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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본인이 저에게 CD를 주시기에 퍼 온 것 입니다.독도 이상훈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1.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말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쓰이는 용어로 광의와 협의로 구분된다. 넓은 의미로 볼 때, 이 용어는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들이 그 기간동안 근대화되었다는 것인데, 한국을 비롯하여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와 달리 좁은 의미에서는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 식민통치에 의해 우리 나라가 근대화되어 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국민이 알고 있기로는, 일제의 통치가 우리의 근대화 과정을 크게 왜곡시켰다는 사실이다. 민족분열정책과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국토와 민족이 수탈되었고, 그로 인하여 근대화 과정이 왜곡되었으며, 이에 대한 저항인 독립운동은 세계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를 가리켜 식민지 수탈론이라 일반화 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일제의 식민 통치가 한국 근대화를 만들어 주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등장하였다. ‘식민지 자본주의화론’, ‘식민지 개발론’, ‘식민지 공업화론’, ‘식민지 산업화론’, ‘식민지 미화론’ 등으로 불리는 이 논리를 듣는 순간, 한국인이라면 거의 모두가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특히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일본인만이 아니라 한국인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도대체 이 이론은 어디에서 왔고, 그 내용이 무엇이며,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친일파를 정리하지 못하여 많은 문제점을 보였던 우리의 역사가 다시 과거의 ‘식민지 미화론’에 집착하면서 장차 ‘신식민지 기대론’까지 등장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에 부딪칠 수 있기 때문이다.
2.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두
1) 이론 대두의 배경
일본 정치인들은 일제 강점기에서나 해방 후에도 한국과의 관련 문제에 대해서 ‘식민통치 미화론(혹은 식민지 시혜론)’과 ‘한국 강점 합법론’이라는 두 가지 견해를 유지해 왔다. 이 모두 식민사관의 핵심인 ‘정체성론’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정체성론이란 한국의 역사는 발전하지 못한 채 정체되었으며, 따라서 일본이 한국의 발전을 위해 합병했다는 논리였다. 이들은 한국의 역사가 일본 보다 1000년이나 뒤졌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 시켰다.
‘식민통치 미화론’은 ‘식민지배가 한국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발전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고, ‘강점 합법론’은 ‘일본이 한국을 무력이나 불법에 의해 강점한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병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한국을 무력으로 불법 강점한 사실과 민족말살을 감행한 사실을 부인하는 한편 그들의 식민통치가 한국의 낙후성을 극복하고 근대화에 기여한 것처럼 주장하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사관에 입각한 ‘침략 정당화론’이라 할 수 있다. 그 논리가 1950년대 이후 지금까지 ‘망언’의 역사로 점철되었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논리화한 작업이 197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였고, 그 바탕은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이었다.
1960년대이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고, 신흥산업국(NICs, NIEs)에 이르렀다. 세계 학자들이 이에 그 원인을 규명하려는 작업을 진행시켰고, 일본이 앞장섰다. 그들은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이 전후에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것에 착안하여, 두 나라가 아시아에서 신흥산업국에 도달한 요인은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요,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공헌했다는 이론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해방 이후 줄곧 계속된 일본인의 망언과 연결되었고, 과거 식민정책이 피식민지의 경제를 성장시켰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세계학계의 제국주의적 시각과도 같은 것이었다.
서양, 특히 유럽의 역사가들은 유럽 중심 사관, 유럽 우월주의, 백인 우월주의에 젖어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적 시각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근대화의 길목에서 서유럽 세력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이 지역은 그들이 필요로 했던 원료의 공급지요, 자원 약탈지이며, 상품의 판매시장으로서 개척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끼리 시장쟁탈전을 벌였고, 그 아귀다툼 속에서 침략국들은 선진국가로, 침략을 받은 국가들은 후진국가로 자리매김되었다. 아울러 침략국들이 가진 종교와 사상에는 우월성을, 침략을 받은 국가와 민족이 가진 그것에는 열등성을 각각 심어 주었다.
