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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신유언과 구유언을 합하여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절을 들라고 하며는 어떤 구절을 들겠습니까? 모임에서 한 번 이 질문이 제시되자 다양한 구절들이 나오더군요. 이는 주님을 만난 환경이나 또는 신앙의 노정이 각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 중 요한복음 3장 16절이 비교적 많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구절이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들어 있는 복음 메시지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저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중심 요절로 들겠습니다. 그 이유중에 하나가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라는 단어가 거북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혼돈과 분열과 패궤로 덮여진 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에 요즈음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생명입니다. 인류와 생명과 환경은 이 미말의 때에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접하는 공통 주제입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이들도 이 생명에 대하여 성경이 증거하는 바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읍니다. 또한 여러 종교 단체, 뉴에이지 운동, 철학, 문학, 예술 등등, 세상의 초등학문에 근거를 둔 생명과 분별된 영적인 실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라면 과연 성경이 증거하는 생명은 어떤 생명일까요? 주지하십시오.. 이 생명은 로마캐톨릭이 부르짖는 단일종교나 뉴에이즈 운동이나 인본주의나 새시대와 새인류를 부르짖는 자들이 추구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결국 사망에 이르는 거짓 생명일 뿐입니다. 오늘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생명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요한일서에는 우리에게 주신 새생명에 대한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로 하여금 회개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한 첫사랑의 추억(?)이 담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주신 증거를 그가 믿지 아니함이니라. 11 그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게 하려 함이라(요일 5:10-13).(권위역)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위 구절의 요지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아들(Son)과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요! 우리에게, 곧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다니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사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심판의 형벌을 담당케 하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셨을 뿐 아니라, 약속하신 대로 다른 위로자로 우리 안에 보내셨다뇨.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우리 안에 계신 주님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생명과 삶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이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e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본 구절은 우리 안에 두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이 삶"의 주체인 나의 생명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삶의 주체인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여기서 위 구절에 대한 탐구를 잠깐 멈추고 다른 말씀을 찾아볼까요? 골로새서 3장 3,4절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죽었고,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Christ, who is our life).
이 또한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요! 우리는 죽었고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라뇨!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이라뇨! 생명은 곧 사는 것입니다. 삶의 주체는 생명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위의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의 두 구절을 보건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두 가지 삶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내가 사는 삶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자, 오늘도 잠자리에서 눈을 뜨자 마자 하루의 삶이 시작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의 삶의 공간은 가정과 일터와 교회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 시간 시간마다 두 가지 삶 중에 한 가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사는 삶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전자의 삶은 썩어진 것(corruption)을 거두는 헛되고 공허한 삶이요, 후자의 삶은 영원한 생명을 거두고 하나님께서 계수 하시며 영원 안에 기록되는 삶입니다(갈 6:8). 그러므로 믿는 이는 당연히 후자의 삶을 소망하고 마땅히 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러한 삶을 사는 키(key)는 무엇일까요? 감사하게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 해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뿐(not I, but Christ)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삶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나니" 이 삶은 간단히 말씀드리면 바로 십자가에서 죽은 삶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채 매달려 있는 삶입니다(현재시제임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왜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까? 이는 나의 자아와 의지와 뜻으로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수없이 깨닫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과 노력으로 애쓰고 수고하며 때로는 곤경과 시험을 악착같이 견디어 내기도 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실패만 거듭하게 됩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 땀은 좌절과 절망 속으로 우리를 몰고 갈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의 주체인 육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롬 8:7). 죄의 권능이 아무런 효력이 없는 곳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의 권능이 그 아무리 세고 집요한들 죽은 시체를 가지고 자기의 뜻을 이룰 수는 없겠죠.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삶이 있을 뿐이며 우리는 이 두 가지중 한 가지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생명이 살아 있는 한 내 안에서 아들의 생명이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는 없어지거나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뿐(not I, but Christ)"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고 내 뒤를 따르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38). 제 회사 책상 책꽂이 하단에는 조그마한 흰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의자에 앉으면 항상 시야에 들어오는 작은 종이입니다. 그 종이 위에 쓰여 있는 말씀이 바로 "yet not I, but Christ" 입니다. 늘 나약하고 실패하고 쓸모 없는 [나]에서 벗어나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라는 고백의 삶을 살고자 하는 저의 믿음과 소망이 담겨 있는 조그마한 흰 종이쪽지 입니다. 이 조그마한 종이 쪽지 위에 쓰인 영어 단어 사이에 한 개의 콤마가 있습니다. 이 콤마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신비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콤마는 바로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옛창조에서 새창조로의 분기점이요 옛 생명에서 새생명으로의 분기점이며 썩어짐에서 벗어나 영원으로 이르는 분기점입니다. 사도는 자기가 얼마나 형편없고 무능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보았습니다(고후 12:9). 그러므로 그는 십자가에서 기꺼이 자기 생명을 매달은 후 "내가 아니요(not I)"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능함과 패배뿐인 삶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오직 그리스도 뿐(only Christ)"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not -, but -' 구문은 영어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강조구문입니다. 그러나 본 구절 안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유일한 비결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오직 그리스도(but Christ)"라고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이 말씀을 붙잡으셨습니까?
