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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왕족이었지만, 조선시대는 이씨가문이 왕족이 되었기 때문에 경주김씨는 왕족반열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죠.
비록 왕족은 아니었지만, 가문을 빛낸 조상들은 많답니다 ^-^
이 분들은 경주김씨 가문을 빛낸 인물들입니다 ^-^
많죠!? 제가 잘~아는분은 추사 김정희 ..;;
더 자세히 한분한분 설명하자면..
경주김씨는 소위 뼈대있는 집안입니다.
전란등을 겪으면서 양반계급이 아닌 일반 평민들이 족보를 사고 파는 일이 비일비재해 현재 자손들이 경주김씨다 !라고 100% 믿을수는 없지만...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경주김씨 홈페이지를 찾아보세요^-^
김 겸(金 謙 / 1375~1425)
조선 전기의 문신. 자 익보(益甫). 시호 평원(平原). 월성군(月城君) 수(需)의 아들, 정안왕후(定安王后)의 종질. 1396년(태조 5) 문과에 급제하고 군기시직장(直長)·교서감승(校書監丞)을 지내고, 1402년(태종 2) 형조전서가 되었다. 뒤에 개성부유후(開城副留後)·한성부윤·동지우군총제·풍해도관찰사·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었다. 1408년 중군총제(中軍摠制) 때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한성부윤, 20년(세종 2) 개성유후가 되었다. 22년 경상도관찰사, 이듬해 돈령부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25년 명나라의 인종(仁宗)이 죽자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김경복(金慶福 / 1550~1622)
조선 중기의 무신. 자 백수(伯綏). 시호 장의(壯毅).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번 오랑캐와 싸워 공을 세웠다. 83년 이탕개(尼湯介)가 침입하자 힘써 싸워 물리치고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그 뒤 장련(長連)현감·이성(利城)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북평사 정문부(鄭文孚)가 의병을 일으키자, 선봉장이 되어 국경인(鞠景仁)을 유인하여 죽였다. 그 뒤 종성부사·영원군수 등을 지냈다. 병조참판이 추증되고, 영흥의 정충사(精忠祠)에 배향되었다.
김경여(金慶餘 / 1596~1653)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유선(由善). 호 송애(松厓). 시호 문정(文貞). 이귀(李貴)의 사위.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4년(인조 2)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가 되고, 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지내고,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청나라에 항복한 뒤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고, 고향 회덕(懷德)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대간(臺諫)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교역(金郊驛)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49년(효종 1) 대사간이 되고, 김자점(金自點)의 잘못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군사력 배양에 힘썼다. 이어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좌찬성이 추증되고 회덕의 정절서원(靖節書院)에 배향되었다. 출처와 의리에 분명하였으며,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과 친교가 두터웠다. 문집에 《송애집》이 있다
김관주(金觀柱 / 1743~1806)
조선후기의 문신. 자 경일(景日). 시호 문익(文翼). 1765년(영조 4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72년 수찬(修撰)으로서 시파(時派)의 영수인 홍봉한(洪鳳漢)을 탄핵하였으나, 영조의 진노를 얻어 갑산에 유배되었다. 93년(정조 17) 용궁(龍宮)현감에 다시 기용되었다. 순조 즉위 뒤 벽파(僻派)가 득세하면서 중추부첨지사(僉知事)·이조판서·양주목사 등을 두루 거쳐, 1802년(순조 2) 우의정에 올랐다. 1804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다시 수렴청정을 실시하려 하자, 좌의정 이시수(李時秀)와 함께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순조·순원왕후(純元王后)의 국혼을 방해하였다는 이유로, 1806년 대사간 신헌조(申獻朝)의 탄핵을 받고 경흥으로 유배가던 도중, 이원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김광악(金光岳 / 1694~1759)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동첨(東瞻)·수이(秀而). 호 독좌와(獨坐窩). 1726년(영조 2) 사마시의 생원과에 장원급제하고, 3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사헌부감찰을 지냈으며, 37년 황해도도사, 이듬해 현릉령(顯陵令) 등을 지냈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병환이 중해지자 피 섞인 배설물을 입으로 핥아내었고, 상을 당하자 죽을 마시면서 여막(廬幕)의 예를 지켰다. 그로 인해 몸이 쇠약해져 죽었다.
김구주(金龜柱 / 1740~1786)
조선 후기의 문신.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오빠. 서산 출생. 홍양해(洪量海)의 문인. 누이가 영조의 계비(繼妃)가 됨에 따라, 음보에 의하여 벼슬에 올라 궁중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1762년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무고하여 죽게 하였으며,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6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으며, 67년 강원도관찰사·좌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의 외조 홍봉한(洪鳳漢)을 모함하여 왕세손의 지위를 위협하였으며, 이때부터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대립이 싹트기 시작하여 벽파의 영수(領袖)로서의 지위에 올랐다.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면서 벽파를 의심하자, 홍국영(洪國榮)에게 접근하여 지난날의 허물을 은폐하려 하였다. 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흑산도에 유배되었고, 79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84년 왕세자 책봉 때 특사령으로 나주에 옮겨졌으나 병사하였다.
김기대(金器大 / 1714~1775)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덕용(德容). 사복시정(司僕寺正) 구연(九衍)에게 입양되어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친정조카가 되었다. 음보로 이천부사(利川府使)가 되었다가, 1756년(영조 32)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승지로 특진하였다. 62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63년 9월 한성부우윤에 임명되고, 64년 전은군(全恩君) 돈(墩)·안표(安杓)와 함께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67년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백두산의 제사를 위한 제단을 갑산에 설치하도록 건의하여 실현되었다. 68년 승지·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역임한 뒤 예조판서를 지냈다.
