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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시지에서 나는 성경 전체에 걸친 생명나무의 원칙을 하나의 삽입부로서 다루고 싶은 부담이 있다.
창세기의 처음 두 장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씨로 뿌려졌고 이 씨는 성경의 다음 책들에서 점차 자라며 신약에서 곡식으로서 나타나고 요한계시록에서 수확된다.
이것이 신성한 말씀의 기본 원칙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심에 있어서 매우 철저하시며 한 마디의 말씀도 허비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단어를 가장 경제적으로 사용하신다.
더욱이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일관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성경의 첫 부분에서 우리가 본 것은 또한 성경 전체에도 있으며 끝에도 있다.
창세기 2장에 있는 두 나무-생명나무와 지식나무-에 관한 기록은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나무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을 주의깊게 읽어본다면 우리는 성경 전체에 두 노선,즉 생명나무의 노선과 지식나무의 노선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간단하게 생명 노선과 지식 노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노선은 창세기에서 시작되어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성경의 다음 책들에서 계속된다.
우리가 메시지 13에서 지적했듯이 생명 노선의 종점은 생명나무가 다시 한번 나타나는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생명수의 강 또한 새 예루살렘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강이 성 전체를 통과하여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수의 성인 새 예루살렘은 생명나무의 노선의 최종 완성이다.
지식 노선은 새 예루살렘 성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불못으로 결론지어질 것이다. 성은 생수의 성이며 못은 타는 불의 못이다.
성경의 계시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두 흐름을 본다. 하나는 생수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 흐름이다. 생수의 흐름은 에스겔 47장과 계시록 22장에 계시되어 있다.
에스겔서에서 생수는 하나님의 집에서 흘러나온다. 계시록 22장에서 생수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다니엘서 7장 9절과 10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흐름, 곧 불의 흐름을 본다. 생수는 살리고 물 주기 위한 것이지만 불의 강은 심판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온 우주를 통과하여 심판 안으로 흐른다. 물의 강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와서 모든 적극적인 것들과 함께 새 예루살렘 안으로 흐를 것이다. 불의 강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와서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불못 안으로 쓸어갈 것이다.
성경의 첫 부분에는 두 노선, 즉 생명 노선과 지식 노선의 출발이 있다. 성경의 끝에는 두 결과, 즉 두 완성인 생수의 성과 타오르는 불의 못이 있다.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당신은 어느 노선에 있는가? 생명 노선은 분명히 올바른 노선이며 지식 노선은 틀린 노선이다.
구속된 백성인 우리는 분명히 올바른 노선인 생명 노선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과 우리의 일, 즉 우리의 생활 방식과 하나님을 위한 일에 있어서는 틀린 노선 안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생명 노선 안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우리의 행함과 일은 지식 노선 안에 있을 수 있다. 성경은 먼저 지식 노선을 떠나 생명 노선에 머물고 생명 노선으로 돌아오라고 충고한다.
일단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며 우리의 구원은 영원토록 보장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의 일상적인 행함과 주님을 위한 일에 관해 우리에게 경고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 영 안에서 행하라(갈 5:16)고 경고하며 그 영으로 심으라(갈 6:7-8)고 경고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은 불로 소멸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교회의 건축자들인 우리에게, 합당한 재료로 건축하기 위해 조심하라고 주의시킨다. 만일 우리가 금과 은과 보석으로 교회를 건축하면 이 일은 새 예루살렘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진 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면에서 바울은, 나무와 풀과 짚은 오직 불타는 데에만 유용하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고전 3:12-15). 그런 재료들로 건축된 모든 것은 불의 강에 의해 불못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자신과 우리의 행함과 우리의 일에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우리 자신은 올바른 노선 안에 있어야 하며 우리의 일상적인 행함과 일 또한 올바른 노선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와 우리의 일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이 두 노선에 대해 극히 분명해야한다. 이 메시지에서 나는 생명 노선을 다루고 다음 메시지에서는 지식 노선을 다루려 한다.
생명나무가 창세기 2장에서 잠깐 나타났다가 창세기 3장의 끝에서 사람에게 닫힌 바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여러 번 마음이 언짢았다. 외관상으로는 생명나무가 사람에게 닫혔다.
