증을 수습하고, 전쟁 후 다시 봉기한 헝가리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을 선포하고 헝가리의 자치를 인정하는 등 국내적으로 어수선한 상태여서 이 문제에 관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비스마르크로부터 1856년 파리 회의에서 결정된 흑해의 비무장화 조약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에 프랑스의 동맹제의를 거부했으며, 계속하여 친 프로이센 경향을 보여왔다. 프랑스는 1867년 4월경 오스트리아에 동맹을 제의하나 오스트리아는 기본적으로 발칸에 관심이 있었고, 반대로 프랑스는 발칸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탈리아 역시 프랑스가 로마 교황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에 반발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스페인 왕위계승문제1868년,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가는 쫓겨났고, 혁명 지도자들은 프로이센 빌헬름 1세 국왕의 사촌인 레오폴드 공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하였다. 레오폴드 공은 이를 거절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 소식을 듣고 전쟁의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빌헬름 1세는 반대했지만, 비스마르크는 1870년 6월 21일에 수락발표를 해버렸다. 프랑스는 이에 반발하여 프로이센 인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철회하라는 문서를 보냈다. 7월 12일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철회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레오폴드 공은 스페인의 왕이 되지 못했고, 스페인에서는 1871년 혁명가 아마데오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엠스 전보 사건전쟁 선포 전인 1870년 7월 7일, 프랑스의 베네데티 대사가 빌헬름 1세의 휴양지인 엠스에 나타나 빌헬름 1세에게 이런 일의 재발 방지를 확실히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다. 빌헬름 1세는 그런 문제는 관심없다며 사실상 거절했다. 나폴레옹 3세는 평화와 프로이센의 항복을 바랐지만, 그랑몽과 파리 시민등 극우파들은 빌헬름 1세의 확실한 보장을 요구하며 실재적 행동을 보일 것을 요구했다. 또한 당시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공략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보다는 빌헬름 1세의 "철회 보장"이 핵심 이슈가 되었다. 그라몽은 서면 보장을 요구하면서 협상 기한을 7월 12일로 하는 최후통첩을 발한다. 동시에 빌헬름 1세는 레오폴드의 스페인 왕위 수락을 공식적으로 취소했다. 다음 날인 7월 13일, 베네딕트와 빌헬름 1세가 우연히 회동하는데, 그 내용을 비스마르크가 내용을 왜곡하여 영국 신문에 공개하였다.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가 프랑스에게 스페인 왕위 계승 건에 대한 철회 문서의 내용을 변경하였다. 1870년 7월 14일, 비스마르크가 조작한 내용이 신문에 실렸고, 이는 나폴레옹 3세의 분노를 일으켰다. 프랑스 정부는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다. 7월 25일 자 런던 타임즈에는 베네딕트가 벨기에 병합을 거론한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이 또한 비스마르크가 흘린 것이다.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보고 비스마르크가 전쟁을 원함을 알게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 및 프로이센과 서둘러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1870년 8월 16일, 프로이센 중장기병 7기가 마르-라-투르 전투에서 프랑스 대포를 부수고 있다.
1870년 7월 14일, 프랑스 국민과 프로이센 국민 모두 서로에게 분노하였고, 프랑스가 먼저 전쟁을 선포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이 전쟁이 방어 전쟁임을 주장하면서 맞대응을 하였다.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참패해 괴멸되었다.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고, 파리 시민들은 파리 코뮌를 세우고 계속 독일군에 저항하였으나 4개월 만에 항복하고 만다. 프로이센군은 파리에서 시가행진을 하였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한다. 이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아주 굴욕적인 일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1856년에 맺은 해협에 관한 협정을 파기한다. 프랑크푸르트 조약1871년 5월 18일, 양국은 종전을 위해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체결한다.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한편, 프랑스는 전쟁 후 공화국을 선포했고, 나폴레옹 3세는 퇴위했다. 그러나 부르주아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와 노동자, 사회주의자, 파리 빈민들이 주축이 된 파리코뮌 간에 내전이 발발했다. 파리 코뮌은 근대 역사상 최초로 시민들이 세운 사회주의 정권으로, 정부군의 무차별 학살과 투옥으로 진압당했다. 그렇다고 하여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완전히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제3공화정이 수립되었지만, 왕당파, 공화파, 사회주의자들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파리코뮌1871년 파리 코뮌(프랑스어: Commune de Paris,1871년 3월 18일~5월 28일)또는 파리 꼬뮌은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 민중들이 처음으로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이다. 세계 처음으로 노동자 계급의 자치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라고 평가되고 있는 파리 코뮌은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책들을 실행에 옮겼으며, 단기간에 불과하였지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 3월 3일부터 마르세이유, 리옹, 생테티엔, 툴루즈, 나르본, 그레노블, 리모쥬 등의 지방 도시에서도 같은 코뮌 결성이 선언되었지만 모두 단기간에 진압되었다
보불전쟁1870년과 1871년에 걸친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정부의 무능함에 반발, 프랑스 민중들이 일으킨 항쟁이 파리 코뮌의 첫 시작이다. 파리 시민들의 농성에도 불구하고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이 체결되면서 그 해 2월 12일 강화조약을 토의할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설치되고 임시행정장관에 L.A.티에르가 임명되었다.