김남중(金南重 / 1596~1663
조선 중기의 문신. 자 백진(白珍). 호 야당(野塘). 시호 정효(貞孝).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어 가주서(假注書)로 광해군에게 입시(入侍)하였다. 23년(인조 1) 검열·전적(典籍) 등을 지내고, 지평(持平)·장령(掌令)에 이르렀다. 36년 병자호란 때 예조참의로서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이 되어, 강화도가 함락된 것에 대한 수장(守將)의 책임을 물어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생일에 여러 읍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었다. 41년 대사간으로 기용되고, 44년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56년 춘추관동지사가 되어,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58년(효종 9) 공조판서, 이어 예조판서·형조판서를 거쳐 개성부유수에 이르렀다. 저서에 《역대인감(歷代人鑑)》이 있다
김노겸(金魯謙 / 1781~18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 원익(元益). 호 성암(性菴). 학문에 전념하다가 1814년(순조 14) 진사시에 합격, 뒤에 충청도 홍산현감(洪山縣監)이 되었다. 47년(헌종 13) 조운선(漕運船) 침몰 사건으로 충청도관찰사 조운철(趙雲澈) 등 12명과 함께 견책받았다. 경학(經學)은 물론, 사학(史學)·음악·언어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섭렵하였으며, 고증적인 전거(典據)를 위주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였다. 문집에 《성암집》이 있는데, 70세 이전에 저술한16권 12책, 그 후의 12권 6책으로 나누어 수록되어 있다.
김노경(金魯敬 / 1766~1840)
조선 후기의 문신. 자 가일(可一). 호 유당(酉堂). 서예가 정희(正喜)의 아버지. 1805년(순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으로 등용되었다. 승지·이조참판·평안도관찰사등을 두루 거쳐 이조·예조·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809년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22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익종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할 때 김로(金?·홍기섭(洪起燮) 등과 같이 중직에 있으면서 전권을 휘둘렀다는 죄와, 이조원(李肇源)의 옥(獄)을 밝히지 않았다는 죄로 인하여, 30년에 탄핵을 받아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40년 사사(賜死)되었다. 사후 58년(철종 9) 관직이 복구되었다.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아들 정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작품에 글씨 《신라경순왕전비》 《신의왕후탄강구묘비(神懿王后誕降舊墓碑)》 등이 있다.
김노응(金魯應 / 1757~1824)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유일(唯一). 호 일와(一窩). 시호 정헌(正獻). 1786년(정조 10) 진사에 합격하고, 헌릉참봉을 거쳐 활인서 별제(別提) 등을 지냈다. 장악원 주부(主簿)로 있으면서, 1805년(순조 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07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응교(應敎)를 지내고,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1년 대사성, 이듬해 경상도관찰사에 오르고, 22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병조판서·성균관 동지사(同知事)에 이르러 신병으로 사퇴하였다. 효행·우애가 돈독하고 검소하였다.
김 당(1465~1532)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옥이(玉耳). 시호 공절(恭節). 1492년(성종 23) 사마시를 거쳐, 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지냈다. 1507년(중종 2) 사간·장령(掌令)을 거쳐, 14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9년 기묘사화 때 호조참판으로서 조광조 일파의 신진사류 숙청에 관여하였으며, 23년 진향사(進香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형조판서·한성부판윤·우참찬(右參贊) 등을 지내고, 31년 의금부판사·호조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 겸 도총관(都總管)이 되었다. 성품이 청렴·솔직하였으나, 지조(志操)가 없었다.
김덕성(金德成 / 1729~1797)
조선 후기의 화가. 자 여삼(汝三). 호 현은(玄隱). 화원인 두량(斗樑)의 조카, 화가 종회(宗繪)의 아버지. 도화서의 화원으로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으며 화가로서의 그는 특히 김씨 가승(家乘)의 신장상(神將像)을 잘 그렸다. 현재 전하는 《신장도(神將圖)》와 《뇌공도(雷公圖)》 등의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는 입체적인 음영법과 공필(工筆)이 매우 정교하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뇌공도》를 들 수 있다.
김도희(金道喜 / 1783~1860)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사경(士經). 호 주하(柱下). 시호 효헌(孝憲).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설서(說書)·참의를 지냈다. 이조참판·경기도관찰사·한성부좌윤(左尹)을 역임하고, 38년 형조판서, 42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뒤에 돈령부판사에 이르렀다. 45년(헌종 11) 흉언죄인(凶言罪人)의 처리와 조선에 온 영국군함의 처리방침 및 죄인을 타도로 정배하는 일을 형조에서 관장하지 못하게 하고, 서원을 함부로 건립하는 것을 금하였다. 51년 실록총재관이 되어 《헌종실록》을 편찬하였다.
김두량(金斗樑 / 1696~1763)
조선 후기의 화가. 자 도경(道卿). 호 남리(南里)·운천(芸泉). 화원으로 도화서(圖畵署) 별제(別提)를 지냈다. 산수·인물·풍속에 능하였고 신장(神將) 그림에도 뛰어났다. 전통적인 북종화법을 따르면서도 남종화법과 서양화법을 수용한 화가로 대표작에 《월야산수도》가 있으며, 이 밖에도 《춘하도리원호흥도(春夏桃李園豪興圖)》 《월하계류도(月下溪流圖)》 《고사몽룡도(高士夢龍圖)》 《목우도(牧牛圖)》 《맹견도(猛犬圖)》 등이 있다.
