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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4일 오전 싱가포르에서 도로로 국경선을 넘어 말레이시아 조호루에 도착했다. 말레이시아 지도는 붙임 사진과 같고 말레이시아는 연방제입헌 군주국이다. 오른쪽 기와 같이 13개의 주와 3개의 연방직할구로 구성되어있는데 9개의 큰 주에서 5년마다 왕을 번갈아 배출하며 4개주는 왕이 지정해주는 주지사가 있다. 왕은 상징성만 있고 통치하거나 실권이 없으며 수상이 실권을 행사한다. 현재 총리(수상)은 나집 라작(Najib Razak)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 반도의 서말레이지아와 보루네오섬의 북부의 동말레이시아로 크게 두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329,733㎢로 우리나라 남북한 합친 명적의 1.5배로 수도는 쿠알라룸 푸르이며, 말레이 반도의 남쪽 절반을 차지하는 서말레이시아는 길이 약 800km, 폭 325km이며 북쪽은 타이, 남쪽은 싱가포르, 서쪽은 말라카 해협, 동쪽은 남중국해를 경계로 한다. 동말레이시아는 보르네오 섬 북서부에 위치하며 길이 약 1,075km, 폭 384km로 사라와크 주와 사바 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서쪽은 남중국해, 동쪽은 셀레베스 해, 남쪽은 인도네시아령 보르네오 섬과 접한다.
사라와크 주의 영토 안에는 영국 보호령이던 이슬람 왕국 브루나이가 있다.
정치체제는 양원제를 운영하는 입헌군주제이다. 국가원수는 국왕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입헌군주를 명목상 최고통치자로 하는 연방제국가이다. 연방정부는 외무·국방·치안·사법(이슬람법과 현지법이 지배적인 곳은 제외)·연방시민권·재정·상업·산업·통신·교통을 주관하며 주(州)정부는 이민·행정사무·관세 문제들을 관할한다.
9개 주는 주행정위원회의 자문에 따라 세습 통치자가 다스리고 나머지 4개 주는 연방이 위임한 수장이 통치한다. 연방정부의 명목상 수장인 국왕은 9개 주의 세습통치자들로 구성된 통치자협의회가 5년 임기로 선출한다.
그러나 1957년에 제정된 말레이시아 헌법에 따라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상원(데완 네가라)과 하원(데완 라키아트)으로 구성된 의회가 행사한다.
인구 2,700만명(2016기준)이며있으며, 민족구성은 말이이계 61%. 중국계 29%, 인도 파키스탄계 9% 기타 1%로 구성되며, 언어는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를 사용하고, 종교는 이슬람교 61.3%, 불교 19.8%, 힌두교 6.3% 기독교 9.2%, 기타로 구성된다.
총인구의 4/5가 서말레이시아에 살며 총인구중 1/2가 도시에서 생활하고 15세미만이 총인구의 35%로 인구 증가율이 역동성이 높은 젊은 나라이다.
화폐단위는 링깃(ringgit)이다. 1링깃은 2017.5월 현재 약 262원이다.
1400년경 수마트라 추방자들이 도시국가 말라카를 세웠다. 이 도시국가는 1511년 포르투갈인들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교역과 이슬람교의 중심지로 황금기를 맞았다. 1641년 네덜란드가 말라카를 점령했다.
1819년 영국은 싱가포르 섬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1867년 해협식민지(말라카, 싱가포르, 페낭 섬)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중국인들이 말레이 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41년에는 일본이 말라야를 침공하고 1942년에는 싱가포르를 점령했고,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군정하에 있다가 종전후 다시 영국의 보호령 말라야 연방이 되었다가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963년 영국 식민지였던 동말레이시아의 사라왁과 사바, 싱가포르까지가 독립 연방국 말레이시아로 되었고, 1965년 싱가포르가 분리되어 독립했다.
