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생후루츠』를 보다
최 화 웅
연말 들어 마음이 쫓기듯 바빴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시작과 끝이 덧없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문학상 시상식과 문예 지원금 신청에 이런 저런 잡다한 일들이 이어졌다. “나는 그 일들이 과연 내 인생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무의미하다. 그런 일상에서도 다큐멘터리『인생후루츠』를 놓치지 않으려고 책상에 앉을 때면 영화의 전당 상영시간표를 확인했다. 대림 제3주일의 부산 풍경은 잿빛 하늘에 겨울비가 추적거렸다. 추위에 감기 들기 좋은 날씨였다. 저녁에는 길 건너 하얀 수녀원의 ‘열린 대림의 밤’에 초대되었다. 낮에는 ‘아일린의 뜰’이라는 이름의 주택조합아파트 모델하우스를 구경하기도 했다. 평소 둘이 사는 집을 좀 더 줄이고 차 없이 병원과 성당을 걸어 다닐 만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신축 예정인 소형아파트에 끌렸다.『인생후루츠』는 텃밭 옆 작은 통나무집에 사는 90세의 건축가 츠바타 슈이치 할아버지와 등이 참하게 굽어가는 몸으로도 웃는 표정이 애 띤 87세의 츠바타 히데코 노부부가 살아가는 삶과 사랑의 기록이다. 이 영화는 2012년 여름에 읽은 수기『내일도 따뜻한 햇살에서』를 다큐멘터리로 엮은 영화다.
첫 장면부터 얼마 전 타계한 노배우 기키 기린의 감칠맛 나는 나레이션이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지고,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리는 자연의 이치”를 시도 때도 중간 중간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텃밭에는 낙엽이 떨어져 쌓이고 새들은 수반의 옹달샘에서 물마시며 자연의 새소리를 듣고 자라는 갖가지 열매가 탐스럽게 익었다. 자상한 건축가 슈이치 할아버지와 못하는 게 없는 87세의 사랑스러운 히데코 할머니는 둘이 합쳐 177살, 혼자 산 날보다 함께 산 날이 더 긴 이 노부부는 50년 살아온 집에서 과일 50종과 채소 70종을 기르고 풋풋한 사랑을 지키며 산다. 통나무집을 둘러싼 생명의 텃밭은 서로의 떨림과 울림이 존재하는 삶의 보금자리다.『내일도 따뜻한 햇살에서』는 건축가로 일한 뒤 히로시마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는 평론가로 활동하는 츠바타 슈이치(88세) 씨와 그의 아내 히데코(85세) 씨가 작은 통나무집을 지어 그 옆에 텃밭을 가꾸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낱낱이 들려준다. 츠바타 슈이치는 1925년생으로 건축가였던 만큼 집과 정원을 아우르는 디자인이 가능하다. 기록하거나 분류하는 일, 세탁물을 주름 없이 말리는 일 등 세심한 작업도 곧잘 해낸다. 취미생활이었던 요트에서 익힌 로프워크와 생활기술을 활용해 보다 편리하게 집안일을 처리한다.
츠바타 슈이치의 아내 츠바타 히데코는 1928년생으로 소녀시절 꿈꾸던 이상형인 슈이치 씨를 만나 결혼 하고 그 뒤 내조에만 몰두한다. 밭일과 요리, 뜨개질, 길쌈, 자수 등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더 기뻐한다. 요즘은 백사(흰실)자수에 빠져 있다. 은퇴 후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전원주택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살아왔다. 서로 많은 말이 오가지 않더라도 호흡이 척척 맞아 항상 일상이 물 흐르듯 순조롭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설렘과 울림으로 어우러져 산다. 히데코 씨와 슈이치 씨 사이에는 50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부부에게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안정감, 따뜻함이 묻어난다. ‘웬만한 일은 그냥 넘어가자’는 주의랄까? 츠바타 부부 사이에는 ‘서로 간에 무슨 일이든 강요하지 않고 사랑으로 의사를 소통한다. 예를 들어 히데코 씨는 채소를 좋아하지 않는 슈이치 씨에게 억지로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남기는 사람 기분도 좋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슈이치에게 ‘좋아하는 것을 드시라’고 해요.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매번 슈이치 씨가 좋아하는 것으로 상을 차리고, 모자란 영양소는 매일 아침 마시는 과일채소 주스로 보충시킨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른 작물을 기르고 그 수확물로 요리를 하면서 이웃과 삶을 나눈다.