김 려(金 礪 / 1675~1728)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용여(用汝). 호 설재(雪齋). 1705년(숙종 3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병조좌랑·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경기도도사(都事)·수원부사·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언관(言官)으로 재직시에는 직언을 서슴지 않아, 23년(경종 3) 전라도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25년(영조 1)에 풀려났다. 수원부사로 재임시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하자, 백성의 굶주림을 구하기 위해 사재를 털고 나라의 봉납을 유예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시문을 모은 《설재집》 1권이 전한다.
김만균(金萬鈞 / ?~1549)
조선 전기의 문신. 자 중임(仲任). 직제학(直提學) 천령(千齡)의 아들. 1528년(중종 23)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자시강원의 정6품 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 31년 홍문관의 수찬(修撰)으로 전직하여 권신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심정(沈貞)의 무리로 몰려 탄핵을 당하고 사직되었다. 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고 그의 일당이 축출된 뒤 재기용되어 시독관(侍讀官)·교리·부응교(副應敎)·장령(章令)·사간(司諫) 등을 지내고, 이어 당상관에 올라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이 되었다. 43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이듬해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종2품 예조참판에 승진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고 이어 중추부의 동지사(同知事)로 재임중 죽었다. 부친·본인·아들 3대가 장원급제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명원(金命元 / 1534~1602)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응순(應順). 호 주은(酒隱). 시호 충익(忠翼). 승지 만균(萬鈞)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 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69년(선조 2) 종성부사가 되고, 내외직을 거쳐 87년 좌참찬으로 의금부지사를 겸임하였다. 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순검사(巡檢使)가 되고, 이어 팔도도원수로서 임진강방어전을 전개하여 적의 침공을 지연시켰다. 평양이 함락된 뒤 순안에 주둔, 행재소(行在所) 경비에 힘썼다. 이듬해 명나라 원병이 오자 장수들의 자문에 응하였고, 그 뒤 신병으로 원수직을 사직, 호조·예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97년 정유재란 때 병조판서로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하고 좌찬성·이조판서·우의정을 거쳐, 1601년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병서(兵書)·궁마(弓馬)에도 능하였다.
김명희(金命喜 / 1788~?)
조선 후기의 서예가. 자 성원(性源). 호 산천(山泉). 노경(魯敬)의 아들이고, 추사(秋史) 정희(正喜)의 아우이며, 형과 더불어 글씨가 뛰어났다. 1810년(순조 10) 진사에 합격, 벼슬은 현령(縣令)에 그쳤다. 22년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일행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가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저자인 유희해(劉喜海) 및 진남숙(陳南淑) 등과 교분을 맺었다.
김사목(金思穆 / 1740~1829)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백심(伯深). 호 운소(雲巢). 시호 경헌(敬獻). 음보(蔭補)로 기용된 뒤, 특지(特旨)로 김제군수가 되었다. 1772년(영조 4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校理)·부승지를 거쳐, 74년 승지가 되었다. 83년(정조 7)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병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총융사를 지냈다. 88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우택(雨澤)에 대한 장계를 늦게 올려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직되어 대사간이 되고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수원부사에 제수되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한 뒤 병조·예조의 판서, 한성부판윤, 의금부판사 등을 거쳐 1808년 우의정, 19년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28년 중추부영사 겸 군자감도제조를 역임하였다. 천부적으로 영민·성실하여 낮은 관직이라도 성심껏 봉사하였다. 공직생활 70년 동안 영조·정조·순조 세 임금을 섬겼으며, 원로정승이 되어 회방(回榜:登科回甲)으로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검약을 생활신조로 삼았으며 안일한 생활을 구하지 않는 교훈을 실천에 옮겼다.
김상리(金相리 / 1732~1806)
조선 후기의 학자. 자 이흡(而洽). 호 송와(松窩). 함경도 출생. 과거시험에 여러 번 낙방하자 경학의 본원(本源) 공부에 힘썼다. 1776년(영조 52)에 학행으로 천거받아 지릉별검(智陵別檢)이 되고, 이어 돈령부(敦寧府)·예빈시(禮賓寺)의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에 향숙(鄕塾)을 세우고 후진교육에 힘써 사풍(士風)을 진작시키고 북방에 문운을 불러일으켰다. 1830년(순조 30)에 함경도 쌍성영인(寧仁)의 상덕사(尙德祠)에 향사되었다. 문집에 《송와집》이 있다.
김세민(金世敏 / 1401~1486)
조선 전기의 문신. 자 백공(伯恭). 시호 양평(良平). 정종의 딸 숙신옹주(淑愼翁主)의 남편. 1418년(태종 18) 돈령부첨지사(僉知事)가 되고, 이어 통정대부·공조참의를 지냈다. 37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충주목사에 제수되고, 42년(세종 24) 한성부윤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48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뇌물수수 혐의로 탄핵을 받아 영광에 유배되었다. 문종 즉위 때 직첩·고신(告身)이 환급되었으며, 문종이 죽자 고부 겸 청시사(告訃兼請諡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57년(세조 3) 대사헌을 거쳐 중추원사·전라도관찰사를 지냈으며, 60년 숭정대부에 올랐고 돈령부판사에 이르렀다. 관직생활 70년 동안 7명의 왕을 차례로 섬겼다.
김세필(金世弼 / 1473~1533)
조선 중기의 문신. 자 공석(公碩). 호 십청헌(十淸軒)·지비옹(知非翁). 시호 문간(文簡). 1495년(연산군 1) 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수찬(修撰)·지평(持平)에 올랐다가,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응교(應敎)로 기용되고, 부제학(副提學)·광주목사·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대사헌(大司憲)·이조참판을 거쳐, 19년(중종 14)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겨울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가 사사(賜死)되자, 중종의 과오를 규탄하다가 유춘역(留春驛)에 장배(杖配)되었다. 22년에 풀려났으나, 고향으로 내려가 십청헌을 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십청집》이 있다.
