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자 중앙일보 week&에 차마 싣지 못한 내용을 모두 싣는다. 무진장 길다>
그곳에는 길이 없다. 수많은 길의 경계선이 허물어져 본래의 길이 없어진다. 길은 천변만화하여 무한대가 된다.
휴가 잘 다녀와라. 아, 출장입니다. 휴가가 아니라요.
캐나다 휘슬러 출장은 이렇게 시작됐다.
# 2011년 12월 10일, 첫 날 할 것은 죄다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수영, 한의원에서 침 맞기, 면세점 기웃거리기, 보딩 기다리며 맥주 마시기...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기내식이 나왔다. 난 평소에 마시지도 않던 와인을 시켰다. 이유는, 단순하다. 양이 많아 보여서. 대신 음식은 조금만. 맥주를 또 시켰다. 그리고 또 시켰다. 내 옆에 앉은 젊은 외국인 친구는 계속 잤다. 정말 내내 잤다. 내 대각선 앞의 친구는 계속 먹고 마셨다. 정말 무진장 먹었다. 문득, 속이 쏴하고 쓰려왔다. 어...어... 이러면 안되는데. 왜 이럴까. 생각해보니, 지난 3주간 매일 과음을 했다. 그 3주간 술을 마시면서 무엇인가를 토해내야 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안정을 취했다. 1시간 뒤, 속이 가라앉았다. 출발 10시간 뒤, 캐나다다. 밴쿠버다.
# 12월 10일, 또 첫 날 몽준(Mong Joon)? 여권상의 이름과 다르다? (존댓말이 없는 영어라 반말로 적는다) 아, 몽준이 아니라 홍준(Hong Joon)이다. (나도 그 몽준씨처럼 돈이 많으면 좋겠다)
H를 흘겨 쓰니 M처럼 보였나보다. 근데, 입국 심사하는 이 캐나다 분들, 너무 느리다. 무려 1시간30분을 기다렸다. 인천공항의 신속, 정확함이 그리워진다. 드디어 빠져나왔다. 어라? 가이드가 없다. 전화를 했다. 그가 후다닥 나타난다.
아, 하도 안 나오셔서 담배 한대 피우고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네. 기성준이라고 합니다. 얼큰한 것 드시고 싶으시죠? 네. 가시죠. 네.
밴쿠버 번화가에 도착했다. 장모집이라고, 제법 유명한 한국식당에 들어섰다. 순두부를 시켰다. 맛은 그저 그렇다. 그런데 캐나다에서의 보통 순두부 맛은 매우 특별하게 다가온다. 소주 한 잔 생각이 절실했지만 메뉴판에 적힌 '소주 1만5000원'을 보고 포기한다. 누가 돈을 쓰건, 1만5000원짜리 소주를 마시면 내 속이 다시 뒤집어질 것이다.
2시간을 달려 휘슬러에 도착했다. 퍼시픽 빌리지 호텔에 체크인. 호텔 직원이 나보고 카드를 달란다. 그리고 싹 긁는다.
어엇? 뭐하는 거야? (역시 존댓말이 없는 영어이니 반말로 적는다) 아, 일종의 보증이다. 무사하게 체크아웃하면 리펀드가 된다.
촌놈이 간만에 호텔에서 자려니 영 적응이 안 된다.
정우찬(42세) 강사가 도착한다. 정우찬 강사는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캐나다에서 스키 강사(CSIA, Canadina Ski Instructors Alliance) 레벨 4 자격증을 받았다. 레벨 4는 최고 단계인데, 기술뿐 아니라 강습 능력을 중요시한다. 두 요소의 배점은 50대 50이다. 달리 말하면 강습능력을 높게 본다는 것.
가져온 소주 몇 개(병이 아니라 팩이라 '개'라는 표현을 씀)를 풀었다.
아니! 이 귀한 걸.
근처 수퍼마켓에서 산 소시지와 함께 소주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곳 대부분의 호텔은 조리가 가능하도록 방 설계를 했다. 스키어들이 오래 머물다 가기 때문이다.
기성준씨는 휘슬러 두목이라 불린다. 작은 일, 큰일 즉 음주시비, 고성방가, 폭주민원... 구분 없이 휘슬러의 모든 한국인 문제는 그에게 연결되고 그를 통해 해결된다. 그래서 두목이라 한다. 그가 집에 간단다.
정우찬 강사와 나는 다정하게 한밤의 데이트를 즐겨야 한다.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눈썰매를 타고 골프장에 쌓인 눈코스를 30분간 돌았다. 그리고 퐁듀를 먹으러 레스토랑으로... 솔직히, 퐁듀는 내게 맞지 않는 음식인 듯. 브로클리, 당근 등 각종 채소를 끓고 있는 치즈에 풍덩 담아 찍어 먹는다. 으음...!!!! 흑맥주를 곁들였다. 이건 굿! 매니저가 자꾸 다가와, 끝나셨냐고 물어본다. 다음 메뉴를 내와야 하는데, 참 천천히 먹고 있다는 뜻이다. 얘기를 많이 나눴기 때문이다.