서유럽 중심의 사관은 그들의 우월성으로 세계 각 지역을 개척하고 후진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의식을 기본으로 삼았다. 서유럽이 미국을 낳았고, 미국이 일본을 개항시켰으며, 다시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데에는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2) 일본 학계
‘식민지 근대화론’을 학계의 이론 차원으로 만들어낸 사람은 교오토(京都)대학의 나카무라(中村哲)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75년 이후 일본의 식민지배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 경제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아시아 NICs 4개국(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이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달성한 공통적인 요인을 찾고자 하였다. 이들 4개국이 가진 공통점으로 식민지 출신이라는 것을 끄집어냈고, 식민지 경험이 없는 국가들 보다 빠르게 근대화를 이룬 요인을 식민지배에 대한 긍정적 검토를 통해 찾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나카무라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제시하였다. 첫째 식민지화에 의하여 구사회(舊社會) 체제인 전근대적 사회경제구조가 상당히 파괴되고 해체되었다는 점, 둘째 그 위에서 본국(식민통치국가)에 종속하는 경제구조가 만들어졌다는 점, 셋째 그 과정에서 본국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달했다는 것인데, 특히 한국과 대만이 여기에 속한다고 정리하였다.
나카무라는 이러한 발상을 바탕으로 이론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는 사례를 제시하였다. 토지조사사업(1910년대), 산미증식계획(1920년대-1930년대 전반), 일본자본 중심의 급속한 공업화(1930년대 후반-1940년대 전반)가 그것이었다. 그는 일제 식민지배 특징의 하나로 ‘토지소유관계의 철저한 개혁’을 들었다. 자본주의화를 위해서는 전근대적인 토지소유관계를 폐지하고 자본주의에 알맞은 근대적 토지소유제를 확립해야 하는데, 일제는 한국에 철저하게 근대적 토지소유제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산미증식계획이 전근대적인 경제구조를 해체시키고 제국주의 본국경제에 종속된 경제구조를 형성시켰다고 주장했다. 이 계획이 농업의 상품생산화와 해외기술의 도입을 가져왔고, 농산물의 본국수출을 통해 단일문화의 형성을 진행시켰으며, 식민지 지주제의 성립과 농촌인구의 대량유출 등을 급속하게 진행시켰다는 것이다.
또 그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전반에 걸친 공업화와 관련하여, 1930년대부터 일본의 독점자본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함으로써 독점자본에 의한 공업화를 빠르게 진행시켰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 경제는 한층 강력하게 일본경제에 종속되어 갔고, 일본의 독점자본이 한국으로 진출하여 일본인과 한국인의 자본이 공업과 상업 등에서 신속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나카무라의 주장은 기존의 ‘식민지 수탈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의 자생적인 근대화 과정을 짓밟았고, 이에 따라 건강한 시민사회와 자본주의로 향한 길이 차단되고 왜곡되었다는 기존 논리를 뭉개버리고, 거꾸로 일제 지배가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기고 알차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리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시키는 망언과 길을 함께 걷고 있다.
3) 미국 학계
미국 학계는 우리의 경우보다 훨씬 자유스럽다. 창의성을 중시하는 풍토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들이 우리처럼 민족의식에서 기인하는 부담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전통적으로 유럽 중심 사관을 소유하고 있고, 더러는 평화봉사단(Peace Corps) 출신으로서 가지는 시혜적 인식의 굴레 속에 갇혀 있는 경우도 있다.
미국학자들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신흥산업국들이 1960년대 이후에 보인 경제발전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들도 일본의 식민지를 겪은 한국과 대만의 경제성장을 식민지시대와의 관련을 통해 이해하려 하였다. 그 결과 1990년대에 들면서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을 밝히려는 저술이 발표되었다. 제국(諸國)의 후예(後裔):Offspring of Empire(부제:고창 김씨 일가와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을 쓴 하바드대학의 에커트(Carter J. Eckert)와 한국기업의 식민지적 기원, 1910-1945: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enterprise, 1910-1945을 쓴 맥나마라(Dennis McNamara)에 의해 ‘식민지 근대화론’이 제기되었다.
에커트는 한국의 재벌과 자본주의 형태가 식민지시기에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밝히면서, “식민주의는 좋건 나쁘건 한국의 산업발달의 촉매이자 발상지이며, 이 식민주의를 연구해 나가다 보면 근대한국의 기원 그 자체와 얼굴을 맞대게 된다”고 하였고, “식민주의....성공적인 자본주의 성장의 방식을 남겨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에커트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의 산업발전의 근대적 기초를 다졌음을 주장하는 한편 일제의 강점으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잘려나갔다고 주장하는 ‘자생적 근대화론’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맥나마라도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사업가들의 기업이념과 조직 등을 검토하면서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에 접근하였다.
