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영화 [복수는 나의 것]과 함께 버무려 써서 인터넷 여기저기에 올렸던 글인데 새내기 여러분께 내려진 사회학개론 시간의 과제물이라는 말을 듣고 별볼일 없는 도움이라도 될까 하여 아래 글을 올려봅니다.
- 조 진 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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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영화 한 편에도 쉬이 흔들리곤 하는 내 마음과 생각인지라,
이번의 흔들림을 그저 바람에 날려버리고 싶지 않다는 의도에서
다음의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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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人과 村長]의 하덕규처럼, 피안(彼岸)의 영토로 날아가버린 작가, 김승옥이 썼다는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가 생각나는 영화였다. 물론 내게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계셨고, 그 외할머니와 나는 함께 먹고 자면서 나름대로의 추억들을 만들었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영화 [집으로...]를 외할머니와 손자의 스토리로 읽지 않는다.
: 영화의 줄거리
열아홉에 시골 집을 뛰쳐나가 서울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살아온, 결국은 아들 하나를 낳고 남편과는 이혼을 하고 만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가 서울에서 새 직업을 찾고 안정이 될 때까지, 제 아들을 시골에서 아직도 살고 계시는 친정엄마(아이에게는 외할머니)에게 잠깐 맡기러 온다. 아이는 서울에서 자라면서 심지어 '외할머니'라는 게 뭔지를 모를 정도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말씀을 하지 못하시고 글도 읽지 못하시는 분이다.
엄마가 시골버스를 타고 가버리자, 아이는 외할머니보고 "벙어리", "병신"하면서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제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더러워!"하면서 손을 쳐낸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이러한 손주의 유별난 행동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테레비도 안 나오는 이 구석 중에 구석인 시골마을에서 오직 자신의 휴대용 게임기만을 가지고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엄마가 챙겨준 캔콜라와 스팸깡통만을 먹으면서 할머니가 직접 손으로 찢어서 얹어주는 김치를 짜증과 함께 도로 할머니의 밥공기에 덜어내버린다.
그런데 그만 밤낮으로 붙들고 있던 게임기의 밧데리가 다 되고만다. 아이는 할머니에게 돈내놓으라고 떼를 쓰고, 할머니가 돈이 없다고 하자, 요강을 깨고, 할머니가 밤새 실로 꿰맨 고무신도 뒷간에 던져버리고, 심지어 할머니의 은비녀까지 할머니가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살짝 빼서 밧데리를 사러 간다.
하지만 시골 구멍가게에 건전지도 아니고, 오십원짜리 동전보다 더 조그만 원형 전지가 있을 리 없다. 오히려 과자나 사려던 아이는 내밀었던 은비녀로 꿀밤이나 한 대 맞고 나오다가 길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자전거로 아이를 데리고 오니 할머니는 맨발로 물지게를 지고, 은비녀 대신 나무수저로 머리를 쪽지고 있다.
할머니는 별안간 아이에게 뭐가 먹고 싶냐 하신다. 아이는 피자, 햄버거, 캔터키후라이드치킨이 인쇄되어 있는 책받침을 들이대면서 요구하고, 할머니는 그 중 치킨을 알아본다. 아이는 좋아하지만, 정작 할머니는 살아있는 닭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돌아와 백숙을 해준다. 아이는 울고불면서 안 먹지만, 결국 새벽에 일어나 배고파서 백숙을 먹어치운다.
다음 날, 억수같은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닭을 가져오신 할머니가 아프다. 아이는 할머니 머리에 수건도 덮어드리고 이불도 덮어드린 후, 부엌에 나가서 밥상까지 차려 온다.
한편, 아이는 제 또래의 마을 여자아이에게 관심을 갖는다. 할머니와 버스를 타고 읍내에 가서도 할머니가 나물이나 호박 등을 길거리에 벌여놓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파는 걸 숨어서 지켜본다. 할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중국집에 가 짜장면을 사준다. 할머니와 손주가 마주앉아 있는데 아이만 짜장면을 허겁지겁 먹다가 할머니를 힐끔 쳐다본다. 할머니, 말씀을 못하시는 할머니는 손짓으로 '어서 먹어'라고 하신다. 그리고 앞에 놓인 물컵을 들이키면서 고픈 배를 달래는 할머니. 읍내 오는 길에 손주가 신은 캐주얼 구두를 쳐다보시던 할머니는 나물이랑 호박 판 돈으로 손주에게 하얀 운동화를 사주시고 짜장면을 사주시고 뭘 먹고 싶냐고 물으신 후 초코파이도 주신다.
