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형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단편적인 자료와 자신의 주장 이외에는 거의 자료가 없다. 자신의 주장 또한 역사적 근거는 전혀 없고 사실을 과장하거나 날조한 흔적들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일생을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그가 일제의 밀정으로 활약했던 만큼 청년 시절은 그야말로 안개에 싸여 있다.
1895년 4월 20일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난 그는 15세까지 한학을 공부한 뒤 원산 광성(光成)소학교, 보광(保光)중학교를 나와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와세다대학 조선인 동창회 명부에는 이종형이 충남 출생으로 1918년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과를 졸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졸업생 명부에는 이름이 없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 와세다대학에 입학해서 졸업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여튼 이종형은 일본에서 귀국하게 되는데, 훗날 그는 자신이 3|1 운동 때 종로에서 일본인 순사 2명을 때려 죽인 혐의로 체포되어 복역했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또한 의문이다. 1949년 3월 반민특위 재판부가 낭독한 기소장에 따르면 @이종형은 3|1 운동에 주동자로 참여하여 징역 19년을 언도받고 복역중 감형되어 9년 만에 출감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종형이 1950년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작성된 {국회보} 3호에서는 그가 @3|1 운동에 참여하여 12년 징역을 받아 서대문과 함흥감옥을 거쳐 원산감옥에서 출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쓴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검증이 필요하다.
먼저 3|1 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종형의 형량부터 보자. 자신은 @19년#의 형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런 형량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제 때의 형법에 따르면(지금도 대개 그러하지만) 15년형이 넘을 경우는 일반적으로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언도한다. 따라서 이런 형량은 법적 상식에서도 어긋난다. 이종형 자신도 이것을 뒤늦게나마 알았는지 {국회보}에서는 12년형으로 고친 것 같다.
다음으로 자신의 주장처럼 @19년 징역 언도에 9년 복역#이라 하면 실로 대단한 형량이다. 3|1 운동 가담자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인 형량을 보면 시위 주모자라 하더라도 1년에서 3년 정도였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이상의 징역을 살았다. 한 예로 경기도의 민용운(閔用云)은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그 때로서는 대단히 높은 형량이었다.({독립유공자공훈록} 2권, 465면)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종형의 형량은 지서 습격, 살인|방화 정도에 해당되는 것으로 당연히 그 자료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우리나라나 일본측 어느 자료에도 보이지 않는다. 3|1 운동 상황을 비교적 빠짐없이 기록한 김정명(金正明)의 {조선독립운동}, 강덕상(姜德相)의 {현대사자료}, 나아가 {동아일보}, {조선일보} 및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독립운동사} 제2|3권에서도 이종형의 행적은 찾을 길 없다. {독립운동사}는 2천 페이지 정도의 방대한 분량으로 1919년 전국의 3|1 운동 상황을 비교적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종형이 주장하는 정도의 감옥생활을 했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면 당연히 서술되어 있어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찾을 수가 없다.
의열단원으로 행세하며 밀정노릇을 하다
이종형의 사실 날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즉,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계속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국회보} 3호에 경력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원산감옥에서 나와 36세 때(1930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42세 때 하얼빈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지린(吉林)|다롄(大連)|뤼순(旅順)감옥에서 복역하다가 46세 때 출감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지 보자.