4) 한국 학계
한국 학계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소개한 사람은 경제사학을 전공한 安秉直이었다. 그는 1986년에 연구차 일본에 갔다가 나카무라(中村哲)를 만나고 그의 ‘중진자본주의 이론’을 수용하였다. 안병직에 의해 이 이론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경제사학계를 중심으로 한국학계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는 한국 경제발전이 20세기 후반기의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것은 한국의 경제발전이 자생적이라기 보다는 선진 제국으로부터 후발성의 이익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한국사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으로 불려지는 ‘자생적 근대화론’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는 또 한국사에서 ‘자생적 근대화론’을 부정하는 한편 과거 ‘침략과 저항’, ‘수탈과 저개발화’를 중심으로 했던 근대역사관을 ‘침략과 개발’, ‘수탈과 개발’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196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이 만주군의 육군 중위 출신 박정희(朴正熙)에 의해 추진되었음을 들어 한국의 자본주의화가 일제 식민지시대의 공헌으로 탄생한 결과임을 강조하기조차 했다.
3. ‘식민지 근대화론’의 내용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인물들은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을 거부하였다. ‘내재적 발전론’이란 일제 침략을 받기 이전에 이미 조선 후기의 농업, 상업과 화폐, 수공업과 공업 및 신분의 변동 등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근대지향적 요소가 등장했다는 것인데, ‘자본주의 맹아론’ 혹은 ‘자생적 근대화론’이라 불리어진다. 이 논리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첫째 일본의 역사에 비해 1천년이나 뒤떨어졌다는 식민지사관 가운데 정체성이론을 뒤집어엎은 것이다. 둘째 정체성론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한국침략의 정당성을 붕괴시키는 이론이다. 셋째 일제가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서 진출했고, 또 일제가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주장을 분쇄한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오직 근대화의 초점을 경제발전에만 맞추고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하고 나섰는데, 그 이론은 다음과 같다.
“식민지 역사의 두 축이 ‘수탈과 개발’이므로 식민지사에 관한 수탈사적 연구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수탈사 일변도는 역사의 실상을 왜곡하는 것이며, 민족주의적 의식을 고취한다는 의의는 있지만, 사회경제사 연구의 본래 목적인 사회경제 변화의 다이나미즘(dynamism:動力論)에 관한 연구는 찾아볼 수 없게 한다. 따라서 수탈론으로는 사회경제사적 연구가 부진해질 수밖에 없고, 일제시대사에 관한 연구가 주로 독립운동사에 관한 연구로 경도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내재적 발전론은 일국사적 시각이었다. 한국근현대사를 올바르게 연구하기 위해서는 일국사적 시각과 더불어 세계체제론적 시각을 가져야하며, 이러한 두 가지 시각을 가지고 행해진 연구결과를 종합함으로써 한국근현대사의 전체상을 구성할 수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논거자료로 토지조사사업․산미증식계획․식민지공업화 등을 내세우고 있다. 우선 그들은 토지조사사업이 한국에 근대적인 토지변혁을 가져왔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경제발전에 대한 정부의 역할은 제도개혁과 경제개발정책이다. 그런데 한국은 국가적 토지소유를 원칙으로 하는 결부제(結負制)를 기본제도로 채용함으로써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를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러일전쟁 이후 식민지 권력은 엔통화를 유통시켜 동전체제를 극복하고 궁내부와 행정부를 분리하여 정부재정에 황실재정를 편입시킴으로써 근대적 재정제도를 수립했다. 이 사업을 통하여 근대적 토지소유가 성립하였고, 토지의 상품화와 자본전환이 촉진되었으며, 또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지적제도․토지등기제도․근대적 지세제도를 포괄하는 근대적 토지변혁이 이루어져 한국의 사회 경제에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최근에 일본의 미야지마(宮嶋博士)는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수탈성이 없었고, 근대적 개혁이었으며, 농촌주민 또는 일반민중이 성과를 즐거워하고 협조했다고 정리했다. 이어서 그는 이 사업에 다음과 같이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였다. 첫째 이 사업이 종래 조선에서 확립되지 않았던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와 지세제도를 확립한 것이요, 둘째 광무양전(光武量田)과 지계사업(地契事業)이 내재적으로 근대적 토지제도를 확립하려고 시작했다가 완료하지 못한 것을 이 사업이 계승하여 근대적 토지개혁을 수행했다는 것이며, 셋째 이 사업을 계기로 조선사회에 커다란 변동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산미증식계획(1920-34)이 산업자금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크게 기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계획은 농지와 토지개량사업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토지개량사업이 수리시설의 확보가 중심 내용이므로 농업기반 구축사업이었고, 농사개량사업은 품종개량과 시비방법의 개선 및 농사기술의 개량 등이 그 내용이므로 소농경영의 합리화를 도모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산미증식계획은 미곡의 대일 반출이 기본목표였음에도 불구하고, 농업기반을 구축하고 농사방법을 크게 개선함으로써 한국 농업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라는 설명이다.
