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단
Written by_ _Teardrops
내가 의미하는 것 - 1장 코스모스 단 <4>
짹짹.
"……."
채 걷히지도 않은 어둠을 비집고 태양이 그 빛을 세상에 비치려 하는 지금. 그렇다 해도 아직 어두운 건 사실인건데, 푸른 불빛이 방 안 전체를 메우고 있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고요한 숲속의 미물들은 잡히지 않기 위해 그런 현실에 암담해 울면서도 먹이를 찾아다니는 날개 달린 축들의 푸드덕대는 소리를 가로질러 그 빛을 따라온 곳은 로니펠 영지의 한 가운데, 그 집안의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성 한 채.
아무도 오지 않는 방.
아무도 오게하지 않는 방.
아무도 올 수 없는 방.
…누구도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방.
2층 서재 바로 옆 굳게 닫힌 방이었다.
"기사라…."
푸른 불이라고 해봐야 기름 초에 푸른 색 연지를 싸서 여러 개 세워 두는 것뿐이었다. 그건, 단지 그녀의 취향에서 그렇게 한 것. 별로 밝지 않는 그 방 한가운데에 침대가 있었다.
"한 주군을 모시면 반드시 주군만을 섬긴대."
그리고 그 침대엔 소녀가 있었다.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 태양의 흔적을 쫓는 것인가, 소녀는 밝지 않는 창 밖일지라도, 혹 지나가는 한 마리의 새조차 놓칠까하여 전혀 미동도 않은 채 보고만 있었다.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역시 일어나서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건 조금 외로운 일이다. 그녀가 씁쓸하게 웃음을 지을 때, 그녀의 시선의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도 말씀이군요."
그런 소녀를 몇 걸음 물러나 공손한 태도로 바라보며 대답한다. 소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시녀가 한 명 있었다. 소녀는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소녀의 손에는 흔히 '로망'이라고 하는, 일종의 위인전이 들려있었다. 예전의 유명한 영웅, 혹은 성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걸 진작에 본 시녀는 품위 있게 웃으며 소녀에게 말한다.
"후후, 꼬마님을 위해 몸 바쳐 일 할 사람들은 영지 내에도 많습니다."
소녀는 미소지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응… 하지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내 몸 상태를 아는 사람 치고, 나를 평생 간병한다든가, 나를 위해 자신의 자유 전부를 버릴 그런 기사는, 아마 분명, 적어도 이 영지 안엔 없다.
"아니야, 엠마. 내가 원하는 건, 나를… 이렇게 약한 나를 강제로라도 데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바람과 같은, 그래… 새의 날개와도 같은 그런 기사야."
그래, 없다. 그런 게 있기 바라는 건 단지 나의 작은 소망. 그게 이루어질 리 만무하지만, 그저 바란다. 바랬다. 그래서 이렇게 웃고 있다. 비록 쓸쓸해 보이는 웃음일 테지만 그래도 웃는 거다.
꼬마의 말에 엠마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꼬마는 로니펠 영주의 둘째 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 돌아가실 정도로 그녀는 난산으로 태어났고, 거기다 8개월을 다 못 채우고 태어난 칠삭둥이였다. 로니펠 영주에게 낳은 지 3일 째, 그 날을 넘기기 힘들다는 산파의 말은 치명적이었기에 부인을 잃고 딸마저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겨우 꼬마를 살리게 된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인지 그녀의 생전 별명이었던 '꼬마'라는 글자로 무심결에 이름을 지어버린 로니펠 영주는 자신을 한심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계속 꼬마라 불렀다.
커가면서 자신의 출생 얘기를 듣게 된 꼬마는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죄책감으로 먼 끝 방으로 방을 옮기고, 집안에 살 되, 존재감이 없게 타 가족들과 교류를 끊고 살았다. 아마 자신이 집에 있다는 자체가 아버지에게 좋지 않은 기억으로 기억나게 되니, 일종의 죄송스러움과 함께 뭇 말로 표현 못할 그런 기분이었을 테지. 그래서 그녀는 방을 옮겼다. 그리고 엠마를 고용했다. 그녀는 그래도 엠마를 통해 집안 사정의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솔미님으로 호위관으로 누가 온다던데 아시나요?"
엠마의 그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빙그레 웃는 꼬마다.
"가봐야 하지 않나요?"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굳이 그럴 필요 없는 걸. 아아… 솔미도 호위기사가 드디어 생기는 구나."
소녀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엠마와 꼬마 둘 다 조용히 웃었다.
"엠마는 내 대신 가봐. 이번에도 아프다는 핑계면 아버지도 넘어가 주실 거야."
그녀가 지금까지 수년간 집안 사람들과 교류를 끓은 핑계는 요양. 안 그래도 몸이 수시로 아팠던 그녀다. 그래서 혹 집안의 큰 일이 생길 때도 이런 식으로 아프다는 핑계로 넘어갔던 것이다. 뭐, 매번 오는 부친의 생신에도 이렇게 얼굴도 비치지 않는 그녀니, 이정도 일은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엠마를 보내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분부대로."
"솔미님."
조금 시간이 흘러 드디어 해가 상공에 걸리고 시각은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흐응…."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의 방이다. 걷혀진 커튼으로 창 밖에선 햇빛이 비쳐와 흰 빛 방안에 이리저리 반사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역시나 그 빛 가운데에 소녀가 있었다.
"일어나세요. 오늘은 중요한 날이잖아요."
"……!"
'5분만~'하며 칭얼대던 솔미가 한순간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베시시 웃고는 부스럭 대며 침대에서 나왔다.
"히히."
"그렇게 좋으세요?"
준비해둔 드세스를 입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간다.
"응 당연히 좋지. 아, 거기 있는 머리 띠 좀."
