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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마루금은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를 나누어 속리산이라는 거대 암릉군을 올려 세웠다. 이번 구간은 속리산의 전 구간을 종주하는데 길이는 20여 Km, 예상시간은 12시간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02:20, 버스에서 내리니 안개비가 흩날리고 있다. 날씨도 그렇거니와 내 몸도 코감기가 와 콧물이 연신 흘러내려 컨디션은 최악이다. 여기는 늘재다.
속리산 구간은 북쪽에서부터 늘재~문장대~천왕봉~형제봉(갈령)까지 산줄기를 말한다. 나는 15 전인 2003년 8월 24일 대간 종주의 일환으로 갈령에서 늘재까지 걸은 적이 있다. 그때 쓴 기록을 보면 안개와 구름이 자욱하여 풍경이 제약되어 힘 든 산행의 기억으로 남았는데 오늘도 그 기억이 되살아나나 염려스럽다. 늘재는 ‘눌재’라고도 불리는데 이 동네 사람들은 ‘늘티’라고 해야 쉽게 알아듣는다. 지도를 보면 고개 아래에 윗늘티와 아랫늘티라는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늘재부터 밤티재 구간은 공식적으로 출입금지 지역이다.
잔뜩 흐린 밤은 역시 을씨년스럽다. 바람이 없어 습기 또한 대지에 차있다. 걱정과 기대를 잔뜩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야간 산행의 최대의 적은 졸음이다. 군대생활을 해 본 남자들은 대개 졸음 행군이 어떤 것인지 안다. 다리는 움직이는데 동기와 변화가 없는 뇌 활동은 정지 되었으니 피곤과 겹쳐 당연히 졸음이 온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정 힘이 들면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라고 스스로 되뇌어야 한다.
랜턴 불빛에 안개비가 하얗게 내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갑자기 생각났다. “안개비가 하얗게 내리던 밤, 그대 사는 작은 성으로 나를 이끌던 날부터…”
밤티재에서 문장대까지 마루금도 역시 출입금지 지역이다.
각자 지참하거나 부착한 랜턴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불빛의 범위도 그렇고 밝기도 다양한데 기대 이상으로 밝은 랜턴은 배터리와 조명의 발달로 이룬 최고의 결과물이다. 산악자전거도 배터리를 부착한 것이 나오는데 머지않아 무릎에도 배터리와 기기가 부착되어 백두대간 종주도 더 쉽게 할 날이 오지 않을까.
지도에 보면 문장대 방향으로 시어동 갈림길부터 바위지대가 나타나는데 다양하고 위험한 바위가 많아 비상 자일이 필요한 곳이고 개구멍 바위 등은 몸이 빠져나가기 어려워 동료의 도움을 받아야 통과할 수 있다. 2003년 이곳을 통과할 때 사람 키 만한 직벽을 올라서다가 발이 미끌어져 그만 아래로 떨어진 적이 있다. 그때 나를 살려준 건 배낭이었다. 배낭이 쿠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배낭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절실히 느꼈는데 그래서 배낭은 어느 정도 넉넉한 것이 좋다.
09:00, 문장대 입구에 올라섰다. 아직 날씨는 언재 갤지 오리무중이다. 안개가 문장대 큰 바위를 둘러싸고 있다. 15년 전 그 날씨와 어쩜 이리 같을 수가….기분이 언짢았지만 받아 들여야 한다. 그 날 츄리닝 바람의 식당 아저씨가 당귀차를 마시라고 주었는데 이제 그 식당은 없어졌다.
문장대(文藏臺·1,054m)는 속리산의 랜드마크다. 문장대에 올라서서 주변 풍광을 감상하는 것은 정말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것 중의 하나다. 문장대에 세 번만 오르면 극락에 들 수 있다는 말이 전한다. 나는 개별적으로 문장대에 오른 적이 한 번 더 있어 오늘 날씨는 안 좋지만 나중에 극락에 분명히 갈 것이다. 문장대의 원래 이름은 구름 운자의 운(雲)장대였다. 세조가 어떤 약을 써도 낫지 않은 괴질을 앓고 있을 때 꿈속에서 월광태자라는 귀인이 알려주는대로 오른 곳이 운장대였고 거기에 올라 삼강오륜을 읽어 병을 고치니 ‘구름 운’자를 ‘글월 문’자로 고쳐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참고로 저 아래 보은의 ‘정이품송’도 세조가 속리산을 방문 할 때 가지를 들어 정이품의 벼슬을 받았으니 그 때의 일인가 보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과연 삼강오륜을 읽어 사람이 됐는지 역사를 들쳐 봐야겠다.