1871년 3월 파리 코뮌 참여자들이 쳐놓은 바리케이드
중앙위원회이를 계기로 시민과의 마찰이 생겼으나 곧 정규군과 국민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19일 양자의 대표는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중앙위원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코뮌(인민의회)의 선거가 실시될 것이며, 중앙위원회는 그 때까지의 잠정기관임을 분명히 하였다. 26일 실시된 선거의 투표율은 절반정도였으며 85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1871년 3월 28일에 코뮌의 성립을 선포하였고 이후 5월 20일까지 파리를 자치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인민의 단결파리코뮌에 참여한 인민들은 야간 이념 학습을 통해 단결하였기 때문에 70일간 자치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파리 코뮌은 프랑스를 자유로운 코뮌들의 연맹체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인민들에 의한 지방정부인 코뮌을 수립하라는 호소문을 풍선에 매달아 날려 보냈다. 마르세유 등에서도 코뮌 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대단했으며, 10시간 노동,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제빵노동자의 야간노동 철폐, 종교와 정치의 분리 등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파리 꼬뮌이 존재하는 동안 파리에서는 민중들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었다. 파리 코뮌은 다양한 이념을 가진 분파로 나뉘었는데 자코뱅파, 블랑키파, 무정부주의자, 제1인터내셔널파와 프루동파가 존재하였는데 대체적으로 무정부부의와 사회주의로 나눌 수 있다. 코뮌의 진압과정1871년 5월 21일 마크 마옹(Mac-Mahon)의 지휘 하에 정부군은 코뮌을 진압하기 위해 파리로 진입하였다. 프랑스 정부군을 지원한 나라는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벨기에, 영국이 있었다. 당시 파리 시민들은 튈르리 궁전 정원에서 코뮈나르(코뮌 지지자) 전사자 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음악회에 참석했었다. 이 틈을 타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다. 미리 심어놓은 간첩으로부터 생클루 문 인근에 수비대가 없다는 하얀 손수건 신호를 받은 베르사유군은 일차 선발부대를 보내 일대를 장악했다. 긴박한 소식이 코뮌 평의회에 알려지자 평의원들은 서둘러 산회한 뒤 방위태세를 갖추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코뮌 군사위원회 대표 샤를 들레클뤼즈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 군국주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금술을 달고 군복의 솔기를 금빛으로 장식한 참모장교는 이젠 싫다. 민중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혁명을 알리는 종소리는 울려 퍼졌다. <중략>… 시민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싸우고, 필요하다면 여러분과 함께 죽을 것이다. ” 밤이 되면서 시내에 들이닥친 정부군 본대 2만 명은 눈에 띄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발포했다. 파리의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파리코뮌의 마지막 "피의 일주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죽은 사람의 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는데, 적게는 1만명 부터, 많게는 5만 명까지로 다양한 설이 있다. 진압 후 파리코뮌의 연루자 10만여 명이 체포되어 그 중 4만여 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었다. 코뮌에 참여했던 7,500명의 인사들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누벨칼레도니로 종신 유배되기도 했다. 파뤼 코뮌은 비록 실패했으나, 미국 보수언론들이 파리코뮌같은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며 노동 운동 탄압을 선동했을 정도로, 기득권층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코뮌의 성과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은 파리코뮌 진압 이후에도 계속 생명을 유지한다. 사회주의 정당 운동은 1879년 창당된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 연맹 (F?d?ration des travailleurs socialistes de France, 약칭 FTSF)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936년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회(Section fran?aise de l'Internationale ouvri?re, 약칭 SFIO)와 프랑스 공산당, 급진당(Radical)의 "인민전선"이 원내 과반수를 차지하여 레옹 블룸이 총리로 선출되어 상당기간 여당으로 있었다. 이후 1981년에는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가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출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코뮌이 일어난지 정확히 110년 뒤였다. 파리 코뮌기간동안 여성 참정권의 실현, 아동 야간 노동의 금지, 정교 분리등의 혁신적인 정책을 주장하였고, 달력도 프랑스 혁명력이 이용되었다. 덧붙여 선택된 의원안에는 사실파의 화가인 쿠르베도 일원이 되고 있다. 평가훗날 소비에트 연방의 창시자 레닌은 파리 코뮌을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 예행연습"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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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촛불방송 원문보기 글쓴이: 부산촛불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