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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금융교육을 받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파산에 이르는 비율이 낮다. <김대진 기자> |
경향신문과 몇 개 대학이 함께 기획한 2학점짜리 금융특강에서 얼마 전 ‘나의 재무설계’란 주제로 강의를 했다. 아직 돈을 벌어본 경험이 거의 없는 학생들이긴 하지만, 이런 개념을 일찍 익힌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빠, 난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될 거야.” 지난해 가족과 함께 지리산 종주할 때,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막내 보리가 한 말이다. 돈에 쪼들리나, 왜 이런 말을 하지? 의문도 잠시, 돈에 대한 관점을 다루는 일을 하는 아빠로서는 딸아이의 논리를 비집고 들어가고 있었다.
“보리야, 그럼 세상에서 두 번째 부자부터 마지막까지 사람들은 너 때문에 서운하지 않을까?”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맘에서였을까. 딸아이는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비슷한 말을 한다. “아빠, 그럼 두 번째 부자가 될 거야.” ‘부(富)’는 상대적인 거란 말을 하려는 거였는데, 보리는 아직 못 알아듣고 있다. 한 번 더 얘기할 수밖에…. “보리야, 그럼 세 번째 부자부터 마지막까지 사람들이 서운하잖아.”
이쯤 하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보리는 한마디 더 한다. “그럼 세 번째 부자 될 거야.” 인식능력이 부족한 걸까. “제 딸이 좀 멍청하죠?” 한바탕 웃음으로 얘기를 마쳤지만, 세상을 사는 우리는 늘 ‘부의 상대성’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그 다음 돈과 인생의 문제로 넘어갔다. 강의 때마다 학생에게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누구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다들 ‘내 것’이라고 한다. “왜 당신 것입니까?” 대답은 간단하다. 돈 주고 샀으니까. “돈 주고 사면 다 내 것입니까?” 잠시 조용해진다. “사람도 돈 주고 사면 내 것입니까?” 이쯤 되면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노예나 조선시대 머슴을 얘기하면 다들 뜻을 이해한다.
“돈 주고 사면 다 내 것일까”
돈 주고 사면 다 내 것일까. 그러나 그건 이제 명백해진 사실이고, 현실은 어떤가. 조선족이나 동남아 여자를 돈을 주고 사다시피 데리고 온 한국 남성들이 아내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생각해 보자고 했다. 돈 주고 사서 ‘내 거’라고 생각하는 구석이 있으니까 함부로 대하는 건 아닌지.
그럼 돈은 어떤 도구일까.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양복이 안방 옷장에 있지 않고 아이 옷장에 있으면 어떨까. 옆집 옷장에 있으면 또 어떨까. 동사무소 창고에 있거나,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 더 낭패다. 결국 돈은 사람과 물자 사이의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도구일 뿐이다. 돈보다 삶이 먼저건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크고 작은 사업으로 빚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고생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건만 가정이 깨지고 심하면 노숙자 신세가 되는 경우도 많다. 삶의 도구인 돈이 오히려 삶을 짓밟는 꼴이다. 재무설계는 돈에 대한 관점을 확립하고 돈을 다루는 기술을 활용해 돈에 끌려다니지 않는 가정경제를 만드는 일이다. 아래 사례는 직장이 번듯한데도 빚이 많아 희망이 없던 부부가 손을 맞잡고 빚수렁에서 벗어난 성공사례다. 정확히는 실천과정인 사례다.
“맞벌이 공무원인데 빚만 늘어요. 저는 공무원이고 처는 교사입니다. 둘의 연봉은 7000만 원 정도입니다. 겉보기엔 남부러울 게 없는데 속으로는 상당히 힘든 상황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간절한 이메일. 이어서 빚이 늘어난 사정이 이어졌다. “1999년 전세값 폭등 때 차라리 집을 사자는 마음으로 집을 샀는데, 당시 대출금이 8000만 원이었습니다.”
상당히 무리였지만 전세금 대출에 비해 금리가 싸서 이용했다고 한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공무원인 맞벌이 부부니 실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다른 빚이 더 얹어지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동생의 사업실패와 친구 보증 때문에 1억 원 빚이 더 생겼습니다.”