김수렴(金守廉 / 1574~1651)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지혼(志渾). 호 야당(野堂). 좌의정 명원(命元)의 아들. 공신의 적자(嫡子)로서 중림도찰방(重林道察訪)에 초임되었다. 홍산현감으로 있을 때 광해군의 비(妃) 유씨(柳氏)의 오빠인 희발(希發)의 딸과의 결혼을 거절하여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한성부서윤(庶尹)에 복직되었다. 익산군수·안성현감·중추부경력(經歷)·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46년(인조 24) 절충장군(折衝將軍)·중추부첨지사에 오르고, 오성군(鰲城君)에 추봉되었다.
김승경(金升卿 / 1430~1493)
조선 전기의 문신. 자 현보(賢甫). 1453년(단종 1) 사마시를 거쳐, 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호조정랑을 지냈다. 성종 때 도승지·한성부우윤(右尹)을 역임하고, 예조참판·대사헌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벼슬길에 오르기 전부터 자질과 명성이 알려졌다. 승정원에 재직할 때 직무에 충실하고 행정능력이 뛰어나 왕으로부터 금띠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좌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추형(追刑)을 받았다.
김시구(金蓍耉 / 1724~1795)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몽휴(夢休).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그해 보안도찰방(保安道察訪)으로 나갔다가 곧 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다. 58년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으로 좌천되고, 62년 이후 장령(掌令)·돈령부동지사(敦寧府同知事)·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官) 등을 역임하였다. 67년 전사관(典祀官)이 되어 관북(關北)에 파견되었으며, 72년 승지를 지낸 뒤 주로 외직으로 나가, 80년 제주목사로 있을 때 전라도관찰사 박우원(朴祐源)의 밀계로 파직되었다. 성리학에 밝았다.
김시양(金時讓 / 1581~1643)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자중(子仲). 호 하담(荷潭). 초명 시언(時言). 시호 충익(忠翼).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3사(司)·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여러 벼슬을 지냈다. 10년(광해군 2)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전라도도사(都事)가 되어 향시(鄕試)를 주관할 때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시제(詩題)를 출제하였다 하여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 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예조좌랑·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고,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정묘호란 뒤 서북의 경비가 중요시되자, 평안도관찰사로 발탁되었다. 31년(인조 9) 병조판서에 올라 팔도도원수(都元帥)·사도체찰사를 겸임하고,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41년 《선조실록》을 개수(改修)할 때 중추부판사 겸 춘추관판사로서 참여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전적(典籍)·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집》 《부계기문(溪記聞)》 등이 있다.
김시진(金始振 / 1618~1667)
조선 중기의 문신. 자 백옥(伯玉). 호 반고(盤皐). 좌의정 명원(命元)의 증손. 1644년(인조 22)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47년 사헌부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문학·수찬(修撰)·교리·집의(執義) 등을 지내고, 59년(효종 10)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62년(현종 3) 승지에 오르고 이어 경기좌도균전사(京畿左道均田使)로 나갔으며, 66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그해 9월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수원부사(水原府使)를 거쳐 형조·예조·호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김여로(金汝老)
조선 중기의 무신. 병자호란을 겪고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 두 왕자가 선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수행하였다. 청나라가 금주위(錦州衛)·산해관(山海關)을 칠 때 별시위(別侍衛)로 두 왕자를 호종하였다. 44년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하고 이듬해 두 왕자의 귀국이 허락되자, 그 소식을 앞질러 조정에 전달하였다. 그 공로로 별군직(別軍職)을 지내고, 자산(慈山)·덕천(德川)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김 연(金 演 / 1552~1592)
임진왜란 때 의병장. 자 언홍(彦洪). 호 노암(魯庵). 영천 출생.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최인제(崔仁濟) 등 17의사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을 수복하였다. 이어 경주를 수복하기 위해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로 그 자손의 공역이 면제되고, 밀양의 고천사(古川祠)에 배향되었다.
김영유(金永濡 / 1418~1494)
조선 전기의 문신. 자 택부(澤夫). 시호 공평(恭平). 1447년(세종 29)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正字)에 등용되고, 감찰(監察)·정언(正言) 등을 거쳐 57년(세조 3) 평양부소윤(少尹)이 되었다. 65년 승문원판사, 이듬해 대사성을 역임, 호조참의에 전직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75년(성종 6) 형조참판에 전직, 이듬해 공조참판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83년 한성부좌윤, 그 뒤 중추부행첨지사(行僉知事)·개성부유수(留守)·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87년 70세로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소청했으나 왕이 불허하여, 형조참판·중추부수지사(守知事)를 지냈다.
김영작(金永爵 / 1802~1868)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덕수(德). 호 소정(邵亭). 영의정 홍집(弘集)의 아버지. 1838년(헌종 4) 음보로 정릉참봉(靖陵參奉)이 되고, 4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호조·예조·병조의 참판(參判) 및 한성부우윤·대사헌·대사성·홍문관제학(提學)·목사(牧使) 등을 지내고, 고종 초기에 개성부유수(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에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지방민의 칭송을 받았다. 시문에도 능하여 《소정고》 《청묘의례(淸廟儀禮)》 등의 저서를 남겼다.