아이는 다시 읍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에 올라타는데, 할머니는 볼 일이 있다고 먼저 가라고 하신다. 그 때 마을에서 함께 사는 아이 둘이 같이 타 셋은 나란히 앉는다. 그 중, 아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여자애가 방금 시장에서 산 인형을 가리키며 동네 오빠에게 하는 말, "이게 뭔줄 아나? 이게 엽기토끼라 하는 거다."
아이는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를 기다린다. 하지만 버스가 한 대, 두 대가 왔다가도 할머니는 내리지 않는다. 이윽고 버스가 엉뚱한 할아버지만 내려놓고는 돌아가는 흙먼지 속에서 할머니가 구부정한 허리로 지팡이를 짚으면서 걸어온다. 아이가 뛰어가 '왜 인제 오냐'고 얘기하자, 할머니는 가슴에 손으로 원을 그린다. 이건 미안하다는 할머니식 표현법이다.
결국 아이는 제가 관심을 가지던 여자애와 만나기로 한다. 그래서 제가 서울에서 가지고 온 쥬라기공룡장난감이며, 만화책이며, 이런저런 보물들을 싼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이가 제일 아끼는 로봇과 각종 캐릭터들이 인쇄되어 있는 엽서는 망설이다가 뺀다.) 그런데 아무리 거울을 보고 머리에 힘을 주려 해도, 무스나 젤이 있을 턱이 없으니 고민이다. 결국 아이는 할머니에게 두 손가락으로 조금만 잘라달라며 부탁한다.
할머니가 거울조각을 아이 손에 들리우고 까만 가위로 서걱서걱 아이의 머리를 자르는데, 아이는 그만 노곤해져 잠에 빠져들고 만다. 그러는 사이 아이의 머리는 아주 짧은 구식헤어스타일이 된다. 아이가 조금만 잘라달라 부탁한 것을 할머니는 조금만 남기고 다 잘라달라는 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당연히 잠에서 깨 거울을 본 아이는 난리가 아니다.
아이는 제가 손수 챙긴 보물뭉치를 핸드카에 담아 끌고 여자애를 만나러 간다. 여자애를 만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돌아오는 아이의 핸드카에는 엽기토끼인형이 담겨 있다. 내리막길, 아이는 핸드카에 앉아서 내리막길을 눈썰매 타듯이 내려가려 한다. 그런데 그만 사고가 난다. 아이가 언덕길에서 굴러버린 것이다. 핸드카는 망가진 채 도랑에 쳐박히고, 팔꿈치와 두 무릎이 까져 피가 흐르는 아이는 비틀비틀 울면서 시골 길을 간다. 그 때 미친 소가 아이를 향해 질주한다. 마침 동네 아이가 나타나 소를 몰면서 위기를 모면하지만 아이는 기진맥진이다.
한편 아이가 돌아오지 않자 할머니는 길가에 나와 지팡이를 짚은 채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가 할머니를 발견한다. 아이는 엉엉 울면서 할머니에게 온다. 할머니, 아이에게 난 상처들을 보면서 아이의 눈물을 닦아준다. 물론, 말씀은 못하시면서 다만 엄마에게서 온 편지를 내민다. 아이의 엄마가 이제 아이를 데리러 온다는 것이다.