손님을 맞는 날에는 가슴 설레는 상차림과 풍요로운 삶을 가꾸는 지혜가 삶을 완성한다. 봄, 새잎을 느끼다. 풍요로운 삶을 가꾸는 지혜, 메모판을 활용하여 각자가 잘하는 일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나간다. “보리차 드세요.” 정감어린 여름날 오후의 휴식, 그리고 여름철 절임 음식, 우메보시(매실 장아찌). 히데코 씨가 아끼는 그릇에 여름의 시원함을 담아낸다. 집에서 수확한 채소와 과일로 소포를 꾸리는 일은 츠바타 부부의 즐거움 중 하나다. “슈이치가 은퇴하기 전까지는 추석선물이나 새해맞이 선물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선물을 보내는 일을 즐긴답니다.” 포장까지 마친 소포를 택배로 부치기 위해 슈이치 씨가 손수레에 싣는다. 이것을 동네 우체국까지 운반하는 일은 히데코 씨가 맡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른 작물을 기르고 그 수확물로 요리를 하면서 도시에 살고 있는 자녀를 돌보고 이웃과 나누는 삶에 부지런한 노부부로부터 살림의 향기가 묻어난다. 하나씩, 조금씩 고쳐 쓰는 즐거움이 츠바타하우스의 삶이 되어 계절의 미각을 전한다. 낙엽과 검은 흙을 헤집고 감자를 캔다. 유자 수확이 끝나면 낙엽 쌓인 텃밭을 산책하며 여유를 즐긴다. 이어서 보리 모종하기와 가을의 맛을 담아 잼을 만드는 날이면 할머니의 일손이 바쁘다. 다큐멘터리『인생후루츠』를 보는 동안 내가 할 수 있을 때 인생을 돌아보며 충분히 즐기자는 생각이 솟구쳤다. 가을철 손님맞이 상차림이 마냥 가슴 설레고 즐겁다. 올해부터 3년간 베이비부머 세대 은퇴자들이 800만 명에 달할 것이란 예측이다.
어느 언론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70%가 은퇴 후 전원생활을 원한다고 했다. 덕분에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베이비부머 은퇴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연일 땅, 주택 건축, 편의시설 관리에 따른 보도를 쏟아낸다.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서 전원주택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살아가는 일, 자연스러운 은퇴 후의 꿈이자 우리 모두의 로망이 되었다. 그러나 즐겨 찾던 지인들의 발길도 뜸해지자 아내는 종종 외로움을 토로하기에 이르렀고, 외부 편의시설과의 거리가 멀어 스트레스를 풀 나들이가 어렵다는 불평이 나온다. 자기만의 취미활동 없이 집에서 아내와 둘만 살다 보니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다. 오랜 시간 꿈이었던 전원생활이 차츰 악몽으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지난 9월 보았던『타샤 튜더』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온전히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지고,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익어간다.”는 자연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우리가 바라는 노후가 좀 더 여유롭고 편안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는 문제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새로운 울림으로 답해야 하지 않을까? 공허한 사람은 작은 것도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려고 한다. 최근 세계 천체물리학계는 지금 지구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우주의 경계를 조정하려고 논의 중이다. 일찍이 성철스님께서는 “사람들은 소중하지 않은 것들에 미쳐 칼날 위에 춤을 추듯 산다.”고 일갈하시지 않았던가? 명예와 사랑은 버리고 포기해야 비로소 내가 바라는 반야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우주적 작은 떨림을 스스로 느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