김영제(金영濟 / 1883~1956)
국악이론가, 가야금·피리의 명인. 호 괴정(槐庭). 충북 괴산(槐山) 출생. 순조 때의 가야금과 정재춤의 명인 김창하(金昌河)가 증조부, 초대 국악사장(國樂師長)이며 가야금의 대가인 김종남(金宗南)이 양조부, 가야금의 명인 김종표(金宗杓)가 조부이다. 1897년(광무 1) 장례원(掌禮院) 전악(典樂)에 오르고, 1908년(융희 2)에는 궁내부의 국악사(國樂師), 11년에는 이왕직아악사, 28년에는 제4대 아악사장(雅樂師長)에 임명되었다. 가야금이 전공이었으나 편보(編譜)와 악기 개량에도 뛰어났으며, 국악자료의 수집, 악보 정리, 악률(樂律)의 개정 등에 공헌하였다. 또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를 개설하여 후진을 길러내는 한편 승무(僧舞)의 부활에도 힘썼다.
김원량(金元亮 / 1589~1624)
조선 중기의 문신. 자 명숙(明叔). 호 미촌(村)·율촌(栗村). 시호 강민(剛愍).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3년 이시백(李時白)의 권유로 인조반정 모의에 참여하였으나, 거사 당일에는 가담하지 않고 인조를 맞이하는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논공행상에서 이후원(李厚源)과 함께 극력 사양하였으나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호조좌랑을 역임하고, 김집(金集)과 함께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지평(持平)이 되었다. 24년(인조 2) 정찬(鄭燦)이 이괄(李适)의 모반에 대한 고변을 하자, 평소 이괄 부자와 교분이 두터웠던 그는 이괄의 무혐의를 극구 변호하였다. 이괄의 반란이 확실해지자 승지 김자점(金自點)의 주장으로 투옥, 참살되었다. 61년(현종 2) 훈작이 복구되고 호조판서에 추증,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김유경(金有慶 / 1669~1748)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덕유(德裕). 호 용주(龍洲)·용곡(龍谷). 시호 효정(孝貞). 1693년(숙종 19) 사마시를 거쳐, 171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說書)·정언(正言)·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숙천(肅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양이(量移)되었다. 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27년 정미환국 때 부사직(副司直)으로서 《숙종실록》 보수(補修)에 반대한다는 소론의 탄핵으로 제주도 대정(大靜)에 안치(安置)되었다. 29년 소론이 물러나자 석방되었으며,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앞서 소론 김일경(金一鏡)이 조작한 임인옥안(壬寅獄案)의 허구를 밝혀 사실(史實)을 다시 쓰라고 상소하였다. 이어 노론 4대신에 대한 무고를 추론(追論)하라고 하였으나,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는 극론이라 하여 상소문이 소각되었다. 44년 대사헌이 되어 탕평책을 반대하는 노론계열의 소장세력을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46년 좌참찬으로 물러난 뒤, 48년 숭록대부에 특진되었다.
김 익(金 瀷 / 1504~?)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재청(載淸). 호 북일(北逸).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44년 주서가 되었다. 45년(인종 1) 봉교(奉敎)로서 춘추관기사관(記事官)을 겸직,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54년(명종 9) 지평이 되어 당시 민생고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실시되던 금주령 해제를 반대하며 더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57년 함경도암행어사가 되고, 63년 정론(正論)으로 표창받았으며, 66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가 되었다.
김 인(金 寅 / ?~1592)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 언홍(彦洪). 호 노암(魯菴). 영천 출생.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카 대해(大海), 유생 최인제(崔仁濟)·이일장(李日將)·정세아(鄭世雅)·정의번(鄭宜蕃)·이영근(李榮根) 등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고향을 수복한 뒤 경주로 진군하여 다른 의병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다. 벼슬이 추증되고, 밀양의 고천서원(古川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김재현(金載顯 / 1627~1700)
조선 후기의 문신. 자 회백(晦伯). 20세 전에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이 되고, 1662년(현종 3) 예빈시(禮賓寺)에 전임되었다. 그 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자(正字)·지평(持平)·집의(執義) 등을 지냈다. 89년(숙종 15) 승지로서, 숙종이 희빈장씨(禧嬪張氏) 소생을 원자(元子)로 책봉한 것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출사건이 있자, 반대의 소(疏)를 올리고 두문불출하였다. 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호조참의로 기용된 뒤 좌승지(左承旨)·한성부우윤·호조참판·중추부동지사(同知事)·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留守) 등을 지냈다.
김 정(金 淨 / 1486~1520)
조선 전기의 문신. 자 원충(元?. 호 충암(요?. 시호 문간(文簡). 10세 전에 사서(四書)에 통하고,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에 합격,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순창군수 등을 지냈으며,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함께 폐비 신씨(愼氏)를 복위시키고자 상소하였으나 각하되고 유배당하였다. 16년(중종 11) 다시 등용되어, 부제학(副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都承旨)·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미신타파·향약(鄕約) 시행 등에 힘썼으나 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뒤에 사사(賜死)되었다. 시화(詩畵)에 능하였다. 문집에 《충암문집》, 저서에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등이 있다.
김정집(金鼎集 / 1808~1859)
조선 후기의 문신. 자 구여(九如). 호 석세(石世). 시호 문정(文貞). 좌의정 사목(思穆)의 손자. 1825년(순조 25) 생원이 되고, 27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가주서(假注書)·설서(說書) 등을 지냈다. 33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46년(헌종 12)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체포하였다. 철종 때 평안도관찰사로 있으면서, 횡포가 심한 온갖 잡세를 혁파하였다. 좌참찬(左參贊)·의금부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사학(史學)에 밝았으며, 충신과묵하여 지방관으로서의 치적이 많았다. 문집에 《석세유고》가 있다.
