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장 청교도의 예배에 대한 접근
1. 예배에 대한 접근
예배의 기능이란 우리의 눈을 인간과 인간의 잘못으로부터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응시하는 것으로 세월의 경과에 따라 이 과정은 점점 다듬어지고 다른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방법으로 영혼에 위로와 활력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에 대한 접근에 있어 청교도들을 따라야 하는데 그들의 접근은 하나님께 대한 접근이었다.
모든 주장의 근저에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주요 의문들이 존재한다.
(1) 어떤 의미에 있어 성경은 기독교 예배의 권위가 되는가? 공적 예배의 순서를 정함에 있어 루터가 성경에 반대되지 않고 편리해 보이는 전통적 사항들을 허용한 반면에 칼빈은 성경이 직접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 예배에 포함되는 모든 실제적 항목을 시인하기위해서 교훈이나 전례 형태의 직접적인 성경적 근거가 요구된다는 사상은 사실상 청교도의 한 가지 혁신이었다.
(2) 기독교 예배에 있어 타당한 규칙은 무엇일까? 과거에나 현재에나 공적 예배를 배열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곧 ❶공동기도서와 같은 지정된 기도서를 사용하거나(영국국교회) ❷ 웨스트 민스터 예배규칙서와 같은 총괄적인 지침서를 사용하거나(장로교회) ❸ 또는 나름대로 자체적인 예배 규정을 완전히 개개인의 목사나 회중에게 맡기는 것이다(조합교회와 퀘이커교).
(3) 예배와 관련된 적절한 징계는 어떤 것일까? 로마교의 예배의식과 기도문을 그대로 도입한다든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구속된 자녀들이라는 이단설에 근거한 공적중보기도를 하고 있는 교리적 탈선에 의해 부패되고 있는 경우.
2. 예배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송영, 영광과 찬양과 존귀와 경의를 드리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청교도들은 일치하였다. 가장 넓은 의미에 있어 모든 참된 경건이 예배이다.
존 오웬은 에베소서 2:18의 본문을 해석하기를 “본문은 성령에 의해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로 나아오지 않거나 성령의 능력안에서 예배를 행하지 않거나 또는 예배 가운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배의 모든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다.”고 지적하였다.
스테판 차녹은 요4:24을 본문으로 ‘영적예배’라는 설교를 하면서 예배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예배는 하나님의 뛰어나심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실제적인 사상들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하나의 행동이다.” 그는 중생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진정으로 사모와 복종을 하나님께 쏟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죽은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예배는 죽은 예배에 불과하다. 예배를 목적으로 열망하는 것은 육욕적이다. 예배를 수단으로 열망하며, 예배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망하며 행하는 것이 영적이며 신령한 삶의 열매이다.”고 말한다.
“예배하러 오는 신자들은 죄인이 판관에게 가는 것처럼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성도들이 공적예배를 사랑한다는 것은 부단한 청교도의 주제였다. 왜 즐거워하는가? 그것은 성도들이 단지 하나님을 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발견하기도 때문이다. 예배는 단지 감사의 표현일뿐만 아니라 굶주린 자들이 배부름을 얻고, 빈 손이 풍성하게 채워져서 돌아가게 되는 은혜의 수단이기도 하다.
3. 예배의 요소
청교도 예배 요소들과 활동들의 목록에는 정규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된다. 곧 찬양(특별히 시편들을 노래하는 것), 기도(고백, 경배, 중보의 기도), 설교, 성례(성찬식), 그리고 교리문답과 교회 훈육 활동이다. 이 모든 활동 가운데 청교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자신의 백성을 만나기 위해 오신다는 사실을 주장했는데 무엇보다 설교에서 이 사실을 주장했다. 설교는 가장 엄숙하고 고귀한 활동이므로 인간의 목회 직무 중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었다.(p.355) 오늘날 우리는 목사들이 설교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우리 회중도 듣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똑같은 진실이 아닐까? 두 번째 결함이 고쳐지지 않는 한 첫 번째 결함을 고치려는 교육은 분명히 헛일일 것이다. 토마스 아담스는 설교를 듣는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기도와 찬양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4. 예배의 영역
청교도들은 기독교 예배에 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말했다. ❶ 지역교회의 공적 예배 ❷ 가족단위의 가정 예배(모든 가정은 가장을 목사로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❸ 골방에서의 개인 예배 이 세가지 중에 공적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클락손은 “주님께서는 공적 예배를 통해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신다. 공적예배에는 주님의 임재가 더 많다.”고 했다.
5. 예배의 준비
오늘날에 있어 우리의 예배를 심오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예배의식 형태나 공식도 아니며 새로운 찬송가 가사나 곡조도 아니라 과거의 예배 의식과 찬송을 사용하기에 앞서 보다 많이 마음을 준비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만일 토요일 밤에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주일 아침에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 조지 스위노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