1930년 여름, 만주로 건너간 그는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이 의열단 활동을 했던 유석현(劉錫鉉)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21세에, 펑톈(奉天) 만주일보 사장으로 있던 고향 선배 구연흠(具然欽)의 소개로 이종형을 만났다고 한다. 유석현은 이종형을 당시 30세 정도의 대머리로 재주가 뛰어났다고 기억하면서 그래서 @변절#했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하였다. 그런데 @변절#이라고 하면 그전에는 민족운동을 했다가 어떤 이유로 해서 일제에 협력했다는 뜻이 되는데, 그렇다면 이종형이 과연 의열단에서 독립운동을 했을까.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의 지린에서 암살, 폭동, 파괴 등의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려고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였다. 그런데 이종형이 의열단에 가입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밀정활동을 감추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의 밀정으로 의심받지 않고 활동하려면,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가로 행세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이종형의 이러한 간교한 술책은 밀정으로 활동하면서 곧 드러난다. 자칭 @조선의 독립운동가#인 이종형은 만주국 지린성 군법처장 왕(王)씨를 통해 지린 감군(監軍) 장쭤린(張作霖), 참모장 희흡(熙洽)과 서로 짜고 이른바 초공군(剿共軍)사령부를 조직하였다. 초공군사령부는 1920년 일제가 만주에 있는 조선인들을 탄압하고 독립군을 검거하기 위해 만든 보민회(保民會)와 같은 조직이었다. 이종형은 초공군사령부의 고문 겸 군재판관에 취임했으며, 얼마 되지 않아 군경 지휘권까지 얻어냈다. 이종형은 이러한 지위와 권한을 이용하여 5개월 동안 둔화(敦化), 동만(東滿)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밀정노릇을 했다. 이 때 이종형은 조선인 공산당원을 토벌한다는 구실 아래 지린성 둔화현 왕도하(王道河) 등의 부락에 살고 있는 애국지사 50명을 직접 체포하여 그 가운데 17명을 교살하거나 투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듬해인 1931년부터 이종형은 동북군 총사령부 겸 동삼성 순열사위내 고문으로 있으면서 주로 조일 관계 또는 일본 외교 문제를 담당하였다. 1931년 5월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한 번 밀정으로서의 악명을 떨쳤다.
당시 조선일보 창춘(長春)지국에서 근무하던 김이삼(金利三)은 만보산 사건의 진실을 취재하여 보도했다. 이 때 이종형은 김이삼을 얼토당토 않게 일본영사관의 주구로 몰아붙였다. 또한 그는 김이삼이 만보산 사건이 없었음에도 대서특필하여 허위보도함으로써 조선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했다고 주장하고 몰래 죽여 없앨 계획을 세웠다. 이에 그는 김이삼을 창춘에서 지린의 자기집으로 불러들여 체포, 감금하였다. 그리고 5~6시간이 지난 뒤 풀어주겠다고 하면서 지린시 우마황 연등호 여관에 잠시 머물게 한 뒤, 부하를 시켜 여관에서 총으로 사살했던 것이다. 또 독립운동가 승진(承震)을 지린 강남공원에서 암살했고, 하얼빈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을 일제 경찰에 밀고하여 결국은 옥사케 하였다.
이처럼 이종형은 만주에서 밀정으로 활동하면서 온갖 악질적인 행위를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 그는 밀정으로 활동하면서 보복이 두려웠던지 의열단원, 그 가운데서도 특히 김시현(金始顯)과 친하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시현은 의열단원으로 해방 후 이승만의 암살을 기도했던 테러리스트였다. 결국 이종형은 일제 군경과 독립운동단체에 양다리를 걸치면서 자신의 악질적인 밀정 행위를 숨기려고 했던 것이다.
유석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시현은 조선의 해방에 대비하여 일본인 기다하라(北原)와 박시목(朴時穆), 권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옌안(延安)의 독립동맹 등 각지의 무장 독립운동세력을 연결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했다고 한다. 이들은 해방이 되었을 때 일정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계획을 추진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발각되어 김시현을 비롯한 관련자 수십 명이 모두 베이징에서 체포되어 구속 수감되었다.
이 때 이종형은 김시현을 베이징에서 국내로 데려와 용산 헌병대에 수감시켰다. 베이징에서 구속된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지만, 김시현만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종형이 김시현을 국내로 데려와 결국 죽지 않게 한 것은 자신의 밀정 행위를 은폐하고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었다.