문장대는 정상석이 두 개가 있다. 기존의 것은 충북 보은군에서 세웠는데 한자로 새겨 놓았고 작고 아담한데 그 뒤에 경북 상주시에서 한글로 새겨 더 크게 세워 놓았다. 전국 명산마다 정상석이 두 개인 경우는 각 지자체마다 소유권을 주장함이라 쓸데없는 낭비 같은데 안 해 놓으면 또 서운하니 이 또한 해결 난망이다.
문장대를 다시 내려와 천왕봉 방향인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나 지금이나 이 길은 변함이 없다. 1천 미터 이상의 고산준봉들이 줄지어 있으니 멀리서는 아름다우나 그 속에는 올라갔다 내려가는 일이 자주 있어 세상 사람들이 산을 가까이 하고 싶어도 산을 멀리하게 되는 ‘속리산(俗離山)’이 되었는가 보다.
최치원 선생은 속리산 묘덕암에 와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속리산을 시에 넣었는지 아니면 시에서 속리산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그 어떤 산 이름보다 철학적이다.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상을 멀리 하지 않는데
세상이 산을 멀리 하는구나‘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속리산의 아름다움은 8봉,8대,8석문의 24절경을 말한다. 8봉은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부터 비로봉·길상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묘봉·수정봉을 이르고, 8대는 문장대·입석대·신선대·경업대·배석대·학소대·봉황대·산호대를, 8석문은 내석문·외석문·상환석문·상고석문·상고외석문·비로석문·금강석문·추래석문을 이른다. 그런데 오늘 이 절경을 보지 못함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문장대를 지나면 대간길은 문수봉을 지나 청법대에 이르고 신선대 휴게소에 이르러 신선대와 경업대를 관람할 수 있다. 신선대 휴게소의 신선주는 아직도 그 명소에 걸맞게 옛 맛을 잃지 않았다. 총대장님의 배려로 대원들은 칡과 당귀로 담근 신선주의 향을 음미할 수 있었다. 신선대를 배경으로 안개가 지나가는 틈을 이용하여 개인 사진촬영을 했다.
이어 발길은 신선대 옆으로 해서 철계단을 올라가는데 나무 사이로 미끈하게 생긴 입석대가 옆으로 보이는 것이다.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서 입산 수도할 때 높이 약 13m의 바위를 세웠다는 것인데 약간 뻥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 미끈한 절제미에 감동이 온다. 숲으로 들어가 온전한 모습을 사진 촬영하려고 했으나 후미에 위치해 시간이 지체될까 그냥 지나치며 아쉬움만 남겼다.
거대한 비로봉 밑으로 내려가 상고석문을 지나 천왕봉이 가까워지고 있다. 청년들이 쏜살처럼 지나가고 나는 젊은 건각을 부러워했다. 산행 시작한 지 8시간이 넘어가니 기력이 빠진다. 천왕봉을 오르는 길은 억센 철쭉가지가 방해하는 좁은 길이다. 속리산에 오는 열혈 산꾼들은 누구나 문장대와 천왕봉은 오른다. 대신 법주사에서 올라온다면 천왕봉을 밟았다가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은 이래서 외롭고 서먹하고 감추어져 있다.
11:30, 천왕봉(天王峰·1,057.7m)이다. 문장대에서 3.4Km 왔다. 속리산의 최고봉에 걸맞지 않게 정상석은 초라하다. 정서 방향에 있는 법주사는 안개로 희미하게 보이고 앞으로 가야 할 형제봉도 연무에 싸여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은 천왕봉의 왕 자를 황(皇) 자로 고쳐놓는 누를 범했다. 일왕의 존재감을 높이고 일왕(천황)을 숭배하도록 하였는데 백두대간이 일반화되면서 원래 이름을 찾았던 역사가 있다. 이렇게 보면 아직도 우리나라에 많은 지명이 일본의 잔재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고 있다. 백두대간을 타는 것은 무조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는 게 다는 아닌 것이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도 품고 가는 것이다.
또한 백두대간을 타는 이라면 이 천왕봉이 최고봉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한남금북정맥이 분기하는 곳이란 것도 알아야 한다(한남금북정맥은 안성 칠장산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나뉜다). 한반도의 젖줄로 보면 남한강의 시작이다. 봉우리의 남쪽에 떨어진 비는 금강으로 흘러가고 동쪽에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 되며 서쪽으로 흐르면 한강이 되는 것이다. 생명의 원천인 물이 시작되는 곳, 이곳이 바로 천왕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어 여기서 얼른 탈출해야했다. 봉우리 밑에 표지목을 보니 형제봉까지 7.1Km 남았다.