빚을 정리해 보았다. 집을 사면서 생긴 빚은 현재 6000만 원이 남았고, 동생과 친구 때문에 생긴 빚 1억 원, 그리고 이런 상황에 지출통제를 잘못해 생긴 빚 2000만 원을 합해 총 1억8000만 원이다. 주택의 자산가치는 1억5000만 원. 순수부채는 3000만 원인 셈이다. 연소득이 7000만 원이니 감당하지 못할 빚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빚의 악순환 구조다. 최근 2년 사이에 알게 모르게 마이너스 통장 등으로 생긴 빚이 2000만 원이라는 점이 그것을 말해 준다.
고객 스스로 파악하고 있는 악순환 구조를 보자. “매월 이자만 120만 원, 원금은 50만 원씩 들어갑니다.” 대출상환에 들어가는 170만 원 가운데 원금상환은 3분의 1도 안 되는 50만 원뿐이다. 보험료와 생활비에서도 새는 돈이 있다.
낮은 이자로 높은 이자부터 상환
먼저 빚을 정리해 보았다. 남편 빚이 8가지, 부인 빚이 4가지다. 그중 가장 나쁜 것은 대출원금 1800만 원짜리 마이너스대출인데, 금리가 연 17%나 된다. 월납이자가 25만5000원이고, 4년 동안 낼 이자를 다 합치면 1200만원이 훌쩍 넘는 액수다. 지난 2년 동안 원금은 겨우 200만 원을 갚았을 뿐이다. 고객 스스로 인정하기를 월 100만 원 정도씩은 남아야 하는데도 이런 상태였다.
부부가 공무원인 점을 감안해 대출여력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부인이 교원공제회에서 현재 갖고 있는 부채의 이자율보다 훨씬 유리한 연리 6%로 29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부채 종류가 많고 액수가 커 헤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점도 있었지만, 부인이 남편을 못 믿어 적극 협력하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이제 남편이 재무상담을 받으면서까지 빚을 정리할 의지를 보이자 부인도 마음이 바뀐 것이다.
새로운 대출금으로 남편의 빚 가운데 이자율이 높은 것 4개를 해결했다. 그중에는 할부로 차를 사면서 진 할부금융도 포함시켰다. 빚이 많은 사람은 어떻게든 대출을 좋은 조건으로 받아 이자부담을 줄여야 하는데 할부금융 빚이 있는 경우 제1금융권 대출이 많아 제2금융권 대출을 받은 것으로 인식되어 신용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남편에게 대출여력이 생겼다. 또 부인을 다시 설득해 신용대출을 추가로 받았다. 이렇게 받은 대출금으로 다시 이자율이 높은 약관대출과 남은 마이너스통장을 정리했다. 마이너스 통장을 정리한 것은 자신도 모르는 새 마이너스 금액이 늘어나는 것을 아예 없애자는 뜻도 있다.
이런 2단계 대출을 통한 대출정리 결과 대출원금은 달라지지 않고, 월상환액은 167만 원에서 178만 원으로 조금 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먼저 대출종류가 12개에서 7개로 5개나 줄어 관리가 편해졌다. 이자율도 이자율도 10% 이상인 것이 5개나 되었지만 이제는 2개만 7%대이고 나머지 5개는 모두 6%다. 월 상환액이 늘어난 것은 만기일시상환을 원리금균등상환으로 하여 원금을 갚아나가는 구조로 바꿨기 때문이다.
새로 대출상환을 위한 적금도 월 80만 원씩 불입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5년 후엔 대출원금이 현재 부동산 자산의 50% 이하인 7000만 원대로 줄어든다. 월 상환이자도 66만 원으로 줄어 원금상환과 자녀교육비 등 장기저축 여력이 충분해진다.
이 가정처럼 무리한 보증 때문에 가정경제가 곤란해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 때문에 친척이나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보증을 서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개인은 신용도로 치면 가장 위험한 등급이다. 일반 투자에서는 위험한 투자에는 높은 수익이라도 뒤따른다지만 이런 경우는 높은 수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 가장 나쁜 투자다. 하더라도 자신의 재무체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지 미리 점검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침 국회에서도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개인의 보증한도를 2000만 원으로 제한하는 법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가정재무에 대한 개인 의식화와 사회의 제도보완이 가정경제를 지키는 두 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