그러나 사실상 약속된 구속을 통하여 생명나무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역대로 만지고 누리고 체험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이 생명 노선 안에 있는 적극적인 많은 사람들을 아주 간단하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타락했다가 구속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벨부터 시작한다.
1. 아벨-하나님의 길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함
아벨의 생활의 특징은 그가 하나님의 길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했다는 것이다(창 4:4). 하나님을 접촉하기만 하면 다 좋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어떤 길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했는가?
당신의 길 안에서인가, 하나님의 길 안에서인가? 하나님을 접촉한다고 주장하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회교도와 그리스도인들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방식으로 접촉한다. 로마서 10장 2절과 3절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했으며 하나님의 의에 순종치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접촉했다는 뜻이다. 회교도들은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있어서 더 열심이다.
만일 당신이 회교 사원을 방문한다면 당신은 회교도들이 절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있어서 종교적이고 경건하게 보이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천주교인들을 포함한 수많은 소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나 그 영 안에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봉사한다.
사람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근원은 지식밖에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의 골칫덩이 생각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명의 길 안에서가 아닌 지식의 길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한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의 길 안에서 그분을 접촉했다. 다음 메시지에서 보겠지만 그의 형인 가인은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접촉했다.
하나님의 길은 생명이고 가인의 길은 지식이다. 우리 모두는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아마 당신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위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발명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접근하며, 그 방법은 전적으로 지식에 속한 것일지 모른다. 그런 길을 따르지 말라.
우리는 아벨의 본을 관찰해야 하며 자신의 생각과 의견과 관념을 제쳐놓고 하나님을 접촉해야 한다.
『주여, 나는 당신의 길 안에서 당신을 접촉합니다. 나는 내 생각과 관념과 지식에 의해 당신을 접촉하지 않습니다. 주여, 당신이 내 길이십니다.』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생명나무이신 하나님을 누릴 것이다. 아벨은 생명나무이신 하나님께 참여했다. 그는 진실로 이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2. 셋과 에노스-주의 이름을 부름
아마 셋과 에노스의 이름은 당신에게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셋과 에노스는 인류의 셋째 세대와 넷째 세대이지만 성경은 그들을 하나로 간주한다. 아벨이 살해당한 후 생명 노선은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노선을 잇기 위해 셋과 에노스가 일어났다. 이 두 세대는 현저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창 4:26).
그들은 기도했을 뿐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불렀다. 만일 당신이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원본을 읽는다면 당신은「부르다」라는 단어가 다만 기도할 뿐 아니라 「부르짖다」라는 뜻임을 볼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만 「부르는」 방식의 기도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기도가 조용하고 심지어 침묵과 같다. 그러나 인류의 셋째 세대와 넷째 세대는 하나님을 접촉하기 위해서 그분께 부르짖고 그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시므로 우리의 말을 잘 들으실 수 있다고 말하며 논쟁하지 말라. 심지어 주 예수님 자신도 산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기도하셨다(히 5:7).
셋과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며 그분께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해 본다면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주님이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말했다(롬 10:12). 당신이 주님의 풍성을 누리기 원한다면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가령 당신이 새 신자로 하여금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지도록 돕는다 하자. 그는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나는 당신을 내 구주로 취합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이것도 좋은 기도이지만 그는 강하게 주님을 부르는 것이 더 좋다. 만일 그가, 『오, 주 예수여! 나를 위해 죽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의 영은 활발하게 될 것이며 그는 생생하게 주님을 접촉할 것이다.
인류의 셋째 세대와 넷째 세대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분을 부르는 이것은 점차 상실되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무시하며 경멸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서 떠날 수 없다.
평화롭고 문제가 없을 때에 당신은 냉정하고,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체면이 깎이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울 때, 가령 자동차 사고를 당했거나 갑작스런 병이 들었을 때 당신은 자연히 『오, 주여!』라고 하며 그분을 부를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그들이 주님을 부를 것이다. 문제가 닥칠 때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부를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바로 그분을 누리는 것이며 생명나무이신 그분을 먹는 것이다.
3. 에녹-하나님과 동행함
에녹의 생활의 특징은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창 5:22, 24). 그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성취하지 않았으며 다만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 깊은 것이다. 어떤 사람과 동행하려면 당신은 그를 좋아해야 한다. 만일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면 결코 당신과 동행할 수 없다.