구주의 생명
자 이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하여 주목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생명에 대해 상고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과연 이 생명은 어떠한 생명이며 왜 내게 왔으며 내 안에서 어떠한 역사를 이루는가를 상고해 보셨습니까? 성경이 증거하는 이 생명은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말씀이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요 1:4) 시간을 넘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자존자(I AM THAT I AM) 안에 있는 생명이기에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때가 차매 구주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 6:48, 51). 영원한 생명이신 아드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생명의 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사람들이 듣고 보았고 손으로 만지기도 하였습니다(요일 1:1-2). 이 영원한 생명이 시간 안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죄와 심판과 썩어짐 아래에서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고,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의 생명과의 교제로 돌이켜서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으로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속한 사람(첫 사람 아담)의 형상을 지닌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아들들로 만들고자,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가 인격화된 자를 중보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생명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사 인간들과 독같이 살게 하셨으며 필요한 모든 길을 앞서 걷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생명의 구주가 되시고자 모든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며,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워서 완전하게 되셨습니다(히 2:18)(히 5:8)(히 2:10).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비록 사망 안으로 들어가셨지만 사망의 권세에 굴복 당하지 아니하시고 사망에게 붙잡힌 바 되지 아니하시고 사망을 이기시고 그 권세를 뚫고 헤쳐 나오셨습니다.
사망을 이긴 생명
어렸을 적 가을에 열리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에 기마전의 추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네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서 기마를 만들고 마치 말 탄 장수끼리 한 쪽이 쓰러질 때 까지 싸우는 놀이입니다. 제 친구 중에 마치 중학생 같은 체격과 힘을 가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장수가 되면 서너 개의 상대편 기마가 겹겹이 포위하고 위에서 누르고 올라타더라도 한 번 힘을 주고 일어나면 누르던 상대편 장수 서너 명이 감당하지 못하고 일 순간에 무너져 버립니다. 서너 명이 위에서 아무리 힘주어 눌러도 이 친구가 일어서는 힘을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순절날 베드로사도가 말씀을 선포할 때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작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으로 넘겨지신 그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일으켜 세우신 것은, 사망이 그분을 붙들고 있을 수 없었음이라
[Him, being delivered by the determinate counsel and foreknowledge of God, ye have taken,and by wicked hands have crucified and slain: Whom God hath raised up, having loosed the pains of death: because it was not possible that he should be holden of it](행 2:23,24)."