예로부터 말레이시아는 동서 문화의 네거리에서 중요한 역활을 해 왔고, 중국, 인도, 이슬람문화와 동남아시아 고유의 문화가 융화, 공존하면서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어서 들어온 서구 문화도 말레이시아 문화의 다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말레이시아는 11(12)~3월의 북동계절풍과 6~9(10)월의 남서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적도기후지대이다.
서말레이시아의 동해안과 동말레이시아는 11-2월, 서말레이시아의 서해안은 8-9월이 우기이며, 기온은 저지대에서 25-30℃, 내륙 산악지방에서는 22-28℃로 일년 내내 우리 나라의 여름 날씨와 같은 기온의 변화가 없고 낮과 밤의 길이가 거의 같다. 강수량은 2,500-3,300mm이며 습도가 평균 80-85%다.
무덥고 습한 기후로 열대식물들이 울창하게 자란다. 국토의 3/4가량을 차지하는 삼림은 대부분 상록우림으로 덮여 있으며 그밖에 대나무·녹나무·흑단·백단향·티크·야자수·홍수림 등도 분포한다. 코끼리·코뿔소·호랑이·표범·들소·말레이곰·멧돼지·오랑우탄·긴팔원숭이 등 동물상도 다양하다. 석유 채굴 및 생산과 주석 채굴은 제1의 외화 획득원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말레이시아 국기와 주기에 초생달이 많은 데 ?
꾸란 바까라 章 185절 『그들이 그대에게 초생달에 관해 질문할 때 그것은 인간과 순례를 위한 시간이라 말하여라』라 되어있다.
석유와 주석은 말레이시아 제1의 외화획득원이다
말레이시아 연방정부의 문양과 각 주의 문양
원 말레이시아계는 의무적으로 이슬람교를 믿어야 하고, 이슬람사원은 정부청사 이상으로 중요시되고 있는 신성한 장소이다.
이슬람 :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을 내리셨고 앞서 온 것을 진리로 확증하면서 그대에게 그 책(꾸란)을 계시하노라(꾸란 제3장 이므란 제2절)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아닌 성실한 무슬림이었으며 또한 우상을 숭배한 분도 아니었다(꾸란 제3장 이므란 제67절)
(모세는 아브라함 이후 1000년 예수는 모세이후 2000년 이후에 왔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에게 내려진 계시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이삭과 야곱과 그 자손들에게 내려진 율법을 믿으며 모세와 예수와 예언자들에게 내려진 율법을 믿으며 예언자들을 구별하지 아니하며 하나님만을 믿는다 말하다(꾸란 제3장 이므란 제84절)
이슬람은 오직 유일신인 하나님만을 믿고 선지자로서 모세와 예수를 믿으며, 기독교와의 차이는 성부 성자(성령) 성신의 3위 일체 특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육설을 인정하지 않으며, 유대교와는 선지자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살해 했다고 보기 때문에 교리의 차이가 발생한다.
또한 기독교와 유대교는 최후의 예언자 마호메드를 인정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종교적 갈등이 상존한다.
제2장 바까라 제 193절 : 박해가 사라질 때까지 그들에게 대항하라 이는 하나님을 위한 신앙이니라(개인적으로 시초와 뿌리는 같지만 .........그러나......)
뒤에 앉은 히잡 차람의 현지 가이드의 이름은 아줌마(말레이이사아어 이름)인데 34살의 미혼이며 한국에 친구가 시집와서 잘 살고 있고 한국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자신도 한국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한다. 한국 이태원, 명동, 강남 등을 좋아하며 다시 가고 싶다고 한다. 한국 말은 잘 하지 못하는데 빨리 빨리!라는 말은 확실히 배웠는지 가이드 중 수십번이나 우리들에게 빨리 빨리!! 재밌는지 웃으며 계속 외쳤다.
싱가포르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조호르(우리돈 1억 5천 정도면 좋은 아파트나 주택을 살 수 있다)에 집을 많이 사는 것이 문제가 되어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땅을 빼앗긴다고 생각하여 구입가 커트라인인 우리돈 약 6억원이상으로 제한 했다고 한다.