다음으로 ‘식민지 공업화’ 문제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가장 역점을 두고 주장하는 분야이다. 그들은 1930-45년에 걸쳐 시행된 식민지공업화정책을 한국인이 겪은 역사상 최초의 공업화 경험이었다고 했다. 1937년 이전에는 소극적으로 장려하는 선에 머물렀지만,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대륙병참기지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자금계획은 물론 물동량 계획에까지 이르는 그야말로 ‘국가총동원체제’의 일환이었다. 이 정책은 피식민지민의 가혹한 시련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한국인에게는 최초의 자본주의적 고통에 대한 경험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이러한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나름의 근대적 변신을 꾀해갔던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이상의 세 가지 사업을 중심으로 한국이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산업구조면에서 급격히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1920년대까지 순수 농업국이었던 한국이 1930년대에 들어 식민지공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식료품 및 섬유 중심으로 공업이 발전하였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대륙전진병참기지정책에 따라 금속공업과 기계공업이 발전하여 화학공업과 함께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그것이 군사공업화정책이 낳은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들은 한국경제의 발전은 자생적 발전 과정이라기 보다는 선진자본주의에의 캐치업(catch-up) 과정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러한 능력을 일제 식민지배하에서 이루어진 개방경제 때문에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1905년의 ‘화폐정리사업’은 일본과 동일한 통화권을 형성하였고, 그 결과 ‘조선경제는 일본제국의 한 지역경제의 위치로 전락’했다고 정리하였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한국경제의 발전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통계수치를 현란하게 제시하고 있다. 식민지시기 한국의 국내총생산량(GDP)이 1912-37년 사이에 연평균 4.15%씩 성장했는데, 이 수치는 같은 시기 세계자본주의 제국의 성장률보다도 훨씬 높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 고도성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본토의 그것을 상회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 그들은 공업생산액이 1920년대에 2-3억원 선에서 1939년에 20억원을 넘어섰고, 회사 수는 1920년대에 1,000개 정도였는데 1939년에 5,600여 개로 늘어났다고 했다. 이외에도 그들은 많은 종류의 산업 증가 수치를 제시하였고, 이와 함께 인프라스트럭쳐(Infrastructure; 하부구조) 등의 설비도 크게 증가하였다고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면서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이 가장 힘을 주고 있는 부분은 한국인이 식민통치하에서 자기개발에 노력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식민지 개발과정에서 한국인도 꽤 자유로운 공간을 가졌고, 그 속에서 농민․노동자․자본가의 여러 계급으로서 나름대로의 발전을 보였다는 것인데, 일본의 침략전쟁과 운명을 같이하려는 한국인자본의 능동성을 앞세우는 주장이었다.
또한 이들은 경제발전이라는 오직 하나의 기준을 갖고 조선후기,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를 일관되게 파악하고 있다. 그 결과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발전의 근원을 소급하다보면 1910년 이후의 현상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고자 그들은 몇 가지 논거를 제시하였다. 먼저 실질 경제성장률이 1911-38년에 3.7%였고, 1953-90년에 7.7%였는데, 이 수치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1930-38년이나 1960년대 이후의 공업화 기간에 특히 높았으므로, 두 시기의 공업화가 고도성장을 가능케 했다고 한다. 경제성장이 진행될수록 국민경제의 무역의존도가 높아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외국자본이 국민경제를 피폐시키는 그러한 수탈은 한국에서 있어본 일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외국자본이 기본적으로 자본축적을 가져왔기 때문이라 했다.
