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존 왕과 1215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I
존 랙랜드 (John Lackland) – 애들 이름 함부로 짓지 말기, 정말 땅을 다 잃었음.
헨리 2세와 엘레아노르가 끔찍히 아끼던 막내아들, 존 (John) 은 어렸을때부터 해달라는 것은 다해주어 예의없고 개념없는 대디보이, 마미보이로 자랐습니다. 멋내기 좋아하고, 미식가였던 그는 여자보기도 쉽게 알아 바람둥이 (womaniser) 라는 소문도 자자했는데, 네째 아들로 태어나 물려줄 땅이 남지 않아 땅이 결여되어있다는 뜻의 ‘랙랜드 (lackland, lack (결여되어있는) + land (토지))’ 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지요. 별명이나 애칭도 함부로 지어주면 안되는 것이, 존은 정말 ‘앙주제국’의 영토를 다 잃고, 별명처럼 ‘lacking land’ 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앙주제국이 뭐냐구요? [런던 이야기 11편] 유산과 혼수로 제국을 이루었던 헨리 2세 를 보아주세요.)
너는 아직 어리다며 항상 말썽쟁이 막내동생을 용서해주었던 ‘사자심장왕 리차드’는 바로 밑의 동생, 제프리의 아들, 아써대신 존을 후계자로 임명했고, 존 (r. 1199-1216) 은 왕이 되자마자, 논쟁을 막기위해 우선 조카 아써부터 죽였는데, 이때부터 존의 문제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동의할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왕은 재앙입니다.
‘사자심장왕 리차드’ 와 손잡고 헨리 2세를 쳤었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리차드는 무서웠지만, 존 랙랜드는 만만해, 어린 아써를 죽인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시비를 걸며 (그렇긴 하지만, 남의 사?), 노르망디를 비롯한 앙주제국의 영토들을 돌려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형과는 달리 군사적인 자질이 떨어졌던 존은 노르망디, 앙주부터 시작해 프랑스의 영토를 하나하나 잃기 시작했고, 계속되는 전쟁의 자금을 대기 위해, 터무니없이 세금을 올리고, 세금을 못내는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처벌을 가했으니, 국민들의 원성이 날로만 높아갔습니다.
존은 또 누구를 캔터버리 대주교로 임명할 것인지에 대해 로마교황과 다투었는데, 이것도 현명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존을 괘씸하게 여긴 로마교황은 그를 파문 (excommunication) 시켰고, 영국에게 성사금지 명령 (interdict) 을 내렸습니다. 교황과 로마교회와 단절되어 지옥에 가는 것을 의미했던 ‘파문’ 은 카톨릭교에서 가장 무거운 벌이였고, ‘성사금지 명령’ 은 교회의 성사를 지키지 못하게 하는 명령으로 미사를 드릴 수 없고, 고해성사를 할 수 없으며, 죽은 사람을 예식에 맞추어 묻을 수 없고, 세례도 받을 수 없어 죄가 용서되지 않아 천국에 갈 수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때는 사람들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비정상적으로 강하고 리얼했을 때였는데, 왕때문에 지옥에 가게 생겼으니 나라 전체에 난리가 났습니다. 어쩔 수 없이 존은 교황이 임명한 대주교, 스티븐 랭튼 (Stephen Langton) 의 발앞에 무릎 꿇고 그를 받아드리고, 교황에게 ‘성사금지 명령’을 해제해달라고 빌어야 했습니다.
이때 다른 것은 몰라도 영국의 ‘앵글로-노르만’ 귀족들과 앙주제국 영역 프랑스 귀족들 모두가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the new king was a disaster, 새로운 왕은 재앙이라는 것이였습니다. 라틴어로 ‘대 헌장’ 을 의미하는 1215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는 재앙적인 왕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나온 것이였습니다.