김정현(金鼎鉉 / 1591~1675)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중길(重吉). 호 추곡(楸谷)·송림(松林). 1613년(광해군 5)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 은둔하였다. 인조반정 후 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모봉양을 위하여 외직(外職)을 택하여 다섯 고을을 다스렸다. 부모가 죽은 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친구들과 기로계(耆老契)를 만들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중추부동지사·한성부우윤을 거쳐, 75년(숙종 1)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김정희(金正喜 / 1786~1856)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예산 출생.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48년 풀려나왔고, 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김종순(金從舜 / 1405~1483)
조선 전기의 문신. 시호 공호(恭胡). 1437년(세종 19) 문음(門蔭)으로 충훈부사승(忠勳府司丞)이 되고, 39년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거쳐 한성부중부령(中部令)·감찰 등을 지냈다. 그 뒤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부사직(副司直) 이보흠(李甫欽)을 사직(司直)에 잘못 승진시킨 사건에 연루되어 논죄되었으나, 공신자손이라 하여 파직에 그쳤다. 그 뒤 복직되어 승문원교리(承文院敎理)·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63년(세조 9)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올랐으며 이어 대사헌·중추부동지사·경상도관찰사·중추부지사를 역임하였다. 세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김종일(金宗一 / 1597~1675)
조선 중기의 문신. 자 관지(貫之). 호 노암(魯庵). 1624년(인조 2) 생원시·진사시에 합격, 2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30년 진주목사, 35년 정언(正言), 36년 병자호란 때 순찰사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듬해 10월 소현세자가 심양(潘陽)에 볼모로 잡혀갈 때, 사서(司書)로서 수행하였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청(淸)나라 벼슬에 올라 조선에 대해 갖은 횡포를 부리던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의 죄상을 폭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송환되어 영덕에 귀양갔다. 43년 풀려났으며, 57년 울산부사를 지냈다. 60년(현종 1)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에, 허목(許穆)과 함께 3년설을 주장하다가 평해(平海)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문집에 《노암문집》이 있다.
김종표(金宗杓 / 1843~1937)
조선 후기의 가야금의 명인. 자 영조(永朝). 초명 종한(宗漢). 철종·고종 때 판소리의 명창인 창록(昌祿)의 셋째 아들이고, 고종 때의 가야금의 명수인 종남(宗南)의 아우이다. 1866년(고종 3) 전악(典樂)에 오른 기록이 있으며 특히 덕행을 겸비하고 지조가 굳어 모든 국악인들의 사표(師表)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그의 초상을 난계(蘭溪) 박연(朴堧)의 신실(神室)에 봉안하고 크게 제사지냈다.
김주신(金柱臣 / 1661~1721)
조선 후기의 문신. 자 하경(廈卿). 호 수곡(壽谷)·세심재(洗心齋). 시호 효간(孝簡). 숙종의 장인. 박세당(朴世堂)의 문인. 1686년(숙종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이 되었다. 1720년 순안현령으로,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仁元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都正), 이어 돈령부영사(領事)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다. 도총관(都摠官)으로서 상의원(尙衣院)·장악원의 제조(提調) 및 호위대장을 겸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었다. 저서에 《거가기문(居家紀問)》 《수사차록(隨事箚錄)》 《산언(散言)》, 문집에 《수곡집》 등이 있다.
김진수(金進洙 / 1797~1865)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치고(稚高). 호 연파(蓮坡)·벽로재(碧蘆齋). 어려서부터 독서에 몰두하여 기대를 모았으며 자라면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을 벗삼았다. 이러한 것들을 문장으로 표현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여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일찍이 북경(北京)에 드나들면서, 그곳에서 접하는 인물·풍속·경치를 내용으로 한 《벽로집》 4권을 저술하였다. 문집에 《연파집》이 있다.
김창일(金昌一 / 1548~1631)
조선 중기의 문신. 자 형길(亨吉). 호 사한(四寒). 김근공(金謹恭)의 문인. 1595년(선조 28) 유일(遺逸)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고 이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1601년 홍천현감(洪川縣監)으로 나간 뒤 고산(高山)·고창·금구(金溝)의 현감에 이어, 안락(安樂)·합천의 군수 등 외직을 지낸 뒤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낮출 때 정온(鄭蘊)과 함께 극력 반대하는 소를 올렸고, 16년 형장(刑杖)의 남용 혐의로 체포된 해주목사 최기(崔沂)의 공술(供述) 초고를 이귀(李貴)와 함께 수정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청도군수(淸道郡守)로 재기용되고, 27년 정묘호란 때 원주에 돌아가 80의 나이에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난이 끝난 뒤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이 되고, 30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학문을 닦아 학식이 뛰어나고 서문에도 능하였다.
김창하(金昌河 / ?~?)
조선 후기의 가야금과 춤의 명인. 자 의선(義善). 서울 출신. 유명한 국악 가문 태생으로, 정조(正祖) 때의 국악사 김대건(金大建)의 아들이며, 철종·고종 때의 가야금 명인 김종남(金宗南)의 숙부이다. 정재(呈才)의 안무(按舞)에 뛰어났으며, 1827년 전악(典樂)이 된 뒤 순조의 세자 익종(翼宗)을 도와 악단 구후관(九官)을 조직하여 그 감관(監官)의 칭호를 받았고, 순조(純祖)의 망오(望五)에는 세자를 도와 축하진연(祝賀進宴)의 많은 정재를 지었다. 작품에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ont face="바탕체" size="2" color="navy">조선 후기의 문신. 자 자유(子有)·숙기(叔起). 호 급류정(急流亭). 시호 정헌(靖獻). 서산 출생. 1699년(숙종 2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檢閱)·주서(注書)·대사간 등을 지냈다. 경종 때 한성부우윤(右尹)으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한성부판윤에서 쫓겨났다가, 이듬해 우참찬으로 복직되었다. 탕평책에 반대하여 다시 파직, 30년 좌참찬에 복직되었다.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영의정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중추부판사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김종효(金從孝 / 1409~?)
