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안일왕지맥종주
종주에 필요한 5만분의1 지형도 도엽명 : 장성 죽변 울진 소천(참고도면)
낙동안일왕지맥이란?
낙동정맥이 검마산에서 백암산으로 흐르면서 오른 경북 봉화군 석포면, 울진군 서면,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의 삼면봉인 삿갓봉(△1119.1)에서 강원도와 경북의 도계를 따라 동쪽으로 분기하여 1009봉-관문봉(△989.9, 2.7)-907봉을 지나 대밭목이재 임도로 내려서 오른 삼척시 가곡면, 울진군 북면, 서면의 삼면 경계지점인 등고선상 930봉어깨 910m 부근(2.2/4.9)에서 도계능선은 천혜의 비경인 용소골을 품고 있는 북쪽 응봉산(△908.5)으로 가고 지맥은 울진군 북면과 서면의 경계를 따라 남진한다
등고선상810m 부근(1.7/6.6)에서 순수한 서면내로 들어가 674봉-십자임도 주미재(590, 1.8/8.4)-샛재(조령, 590, 0.8/9.2)-安一王산(△818.9, 2.7/11.9)부터 다시 북면과 서면의 경계를 따라가며
△519.3봉(2.5/14.4)을 지나 십자임도로 내려선다
끊임없이 오름짓을 하여 오른 峨口산(△652.9, 3/17.4)에서 울진읍을 남북으로 가르며 △363.7봉(3/20.4)-십자임도 부천당고개(270, 1.1/21.5)-錦산(△387.9)어깨-아시고개-205봉(4/25.5)에서 다시 울진읍과 근남면의 경계를 따라 △181.8봉(1.8/27.3)-바리고개(90)-145봉-7번국도(10, 2.5/29.8)를 지나
논둑길로 진행해 飛來峰산(20)을 지나 비래동마을을 거쳐 왕피천이 바다를 만나는 곳(0, 1.5/31.3)에서 끝이 나는 약31.3km의 산줄기를 말하는데 산경표에는 이름이 없다
그래서 그 산중에 지도에 이름있는 산중에서 제일높은 아구산의 이름을 빌어
처음에는 “낙동아구지맥”이라고 불렀으나
답사한 결과 도면상 “818.9”봉도 안일왕산이란 이름을 얻고 있으며 등로의 상태나 높이 그리고 산세와 조망등등 모든 것이 안일왕산이 단연 으뜸이라 아구산이 비집고 들어갈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어진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상도 일부 산님들과 그 외 소수 산님들이 종주를 하면서 아구지맥이라고 부른 선례가 있어 그 이름을 인정하면서도 도저히 안일왕산의 그 웅후하면서도 수려한 자태와 역사적인 의미를 저버릴 수없어 안일왕의 이름을 빌어 낙동정맥에서 분기한 30km이상 100km미만의 산줄기임으로 낙동안일왕지맥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 “안일왕”이란?
삼국시대 초기에 강원도 삼척에 실직국이 있었고 강릉에는 예국이 있었으며 실직국 남쪽으로 신라가 자리잡고 있었다 실직국은 신라에 의해 점령당했고 지증왕때 이사부로 군주를 삼고 경덕왕이 삼척이라 이름을 지었으나 그후로 400여년 동안 실직국의 명맥은 유지되어 왔다
□. 네이버 지식인을 참고하면 실직국과 안일왕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라 파사이사금 때 패망한 실직국을 건설한 사람들을 실직인(悉直人)이라 부르고, 임금을 실직왕(悉直王), 그 부족을 실직씨(悉直氏)라고 불러오고 있다. 물론 지금은 실직씨라는 성씨가 남아 있지는 않다. 잃어버린 나라요, 잃어버린 왕손이요, 또 잃어버린 성씨이다.
경북 울진군 서면에 왕피리(王避里)라는 마을이 있다. 왕피리에는 병위동(兵衛洞) 임왕기(臨王基) 포전동(飽田洞) 거리곡 등이 있다. 통고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흐르는 강을 왕피천이라 부른다.
옛 실직국의 안일왕(安逸王)이 예국(濊國)의 침략을 받아 지금의 소광리에 있는 애밀왕성(安逸王城)으로 피난하여 버티었으나 성이 함락되었다.
이 마을로 실직국 왕이 피신하였으므로 이곳을 왕피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왕피리의 병위동은 실직국 안일왕의 군사들이 머물렀던 곳이고, 포전은 군사들이 밥을 먹던 곳이라 한다. 또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이며 거리곡은 실직곡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웃한 삼근리의 복두괘현(일명 박달재)은 애밀왕성이 함락되자 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하다가 이곳에서 복두를 쓰지 못하고 그냥 도망한 곳이므로 두건을 걸어 놓은 고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왕피리의 전설은 실직국과 예국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다. 실제로 실직국을 멸망시킨 나라는 신라인데도 엉뚱하게 울진군 왕피리의 전설은 예국이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와 예국이 뒤바뀌어 있는 것이 이 전설의 묘미이다. 실직국은 신라에 멸망한 3년 후에 다시 봉기하여 부흥 전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신라군에 다시 패망한다. 신라는 이에 실직국이 다시 모반할까 봐 실직국 사람들을 모두 남쪽으로 옮긴다. 실직국을 비워 놓고 신라 쪽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왕피리 전설에는 실직국의 왕과 백성이 모두 삼척 남쪽 울진으로 내려와 피난한 곳으로 변형되어 있다.
실직왕, 실직씨는 고대 삼척을 건설한 원래의 종족이고, 지금 실직군 왕릉은 삼척 김씨의 시조 경순왕 7자의 무덤이다. 실직국왕, 실직씨와 실직군 왕릉의 주인공을 왕왕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래서 역사의 오류가 생긴다.
실직국의 안일왕(애밀왕)은 실직국에 전해 내려오는 유일한 왕의 이름이며 또 유일한 실직인 이름이기도 하며 실직국의 마지막 임금인 것이다
한문으로 安逸王이라 쓰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아래 黃腸封界(황장봉계) 표석에 보면 “安一王山”이라 기록이 되어있어 나도 安一王山이라고 표기하기로 한다
※. “황장봉계”란? -소광리 후곡천을 따라 들어가며 아래와 같은 글귀들이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울진 소광리 황장봉계표석
黃腸封界(황장봉계)
地名 生達峴(지명 생달현) 安一王山(인일왕산)
大里當城(대리당성) 周回(주회)
山直命吉(산직명길)
(황장봉산의 경계지는 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으로 정하고 산지기 명길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황장목(黃腸木)이란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소나무 관곽재(棺槨材)를 말한다
황장(황장)은 속이 누런 소나무의 속고갱이(深材)를 말한다
세종실록에는 “천자의 곽은 황장(黃腸)으로 속을 하고, 황장은 소나무의 속고갱이라, 흰 갓재목(邊材)은 습한 것을 견디지 못하여 속히 썩기 때문이라” 고 하고 있다
봉산(封山)은 왕실의 재궁감이나 건축용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일반인들의 사용을 금지하기 위하여 지정한 산으로 황장봉산은 왕실의 관곽재를 공급하기 위하여 지정한 산이다
첫댓글 두가지 내용 모두 이런저런 얘기들로 머리가 복잡하였는데
상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다음엔 예국이 어디 쯤인지 찾아봐야 겠습니다
아래 글은 제 블로그로 살짝 모셔 갑니다
상쾌한 아침 맞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