그들은 경제발전이야말로 한국근대사의 총결산이며 한국현대사의 유일한 전망이라고 했다. 경제발전을 제하고 나면, 단순한 우리의 희망에 불과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선택이었고, 1960년대 이래의 경제발전이 아무리 모순에 가득 차 있고 우리의 소망 수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더라도, 그것은 한국근현대사의 유일한 객관적 발전방향이었다고 했다. 또 경제발전이 객관적 발전방향을 이미 제시한 것이라면, 한국근현대사 연구방향에서 지금까지의 방황도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일한 전망은 남북한을 통틀어 한국현대사의 발전방향이 한국경제의 중진화로부터 선진화로의 방향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즉 “일제시대의 식민지사를 경제성장사적 맥락에서 고찰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크게 훼손하는 작업임에는 분명하지만, 한국근현대사가 ‘민족정기’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과학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할 것이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순수한 것’, ‘전통적인 것’, ‘민족적인 것’만을 남기고 그 외의 모든 것을 제거한다면, 한국근대사는 아마 완전히 공중 분해되고 말 것이다. 한국인의 새로운 삶의 개척에서는 당분간 경제발전이 그 중심축으로 될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일제 통치의 특징을 원시적이고 폭압적인 수탈체제라기보다는 전근대사회를 강력하게 해체시키고 근대적 제도이식과 공업화를 통해 식민지자본주의를 성립시킨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민족과 여타의 사회적 정치적 관계를 일단 본질이라는 시야에서조차 배제하는 방법론을 취하고 있는데, 이 점이 사회구성체 수준에서 계급이 있을 뿐 민족은 없다는 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4.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점
1) 논리 자체의 문제점
국내 국사학계에서는 수탈론의 시각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논평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혹평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한국에서 근대적인 토지소유관계를 이루었다는 주장은 이 사업이 제국주의 권력이 추진한 식민지 농정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근대성만을 강조한 것이다. 한국사에서 15세기 이래로 토지사유제가 확립되기 시작하여 구한말에는 이미 토지사유제에 의하여 토지의 사적 매매가 자유롭게 성행하고 있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시행되어 전국토의 약 50.4%를 일제 총독부 소유로 무상약탈하고 한국 농민의 권리를 소멸시킨 토지약탈정책이었으며, 토지개혁의 성격은 전혀 없는 식민지의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의 하나에 불과했다. 이 사업은 오히려 농촌사회의 극소수의 지주와 다수의 소작농으로 양극화시켰고, 전통질서를 파괴시켰다. 그리고 일제는 그 틈을 파고들어 민족 분열책을 획책했고, 민족항쟁의 터전을 짓밟아 나갔다.
대한제국의 양전지계(量田地契)사업과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소유권을 근대의 소유권으로 확정한 점이나 이에 근거하여 근대적 지세제도를 꾀하였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가졌다. 그러나 전자가 한국의 근대화 개혁의 기반이었던 것에 비해, 후자가 제국주의 자본축적의 공간으로 삼았다는 점, 전자가 농민의 경작권을 보호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었음에 비해 후자는 토지소유권 이외의 모든 권리를 부정하였다는 점, 그리고 전자가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이라는 전제하에 추진된 사업이기 때문에 기존의 향촌자치제의 경제사회적 질서를 보호하려는 것이었음에 비하여 후자는 일제가 자본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향촌질서를 파괴해 버렸다는 것 등의 차이가 있다. 이 말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 일제 토지조사사업 연고에 대해 펼친 여러 주장에 비판을 가한 것이고, 대한제국이 벌인 일련의 사업을 일제가 왜 방해하였는가 하는 점도 확연하게 드러내 보였다. 또 이완용이 토지조사사업을 ‘시혜’라고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둘째, 산미증식계획은 식민지적 이익을 극대화시켜 나간 사업이었다. 모두 3차에 걸쳐 추진된 이 계획은 생산량에서 증대를 가져와서 1930년대 초의 미곡 생산량은 1910년대 초반보다 1.5배로 증가하였다. 그렇지만 같은 기간 동안 일본으로 유출된 미곡의 양은 9.4배나 되었으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일본으로 유출된 미곡은 1910년대 초반에 총생산량의 7.1%에 불과했으나, 1930년대 초에는 45.6%로 6.4배나 되었다. 생산량은 일본인들이 말한 것처럼 증가하기는 했지만, 생산량의 절반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상황은 한국인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1920년에 39.8%이던 순소작인의 비율이 이 계획이 마무리되던 1932년에는 52.8%로 늘어났다. 전 국민의 반 이상이 경작지를 한 평도 가지지 못하는 순소작인이었다는 말이다.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던 1930대 초에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로 향했던 원인에는 이러한 조건이 중요하게 작용되었던 것이다.