1215년 6월 15일, 왕의 문장으로 봉인된 ‘마그나 카르타’는 중세기 영국의 가장 중요한 문서중 하나로, 법에 따라 공정하게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겠다는 왕의 약속이자, 왕의 줄어든 권한이 문서화되는 계기였으며, 우리가 지금 숨쉬는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진 획기적인 사건이였습니다.
‘정복왕 윌리엄’때 들어온 봉건제도 아래 왕은 세금을 올리거나 군사가 필요할때 귀족들과 먼저 상의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전쟁에 지기만 하는 존의 계속되는 세금과 군사의 요구에 귀족과 서민들 둘다 지쳐가고 있었는데, 1204년 프랑스 북부의 땅을 잃은 존은 봉건제도의 법을 어기고 귀족들과 상의없이 세금을 올렸고, 1214년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다 잘되지 않자 또 세금을 올리려 했습니다. 이번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못난 왕의 횡포에 계속 휘둘리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였습니다.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목숨은 땅에서 나오나요? 돈도 없지, 땅을 경작할 사람도 없지,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사나요?’ 대주교, 스티븐 랭튼의 지도아래 단결한 남작 (baron, 가장 낮은 귀족작위) 들이 왕에게 요구할 조항들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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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줄어든 권한을 문서화했던 1215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Source: Wikipedia)] |
왕의 권력이 남용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의 63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마그나 카르타’의 기본개념은 1) 영국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고, 2) 고대부터 내려오던 ‘더 씨티 오브 런던’ 과 다른 도시들의 특전을 존중하며, 3) 누구든 정당한 법의 절차를 거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는 것이였습니다. 풀어말하면, 교회는 왕권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특히 누가 주교가 될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 런던은 자치제를 계속할 것이고, 세금은 의회의 승인없이 인상될 수 없으며, 아무도 정당한 법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감금되거나 재산을 빼앗기거나, 쫒겨나거나 처형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구문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들릴 수 있지만, ‘마그나 카르타’ 이전에는 ‘생긴 것이 맘에 안든다’, ‘말투가 기분나쁘다’ 라는 이유로도 잡혀갈 수 있었으니, 당시에는 매우 중요하고 획기적인 컨셉이였고, 이후에 제정된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전들의 핵심개념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성문법 (statute law) 에 담겨있습니다.
남작들의 뜻에 동의한 런던시민들은 성벽의 대문을 열어 그들을 받아드렸고, 세력을 키운 남작들은 갑옷으로 무장하고 왕이 거주하던 윈저에 무력으로 쳐들어가, 왕에게 써리 (Surrey) 지역의 에그햄 (Egham) 에 있는 러니미드 (Runnymede) 에서 협상 회의를 열 것을 요구했습니다. 1215년 6월 15일, 존 왕은 결국 러니미드에서 남작들의 협박과 강요에 못이겨 ‘마그나 카르타’ 에 서명했고, 그 댓가로 남작들은 왕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지만, 왕이 ‘마그나 카르타’ 의 조약을 어길시에는 왕의 뜻을 기각하고 왕의 성들과 소유물을 무력으로 압수할 수 있는 25명의 남작들로 구성된 위원회까지 만들어졌으니, 왕의 체면이 땅으로 떨어졌던 순간이였습니다. 서명된 ‘마그나 카르타’는 대법관청에서 공식화되었고, 주교와 주장관들을 비롯한 영국 전역의 고위직의 사람들에게 배포되었습니다. 영국 시민의 권리의 기초가 되고, 강력한 의회의 결성을 암시하였던 ‘마그나 카르타’는 이렇게 무능한 왕과 기센 남작들의 합작으로 탄생한 것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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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들의 강요에 마지못해 '마그나 카르타' 에 서명하는 존 왕 (Source: Wikipe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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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존심상해 죽겠는 존은 남작들이 런던을 떠나자마자 태도를 바꾸었고, 교황까지 존의 편을 들었으니, 남작들은 비장의 결심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