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해방전후 만석꾼 5가구·천석꾼 20여가구
울주 남창 오씨집안·조기홍씨 등 절반정도 소개 못해
신문 보도 후 자료 제공·제보 많아 보람 느낀 기획물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울산에는 만석꾼이 5가구, 천석꾼이 20여가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동안 만석꾼은 모두 연재했지만 천석꾼은 절반 정도 밖에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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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11월12일 이춘우 합천군수가 군 직원들과 함께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중간에 안경을 낀 인물이 이 군수이고 이 줄 왼편에서 두 번째가 울산시 초대 재무과장을 지냈던 임원수다. 임씨는 당시 내무과장이었다. |
천석꾼으로 기사화되지 못한 집안으로는 남창의 오씨 집안, 그리고 조기홍이 있다. 조기홍은 최현태 전 시의원의 외할아버지로 옛 성남동 사무소 뒤에 큰 한옥을 지어 살았는데 지금은 이곳이 시장터가 되었다. 이 외에도 소문으로만 알려졌지 지금은 흔적이 사라진 천석꾼도 적지 않다.
울산의 옛날 부자들 중 지금까지 온전하게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집안은 거의 없다. 이들이 많은 재산을 오랫 동안 지키지 못한 것은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해방이 되면서 5000년 지켜왔던 농경사회에서 벗어나 산업사회로 변했다. 이런 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했는데 대부분의 부자들이 그렇지 못했다.
부자들이 망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방 후 있었던 농지개혁 때다. 이승만 정부는 대지주들의 땅 중 자작이 아닌 논을 소작인들에게 나주어 주는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이때 많은 지주들이 조상대대로 경작해 온 땅을 잃게 되는데 울산의 부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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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뇌출혈로 쓰러져 현재 제주도 서귀포에서 요양 중인 울산 출신 광산거부 이종만의 딸 이남순. |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들이 재산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패가 요인이었다. 부자 자식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문지식을 익혀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자 자식들이 재산만 물려 받았지 이를 지켜낼 수 있는 전문지식이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 자식들이 한량으로 지내면서 소실을 얻게 되고 나중에는 여러 갈래에서 난 자식들이 재산을 놓고 소송을 벌이는 바람에 아까운 재산이 대부분 소송비용으로 날아가기도 했다.
자식들의 정치 참여 역시 부자들을 망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예로 김홍조의 아들 김택천은 부친이 돌아갈 때 많은 재산을 물려 받았다. 그러나 사람 좋은 그는 이후 정치를 하면서 많은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방 한 칸 없이 외롭게 살다가 죽었다.
사람들은 부자에 대해 관심이 많다. 부자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재산을 모으고 어떻게 썼으며 이 재산을 물려 받은 후손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하는 것은 궁금증이 아닐 수 없다. 수입으로 치면 옛날에 비해 요즘 울산에는 천석꾼이 더 많다.
옛날 천석꾼의 수입이라 해보아야 요즘 금액으로 환산하면 연간 2억원 정도에 불과했다. 요즘은 중소기업을 운영하거나 대기업 중역들의 연간 수입이 이 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부자가 이처럼 늘어났지만 옛날에 비해 우리사회는 여유롭지 못하다.
아쉬움은 부자와 관련된 많은 뒷얘기들이 기사가 연재된 후 후손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중 이토 히로부미 통역관을 지냈던 송태관은 신문에 연재된 것 보다 보도되지 않은 내용들이 훨씬 많다.
그가 일본에 공부하러 갈 때 김홍조의 도움을 받았느냐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의문은 그가 짧은 시간에 김홍조를 훨씬 능가하는 재산을 모았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가 아들 석하를 울산초등학교에 전학시킬 때 반구동에 지었던 집의 규모는 김홍조 집의 5배 정도가 된다. 이 집터는 반구동 서원 마을에 있었는데 현재 한신아트빌라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당시 집은 고스란히 작천정 자수정 광산으로 옮겨져 도자기 체험장이 되어 있다. 그는 해방 후 1947년 타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의 행적이다. 그가 일제강점기 친일로 돈을 벌었다면 일제 말기에도 그의 행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이 무렵 행적이 전혀 없다.
일제 말 대동아전쟁이 일어났을 때 친일로 부자가 된 국내 인사들은 무기 구입과 비행기 헌납 등 친일 행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데 이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없다. 대신 그는 1921년 일어난 ‘교육개선 건의사건’때 최남선, 송진우와 함께 일본 교육정책에 반대했고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산업조사를 벌일 때도 민족산업 말살 정책이라면서 일본에 항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활동 범위가 넓어 기사가 나간 후에도 자료를 많이 챙겼다. 그의 재산과 재실이 울산과 태안 뿐만 아니라 서부 경남에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가천 사람들은 그가 조상들을 위해 서부 경남에 지은 재실이 자그마치 30여개가 넘는다고 했다. 그는 재산을 본 부인에서 태어난 석하에게 많이 물려주었지만 석하가 이재에 관심이 없고 민속에만 몰두하는 바람에 후실에서 난 석구에게도 적지 않은 재산을 준 것 같다.