조호르 주의 중심도시 시가지
바다건너 싱가포르의 발전소
중간 고속도로 휴계속에서
차창밖으로 구름에 휩싸인 끝없는 팜농장
조호루에서 3시간 반, 말라카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 2시간 반 합계 6시간을 달려도 계속 이어져 끝없이 펼쳐진 팜 농장들
심은지 얼마 되지 않는 팜나무농장; 말레이시아는 팜나무 생산을 장려하고 있다. 심은지 5년이되면 수확하기 시작하여 수령이 25년이 되면 베어내고 다시 심는다. 말레이시아의 팜오일(Palm Oil)생산량은 전세계 생산량의 39% 수출량은 44%로 세계최고 수준이다. 대체로 소규모 가족기업 생산공장으로 전역에 약 400개의 팜오일 생산공장이 있다. 팜나무는 어린나무일때는 높이가 낮아 수확하기 쉽지만, 수령이 오래되면 야자수 나무처럼 키가 커서 수확하기 어렵다. 팜유는 튀김기름으로 주로 사용되고 디젤유생산으로 전용되기도 하며, 찌꺼기는 가축용사료로, 폐기물은 퇴비로, 나무는 합판으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심은지 얼마안되는 어린 팜나무
팜 나무열매(크기는 한 모타리가 파인에플 만큼 크다)
익으면 빨간색으로 변한다
알갱이 하나 하나를 분리하여 짜개면 속에 씨가 나오는데 이 씨에서 팜 오일을 채취한다
들쥐가 많아서 의도적으로 뱀을 풀어 놓는다고 한다.
팜 농장에 방목하여 키우는 소
가끔 소를 잡아서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아 잔치를 벌인다는데...........
이스람 율법(바까라 章)은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마라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살되지 아니한 고기는 먹지말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라 했거널(이하 생략)
식용으로 짐승을 도살할 때는 『비쓰밀라(하나님의 이름으로)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이 가장 위대하시다)』라는 꾸란 구절을 암송하고서 도살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기아의 상태에서 생명이 위험할 때 목숨을 구할 때 또는 알지못하고 무의식 중에 먹었을 때는 허용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약 25년이 경과하면 팜 나무가 늙어서 생산량도 적고 키가 20-30m까지 자라 수확하기가 어려움으로 잘라버리고 다시 심는다. 잘라버리고 개간하기 전의 팜나무 고사목
말라카해협(Strait of Malacca)
동남아시아의 말레이 반도 남부와 수마트라섬(인도네시아) 사이에 있는 말라카 해협은 수에즈운하, 파나마운하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항로이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가장 중요한 뱃길로, 세계 해상 물동량의 1/5에서 1/4 사이가 이 해협을 통과한다.
바다를 통한 석유 수송의 절반 이상, 특히 동아시아 나라들은 석유 공급의 90%를 이 해협에 의존하고 있다. 가장 좁은 곳이 1.5해리(2.8km)밖에 되지 않아 병목 현상이 심해서, 은 악명 높은 해적과 테러리즘의 표적이 되고 있다.
몇 년전 한국선적의 상선을 납치해서 몇년 후 색칠을 다시해서 한국 조선수리소에 수리를 맡겼다가 들통나서 압수당한 적도 있었다.
말라카는 400년경 수마트라 추방자들이 말라카(1400경)를 세우고 중국의 보호를 받았다.
도시국가 말라카는 상업과 이슬람교의 중심지로서 황금기를 맞았으나 1511년 포르투갈에게 점령당했다. 1641년 네덜란드인들에게 점령되면서 항구도시 말라카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말라카(Malacca)는 말레이 반도 서쪽 남부에 위치하는 동서 해양 교통의 중심지인 항구도시로서 말라카 강 어귀에 있으며 강의 좌안에 세인트 폴 언덕이 솟아 있다. 인구는 약 50만명이며 말라카 해협에서 가장 오래된 말레이시아 도시로 말라카 술탄의 시대에 성공적인 동서무역의 중계지로 발전되었다.