이종형은 1941년 만주에서 귀국한 뒤에도 일제 총독부 경무부 촉탁으로 있으면서 밀정노릇을 계속하였다.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 야쓰기(八木信雄), 경무국 경무과장 후루가와(古川兼秀), 조선주둔군 참모장 다카바시(高橋), 헌병사령부 특고과장 노하다(野田) 등과 몰래 만나면서 이들의 앞잡이로 활동했다. 이 때 그는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 장명원(張明遠), 권태석, 김만룡(金萬龍), 김선기(金善基), 이상훈(李相薰), 박시목 등을 일제 경찰에 밀고하여 투옥시키는 공로를 세웠다. 이종형의 이같은 뛰어난 활약에 대해 당시 일제 경찰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종형은 1942년에는 친일단체 총진회(總進會)를 조직하여 기독교 탄압에 앞장서고 일본 신도(神道)를 합리화하면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 때 이종형은 아현 마루턱에 있는 성결교회를 접수해 학교를 경영한다고 나서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극우반공주의자로 변신하다
악명높은 밀정으로서 일제에 충성을 다바치던 이종형은 해방과 함께 철저한 극우반공주의자로 변신하였다.
해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45년 11월 25일, 그는 극우반공신문인 {대동신문}(大東新聞)을 창간했다. 나중에 {대한일보}, {대동신문}(大同新聞)으로 이름을 바꾼 {대동신문}은 그 경영진과 제작진들이 대개 친일파에서 변신한 자칭 반공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종형은 언동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보수우익으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았다. 이런 점에서 이종형의 행동은 일본군국주의 반공정신에 철저히 물들어 있던 친일파가 해방 후 살아남기 위해 보여준 처절한 몸부림의 전형이었다.
자신이 직접 쓴 저돌적인 반공논설을 {대동신문}에 매일 실은 이종형은 극우반공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승만, 김구세력을 제외한 모든 정당과 정파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펴다가 결국에는 1946년 1월 7일 테러단의 습격을 받기까지 했다.
이종형이 사주로 있던 {대동신문}은 여운형 암살음모사건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거나 미군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5월 15일 정간처분을 받았다. 이종형은 이 때 구속되었다가 11월 초에 석방되었다. 신문이름을 바꿔 {대한일보}를 발행하면서 이승만의 독촉국민회 중심의 단독정부 수립노선을 지지하거나 한민당을 공격하는 등 좌충우돌을 계속하였다. {대한일보}는 당시 친일세력을 대변한 극우반공신문으로서 사주인 이종형의 개인 감정을 발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이종형은 극우 테러리스트들과도 친하게 지내면서 이들의 테러활동을 배후에서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북창동에 있던 자신의 대동신문사 사무실에서 송진우 암살사건에 관련된 신동운(申東雲), 여운형의 집에 폭탄을 던졌으며 나중에 반민특위위원 암살을 기도했던 백민태(白民泰), 그리고 박임호(朴林虎), 김시제(金時齊) 등과 자주 만났다. 그러던 중 1947년 7월 12일 비원에서 열린 @서재필 박사 귀국환영연#에서 허헌(許憲) 등 좌익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그는 이들 테러분자에게 4.5구경 권총과 미제 수류탄 2개를 건네 주었다. 그러나 이종형은 사건이 크게 확대되어 자신에게 번질 것을 염려하여 사전에 이승만, 김구 등에게 알려 좌익요인들의 참석을 막게 했다고 한다.
$반민법은 망민법이다&
이종형은 자신이 극우반공주의자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해방 후 국내에 공산주의가 새빨갛게 퍼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친일파가 해방 후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이종형의 변신도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같은 동족에게 악질적인 행위를 자행하던 자신의 친일 전력을 감추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친일파 청산 움직임이 나타날 때마다 선두에 서서 이를 반대하였다.
1947년 입법의회에서 부일협력법안 제정이 논의되자, 이종형은 5월 5일 @부일협력법안 검토대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주장을 늘어놓으면서 반대를 부르짖었다.