초명은 달효(達孝), 개국공신 계림군(鷄林君) 균( )의 손자이며 공호공(恭胡公) 김종순(金從舜)의 아우이다. 태종(太宗) 때 출생하여 세종(世宗) 때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가 되어 세자익위사좌세마(世子翊衛司左洗馬)로 처은 관직에 나간 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오위사직(五衛司直),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세자시강원좌필선(世子侍講院左弼善), 훈련원도정겸군자감부정(訓練院都正兼軍資監副正), 군기시정(軍器寺正), 공조참의(工曹參議), 우림위장(羽林衛將)을 거쳐 문종(文宗) 때 병조참의(兵曹參議), 단종(端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왕위를 찬탈(簒奪)함에 반발하여 상왕(上王:단종) 복위를 기도하다 실패하자 관직을 버리고 뜻을 같이 하는 한성판윤(漢城判尹) 이지대(李之帶) 및 제(弟) 진사(進士) 종우(從禹)와 함께 경주부(慶州府) 남중리(南中里)에 은거(隱居)하였다.
김 수(金 需)
고려 말 천서(天瑞)의 아들로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를 역임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호공(靖胡公)
김의열(金義烈)
월성군 수(需)의 동생으로 효성이 지극했으며 참의(參議)를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김자온(金自溫)
1401년 (태종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진사과(進士科)로 급제,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냇다.
김인찬(金仁贊)
조선때 동지절제사(同知節制使)를 역임하고, 시호는 충밈(忠愍) 죽은ㄱ뒤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으로 익화군(益和君)에 추봉되었다.
김 타(金 陀)
1401년 (태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김덕재(金德載)
조선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 은열공의 12세손으로 조선개국(朝鮮開國)의 보좌공신(補佐功臣)이며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다가 태조(太祖)를 따라 함흥(咸興)에 갔다가 중산(中山)에 은거하였다.
김위민(김爲民)
1401년(태종)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다.
김 작(金 綽)
1414년 (태종 14) 문과(文科)에 을과(乙科) 1등으로 급제하여,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냇다.
김자양(金自養)
자(字)는 선군(善君). 호는 호연당(浩然堂), 정숙공(貞肅公) 인경(仁鏡)의 7세 손이다. 태종조에 문과(文科0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통천군수(通川郡守)와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역임하여 치적이 잇었음에 그 지방 백성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김계돈(金季敦)
자양(自養)의 아들로 세종, 문종, 단종조에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역임햇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되었다.
김종연(金宗連)
1456년 (세조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교리(敎理)를 지냇다.
김인령(金引齡 / 1462 - 1504)
조선의 문신. 자는 수옹(壽翁). 봉상사정(奉常寺正) 치운(致運)의 아들. 1483년 (성종 14) 진사(進士)가 되고, 1497년(연산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예조좌랑(禮曹佐郞). 문학(文學) 등을 역임, 1503년(연산군 9) 지평(持平)을 지내고 이듬해 박은(朴誾)의 일파라하여 이자건(李自健). 박의영(朴義榮) 등과 함께 관직을 삭탈 당한 후 임실(任實)에 부처(付處)되어 죽었다.
김장미(金長美)
조선때 문신(文臣)으로 시호는 양신(良愼), 계돈(季敦)의 장남이다. 연산(燕山)의 혼정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歸鄕)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후에ㅜ다시 부름을 받아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김자간(金自幹 / 1439~?)
초명은치간(致幹), 호는 우은(于隱), 세종(世宗) 때 출생하였으며 개국공신 계림군(鷄林君) 균( )의 증손이다.그 부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종효(從孝)는 세조(世祖)의 찬탈(簒奪)에 반대하여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도모하였으나 실패하고 낙향, 은거(隱居)하다 죽었는데 후일 성종(成宗)이 왕위에 올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세조의 찬탈을 반대하며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신하들과 그 자손들을 사면(赦免)하면서 다시 관직에 등용하는 회유책(懷柔策)을 쓸 때 통훈대부(通訓大夫) 언양현감(彦陽縣監) 겸 경주진관병마절제도위(慶州鎭管兵馬節制都尉)의 벼슬을 받게 되자 은거지인 경주부(慶州府) 남중리(南中里)에서 언양현(彦陽縣) 명촌리(鳴村里)로 이주하여 본향(本鄕)으로 삼고 만정헌(晩定軒)을 건립하였다.
김천민(金天民)
1436년 (세종 18) 부사정(副司正)으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진사과로 급제하고,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역임, 통정(通政)에 이르럿다.
김천령(金千齡)
조선 문신, 자는 인로(仁老), 통판(通判) 치세(致世)의 아들. 1489년 (성종 20)진사(進士)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전적(典籍).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498년 사가독서(賜假讀書)했다.
부응교(副應敎)가 되면서부터 언사가 재상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 혹은 좌천 되었으며, 교감(校勘)으로 성절사(聖節使)를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와서 장령(掌令)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러 병사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앞서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정침(鄭沈)의 가자(加資)를 주장한 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김명해(金明海)
자는 문관(文觀) 호는 관재, 자양(自養)의 7세손으로, 일찍이 전시에 응하여 을과(乙科)에 뽑혀 예빈시(禮賓寺) 주서(注書)가 되었다.
