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마태오 9,14-15)
송영진 신부님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1)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고 슬퍼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때문에, 즉 이미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단식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왜 요한의 제자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했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요한의 증언을 믿은 사람들은 요한을 떠나서 예수님에게로 갔습니다.(요한 1,37) 그것은 사실상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낸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에 많은 사람들이 그 증언을 안 믿었거나 알아듣지 못했고, 그냥 세례자 요한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신랑이라는 말은 원래 세례자 요한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7-30)
<세례자 요한은 지금은 회개할 때라고 보았고, 예수님은 지금은 기뻐할 때라고 보셨다고 설명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설명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메시아 강생의 기쁨을 말했고, 예수님도 복음을 선포하실 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강조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예수님의 선포 사이에는 모순되는 점이 없습니다.>
3)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엄격하게 극기고행을 하는 생활을 했는데(마태 3,4), 요한의 제자들은 그 생활을 본받으려고(또는 흉내 내려고)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신심을 과시하려고 자주 단식을 했는데(루카 18,1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단식을 ‘위선’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위선자들이 실제로 밥을 굶는 단식을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심을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의도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거짓 단식이 될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단식을 단식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라는 뜻입니다.
4)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기 위해서, 회개하는 단식을 행합니다. 그것도 겨우 일 년에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을, “죄를 짓고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때”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짓고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가 회개하고 주님에게로 되돌아올 때, 그때 회개의 단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꼭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5) 당연한 말이지만, 단식은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혹시라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오늘은 단식하는 날이니 단식하시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잔인하고 가혹한 일이 될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데 무슨 단식을 할 수 있을까?>
실제로 그런 이가 있다면, 단식하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챙겨가서 먹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경우에,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신(마태 8,20)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고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은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느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은(마태 12,1), 그들의 평소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또 어떤 병에 걸려서 음식을 아예 먹지 못하거나, 아니면 음식을 특별히 조심해서 관리해야 하는 병자들은, 글자 그대로 먹을 것이 있어도 먹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단식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우리 교회가 금육재와 단식재 규정에 여러 가지 예외 조항을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그런 상황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감안했기 때문입니다. <‘법’에 사랑이 없다면, 그 ‘법’은 폭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