먼저 당신을 좋아하고, 다음에 당신을 사랑할 때, 그 후에야 당신과 계속 동행할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고 싶어했다.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가 그분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처음 사랑을 잃었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셨다(계 2:2-4). 주님은 수많은 선한 일을 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보기 원하신다. 가령 아내가 남편을 위해 수많은 선한 일을 하지만 남편 앞에 있기를 원치 않는다 하자. 분명히 남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바빠서 내게서 멀리 있는 것을 원치 않소. 나는 항상 나와 함께 있는 아내를 원하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만일 우리가 창세기 5장 21절부터 24절까지를 주의깊게 읽는다면, 에녹이 육십 오 세부터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하여 삼백 년을 계속하여 그분과 동행했음을 볼 것이다. 그는 삼백 년 동안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에녹아, 너는 충분히 오랫동안 나와 동행했다. 나는 너를 내 자신에게로 데려오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휴거와 주의 재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당신은 휴거되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의 임재 안에서 살기 원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함으로 당신과 동행하기 원합니다.』 이런 사랑의 태도가 휴거의 준비요 조건이요 기초이다. 어떤 근거로 에녹은 휴거되었는가? 그는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근거로 휴거되었다. 에녹은 우리에게 뛰어난 본을 보인다.
4. 노아-하나님과 동행함
노아는 에녹의 발자취를 따라서 역시 하나님과 동행했다(창 6:9). 사실상 그는 삼백 년 이상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이 그 시대에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이상을 그에게 보여 주셨다.
노아는 타락한 족속 중 여덟 명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된 방주의 이상을 받았다. 노아처럼, 우리는 자신의 관념을 따라 행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과 일은 우리가 주님과 동행한 데서 받은 이상을 따른 것이어야 한다.
주님과의 일상적인 동행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갈망과 생각과 뜻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생각 아닌 하나님의 갈망을 따라 일하고 봉사할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분을 누렸다.
5. 아브라함-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주의 이름을 부름
아브라함은 노아보다 더 뛰어나다. 로마서 라이프 스타디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주입되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이끌어 내셨다(행 7:2).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 외에도 하나님은 여러 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창 12:7, 17:1, 18:1). 아브라함은 스스로의 힘에 의한 믿음의 거인이 아니었으며 우리와 똑같이 약했다.
영광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거듭거듭 나타나셨으며 그때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살 수 있도록 신성한 요소를 아브라함 안에 옮겨 부으셨고 주입하셨다.
아브라함의 체험은 우리에게, 충전된 후에는 잘 작동되지만 얼마 후에 다시 충전시켜야 하는 건전지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따른 아브라함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매우 흥미롭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어 그에게 거듭거듭 나타나심으로써 인도하셨다. 내가 전에 언급했듯이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분은 어떤 지도나 지침을 주시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따라 행했다. 만일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어떤 방향이면 아브라함은 다만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풍성을 누렸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체험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은 주의 이름을 불렀다(창 12:7-8).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손자인 야곱 또한 주의 이름을 불렀다.
이 세 세대가 똑같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불리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의 하나님이심을 뜻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분을 생명나무로 누렸다.
창세기 18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았을 때 나타나셨으며 약 반나절을 그와 함께 계셨고 심지어 그와 함께 음식을 드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로 불리워졌다고까지 말한다(약 2:23).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이야기하셨으며 친구로서 함께 음식을 드셨다.
분명히 우리 모두는 주님을 그렇게 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분깃은 창세기 18장에 있는 아브라함의 체험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 계시록 3장 20절에 의하면 주 예수님은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만일 누구든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잡수실 것이다.
매일매일 우리는 주님과 잔치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약 반나절 동안 주님과 식사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그분과 잔치할 수 있다. 우리는 아침 식사, 점심 식사, 저녁 식사 때에도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의 분깃은 아브라함의 분깃보다 더 높고 풍성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생명나무로 누렸다. 생명나무란 무엇인가? 생명나무는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유지시켜 주는 생명의 공급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이렇게 누렸다.
6. 이삭-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주의 이름을 부름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은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접촉했다. 그도 또한 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았으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창 26:2, 24-25). 그는 아버지의 모든 축복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누리는 길을 물려받았다.