이것은 망민법(網民法)입니다.<>그냥 두다가는 1백만 내지 2백만~3백만 명의 많은 사람들이 이 망민법에 다 걸려<>가장 능률적, 가장 명석한 인재들을 제외하고 누가 미증유의 건국대업을 성취할 것입니까?<>법이 없을 때의 행동을 지금 새로이 법을 만들어 소급하여 처단하려는 불합리한 이 법을 민주주의적 현실에서 그냥 묵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된 뒤,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의 초안을 의사일정에 상정하자 이종형은 제일 먼저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대한일보} 8월 17일자 사설 ~은위병행^(恩威幷行)을 통해 @친일파 문제는 그 시대 우리 민족의 공동으로 진 책임성#이라고 주장하여 책임을 회피하면서 친일파들을 $보호 또는 합병 조약에 책임을 진 매국적(賣國賊) 이외에는 대개 직업상 종사한 자&라고 변호하였다. 그는 또한 법은 기강을 세우는 데 그쳐야 하는데, 반민법은 @입의(立義) 때 이상 광범위로 많은 희생#을 내게 되므로 @민심을 소란케 하는 악영향#을 끼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요구는 계속되어 9월 7일, 마침내 반민법이 제정되었다. 그러자 이를 전후하여 친일세력들은 반민법 제정에 앞장선 국회의원들을 공산당으로 몰아붙이면서 끊임없는 방해 책동을 벌였다.
친일세력의 대변자인 이종형이 그냥 보고만 있었겠는가? 그는 {대한일보} 사설을 통해 친일파 $처단 운운하는 자일수록 동포를 괴롭혔다. 국회의원이 양심이 바늘끝만치라도 있다면 망민법을 제정할 수 있는가?&라고 떠들어 대는 한편, 반민법이 공포된 다음날 극우반공단체들을 끌어모아 @반공구국 총궐기 및 정권이양 축하 국민대회#를 열었다. 궐기대회가 열린 서울운동장 곳곳에는 @국회를 통과한 반민법은 일제시대 반장이나 동장까지 잡아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이것은 온 국민을 그물로 옭아매는 망민법이다#, @이런 민족분열의 법률을 만든 것은 국회 안에 있는 공산당 푸락치의 소행이다#, @국회 내의 김일성 앞잡이를 숙청해야 한다#는 등등의 반민법 반대구호들이 도배하듯이 붙어 있었다.
대회 주최자인 이종형은 연단에 나가 @반민법을 철폐하고 이를 제정한 국회를 쳐부수자#고 소리쳐 참석한 친일파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이 궐기대회에서는 반공과 반민법에 관한 2원칙 7조항을 결의하였다. 제1원칙은 $현재 대한민국을 지지|보위하는 자는 애국자로 규정하고, 따라서 8|15 이전 행동에 구애하지 말고 포섭&하라는 내용이었다. 반민법을 완전히 부정하는 주장이었다. 또한 이 대회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월#을 채택하였는데, 그 내용은 $진정한 민족반역의 현행범인 공산매국노의 처단을 전혀 도외시한 채 극단 광범위에 소급 적용하여 동포이간과 동족상잔할 화근을 남길 반민법이 제정&되었으므로 $각하께서는 이 법의 실시를 보류하는 시책을 조속히 강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반민법 제정을 방해했던 이승만 정권은 이범석 국무총리가 참석해 격려사를 하는 것으로 대회를 성원해 주었다. 경찰도 대회에 참석하지 않으려는 시민들을 좌익으로 몰아세우거나 배급통장을 빼았겠다고 협박하면서 강제 동원하였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윤치영(尹致暎)도 24일 오후 7시 방송을 통해 반공대회는 해방 후 처음 보는 애국적 대회라고 추켜세웠다.