이 때문인지 그가 돌아간 후 재실에서 제를 지낼 때면 석구가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소가천 마을에는 일제강점기 송씨 재실을 지켰던 이석붕과 정인포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들 후손들의 말을 들어 보면 당시 서울에 살았던 석구가 마을에 나타나면 삼남지서장이 마중을 나가 석구의 가방을 들고 재실까지 올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고 한다. 석구가 이 마을에 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재실 청소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재실에 작은 먼지라도 있으면 관리인에게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대신 입이 까다로워 제사 후 떡을 먹을 때 재실 관리인이 조청을 내어 놓으면 꿀을 내어 놓지 않는다고 크게 나무랐다고 한다.
정인포는 당시 이 마을에 살면서 제사상에 올릴 떡을 지게에 지고 나르는 일을 했는데 당시 송씨 집안에서 얼마나 떡을 많이 만들어 사방에서 제사를 지냈던지 나중에 정씨는 떡짐을 지고 다니다가 골병이 들어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 오고 있다.
석구는 이곳에 묻혔다. 현재 송태관 아버지 헌겸(憲謙)의 부부 무덤이 있는 마을 뒷산으로 오르다 보면 오른편에 자그마한 한 쌍의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이 석구 부부의 묘다.
이 글을 연재 하는 동안에도 부자 후손들의 생활에 변화가 있었다. 울산 대현면에서 태어나 광산으로 많은 돈을 번 후 북한에 학교를 세웠던 이종만의 딸 이남순은 2년 전 뇌일혈로 쓰러져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아버지 일대기를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는 책으로 출간한 그는 아버지가 북으로 간 후 미국과 캐나다에 살다가 최근 제주도로 와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병영의 천석꾼 이종하(李鍾夏)의 장남 춘우의 무덤이 성안동 길촌 마을에 있다는 것도 기사가 나간 후 독자가 알려왔다. 춘우는 40대에 합천군수를 지냈는데 지금부터 50년 전인 1960년 합천군을 떠나면서 직원들과 찍은 사진이 있다. 그런데 이 사진에는 울산시 초대 재무과장을 지냈던 임원수(任元洙)가 있어 눈길을 끈다. 임원수는 당시 합천군 내무과장으로 있었다.
기사를 연재하는 동안 가장 어려웠던 것은 친일 문제였다. 일제강점기 울산 부자들 중에는 친일 인사도 있었다. 암울했던 그 시절 이 땅에 처자식을 남겨 두고 조국 광복을 위해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했던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면 국내에서 많은 재산을 갖고 살았다는 그 자체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부자들 중에는 웅촌면 석계의 이재락처럼 일제의 강압에 의해 중추원 참의까지 지내면서도 조국 광복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 서 독립자금을 지원한 사람도 있다. 해방 후 부자들은 일제 강점기 단지 재산을 많이 가졌다는 죄목으로 단죄를 받기도 했다. 특히 좌익들은 이들을 못살게 굴었다. 잠방골 최 부자 아들이 면서기로 있다가 좌익으로부터 살해되고 범서읍 김홍수가 자식들을 일찍 부산으로 보낸 것은 이 때문이다.
기사가 연재되는 동안 국회에서 진보당의 친북과 종북 문제가 격론을 벌였기 때문인지 울산 부자들의 친일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지적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친일과 좌익 문제는 우리 근대사를 연구할 때 마다 부딪혀야 하는 숙명이다. 이 문제는 다음 주부터 연재되는 ‘울산의 인텔리’에서 더 많은 논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것은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김성우가 쓴 <문화의 시대>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친일 문학은 우리 문학사에 한 오점으로 마땅히 기록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있었던 것을 묻어버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친일문학 행위를 이유로 그 작가의 다른 문학적 업적을 다 엄폐해 버리거나 과소평가하는 것도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문학사는 정직해야 하고 이성적이라야 한다. 작가에 따라서는 친일 이전 또는 해방 이후의 작품 활동을 통해 그의 죄과를 보상받을 만큼 문학가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누가 보아도 할 수 없는 독보적 금자탑을 세운 사람도 있다. 친일 문학작품을 펼쳐 놓고 보면 해방 전후에 활약한 웬만한 작가치고 안 낀 사람이 별로 없다. 이들의 이름을 다 지워버리기라도 하면 우리 문학사는 거의 공백이 된다. (중략) 친일 문학은 오랜 옥고를 치렀다. 언제까지 사면 없는 무기수라야 할 것인가. 친일 문학에 대한 문죄(門罪)는 재발 방지를 위한 경종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부끄러운 역사의 반복을 다시는 않기 위해 오늘 우리는 아픈 과거에 매달려 있을 겨를이 없다.”
울산부자와 관련, 이 글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문학’과 ‘부자’의 차이 뿐일 것이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