7. 야곱-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주의 이름을 부름
부르심 받은 족속 중의 셋째 세대인 야곱은 결국 남의 것을 빼앗는 방식으로 살지 않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하나님을 접촉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살도록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주님에 의해 처리받은 후 그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배웠다(창 35:1, 9, 48:3). 이 길은 그가 물려받은 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에 의해 인도받은 길이었다.
8. 모세-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임재 안에 삶
모세는 가장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사람들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태어났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를 바로의 궁전에 두셨으며 그는 바로의 딸의 아들로서 왕족의 한 명으로 양육 받았다.
그는 애굽인의 손 아래 있는 동족의 고난을 알았다. 아마 그는 이것을 그의 친어머니인 유모에게서 들었을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런 소문은 모세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아마 모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애굽인들은 내 종족을 핍박해왔다.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
비록 모세가 선한 마음을 가졌지만 그 마음은 지식의 마음이었으며 사망의 마음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상황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있다. 그들은 격동되어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강함으로 행동했다. 결과는 실패였고 그는 완전히 실망했다. 결국 모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너무도 실망하여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내 동족을 위해 그렇게 선한 마음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나를 돕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내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으니 나는 상황을 잊어버리고 광야로 떠나야겠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복락을 걱정했지만 자신의 실패로 인해 상심하여 광야로 도망갔다.
거기서 그는 외롭고 낙담하여 양떼를 지키는 자가 되었다. 애굽인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일에 능한 자(행 7:22)인 모세가 지금은 패배하고 낙심하여 광야의 작은 양치기가 되었다.
어느 날 그러한 실망 가운데 하나님이 오셨다. 하나님은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의 이상 안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출 3:2, 16). 모세는 놀라서 이 떨기나무를 보려고 몸을 돌이켰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모세야, 너는 불타는 이 떨기나무와 같아야 한다. 네 자신에 의해 타거나 행동하지 마라. 너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틀린 길로 행했다.』 우리는 자동차를 예로 들 수 있다.
자동차를 움직이려고 할 때 자동차를 밀거나 끈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동력원(動力源)인 휘발유를 사용해야 한다. 휘발유가 탈 때 차가 움직인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자동차를 작동해야 한다. 이와같이 모세는 자신의 지식, 자신의 방법, 자신의 힘, 자신의 활동을 멈추기를 배웠다.
모세는 조상들처럼 주님의 임재와 나타나심 안에서 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는 스스로 행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과 하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행을 인도하기 위해서 주님은 모세에게, 『내 임재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주님께, 『당신의 임재가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으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 33:13-15)라고 말했다. 이것은 모세가 주를 위한 일에 주의 임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음을 보여 준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행하고 있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후 하나님은 그를 산으로 부르셨으며 거기서 그는 사십 일 동안 머물렀다.
산에 있는 동안 그는 완전히 하나님의 영광으로 주입되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서 빛났다(출 34:29). 이 산에서 모세는 생명나무이신 하나님의 누림을 완전히 체험했다.
생명나무는 믿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사라졌지만 모세 같은 사람에게는 나타났다. 모세는 영광의 산에서 생명나무이신 하나님을 누렸다.
노아처럼 모세도 하나님의 건축에 대한 이상을 받았다. 모세가 산에서 영광 안에 있는 동안, 하나님은 그에게 땅에 있는 그분의 거처에 대한 자세한 식양을 주셨다(출 25:9).
만일 우리가 사역하고 일할 때 하나님과 하나라면 우리의 일은 노동이 아니라 누림이 될 것이다.
내가 주님을 위해 말할 때 나는 주님을 엄청나게 누린다. 메시지가 끝나면 나는 만족함을 느낀다.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에 따른 모든 사역은 사실상 사역자들에게 일종의 음식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이렇게 섬기고 누렸다.
