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句(명구), 名言(명언)
재미있는 古語(고어) 풀이와 이야기
心情 成 完 鏞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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季札掛劍(계찰괘검)
계찰이 검을 걸어 놓았다는 뜻으로, 信義(신의)를 소중히 여기며 마음의 약속도 지킴. 계찰의 보검을 마음속으로 서주의 군주에게 주고 싶었으나 서주의 군주는 이미 죽어 서주의 군주 무덤 앞 나무에 검을 걸어 놓는 일. 季札(계찰).
史記(사기) 吳太白世家(오태백세가)에서 春秋時代(춘추시대) 商國(상국)에 사신으로 가는 吳(오)나라 왕자 季札(계찰)이 西(서)나라에 들렸다.
오나라 왕자 계찰이 서나라 군주와 여러 가지의 일을 이야기 하였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서나라 군주는 계찰의 보검만 보고 있었다.
오나라의 왕자 계찰의 보검만 자꾸 서나라 군주가 보는 듯하다. 그 때의 태도로 보아 서나라의 군주가 자기의 보검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계찰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 그 칼을 군주에게 주기로 마음속으로 결심 했다.
상국에서 외교 등 일을 잘 마무리 하고 귀국 길에 서나라에 들렸으나 군주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래서 계찰은 서나라 군주가 죽은 무덤을 찾아가 세 번 절한 뒤에 그 칼을 군주의 무덤 앞에 서있는 나무위에 걸어 놓고,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자기 마음의 약속을 지켰다(季札掛劍 : 계찰괘검).
그쯤 되자 시종들이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 하필 보검을 선사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계찰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처음부터 내 마음속으로 이미 주기로 한 것을 어찌 그가 죽었다고 바뀌랴(季子曰 不然 始吾心已許之 豈以死倍心哉 : 계자왈 불연 시오심이허지 개이사배심재)?
吳(오)나라의 始祖(시조)인 太白(태백)으로부터 20세인 壽夢(수몽)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막내인 季札(계찰)이 가장 뛰어났다.
壽夢王(수몽왕)도 백성들도 계찰의 즉위를 희망했다.
그러나 순위로 따져 장남인 諸樊(제번)이 왕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제번은 아버지의 희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왕위를 계찰에게 물려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왕위는 형제가 차례로 계승한다.
제번이 4년 만에 죽으니 마침내 계찰이 즉위할 차례가 되었다.
계찰은 형이 만들었지만 장자의 원칙을 지키며 즉위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숨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셋째인 형 余昧(여매)의 아들 僚(료)가 왕이 되었다.
제번의 아들인 光(광)은 군사를 총괄하는 직책에 머문다.
오 왕 료는 費無忌(비무기)의 잘못을 물어 楚(초)나라를 공격하자 광은 伍子胥(오자서) 밑에 있던 담력 있고 검의 명수인 專諸(전제)라는 사람을 요리사로 변장해 자객으로 구운 생선 속에 비수를 가지고 료왕을 시해 했다.
광은 료의 측근들을 모두 죽이고 오왕 闔閭(합려)가 된다.
계찰은 前王(전왕)의 사절로서 상나라와 서주를 거쳐 晉(진)나라에 있었다.
이번의 모반에 대하여 계찰은 이렇게 말했다.
조상들의 대를 끊지 않고 백성들이 주인을 버리지 않고 社稷(사직)을 받들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나의 군주다.
나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죽은 료를 애도하고 살아 있는 합려를 섬기며 천명을 기다리자!
계찰의 신의는 나라를 진정으로 또 마음속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계찰의 말을 듣고 합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만일 계찰이 장조카인 합려를 비난했다면 오나라는 다시금 혼란에 빠졌을지 모른다.
계찰의 보검을 마음속으로 서주의 군주에게 주고 싶었으나 서주의 군주는 이미 죽어 서주의 군주 무덤 앞 나무에 검을 걸어 놓는 일 같이 사직을 구할 수 있는 마음을 정한 것이다.
季布一諾(계포일락)
절대로 틀림없는 승낙. 절대로 신뢰할 수 있는 승낙의 비유. 한 번 승낙하면 반드시 실행함의 비유. 한번 약속 한 이상은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킴. 계포가 한 말은 승낙한 것으로 봄. 一諾千金(일낙천금).
