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거래사 전문 8곡병
아래는 8곡병의 각부분을 확대를 하였습니다.


작품에 임하여,
주제는 설정하지만 과정은 정해놓지 않습니다. 과정이 결정 되어진다면 순수심성에서 오는 偶然欲書가 이미 상실 되어지기 때문이지요. 찰라에 일어나는 감흥으로, 書體구분 또한 억매이지 않고 草書의 필운으로 단숨에 써 내려갑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미 서사된 구역을 곁눈질하며 느슨함의 곁에는 긴축되게 하여 긴장을 주고, 윤택함의 곁에는 거칠고 마름을 엮어내며 가장 이질적이지만 가장 서로 상응작용을 할 수 있는 조화를 이루어 내야하지요. 그래야 나만의 개성있는 조형감각으로 호방한 필선을 통해 활달하고 자유분망한 필치의 물성을 즉흥적으로 표현해 낼수가 있습니다.
붓의 운용에 있어서는, 붓끝을 사용하게 되면 획선이 아름답고 유려할 수는 있으나 점과 획에 힘이없어 가볍고 경솔하게 됩니다. 붓끝을 감춘 상태에서 偃仰屈伸 하게되면 붓의 움직임에 따라 성기고 빽빽한 것· 긴장되고 해이한 것. 조밀한 곳에서 성긴 곳이 나타나고 필묵은 있는 곳에서부터 없는 곳으로 흐르게 되며, 먹의 농담이 거칠고 윤택하게 서로 어울려 획들이 균형·배합되어지고, 필압의 경중에 의해서 분망하고 호방한 參差不齊의 절묘한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붓대를 힘있게 잡되, 곧게 세워 경직되게 하는것이 아니라, 붓촉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붓봉을 좌우사방으로 오버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움직여 줍니다. 즉 서사를 함에 있어서 붓봉의 운용에 따라 붓촉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붓촉이 원활히
활동 할 수있도록 붓봉이 보완작용을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형체와 짜임새 속에 안온하고 강열한 맛이 있으면서도 매우 다양한 변화를 보이게 할 수있으며, 필획의 전절을 부드러운 곡선과 강열한 직선을 마음먹은 대로 구사하게 되어, 획을 펄펄 날게 할 수가 있지요. 이렇게 되면 인위적인 운필의 흔적은 없어지고 가슴속에 있는 모든 정서를 모두 초서 속에 배출해 낼수가 있는 것입니다. 붓은 우주요. 붓털은 우주를 생성하는 생명체입니다, 획을 운용하다보면 붓털 한올한올이 한동작도 동일함이 없습니다. 필압의 경중에 따라 모두가 자기의 위치와 임무의 행동을 찾아 방종하고 자유자재하나 모나지 않고 들쑥날쑥해 보이지만 정연하고 서로 엉켜 무질서 해 보이지만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붓의 운용을 위해서는 항시 나와 그리고 또 하나의 내가 되어야 만이 비로서 일회성이고 순간적인 초서의 작품을 서사 할 수가 있습니다. 큰 초서글씨는 산만해지기가 쉽고, 작은초서 글씨는 구속되기가 쉽다. 그러므로 행초를 쓸 때에는 침착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비상하여 살아 움직이는듯 하여야 합니다. 큰 글씨를 쓸 때에는 짜임새를 긴밀하게 하여야 하며, 작은 글씨를 쓸 때에는 너그럽게 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기이한 것에는 바른 것을 배합하여야 하고, 바른 것은 기이한 것을 보충하여 기이하면서도 촌스럽지 않게 하고, 약동감이 있으면서도 경직되지 않게 하여 우악스럽지만 세련되고 피곤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참고로 병풍작품의 아래의 오른쪽 첫번째를 보시면(병풍5번) 3줄의 글자수가 전부 다릅니다. 첫째줄은 15자. 둘째줄은 13자, 셋째줄은 12자 입니다.이러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체적인 글자수를 파악하되 부분적인 숫자의 개념은 흉중의 감흥에 맡기자는 것이지요. 즉,부분적 글자의 수가 작품의 흐름에 방해 요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작품의 원문)
歸去來兮 귀거래혜
書體구분 또한 억매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奚
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舟遙遙以輕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가볍게 흔들리고,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 물어 보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것들의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맞는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놈 손 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影
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或命巾車 혹명건차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른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나의 생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 인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胡爲乎遑遑欲何之호위호황황욕하지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或植杖而耘