셋째, 1930년대 이후의 ‘식민지 공업화론’에 대해 역사학계는 그 주장이 단순히 수치를 통계화 시킨 것에 지나지 않으며 민족모순을 그들의 연구 속에 담아내지 못했다고 공격하고 있다. 그들이 내건 수치가 아무리 진실하다고 해도, 일본자본주의의 확대현상에 불과할 뿐이며 그 자체가 한국 민족경제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들이 주장하는 한국인 자본도 대개 ‘제2의 일본인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어느 학자는 세계 식민통치사에서 식민지에 중공업을 발전시켜준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는 말을 내뱉었다. 일본이 한국을 예쁘게 보아 공장을 만들어 주었다는 말인데, 이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럽다. 일본이 한국을 영원히 자기의 소유 영토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그들 영토에 그들의 공장을 세운 것이지, 어찌하여 그 공장이 일본의 시혜로 건설되었다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특히 일제가 건설한 중공업 공장도 대륙침략을 위한 사업으로 함경남도 장진호와 부전호 부근에 설치된 군수공업이었다. 때문에 일제 패전 후 소련이 이것을 전리품으로 처리하여 실어갔던 것이다. 한국 경제발전에 초석이 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해방후 대기업의 99%가 새로 등장한 자본세력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주장에 무리가 있음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넷째, 그들이 제시한 통계 수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일제가 패전 때까지 한국에 투입한 자금이 60-70억 엔인데 비하여 유출된 자금은 눈에 드러난 것만으로도 302억 엔이요, 여기에 물자유출분 140억 엔을 합하면 440억 엔에 이른다. 식민지 전 기간의 추정 GDP 550억 엔의 80% 이상이 유출 또는 파괴됨으로써 당시 한국인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사실의 의미에 대해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또 1910년 1인당 쌀 소비량이 약 0.71석이었는데, 1919년에 0.62석, 1929년에 0.44석, 1938년 0.77석, 1944년 0.56석으로 줄어든 상황을 두고 한국이 일제하에서 발전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하기야 당시 한국인들이 일본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통계를 제시할 수도 있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을 접하면서 어처구니없다는 느낌만 가진다. 독재정권의 통제 아래 조사된 독재자에 대한 지지도를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째, 식민지시대와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성장을 직접 연관시키는 방식에는 논리적으로 빠진 공백이 크다. 이 연관이 왜 ‘필연적’인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남한의 경우 1960년대 이후의 새로운 여건과 정책을 통해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할 수 있고, 거꾸로 식민지공업화가 한반도 내에서 유기적 연관이 없이 일본 독점자본과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패망 후 기술과 인력 등의 부족으로 경제난을 겪었다는 설명도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빈곤의 원인을 식민지시기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섯째, 일제의 통치는 우리에게 근대화보다는 오히려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우선 경제적으로 1941년 현재 한국 내의 공업자본의 약 94%가 일본자본이었고, 한국자본은 겨우 6%에 불과하였다. 일제하에서 한국 민족경제의 산업혁명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있다하더라도 군수공업에 치중되었으며, 이마저도 북한에 집중되었다. 더욱이 농업부분에서는 반봉건적 지주제도가 지배하여 일제에 의해 엄호되었으니 일제 강점기의 한국경제는 ‘근대화’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저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곱째,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발전 주체에 대한 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 만약 그들 말대로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발전시켰다면, 그것이 우리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하자원을 개발하고 도로교통을 발달시켰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위해 펼친 사업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것이 자원을 약탈하고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가운데 잘못된 정책이 오늘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 상당히 많다. 때문에 지금도 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진정한 독립’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여덟째, 그들 논리는 비교 방법에 커다란 오류를 보이고 있다. 1910년의 통계와 식민시기가 끝난 1945년의 수치를 비교하면서 물동량과 생산력이 증가했다고 하여 발전한 것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마치 강도에게 납치되어 몇 년 동안 길러진 아이의 키와 몸무게를 납치되기 전의 그것과 비교하여 성장시켜 주었다고 강변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비교를 하려면 바르게 해야 한다. 즉 우리가 일제의 지배하에 들지 않았다면 1945년에 어느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통계 가정치와 1945년의 실제 수치를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납치되지 않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통해 성장했을 경우, 그 아이의 키와 몸무게에다가 납치 이후 키워진 그것과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은 차라리 상식에 속한다.