바로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 사망이 그분을 붙들고자 하였으나 주님의 부활의 권능을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악한 영들이 주님의 부활을 저지하고자 갖은 힘을 다 썼으나 주님은 자신을 누르고 붙잡는 죽음의 권능을 무너뜨리고 저들을 패배시키신 후 영광 가운데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때의 장면을 성경은 말씀하기를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어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사 공개적으로 수치거리를 삼으셨느니라"라고 합니다(골 2:15).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죄와 율법의 권능과 세상과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비결, 그것은 부활하신 구주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not I).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but Christ). 로마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진정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여러분은 죽은 자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구주의 생명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자가 진정 하나님 앞에 산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산 자는 바로 사망을 이긴 구주의 생명으로 사는 자 입니다.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생명
구주 안에 있던 이 생명은 구주께서 한 알의 밀로서 땅에 떨어져 죽고 부활할 때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요 12:24).한 알의 밀알 안에 있던 아들의 생명이 죽고 부활하여 많은 생명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그분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이 생명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요 3:16). 누구든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요 3:36).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의 생명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겪게 하신 후 오늘 우리의 생명으로 보내 주셔서 우리로 아들의 생명을 가진 새생명이 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로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새로운 자로서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생명은 포도나무요, 살려주는 영(a quickening spirit)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요 15:5)(고전 15:45),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롬 8:2).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 속한 것들을 둘째 사람인 맏아들에게 속한 것으로 변화시켜서 우리로 그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이 생명은 옛 것에 속한 것들을 멸하고 제하시며 우리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사람 곧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이 생명의 역사는 우리가 땅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을 지니게 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의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되는 날,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몸의 구속의 날에, 곧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그 때에, 사망이 승리에게 삼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롬 8:23)(고전 15:54). 그리하여 아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그 영광스러움을 들어내며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믿음
자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두 번째 비결을 보겠습니다. 다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후반부를 보겠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두 번째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substance)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서(證書)(the evidence)입니다(히 11:1). 에베소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너희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거주하게 하옵시고[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by faith](엡 3:17)."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체가 되게 합니다. 우리가 위에 언급된 구절들을 믿음으로 취할 때 그 말씀들은 그대로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한 놀라운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무엇을 소원하든지 기도할 때에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받게 되리라" 하셨습니다(막 11:24).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을 실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이라고만 말씀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상속이라고 말씀하십니다(시 16:5). 놀랍게도 신유언시대에 믿는 이는 그 안에 그리스도를 상속으로 받았습니다(골 1:27).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상속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을 믿음으로 취하십시오. 그러면 그 믿음이 우리에게 실체,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속으로 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할 뿐 아니라 내 삶이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실제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내게 있어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니
저는 요즈음 이 두 구절로 하늘에서 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이 실체로서 제 삶이 됩니다. 내가 지금 믿음으로 시간 안에서 호흡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웃고 걷고 나누는 것들의 주체가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뇨!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과 신비의 삶인가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생명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으로 보십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은 사도의 삶이 어떠한 삶이었는지를 증거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내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리하였듯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시게 하려 하노라. 이는 내게 있어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니[For to me to live is Christ](빌 1:20,21)." 실로 사도의 삶은 그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시며, 그리스도께서 사도의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빌 3:8).
포도나무와 가지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이러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포도나무는 주님이십니다. 가지는 그분의 생명을 가진 지체들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지 마다에는 포도나무의 생명이 흐릅니다. 가지의 생명은 실제로 포도나무의 생명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맺는 열매는 바로 포도나무의 생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의 일상 속에 일거수 일투족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고 있는 표현이요 증거입니다. 즉 내 삶의 외적인 모습은 두 가지 생명 중의 한 가지 생명이 나타내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생명은 바로 이천년전에 이 땅에 오셨던 구주의 생명입니다. 어떤 때 나의 발걸음은 사마리아의 죄많은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일부러 사마리아 지방으로 향하신 주님의 발걸음입니다. 어떤 때 나의 손길은 눈먼 자의 눈을 만지시던 주님의 손길입니다. 어떤 때 나의 눈물은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셨던 주님의 눈물입니다. 어떤 때 나의 발걸음은 주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던 발걸음입니다. 어떤 때 나의 발걸음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같이 걷는 발걸음입니다. 구주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내 삶이 곧 구주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인 것입니다(벧전 2:21)
교회의 생명
오늘 이 생명은 또한 교회의 생명입니다. 바로 포도나무의 가지가지를 흐르는 포도나무의 생명은 머리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몸 안의 각 지체에게 흐르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밥티슴을 받고 한 몸 안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각 지체들이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는 것이며 이것이 교회의 생명이요 한 몸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몸의 생활,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몸의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분리된 지체의 삶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각 지체들이 육신적으로는 세상 가운데서 떨어져 살지라도 바로 이러한 믿음 안에 살 때 한 몸의 삶이 지속되며,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몸의 삶이며, 하나(unity)의 터가 되는 성령을 따라 성령을 마시며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는 한 주(主), 한 성령(聖靈)님만 계시며 한 생명만 흐릅니다. 일상 가운데 형제 자매들과 떨어져 있더라도 여러분은 한 몸으로 연결된 지체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한 몸 안에 흐르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변함없이 흐르고 있음을 보십시오. 비록 여러분이 가정이나 일터에서 육신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한 생명이 흐르는 한 몸 안에 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 몸 의식(One Body Consciousness)이 생활로 나타날 때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몸의 생활이 증거를 들어내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물씬하게 나는 KJV 묵상모임 방이 되기를 주님의 존함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로 각처에서 그분을 아는 냄새를 발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우리가 구원받은 자 중에서와 멸망하는 자 중에서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향기임이라: 멸망하는 자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구원받은 자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라(고후 2:14-16)." (권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