말라카 도시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말라강의 수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것으로 강 연안의 카페 등의 불빛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이다.
대추야자는 키가 약 30m 정도 자라며 깃털 모양의 잎이 달린다. 100년 이상 동안 연간 250㎏ 정도의 열매가 열리고 있다.
말라카의 구 시가지를 감상할 수 있는 인력거
세인트 폴 성당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
엄청나게 오래된 해송 : 입파리가 우리나라 소나무 잎 길이의 2배정도 된다.
세인트 폴 성당언덕에서 바라본 말라카 강가의 마을
세인트 폴 교회(St. Paul's Church)
세인트 폴 교회는 말라카의 역사적인 교회 건물로 원래 1521년에 지어졌으며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말레이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이다.
자비에르 상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 Francisco Javier) 1541-43 인도 고아지방, 스리랑카 1544-45, 말레이시아 말라카 1546-47 일본 1549-51년 간 포교하다가 중국 광동지방 포교활동 1552년 별세
성 바오로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교로 입교 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22년 그레고리 15세로 부터 시성으로 인정되었으며, 바오 10세에 의해 해외 선교의 성인으로 선정되었다.
유해는 별세한 광동으로 부터 여기 말라카성당에 묻혔다가 초기 포교장소인 인도 고아에 묻혔으며 오른손은 중국 마카오 프란치스코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래서 오른 손이 없는 입상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지금도 시신이 썩지 않고 생전의 모습 그대로 유지한다고 하니 믿음이란?
산티아고 요새의 관문과 대포
시내 좁은 구 도심을 여행는 인력자전거
인력거에서 바라본 구 시가지
이스람 사원
힌두교사원
정화 문화 박물관
쳉 훈 텡 사원(Cheng Hoon Teng Temple) : 지붕위에 있는 조각상들은 얼마나 생동감 있던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있다.
정화(鄭和)장군은 서역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슬람교도로 태어나(1371-1435)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정(鄭)씨 성을 하사받고 1404년 환관의 장이되어 1405-1433년 까지 약 30년간 7회에 걸처 대항해로 남아프리카까지 진출했었고 이 7차례의 원정으로 인하여 동남, 남아시아 일대에 화교의 씨가 광범위하게 퍼뜨려지게 되었다.
당시 육로는 티무르제국이 강성하여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남해로 원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항해거리는 약 18만5천km에 달했고, 배의크기는 길이 150m 너비 60m 약 8000톤으로 200여척의 배에 승선인원 약 2만 7000명으로 콜럼버스가 1492년 첫 항해한 것과 비교하면 87년 이전이며 컬럼버스함대의 규모가 3척 대장호인 산타마리아호가 200-250톤 승선인원 120명이었던 것에 비추어 정화의 함대가 얼마나 규모가 컷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정화의 함대는 도자기와 산호, 보석, 후추, 향료의 교역 뿐만 아니라 방문 나라의 내란에도 개입하여 명나라의 힘을 과시하는 계기도 되었다.
중국 3대 귀한 요리 상어지너러미도 정화가 황제에게 바침으로 인하여 유명하게 되었다.
총 7차례의 원정 항해 중 제 3차 항해 때인 1409년 말라카왕국은 이웃 강대국들로 부터 외침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방문한 정화에게 명나라에 조공국을 자청하고 보호국이 되어줄 것을 간청하여 말라카는 명나라의 보호국이 되어, 1511년 포르투갈에의해 말라카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관계를 유지 했었다.
사진의 청훈텡(Cheng Hoon Teng Temple)은 정화가 명나라의 공주를 말라카왕에게 시집보내면서 명나라의 자재를 들여와 완성한 것이다.
화려한 지붕위의 장식들은 코믹하면서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입체감과 색채감을 나타낸다.
당간지주를 배의 돗대 형식으로 세운 것은 아주 독특하다. 당간지주의 바침돌에 대청 동치 3년이라고 새겨져 있음을 볼 때 삭아서 없어지고 청나라 시대때 다시 만들어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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