이종형이 주도하는 대한일보의 반대운동은 반민법 공포에 따라 @반민특위#가 결성되고 활동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격렬해졌다. 이는 결국 사회적으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켜 국회는 1949년 11월 29일 제116차 본회의에 김동성(金東成) 공보처장을 출석시켜 답변을 듣기에 이르렀다. 본회의에서 윤병구(尹炳求), 노일환(盧鎰煥), 김상돈(金相敦) 등 소장파 의원들은 반공을 내세워 국회를 모독하고 국민을 선동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저지른 {대한일보}를 폐간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검토해 보겠다는 답변을 얻어내는 데 그쳤다.
반민특위 방해 책동에 발벗고 나서다
반민특위 활동에 끝까지 저항하던 이종형도 마침내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1949년 1월 10일 오후 8시 30분, 반민특위 위원 김동명(金東明)의 지시를 받은 신형식(申亨植) 조사관이 특경대를 이끌고 종로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이종형은 화신재벌의 총수로 친일자본가의 거두였던 박흥식*에 이어 두번째로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이종형은 반민특위 특경대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권총을 빼들고 @내가 이종형인데 무슨 일이 있어 잡으려 왔느냐#며 극렬하게 반항하였다. 반민특위 사무실에 끌려와서도 @나는 애국자다. 나를 친일파로 몰아 잡아넣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풀려나는 날 한민당, 빨갱이, 회색분자를 모조리 토벌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날뛰었다. 이종형은 마포형무소 독방에 수감된 뒤에도 @반민법은 망민법이며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내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원인은 사방에 정치적 적을 둔 까닭#이라며 화를 냈다.
이종형의 공판은 1949년 3월 29일 오후 3시 30분에 열렸다. 이종형에 대한 기소장은 주로 만주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고 학살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기소장 낭독이 끝나고 재판장이 사실 심리에 들어가려 하자, 그는 웅변하듯 @공산당을 때려 부순 애국자를 어째서 반민법정에서 재판하려 하는가. 나는 심문에 응하지 않겠다#며 소란을 피워 15분 만에 폐정되었다. 폐정 이후에도 억울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내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지 않고 내 손에 쇠고랑을 채워주다니!#하며 고함을 질러댔다.
2회 공판은 6월 12일에 열렸으나 재판부에 반항하는 그의 태도는 여전했다.
공산당을 토벌하였다고 재판하는 이 법정에서는 나는 재판을 못 받겠다. 공산당을 타도하였다고 재판을 받는다면 여기 앉아 있는 재판장 자신이 재판을 받아야 될 것이다. 이동녕 선생이 애국자인데 그의 아들인 너 이의식이가 너의 아버지 못지 않은 나 같은 애국자를 심판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에서는 반공주의자를 처단할 수 없다. 김일성(金日成) 법정이 아닌 이 법정에서 나를 심판한다고?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비호 아래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함으로써 친일파 처단을 위한 마지막 노력마저 무산되었다. 반민특위가 해산되자 감옥에서 풀려나온 이종형은 이제 자유롭게 활개칠 수 있는 세상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후 그는 평소부터 @정치투쟁이 자신의 취미#라고 강조해 온 대로 정계에 뛰어들었다.
1950년 5|30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 계열의 국민회 추천으로 입후보한 그는 무소속의 유기수(劉奇洙)를 어렵게 누르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과거 일제의 밀정노릇을 하며 민족해방운동가들을 잡아들이던 자가 @해방#된 조국의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이종형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일보}에 이어 발행된 {대동신문}의 사장으로도 행세했다. {대동신문}은 이승만의 재집권을 열어준 @발췌개헌안#이 계엄령 아래서 통과된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에도 야당인 민국당, 이승만 정권, 조봉암계를 모두 공격하여 @독설가의 독설 신문#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다. 이를 보면 그가 주장하던 반공주의라는 것도 어떤 정치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살아남기 위해 부르짖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이런 그도 운이 다했는지 1954년 2월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대동신문}도 곧 사라져 갔다. 사람들은 이제 변신과 곡예를 거듭하며 필사적으로 살아온 한 친일파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