방안, 아이는 할머니에게 글자를 알려주려 하지만, 할머니가 도통 잘 배우지 못한다. 아이는 "할머니, 그냥 아무 것도 쓰지 말고 백지를 보내, 그럼, 내가 할머니 많이 아픈 걸로 알고, 빨리 올께."하면서 울면서 말한다. 할머니도 연신 펑펑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친다. 할머니 주무시는 동안, 아이 할머니 눈 침침해서 잘 못하시는 바늘귀에 실 꿰어놓기를 있는 대로 해놓는다. 그리고 크레파스로 뭔가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제 버스정류장,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아이가 서 있다. 할머니는 계속 아이를 쳐다보고 있지만 아이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버스가 오고, 아이는 엄마와 함께 올라탄다. 갑자기 다시 내리는 아이, 전에 여자애에게 망설이다가 안 준 엽서들을 할머니에게 내민다. 할머니 받는다. 그리고 아이는 다시 올라탄다. 버스 막 떠나려는데 할머니 아이가 탄 의자의 차창을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아이, 쳐다보지 않는다. 버스 막 출발해 움직인다. 갑자기 아이 일어나 버스 뒤쪽으로 뛰어 간다. 버스 뒤편의 너른 차창, 할머니쪽을 바라보면서 가슴팍에 손바닥을 대고 원을 그리면서(할머니식 표현법!) 운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끝나주지 않고 마치 어떤 앨범의 보너스 트랙처럼 두 장면을 더 보여준다. 한 장면은 할머니 집에 돌아오셔서 아이가 준 엽서를 보시는 장면, 엽서 뒷면에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얘기들(이 부분은 글로 묘사가 불가능한 지점이다.), 그리고 다시 언덕길을 마치 실루엣처럼 느릿느릿 할머니가 구부정한 허리와 지팡이로 오르는 장면, 자막 하나가 스크린 우측 하단에 떠오른다. "이 영화를 모든 외할머니께 바칩니다."
: 주저리주저리
99년에 영화 [박하사탕]처럼 거의 눈물을 좔좔 쏟으면서 영화를 본 일은 아주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모두에 나는 김승옥의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를 거론했다. 내가 보기에 이는 한국의 현대사를 돌이켜 보게 하는 영화였다. 이 영화에는 모두 삼대(三代)가 나온다. 외할머니, 그 외할머니의 딸인 엄마, 그리고 그 엄마의 아들인 아이. 이 세 세대는 고스란히 한국의 현대사를 상징하는 세 가지 이미지다. 신영복 선생님께선 당신의 [정치경제학] 강의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얘깁니다. 같은 방에 있던 한 친구의 어머님이 접견을 왔다 가셨는데, 어머님이 딸, 그러니까 그 친구 여동생을 서울역 앞 사창가에서 우연히 보셨다는 거였어요. 하여튼 그 친구, 나가기만 하면 여동생을 죽인다고 난리였지요. 그 여동생이 보따리 하나 싸들고 서울역으로 도망쳐 올라온 나이가 열셋이었답니다. 저는 여기서 '서울의 얼굴'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서울의 얼굴은 그 누이동생의 얼굴이 아닌가? 나이 열세살에 서울역으로 올라와 결국 10년 후 서울역 앞 사창가에서 짙은 화장으로 앉아 있는 그 여동생의 얼굴이 서울의 얼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 강의, 그 시간에도 김승옥의 그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영화 전체 동안 딱 두 번 등장한다. 사실 별 비중도 없는 배역이다. 단지 아이가 어떻게 할머니하고 함께 살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데 필요하니까 사용된 인물설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60년대 이후 농촌이 어떻게 파괴되어 해체되었으며, 그렇게 찢겨진 농촌의 조각들이 또 어떻게 도시의 팽창과 성장의 과장 속에서 다시 짜집기되었는가를 생각해볼 때, 아이의 외할머니를 비롯해, 점방에서 무릎이 아파 꼼짝도 할 수 없던 할머니와, 밭일에 귀까지 어두우셨던 할아버지와, 길 잃은 아이를 삽이 가로끼어진 자전거에 태워주신 할아버지며, 끝내 딸이 사다준 영양제를 할머니가 가져다 주었던 그 기침 짙은 할아버지까지 영화는 충분하게 반복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딸은 열아홉에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가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아들이라고 하나 낳아 시골버스를 타고서 다시 돌아왔다. 영화의 첫 장면, 아이를 놓고 바로 자리를 뜨려던 딸에게 손으로 자고 가라며 애끓는 얼굴로 간청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감독의 편집은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는 버스의 뒷모습을 정면에서 잡아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제3세대, 바로 딸아이가 낳아온,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본주의에서 태어나고, 산업사회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그 잔인한 근대의 땅에서 길러진, 사회화된 한 주체만이 남은 것이다. 엄마(혹은 딸)이 사라진, 그러니까 가교와 완충지대가 사라진 그 간극과 심연에서 해방직후와 90년대 이후라는 두 시대는 서로를 마주보는 것이다.