김춘경(金春卿)
자는 명중(明仲). 조선조 개국공신(開國功臣)계림군 균의 증손이며 승의랑(承義郞)으로서 추장문과(秋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럿다.
김효정(金孝貞)
1475년 (성종 6)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김 함(金 緘)
자는 중묵(仲默), 호는 농은(農慇), 세종 무오(世宗戊午)년 초시(初試)에 급제하고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출사(出仕)하여 세조 6년에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다.
김광수(金光粹)
1423(세종5) 문과(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 )에 이르렀다.
김신민(金新民)
전옥부승(典獄副承)으로서 개국공신(開國功臣) 계림군 균의 3세손. 1426(세종8) 문과(文科)에 진사과 (進士科) 로 급제하고, 검열(檢閱),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제학(提學) 동지중추 (同知中樞)가 되었다. 대사헌(大司憲) 승경(昇卿)의 부(父)
김 확(金 確)
1435년 (세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진사과(進士科)에급제하고 감찰(監擦)을 지냈다.
김안민(金安民)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계림군 균의 3세손. 부(父)는 증(贈) 병조판서(兵曹判書) 중성(仲誠). 정랑(正郞)으로서 1447년 (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정과(丁科) 3등으로 급제하고 통정(通政)에 판사제(判司帝) 감사(監事)가 되었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追贈)
김인손(金麟孫 / 1479 ~1552)
조선의 문신. 자는 정서(呈瑞), 1501 년(연산군 7)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1509년(중종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1532년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시 유배중인 이종익(李宗翼)의 상소문을 전달하여 파면된 일이 있으며, 예조판서.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참찬(參贊)을 지냈다.
김 임(金 任)
자(字)는 중겸(重兼), 1480년(성종11) 무과(武科)에 급제하고1506년 (중종1)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다. 동년(同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冊錄)되고 계성군(鷄成君)에 봉해지고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올랐다.
김의동(金意同)
1428년 (성종13) 장사랑(將仕郞)으로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양보(金良輔)
1502(연산군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수찬(修撰)을 지냈다.
김 요(金 耀)
1496년(연산군) 문과(文科)에 올라 을과(乙科)로 급제,군수를 지냈다.
김가원(金可遠)
자(字)는 공망(公望),1510년(중종5) 교수(敎授)로서 식년문과에 병과 (丙科)로 급제,전적(典籍)을 지냈다.
김성구(金成九).
자(字)는 기수(奇搜),1522(중종17)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학정(學正)을 지냈다.
김세준(金世俊)
자(字)는군필(軍弼),1507년(중종2) 사용(司勇)으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 에 병과(丙科)로 급제,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 선(金 琁)
자(字) 는 온보(溫甫),1495 년(연산군 1) 진사(進士)가 되고 1507(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치운(金致雲)
자(字)는 종용(從龍),1524년(중종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교리(校理) 등을역임,참판(參判)에 일르렀다.
김 홍(金 泓)
자(字)는 홍지(泓之), 1528년(중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진주목사(晉州牧使) 등을 역임, 통정(通政)에 이르렀다.
김 저(1512 ~ 1547)
.조선의 문신, 자는 학광(學光), 이조참판(吏曹參判) 세필(世弼)의 아들. 1539년 (중종 3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1545년(명종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심한 고문을 받고 삼수(三水)에 유배, 이듬해 사사(賜死)되엇다. 선조 초에 관작이 복구,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追贈),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김천우(金天宇)
자(字)는 대용(大容),. 1538년(중종3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 역임했다.
김 완(1546~1607)
자(字)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 자양(自養)의 현손(玄孫)인 공(公)은 일찍이 서경(書經)과 손오병서(孫吳兵書)에 통달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올라 사도(蛇渡) 첨사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장군과 더불어 옥포(玉浦), 한산도(閑山島) 등지에서ㅜ대공(大功)을 세워 척후장(斥候將), 조방장(助防將) 정3품 절충(折衝)에 올랐다.
1607년 (선조10) 향년 82세에 별세하여 어명(御命)으로 불조묘동인각(不眺廟東麟閣)을세워 봉안치제(奉安致祭)케 했다.
김용경(金龍慶 / 1678~1738)
조선의 문신, 자는 이견(而見), 두정(斗井)의 아들, 홍성(洪城)출신,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成均館) 유생으로 있다가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경종 초에 정언(正言)을 지내고 영조 초 노론(老論)으로 3사의 벼슬을 거쳐 대사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했다.
김한철(金漢喆)
자는 사적(士迪). 1731년 (영조 7) 참봉(參奉)으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효간(孝簡)
김한구(金漢耉 /? ~ 1769)
조선 영조의 장인.시호는 충헌(忠憲), 관찰사 홍욱(弘郁)의 아들, 1759년(영조35) 딸이 계비(繼妃: 정순왕후)가 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금위대장(禁衛大將)을 거쳐 1763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냇다.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김한록(金漢祿)
조선 문신(文臣), 자는 여수(汝綏), 호는 한간(寒澗), 영조의 장인 한구(漢耉)의 종제(從第), 충남 서산(瑞山)출신, 한원진(韓元震)의 문인. 가난한집 출신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다가 종형인 한구가 귀한 신분이 되자, 발분하여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벼슬은 세마로 지냇다.
동문(同門)인 홍양해(洪量海)와 함께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영수로서, 김상로(金尙魯). 홍계희(洪啓禧). 정휘량(鄭輝良). 신만(申晩)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를 해치는 유언비어를 퍼뜨림으로써 영조 부자간을 이간했다.
또한 한구의 아들 말년에는 세손(世孫:정조)의 繼位(계위)를 방해하여 세손에게 위해를 입히려 하기까지 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