9. 이스라엘 자손-주의 임재 안에서 여행함
이스라엘 자손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들에 대해 나쁜 인상을 받기가 쉽다. 그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것을 상기할 때 우리는 실로 그들을 가련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에는 두 면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낮과 밤이 있다. 더욱이 모든 가정에는 거실이 있을 뿐 아니라 쓰레기를 모으는 곳이 있다. 우리가 어느 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성경에도 적극적인 것들과 소극적인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그토록 좋은 아브라함에게도 첩이 있었으며 이것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적극적인 것보다 소극적인 것을 그렇게 많이 주목해서는 안된다. 특히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대할 때 더욱 그렇다.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님의 임재 안에서 여행했다(출 13:21-22, 민 14:14). 그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이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의 의견에 따라 여행하지 않았고 다만 기둥의 움직임을 따랐다. 사실상 그것은 두 기둥이 아니라 한 기둥이었다.
그 기둥은 낮에는 구름과 같았고 밤에는 불과 같았다. 낮에는 밝은 햇빛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늘을 만드셨다. 밤에는 길을 밝히기 위해 그들에게 빛을 주셨다. 이 기둥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다.
그들은 또한 하늘에 속한 음식인 만나를 매일 먹었으며, 이것은 그들이 생명나무이신 하나님을 누렸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심지어 광야에서도 우리는 생명나무의 노선을 본다. 우리가 광야의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해 소극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들은 매일 생명나무를 체험했으며 하나님을 누렸다.
만일 우리가 오늘 오렌지 카운티(미국의 지방 이름:역자 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체험하고 하늘에 속한 만나를 누린다면 놀랍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분깃은 훨씬 더 좋다. 우리에게는 구름기둥인 성령이 있고 불기둥인 성경이 있다.
또한 우리에게는 하늘에 속한 만나이신 주 예수님이 있다. 우리가 오렌지 카운티의 광야를 여행할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는 생명나무이신 그분을 누린다.
10. 여호수아-주의 임재 안에서 살고 일함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부르셨을 때 모세와 함께 하신 것같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실 것임을 확신시킴으로써 그를 격려하셨다(수 1:5-9).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누린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한 우리는 오늘날의 여호수아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처럼 우리도 주의 임재 안에서 살고, 행하고, 일할 수 있다.
11. 기드온-주의 임재 안에서 싸움
기드온의 현저한 특징은 그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삿 6:12, 16). 그는 주의 임재 안에서 살고, 행하고, 일했을 뿐 아니라 주의 임재로 싸웠다.
우리 모두는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한면으로는 행함이고, 다른 면으로는 일하는 것이고, 또 다른 면으로는 전쟁이다. 행하든지 일하든지 싸우든지 우리는 주의 임재 안에 있어야 한다.
주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은 다만 생명나무이신 주님을 누린다는 뜻이다. 기드온은 생명나무이신 하나님을 누렸다.
12. 사무엘-기도하고 주를 부름
사무엘은 구약에 있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다. 성경은 사무엘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코 범치 않겠노라고 했음을 말한다(삼상 12:23).
사울 왕이 하나님께 득죄한 것을 듣고 사무엘은 슬퍼하며 온 밤을 주님께 부르짖었다(삼상 15:11).
그러므로 성경은 사무엘을 주의 이름을 부른 사람이라고 말하며(시 99:6),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렘 15:1). 이 모든 것은 사무엘이 계속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주의 이름을 부른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있는 사람이었음을 계시한다.
주의 임재 안에 서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는 주님을 누렸으며 생명나무이신 그분께 참여했다. 이런 동기와 누림은 그를 인류 역사상 놀라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13. 다윗-하나님을 믿고 앙망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누림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앙망한 사람이었다(삼상 17:37, 45, 30:6). 다윗의 생활의 비결은 하나님의 집에 계속 거하기를 갈망했으며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기를 갈망한 것이다(시 27:4, 8, 14).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다는 뜻이다.
더욱이 그는 살진 것이요 복락의 강이신 하나님을 누렸다(시 36:8-9). 다윗은,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라고 말했다. 이것은 다윗이 고대에도 하나님의 생명을 생명나무로 누리고 그의 안에서 흐르는 강으로 누렸음을 증명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누림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 중의 위대한 왕이 되게 했다.
14. 다니엘-하나님께 기도함
우리는 모두 다니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만 다니엘의 예언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 뿐이다. 그들은 다니엘 2장에 있는 거대한 형상, 즉 금으로 된 머리와 은으로 된 어깨와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와 철로 된 발과 진흙으로 된 발가락을 가진 형상에 대해 알기 원한다.