2) 경제논리만이 가진 문제점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일제 강점기의 한국 사회를 오직 경제논리만으로 이해할 경우에 심각한 문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분류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총체적인 상황에 크게 어긋나는 논리를 전개해서는 곤란하다. 경제 이외의 분야가 훨씬 넓고 깊은 부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독립협회 이후 추진되어온 의회중심, 자유민주주의적 지향을 왜곡시켜 버렸다.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민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고, 그 여망이 민주공화정체를 표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제가 민족분열정책을 추진한 결과, 민주주의 성장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특히 일제 강점은 남북분단의 직접적인 요인을 가져다주었으니, 바로 일제는 민족분단이라는 고통을 안겨준 원인 행위자였다. 뿐만 아니라 건강한 민주사회 형성을 방해하는 바람에 오늘까지도 그 악영향이 미쳐 민주주의 발전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일제 식민지배는 근대화를 향한 시민사회의 육성이 아니라 기본권마저 철저하게 짓밟은 것이었다. 시민의 기본권인 생명과 신체․재산․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권, 시민저항권, 평등권, 국민주권, 국민참정권 등 어떠한 권리도 한국인들은 갖지 못했고, 이를 가지려는 한국인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한편 사회신분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고, 시민사회로 급속히 변해가다가 일제의 침략과 강점으로 시민권 신장이 저지되었다. 이는 오히려 근대화에 장애가 된 것이다.
문화적으로 일제가 근대화를 방해한 사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근대화의 요소 가운데 민족문화의 발전도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그들은 철저하게 이를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쳤다. 한국어․한글․민족문화․한국이름․한국시조신앙․한국역사․민족의식 등을 말살하거나 왜곡시키려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일본종교 숭배정책이나 일본 숭배의식을 주입시키려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그들 보다 더 발달된 문화를 가졌기 때문에 민족문화를 지금 만큼이나마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남은 문제점
‘식민지 근대화론’은 실증적 연구와 객관적 근거를 강조하면서 그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민족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들이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하는 것은 식민주의사관의 부활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 이 이론은 해방 후 지금까지 일본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이 주장해 온 ‘식민지 미화론’, ‘식민지 시혜론’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내재적 발전론’을 거부하는 그들의 주장이 과연 식민지사관 가운데 정체성이론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야 한다.
또 ‘식민지 근대화’의 혜택을 받았다면 그것을 뿌리친 북한이 1960년대에 남한보다 더욱 발전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특히 그들은 부르주아 중심의 친일세력을 남한보다 확실하게 제거하였고, 더욱이 한국전쟁에서 철저하게 파괴되었는데도 남한보다 고도의 발전상을 보였다. 그것은 일제의 ‘시혜’와는 전혀 관계없는 발전임을 증명하며, ‘식민지 미화론’이 옳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오히려 남한은 친일파가 주도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모순들을 떨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식민지 통치가 남겨 놓은 심각한 공해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 배경은 오늘날 평가의 문제를 떠나, 일제가 남겨놓은 유산이나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의 개인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에 유례가 없이 자기 역량을 발휘해 온 민주화운동, 이에 대응한 집권세력의 수동적 변화, 교육열과 민주화 운동을 통해 발전한 국민들의 자기 주체성의 실현 욕구가 어우러진 것이었다.
다음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이 옳다고 하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재벌문제와 IMF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과제가 풀리지 않는다. 근대화의 조건이 그렇게 잘 만들어졌고, 그 바탕 위에 발전한다는 당위성이 강조되자면 이 문제도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재벌문제는 오늘날 넘어야할 큰산으로 버티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한국의 학자들은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에 의해 한국사 교육이 망쳐졌다고 한다. 이 논리는 일본 우익의 주장과 동일한 궤도를 걷고 있다. 일본 우익은 ‘망언’을 되풀이하고 있고,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본의 논리에 한국의 일부 경제사학자들까지도 어깨동무를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전후 일본의 계속된 ‘망언’은 말할 것도 없고, 서양 학자들도 근대사의 전개이래 오늘날까지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으로서 자신들의 침략상을 자인한 적이 드물다. 그래서 ‘왜양일체(倭洋一體)’라 했던가.
(김 희 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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