솔미는 시녀의 옆 경대 위에 놓여진 검은 머리띠를 가리켰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들고선 따라 들어갔다.
"호위기사라… 기대되."
시녀에게 머리손질을 모두 맡긴 채 중얼거리는 솔미였다.
"자연스러운 게 좋겠지요. 솔미님이야 원체 뛰어난 미모라…."
"에이~ 너무 그렇게 띄워주지 말아."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표정관리 하는 솔미를 보며 왠지 모를 웃음이 나오는 시녀다. 그래, 한창 귀여울 나이다. 이 시기의 솔미는.
"아, 머리띠는 내가 할 게, 너는 밖에 정리좀 해줘."
"그러죠."
별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가는 시녀다. 방안에 혼자 남은 솔미는 콧 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띠를 감았고 그럭저럭 괜찮겠다 싶어 밖으로 나왔다.
"자, 가자!"
"예."
솔미는 힘차게 나갔다. 한 영주의 딸로써의 품격과, 그녀 자신은 모르지만 왕가의 피를 받은 한 명의 영애로써의 기품을 유지하며 말이다.
"아빠, 정말로 이게 잘한 행동일까요?"
이미 연회장에 와 있는 로니펠 영주에게 다가가며 묻는다.
"아아, 나윤이구나. 그래, 뭐 문제 있니?"
그녀는 로니펠 영주의 첫 째 딸 나윤 로니펠이었다. 나윤의 표정은 그리 썩 유쾌해 보이지 만은 않았다. 당연하잖은가, 오늘의 호위 기사 임명식, 그거는 정말 뭔가 잘 못 되었다. 그래도 영주 자신이 보기에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도 않았기에 그저 가볍게 넘겼다.
"정말 제 주위의 애들로 해도 되요?"
걱정하는 나윤에 대조되게 오히려 그런 질문을 받고서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영주의 표정이다.
"응? 솔미하고 친하다며."
나윤이 솔미의 견습 호위로 결국엔 자기가 잘 아끼던 남자애 하나를 추천했었다. '정 그러면 네 친구들 중에 솔미와도 친한 애를 추천해보려무나.'라던 로니펠 영주의 말에 무심코 추천한 그 애가 아빠의 말에 쏙 들었다니.
"그, 그래도 나이가 3살이나 위라고요."
"그 정도로 뭘. 솔미 나이가 12살인데 그 정도 쯤이야."
참고로 나윤은 솔미보다 4살 많은 16세다.
"나, 남자잖아요."
"아무렴 기사인데."
로니펠 영주의 기사관은 의외로 확고했나보다.
"……."
나윤이 밀렸다. 정말 영주는 그 남자애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윤아?"
로니펠 영주가 조용히 나윤을 불렀다.
"그 애도 어차피 네가 믿으니까 추천한 거잖니. 그러니 친구로서 한 번은 믿어보자꾸나."
믿어서 추천한 게 아니라 우연히 떠오른 이름이 그 애의 이름이었고, 친구가 아니라 동생이라는 말들은 지금 아버지께는 비밀.
"…네."
그 애라면 잘 해줄거라고 혼자 되뇌이는 나윤이다. 그래도 착하고 성실하니까… 게다가 실력도 있어보이고.
"자, 와서 앉거라 시작 시간이 다 되었단다."
그래, 뭐 잘 해 주겠지. 나윤은 '나도 몰라.'라는 표정을 지으며 움직였다.
"네."
로니펠 엉주는 자신의 두 칸 옆에 앉기를 권했다. 첫 번째 자리는 옛 아내의 자리, 지금은 그 누구도 앉게 하지 않는, 조금은 외로울지도 모르는 자리였다.
나윤이 앉자마자 누군가 홀로 들어왔다.
"오오― 엠마 아닌가. 역시 나와 주었군."
영주는 그녀를 반가이 맞이했다. 영주가 유일하게 친히 대하는 시녀, 아니, 정확히는 친히 대할 수밖에 없는 시녀, 엠마였다. 나윤 조차도 꼬마를 직접 대면 못하고 문 밖에서 발길을 돌려야 하는 판에 꼬마와 다리를 놓아주는 그녀의 존재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 일 것이다.
엠마는 귀족은 아니었지만-한참 아니었지만-그 직위에 상응하는 기품이 있었고, 그렇기에 시녀로서도 주위의 칭송을 받는 터라 로니펠 가의 거의 대부분이 그녀에게 친히 대했다. 그녀는 머리 외 화술, 둘 다를 겸비했기 때문이다.
그런 엠마는 영주의 맞이에 고개를 천천히 숙이고는 나윤의 옆 좌석 뒤에서 대기했다. 로니펠 가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영주를 비롯해 다들 앉으라 권한다 할 지라도, 자기 자신이 거부하여 앉지 않는 것이다.
그걸 무언으로 보고 있던 영주가 입을 열었다.
"아예 엠마에게 로니펠 성을 하사해서 가문에 넣어버릴까."
"하아?!"
"…예?"
영주의 파격 제안에 만약 뭔가를 먹고 있었다면 전부다 뱉어 버릴 정도로 놀란 둘이었다.
"농담이었어."
"……."
심하다. 영주는 저렇게 심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뭐 그래도, 사실 사성된다 해도 거부할 엠마일 것을 잘 아는 영주였기에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로니펠 가문과는 점점 멀어져만 가는 엠마와 꼬마가 슬퍼지기도 하였다. 물론, 그건 자신의 잘못이 컸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해 줄 거라는 믿음이 점점 깨져가고 있었다.
"……."
배부른 변명이다. 꼬마에게 짐을 지운 것은 누가 뭐래도 자신이다. 오히려 엠마가 그녀와의 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에 감사해야 될 판에 아비라는 자신은 무슨 실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솔미님께서 오시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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