마을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의 모습은 지극히 낯설고 어색한, 하지만 뭔가 그 나름대로의 질서를 구축하고 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광경이다. 사람들은 결코 바쁘지 않고, 서로를 위해 이것저것을 묻는다. 두런두런 모여 앉아 정담을 나누고 서로를 어떤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보지도, 짜증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서로를 잘 아는 가족이며,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만나야 할' 친구다. 버스기사조차 모든 승객을 알아보고 소식들을 전해주며 심지어는 수화조차 알아 듣는 마을의 아이가 존재하는 세상, 이는 미야자키하야오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전달해주는, 흡사 토토로가 살고 있는 녹나무 숲과 같이 신비해 보인다.
그런 풍광 속에서 아이는 철저하게 타자가 된다. 그에게 모든 것은 낯설고 어색하며 새롭다. 아이의 표정과 시선에서 진하게 묻어나는 것은 생경함과 이해 안 됨이다. 이 공간에서 테레비는 제 의미를 상실하고, 밧데리도 소멸하며, 켄터키후라이드치킨은 외할머니가 고아주신 백숙으로 변화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공간이 무작정 유토피아인 것만은 아니다. 아이가 그토록 싱숭생숭하게 관심을 보였던 그 여자아이는 읍내의 장에서 도시의 인형을 껴안은 채 동네 오빠에게 자랑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왔다는 아이의 신기한 장난감들을 모조리 접수한다. 어쩌면 그 아이가 또 열아홉이 되면 초승달이 뜬 밤에 그 마을을 떠나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무튼 아이는 집에서 떠나와 '엄마의 집'으로 왔다. 아니, 현재는 '엄마의 엄마의 집'이다. 영화의 제목 '집으로'는 결코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영화의 스토리가 전개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이의 엄마도, 아이도, 그리고 이 천박한 자본주의와 산업화와 근대가 태어나고 그 영양분을 쪽쪽 빨아먹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그 '집'으로 가보는 어떤 여행기(記)인 것이다.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과는 달리, 이정향의 [집으로...]는 화해를 권유한다. 박찬욱의 시선이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한 토막을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라면, 이정향의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우리가 떠나온 이후 거기가 어떻게 변했으며, 결국 우리와 그곳은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하는가를 모색하는 것이다.
집으로가 진정으로 감동적이고, 내 눈에서 뜨거운 소금물을 눈언저리가 따갑도록 뽑아낸 것은 우리들의 집, 우리들의 고향, 이제는 흔적기관으로 퇴화된 듯 보이는 저 농촌이 자본의 생채기와 모함, 이지메에도 결코 성내지 않고 오히려 떠나온 우리들을 걱정해주면서 보살펴주려고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미야자키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가 지하세계로 떨어져 인간이 파괴시킨 대자연이 오히려 새로운 공기와 흙을 다시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한없이 흐느끼던 장면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이 땅의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중화학공업화정책'과 '수출산업입국'에서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야당 당사에서 점거농성을 하고, 스물언저리의 나이에 옷을 벗은 채 시위를 벌이고, 급기야 똥물을 뒤집어 쓰면서, 그리고 그 들 중 몇몇은 결국 사창가 언저리로 전락하고 말았던 도시, 그 딸들의 엄마들이 바로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들'이신 것이다.
감독은 그러나, 그 딸들이 낳은 새 세대를 다시 그 딸들이 본래 떠나왔던 공간과 시대로 돌려보냄으로써, 그리고 그 안에서 상처 주었고, 파괴 시켰던 것들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최초의 균열과 대결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동화되고 설득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제시함으로써, '거대한 화해'를 넌지시 촉구하고 있는 셈이 된다.
박찬욱의 방법론이 가져다 주는 저 냉정하고도 칼날 같은 분명함에도 역시 어떤 '미덕'이 있다. 이는 자신의 얼굴을 자신의 눈으로는 전혀 볼 수 없는 인간의 슬픈 운명에 관해 지나치리만큼 정직한 거울이 되어주는 것이다. 보라! 이것이 당신의, 나의, 아니 우리 모두의 진짜 얼굴이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냐구?