혹식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도연명은 자연을 좋아하여 자연미를 노래한 시가 많고, 인간의 이상향을 자연 속에서 발견하려는 시를 많이 썼다. 이로부터 중국의 서경시가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중국 육조 시대의 수사법을 존중하면서도 평이한 언어로 시를 즐겨 썼다. 이 시는 작가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생활 때문에 팽택의 영이 되었으나 당시 관리들의 생활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더 이상 참지 못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지은 시다. 쉬운 언어 속에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나타내고 있으며, 농촌 생활의 흥겨움을 꿈꾸며, 인생 무상 속에 자연 귀의의 사상이함께 나타나 있다.이 작품은 도연명이 41 세 때 평택 현령으로 있을 때, 상급 기관에서 행정 시찰을 나오자 '내 어찌 쌀 다섯 말의 봉급을 위하여 그에게 허리를 굽힐소냐?'하고 사직하며 자신의 심정을 읊은 것이다. 도연
명은 집안이 가난하여 다섯 번이나 관리에 생활을 해 보았으나, 어지러운 사회가 그에게 맞지는 않았다. 그래서 전원 속에 자신을 묻고 자기 본성에 맞는 세계를 찾아 나선다. 이 작품의 첫 부분에서는 하루 바삐 돌아가고픈 심정과 함께 집에 돌아온 만족감, 한적한 생활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면서 천명에 안주하며 사는 데서 오는 삶의 즐거움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인 '애로라지 자연의 조화에 따라 돌아가니 무릇 천명을 즐기되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에서는 도연명의 자연애와 인생관이 잘 응축되어 있다
도연명(陶淵明 365~427.)
중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九江]) 시상현(柴桑縣:지금의 싱쯔 현[星子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방의 토착 사족(士族)으로, 북조로부터 내려온 귀족이 절대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남조 사회에서는 영달의 길에서 소외된 압박받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도연명이 평생 동경했던 증조부 도간(陶侃:259~334)은 동진 초에 장사군공(長沙郡公)·대사마(大司馬:최고군사령관)까지 승진했고, 할아버지 도무(陶茂)도 무창(武昌)의 태수(太守)로 재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장사(長史:막료장)였던 맹가(孟嘉)의 넷째 딸이었다. 도연명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던 것 같다. 도연명의 첫번째 관료생활은 29세 때 자기가 살고 있던 강주의 좨주(祭酒:州의 교육장)로 취임한 것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2번째 관료생활은 35세 때 당시 진(晉)나라 최대 북부군단(北府軍團)의 진군장군(鎭軍將軍)인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참모)으로 취임한 것인데 이것 역시 곧 그만두었다. 3번째는 유뢰지의 휘하를 떠난 직후, 36~37세 무렵 형주(荊州:지금의 장링[江陵]) 자사(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심양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렀다. 이후 강주자사·참군 및 팽택(彭澤) 현령(縣令) 등의 관료생활은 고향에서 가까운 심양군 안에서 지냈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義熙) 원년(405) 11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宋書〉 隱逸傳).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해서 어느 정도 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歸去來辭〉 序).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귀전원거오수 歸田園居五首〉이다.
이리하여 도연명은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또는 南里)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 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진흙속의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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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어느분의 작품인지요?
무릇 자연으로 돌아가니 무엇인들 의심하랴.. 도연명의 정신이 엿보입니다.
존경합니다
귀한 자료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