史記(사기) 季布列傳(계포열전)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季布(계포)는 한 때 楚(초)나라 項羽(항우)의 수하 장군으로 漢(한)나라 劉邦(유방)을 괴롭히니 유방은 현상금을 걸었으나, 협객 朱家(주가)가 夏候嬰(하후영)에게 추천하매, 고조(유방)가 사면하여 한나라의 중랑장이 되었다.
그러나 계포는 초나라 친구 曺丘(조구)를 매우 싫어했으니, 조구가 계포에게 찾아와 서로 도우면 커지고 흩어지면 작아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 이에 계포가 깨닫도록 극진히 대접하면서 조구는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계포의 이름을 널리 알려서 명성이 더욱 높아진다.
조구는 계포의 유래를 적어서 초나라 속담에서 황금 백 근을 얻는 것이 계포의 대답 하나를 얻는 것보다 못하다(一諾千金 : 일락천금). 계포는 약속을 지킨다는 명성이 자자하며 한 번 대답은 반드시 그것을 지킨다.
계포는 동향인이며 변설가이며 물질 욕이 강한 조구가 자기를 적극 홍보하여 주니 조구를 빈객으로 맞이하여 후대함으로 계포일락의 명성이 더욱 자자했다고 한다.
후에 司馬遷(사마천)이 史記(사기)에서 말하길 項羽(항우) 아래서는 누구도 빛을 보기 어려웠다. 계포는 항우의 장수로 용맹하여 항우가 마지막 싸움에서 패하자, 계포는 쫒기면서 노예로 변장하여 목숨을 이어 갔다.
유방은 계포를 현상금 천금을 걸었으나 그를 체포하는 자는 없으며, 협객 朱家(주가)가 夏后嬰(하후영)에게 추천하여 유방은 그에게 중요한 직책에 명할 것을 권한다.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고 굴욕을 감수하여, 끝내 유방에게 추천되어 한나라의 명장이 되었다.
유방이 불러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의로운 일로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유방이 죽은 후 흉노의 선우인 冒頓(모돌)은 呂(여) 태후를 깔보는 편지를 이렇게 보냈다
듣자옵건대 한제 붕어하시고 당신은 미망인 나도 閼氏(연오 : 연씨)와 사별하여 미망인도 쓸쓸하겠지만 저도 홀로 되어 쓸쓸 하오이다. 우리 두 사람 모두 반려자를 잃은 외톨이인즉 서로 다정하게 위로함이 어떠하오니까?
음 흉노의 야만 무례한 놈들!
여태후는 군신들을 모아놓고 이 무례한 흉노의 서한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여태후의 동생 남편이 되는 상장군 樊噲(번쾌)가 말하니, 제게 10만의 병력만 주시면 흉노족을 토벌하고 오겠습니다.
이때 中朗將(중랑장) 계포가 소리치며 반대했다.
번쾌는 斬罪(참죄 : 목을 자르는 죄)함이 마땅합니다.
선제께서도 일찍이 白登山(백등산)에서 흉노족에게 포위되었을 때 번쾌는 32만의 한나라 병사의 상장군이면서도 적의 포위를 뚫고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전투의 쓰라림을 노래하는 소리는 아직도 항간에 들리고 있습니다.
상이군인들도 겨우 일어설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번쾌가 10만의 군사로 흉노를 무찌르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는 천하를 혼란 속에 빠뜨리고 싶은가 봅니다.
秦(진)은 흉노에 대비하여 북쪽 땅에 대군을 동원했기 때문에 망국의 한을 맛본 것이옵니다. 그것을 본뜨려는 자는 참죄에 해당되옵니다.
여태후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계포가 말했다. 오랑캐는 금수와 같습니다.
그들에게 칭찬을 받았대서 기쁠 것도 없고, 그들이 지금같이 악담을 해도 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당히 회답해 보내면 될 줄로 아뢰옵니다.
여태후는 계포의 말을 따랐다. 나는 나이가 먹어 상대 같은 건 할 수 없소.
사마천이 말한다. 계포는 진실로 용기 있는 자는 가볍게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단순한 감정에 자살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살기위한 희망이 무너져도, 재기할 수 없다고 생각 할 때도 스스로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목숨은 천명으로 계포같이 끈질기고 깊이 생각하여 사리가 깊으니 후에 사람들에게 季布一諾(계포일락)이란 지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