결국 나는 영화를 제대로 된 순서로 본 셈이다. [복수는 나의 것]과 [집으로...]는 수미상응(首尾相應)한다. 이정향은 천천히 대답한다. 먼저 화해하자고, 지금과 처음이 화해하자고, 결과와 시작이 마주보자고, 아이가 더럽다고 뿌리쳤던 그 외할머니의 검버섯핀 주름투성이의 손등이 결국 아이가 딱정이 입은 모습으로 처절하게 펑펑울자 아이의 볼을 매만지던 그 장면에서, 내 서푼짜리 자존심과 개성 같은 것들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김승옥의 '누이'는 이제 '상우'라는 이름의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누이는 상우를 맡겨놓고는 다시 그 도시의 입 속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상우는, 누이에게 있어 도시가 누이에게 만들어준 그 상우는, 그런데 누이의 집에서 변화된 상우가 되었다. 상우는 이제 다시 '집'을 떠나 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뭐가 변했느냐고? 얼마나 바뀌었느냐고?
바로 그 질문이, 바로 상우가 처음 외할머니를 만났을 때 보여준
바로 그 첫 얼굴이었지.
: 조각모음
영화 [집으로...]의 얼개를 다음처럼 단순화해보자.
외손주의 온갖 악마적 괴롭힘에도 묵묵할 뿐 아니라 오히려 손주를 보살펴주는 외할머니
그런 외할머니를 처음에는 정말이지 재수없도록 괴롭히다가 결국에는 천천히 변화하는 외손주
이건 미야자키하야오의 각 작품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립선이다.
대지의 여신이라고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가이아(Gaia)는 땅의 어머니다.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다.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주는 그런 어머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도 자신의 몸에서 철분 몇프로, 단백질 몇프로 떼어내 아이 몸을 만든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우리 엄마도 나랑 내 동생을 낳고나서 이가 상하셨다고 했지.
대지의 여신은 자연의 의인화다. 그리고 서양언어가 철저하게 따르는 성별구분에 따라 땅은 여자다. '남자가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그런 땅이 아니라 엄마로서의 땅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땅이 낳은 아이의 아이가 된다. 대개 그 영화를 보는 건 엄마의 엄마도, 엄마들도 아닌 손주뻘들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집으로...]를 보는 동안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정체 모를 죄책감이 태어난다.
인간이 건설한 문명 중, 아직 자본주의가 태어난 건 채 200여년에 불과하다. 거기서 이 놈의 자본주의라는 후레자식은 저를 낳아준 이 '어머니 대지'에게 무슨 짓들을 저질러 왔던가.
하지만 이정향 감독은 자신의 전작, [미술관 옆 동물원]의 심은하처럼 예쁜 얘기를 좋아하는 듯 보인다.
미야자키하야오는 지쳐 은퇴했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가 [원령공주]를 만들기 전에도 그는 은퇴한 감독이었다. 그는 짜증을 냈다고 한다. 자신이 더 말하고 싶은 건 없다고 했지.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와 [원령공주]를 만들었다. [원령공주]에는 더 이상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분위기는 없다. 분노한 대 자연은 끝내 세계를 집어삼킬 듯 폭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손주가 외할머니에게 건네주고 거버린 그 엽서들은 관객들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고 쥐어짜낸다. 크레파스로 정성껏 그린 그림들과 몇 마디 낱말들은 그러나 자본주의와 대자연(大自然)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진정, 장엄한 눈물과 한숨이 범벅되던 장면이다.
그러나 잊지말자, 이 화해는 둘이서 서로의 잘못을 뉘우치는 화해가 아니었음을. 한쪽에서는 아무 말 없고, 나머지 한쪽이 진심으로 사과해 이루어진 그런 화해였음을.
첫댓글 컥 감사~ 비디오 보기 귀찮아서 어쩔까 고민했는데 이거 보고 대충 내용 짐작 해야죠 ^^
가능하시면 그래도 한 번 보시죠. 보기 드물게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강의실을 빌리셔서 동기들과 함께 보셔도 좋고 도서관 비디오로 보셔도 됩니다.
물론 우리 도서관에 비디오테잎이 비치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네 비디오대여점에서 빌리셔서 학교에 들고 오셔서 도서관 비디오플레이어를 이용하시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