천왕봉을 벗어나면 바로 급경사의 하산길이다. 돌도 많고 길도 좁아 체력적으로 많이 힘든 구간이다. 그 아래 안부에는 앞으로 정비할 계단용 침목이 헬기로 공수되어 잔뜩 쌓여있다. 작은 표지목이 형제봉을 목표로 500m 간격으로 세워져 있어 위치 파악에 도움이 되나 갈 길이 멀다는 의미도 있다. 철 지난 매미가 힘이 다 된 듯 울음소리가 쳐진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짝짓기가 되어야 할텐데 걱정스럽다. 길은 호젓하다. 이곳 구절초도 호젓하게 한 두 송이씩 자란다. 혼자서도 잘 크는 구절초의 꽃잎이 길고 크다. 이름은 산구절초라고 하는데 구절초와 꽃잎에서 다르다. 음력 9월9일에 꺾는 풀이라고 해서 구절초라고 하고 구일초라고 한다. 아버지 생신이 음력 9월9일이니 구절초 한 다발을 꺾어 드려야겠다.
길 오른쪽으로 전망바위가 보인다. 몇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다. 절벽 아래는 대목리다. 부러움을 뒤로하고 갈 길을 찾았다. 걸음걸이는 시속 2Km나 될까? 천천히 걷고 있다. 잠깐 쉬면서 무릎에 에어 스프레이를 뿌려댔다. 코감기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피곤감이 엄습해 온다. 극도의 피로감은 활동을 위축시키고 의지를 깎아내린다. 물이 점점 고갈되고 있다. 문장대 아래 계곡에서 받은 물까지 3리터가 소진되고 있다. 피앗재에서 휴식했다. 피앗재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만수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정감록에는 이 고개를 넘어 피난지로 나와 있는데 그래서 고개 이름이 ‘피할재’였다고 한다. 새벽부터 출발한 지 12시간째다. 형제봉까지 약 3Km 남았다(14:15).
작은 암봉을 세 개 넘어 형제봉(828m)에 도착했다(15:10). 지난 주 지리산의 반야봉 구간도 마지막 봉우리가 형제봉이던데 우리나라 산에는 형제봉이 많다. 왜 형제봉인지 모르겠으나 이 봉우리도 전설이 있을 것이다. 작은 정상석 뒤로 주저앉았다. 여기서 북서쪽을 보니 천왕봉부터 문장대까지 하얀 암봉이 밀집되어 있어 가히 명산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래서 속리산의 다른 이름이 구봉산이라 하는데 이곳에서 보면 구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흐린 날씨라 정말 구봉인지는 세기가 어렵다. 정북 방향에는 움푹 들어간 곳이 늘재다. 그 위로 흰 구름이 뭉쳐있는데 오늘의 전 구간을 한 눈에 보여주는 이 전망좋은 봉우리에 서있으니 피로가 가신다. “이 짓을 왜 하고 있나”라는 회한이 “이 맛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정답을 얻은 기분이다.
위험한 암릉 구간에서 “유격”소리를 지르며 사기를 복 돋우었던 양성기씨가 마지막까지 보관해놓은 막걸리를 꺼낸다. 지친 몸에 생기가 돈다. 힘이 들었지만 즐겁게 산행을 하고 있는 그가 바로 오늘의 어벤저스다.
이제 형제봉에서 내려가다 갈령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꺾어 내려가면 최종 목적지인 갈령이다. 무거웠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20분 정도 내려와 삼거리를 만났다. 저 아래 괴산과 상주를 연결하는 49번 지방도로가 보였다. 차 소리가 반갑다. 큰 고인돌 같은 바위를 지나 갈령(葛嶺)에 도착했다. 2003년 8월 24일 새벽 3시에 대간종주를 앞두고 만났던 갈령비를 다시 만났다. 현재 시각 16시20분이다.
세상에 쉬운 산은 없다. 내가 부족할 뿐이다. 예전에 동네산악회에서 주로 말하던 내 말이다. 마찬가지로 “쉬운 백두대간은 없다. 내가 분발할 뿐이다”라고 오늘 속리산 구간을 끝내면서 정리하고픈 말이다. 날씨에 많이 속상해 재미가 반감되었던 속리산은 산도 어쩌지 못하는 이 상황을 ‘山非離俗 俗離山’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의 시간은 어차피 가는 것, 화려함보다는 내 시간에 충실하며 어차피 가는 시간을 가치가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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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5년만에 속세 떠나 속리산에 들었더니
옛모습 그대로 안개속에 잠겼어라
아서라 속세가 어디뇨 속리산이라 하더라
안개가 속세와의 간격을 더욱 멀게 하였나 봅니다. 산행기 잘 봤습니다
산행기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