또한 그들은 다니엘 7장에 있는,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 모든 젊은이들은 이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 여러 해 전에 나는 이런 것을 연구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했으나 결국 다니엘서의 다른 면을 더욱 귀히 여기게 되었다.
지금 나는 다니엘서에서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계속해서 주님을 접촉했던 한 사람을 보기 때문에 이 책을 좋아한다(단 6:10-11, 9:3-4, 10:2-3, 12). 다니엘 6장에 의하면 다니엘은 방백들과 총리들 중에서 탁월한, 다리오 왕국의 총리였다.
다른 방백들과 총리들은 그를 시기하여 멸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다니엘은 이것을 알았을 때 주님께 가서 기도했다.
백 이십 명의 방백들이 음모를 꾸민 목적은 다니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예루살렘 쪽으로 난 창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다.
다니엘은 칠십 년의 방랑 후에 포로 생활이 끝난다는 것을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알았을 때 기도하기 시작했다(단 9:2-3).
그때 그는 또 하나의 이상을 받았으며 대답을 받을 때까지 삼 주 동안 계속 기도했다(단 10:1-3, 12). 다니엘의 기도 생활은 거룩한 생활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바벨론의 이교도 땅에서 거룩한 생활을 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은 왕의 음식, 곧 우상에게 먼저 드린 후 왕과 그 신하들이 먹는 그 음식을 거절했다(단 1:8).
다니엘은 그 음식을 거절했고 하나님을 극도로 누렸다. 그는 하나님을 생명나무로 누렸다.
15. 예수님-하나님으로 인하여 산 하나님의 아들
신약에 올 때 우리는 신약의 생명 노선 안에 있는 첫 사람 주 예수님을 본다. 예수님은 생명나무를 누렸을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생명나무였다. 그분은 아버지께로부터 왔으며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고 스스로 말씀하셨다(요 6:57). 그분은 지식과 학문에 의해 살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분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살고 행하고 일하셨다(요 14:10).
16. 신약의 믿는이들-주님으로 인해 삶
신약의 믿는이들인 우리의 운명은 다만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을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요 15:5).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누린다는 것의 의미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분을 먹는 그 사람이 그분으로 인하여 살 것이기 때문이다(요 6:56, 14:19). 주 예수는 우리의 생명의 떡이요 생명나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먹어야 한다. 생명나무는 음식의 형태로 나타난 생명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은 그분이 생명의 떡이고( 35절) 그분의 살이 참된 양식이라( 55절)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분 자신을 음식의 형태 안에 있는 생명 공급으로 나타내셨다.
그분을 먹으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으로 가질 것이며 그로 인해 살 것이다. 이것이 생명나무에 대한 참된 누림이다.
17. 바울-주님을 살아냄
신약의 모든 믿는이들 중에서 바울은 주님을 살아 낸 사람의 본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고 계시며 그가 사는 생활은 주 예수의 믿음에 의한 생활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사되었으며 그의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 1:21)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이었으며 그의 생명 공급이었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생명나무로 누렸기 때문이다.
18.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생명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삶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이 머리를 누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몸은 머리와 분리될 수 없다. 몸이 머리와 분리되는 것은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온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께 종속되며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산다(엡 1:23, 골 3:4). 이로써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생명나무로 누릴 수 있음을 본다.
19. 새 예루살렘-생명나무가 있는 생명강에 의해 유지됨
성경의 끝에서 우리는 생명나무의 완성인 새 예루살렘을 본다. 이성의 중앙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강이 있으며 강 안에는 달마다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자란다(계 22:1-2). 우리의 운명과 영원한 분깃은 생명나무와 생명수의 누림이 될 것이다.
성경은 약속과 부르심으로 결론을 내린다. 약속은 계시록 22장 14절에 있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갈 …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에서 볼 수 있다.
부르심은 계시록 22장 17절에 있는,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끝나며 생명나무이신 하나님을 누리며 생명수이신 그분을 마심으로 끝난다. 이것이 생명 노선의 완성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으로 누리며 생명나무의 노선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돌보실 것이다.
주님을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누림으로 우리는 일상 생활과 행함과 일을 해야 하며 교회를 건축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관념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신성한 요소에 의한 것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가야 할 길을 본다.
주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사 부디 우리 모두가 생명 노선 안에 계속 머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