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두에세이
패션fashion 시학
임채우 (시인)
요즘 옷을 단순히 기후변화에 부응하여 한서寒暑를 조절하거나 외부로부터 장애를 막아 신체를 보호하는 실용적인 도구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의복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조건인 의식주의 첫 번째에 속한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변함이 없으나, 그것에 장식성, 사회성이 가미되어 원래의 존재 근거에서 진화한 것이다.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부터 지배 계층의 옷의 용도는 민중들과는 차별이 있었다. 현대인들은 옷이 본래의 실용성을 초월하여 패션이라고 생각한다. 즉, 옷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한국인처럼 패션에 민감한 사람들도 없다고 한다. 요즘은 옛날보다 옷을 개성적으로 입는 사람이 많지만, 남자들의 바지통이 넓었다가 좁았다, 여자들의 치마 길이가 길었다가 짧았다, 소위 유행이라는 것이 휩쓸고 지나가면 일색이 된다. 남자들의 넥타이도 길고 짧고 넓고 좁음이 해를 두고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는 다분히 의류 업계 종사자들이 장사를 목적으로 유행을 조장하는 것도 있지만, 한국인들의 다분히 감각적이며 표피적인 성향과 맞아떨어지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한국인들은 무척이나 유행에 민감하다.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면 세상의 흐름에 뒤진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그러나 소위 문화 선진국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그네들도 유행이라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것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남자들의 바지통이 넓든 좁든, 여자들의 치마가 길든 짧든 그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자기 옷을 고집스럽게 입는다고 한다. 물론 물질적으로 풍요롭거나 남 앞에 서야 하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를 수도 있다.
어떤 옷을 입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그 사람의 형편이나 기질상의 문제다. 입고 있는 옷맵시를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개의 사람은 우르르 몰려다니는 쥐 떼처럼 유행에 따라 옷을 입고, 맹목적으로 연예인들을 따르는가 하면, 나이 지긋한 분들도 소위 오빠 부대라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대상에 투사한다. 그러니 자기 자신은 항상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물론 나름대로 어떤 정신적인 위안이나 만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문제를 전적으로 남에게 맡겨버리는 행위는
한 존재로서 주체 의식의 부족이요 소위 몰개성적 취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시 또한 그렇다. 시라는 것이 고도의 정신적 산물이다 보니 시에는 시인들의 내적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는 시인의 이름을 감추고 시만 보고서 대략 누구의 작품이라고 맞출 수 있다. 시라는 것이 시인에게 맞는 옷을 입고 있으면 이름표가 없어도 얼굴이 떠오르는 법이다. 예를 들어 홍해리 시인의 『치매행』이나 『매화에 이르는 길』을 임보 시인이 썼다고 상상해 보자. 역으로 임보 시인의 『아내의 전성시대』나『산상문답』을 홍해리 시인이 썼다고 상상해 보자. 이 묘한 부조화, 아마 두 시인을 잘 아는 독자는 분명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패션이란 무리지어 시류에 줏대 없이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지통이 넓고 좁고, 치마 길이가 길고 짧음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옷맵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시의 형식과 내용을 끊임없이 찾는 작업이다. 남의 옷을 입고 있는, 시류에 편승한 시인은 결코 생명이 길지
못하다. 또한, 자기 옷을 입고 있는 시인은 다른 시인을 너그럽게 대할 줄 안다. 그들 또한 자신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좋은 시를 쓰게 해 달라고 조바심을 내며 기원할 것이 아니라, 남과 다른, 나만의 시를 쓰게 해 달라고 해야 한다.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멋지고 품위 있게 보이듯이 자기만의 시를 쓰는 시인이 진정 시인이다.
《우리詩》에도 개성적인 시를 쓰는 시인들이 참으로 많다. 십인십색이란 말이 적절하다. 이 시는 이래서 좋고, 저 시는 저래서 좋다. 달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작시를 접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개성만화個性萬花 만화방창萬化方暢에 그저 황홀할 뿐이다. 공개적으로 지적하여 적절할지모르겠지만, 나에게 기쁨을 주는 많은 시인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한사람을 거론하여 보라면 나는 기꺼이 일면식도 없으면서 간간 지면을 통해 접하는 안산의 신단향 시인의 시를 든다. 나는 시인의 시가 《우리詩》에 발표되면 어린 시절 혼자서 히죽거리며 만화책에 빠지듯 매료되고 만다.
시인은 언제부터인가「상록객잔」이란 연시連詩를 줄기차게 쓰고 있다. ‘상록’이란 경기도 안산의 상수록수역 인근을 말함이요, ‘객잔’은 중국의 술집이나 주막을 이른다. 안산의 상록수역 일대는 공단이 있어 외국 노동자들도 상당 거주하고 있는 인구 밀집 지역이다. 연시 「상록객잔」은 다분히 중국무술영화 ‘용문객잔’을 인유한 시다. 영화처럼 그 객잔에 드나드는 무림 고수(술꾼)들의 살풍경과 상대를 제압하려는 수컷들의 세상과 이를 제어하는 화자의 일상이 너무 재미있다. 이것이 신 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패션이다. 이 세계를 그리는데 신 시인보다 고수는 없다.
함량 미달이나 엉뚱한 것을 자신의 패션이라고 고집할 수도 있다. 아마추어는 속을지 몰라도 시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척 보면 안다. 시라는 것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라는 보편성의 테두리가 설정되어 있는 법이다. 이 테두리를 벗어난 것은 대개 개발새발, 시라고 볼 수 없다. 시의 행간에 우러나는 분위기와 언어의 놀림만 보면 가짜는 금방 드러난다. 어디까지나 진정성이 있는 독특함이어야 한다. 시란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옷이기에 가장 그 다운 시가 가장 자연스러우며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ㅡ『우리詩』2017년 9월호
첫댓글 말씀대로 자신의 체취가 풍기는 개성 있는 시를 쓰도록 하여야겠지요?
말씀에 100% 동감합니다.
배움의 첫 단계가 모방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fashion을 찾지 못하고 어설피 남의 style만을 흉내 내려고 하면
가련해 보이더군요. 그래도 그가 시라고 하면 그를 존중해 그 글은 그 사람의 시라고 인정해 주어야겠지요?
호월님 안녕하세요.
요즘도 건안하신지요.
개성 만땅인 호월님의 우주시를 또 언제 접할 수 있을련지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