정우찬 강사는 심리학을 전공했고 암벽 등반을 했다. 언젠가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에 오른 뒤 스키 하산을 했는데, 그 맛에 스키에 빠지고 말았단다. 서른이 다 되어 스키를 시작했고 레벨 1~3까지는 2년 안에 다 끝냈지만 레벨 4 하나 획득하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대단하다. 전문 스키어가 아니라 아마추어에서 시작해 전문가가 된 것이다. 맥주 한잔씩 더했다. 간만에 마시는 1000cc 맥주라 묵직한 느낌이 다가온다. 전작이 있어 금세 취한다.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두 시간이다. 내가 잠든 시간.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 라면에 소주를 퍼붓는다. 그리고... 다시 두 시간. 또 깼다. 다시 두 시간. 약속시간이다. 드디어 휘슬러 눈 맛을 보러 간다.
휘슬러 정상에 선 정우찬 강사. 이 사진은 대문사진으로 가야하기에 시간의 흐름에 맞서 맨 앞에 올렸다.
기성준 두목님과 동행하면서 만난 스쿼미시. 암벽등반 루트가 많다. 언젠가 저 곳을 가기 위해 다시 올 것이다.
제법 꼼꼼한 스키 렌탈 업무. 나는 K 사이즈다.
여기, 이 두 마리의 말. 14세가 넘었다. 이름이 메리고... 뭐였더라. 내가 팝송 제목을 들먹이며 이 말들의 이름에 대해 얘기했는데...
정우찬 강사. 앞의 불은 가스로 타는 것이다. 숯이 아니라.
행복한 데이트^^
자, 이제 퐁듀를 드시러 가실까?
저 당근, 브로클리, 빵을 끓고 있는 치즈에 풍덩 담가 적셔 먹는다. 좀... 느끼하다. 그리고 보시라, 1000cc 맥주의 위력!
정우찬 강사.
# 12월 11일, 둘째 날 정우찬 강사는 스키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왔다. 전날 미리 받아놓고 호텔 보관함에 모셔둔 렌탈 스키를 꺼냈다. 보관함이 있는 호텔은 퍼시픽 밸리로, 내가 묵고 있는 호텔 퍼시픽 빌리지의 ‘계열사’다. 곤돌라 출발점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어 굉장히 편하다. 곤돌라에 오른다. 아, 고백하건데 난 11년 만에 스키를 타는 것이다. 그것도 세 번째다. 30분 가까이 오르니 해발 1850m에 위치한 라운드하우스(Roundhouse) 산장에 닿는다. 이 산장에는 식당, 스키용품점, 화장실이 구비돼 있다. 여기서 건너편 봉우리인 블랙콤으로 이어지는 피크 투 피크(Paek 2 Peak) 곤돌라를 이용할 수 있다. 2009년 전에는 하루에 한 봉우리만 올라 스키 타기도 벅찼다.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케이블로 두 봉우리를 연결했다. 1초당 7.7m의 속도로 11분이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건너가 두 곳에서 스키를 즐기는 ‘양다리’ 체험을 할 수 있다. 케이블로 이어진 거리가 무려 4.4km다. 세계 최장이다. 이 거리를 단 4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자연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한 배려란다. 스키로 200m 정도 이동한 뒤 리프트를 타고 정상에 간다. 해발2182m다. 사방이 탁 트였다. 고산준봉이 너나할 것 없이 파도치듯, 하얀 포말을 머리위에 넘실대고 있었다. 산너울이다.
휘슬러에는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판단되는 곳에만 위험 팻말을 꽂아놓죠. 아무곳이나 갑니다. 즐기라는 거죠이곳은 어제와 같은 오늘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항상 바뀝니다. 건조한 눈이 내리거나, 습기 많은 눈이 내리거나, 맑거나, 흐리거나... 산 아래는 흐린데 산 정상 부근은 맑은 인버전도 일어나죠.
정우찬 강사의 말을 새기며 몸풀이로 쉬운 길을 택했다. 휘번트 스튜 트레일(Burnt-Stew Trail)이다. 왼쪽 비탈에는 하얀 눈 숲이, 오른쪽 계곡으로는 푸른 숲이 대비 되며 묘한 조화를 이룬다. 멀리 블랙콤이 보인다. 이 풍광에 압도되어 만들고 있던 스튜를 태웠다 해 번트 스튜다. 아까와는 다른 리프트인 에메랄드 익스프레스를 타고 라운드하우스까지 갔다. 그리고 피크 투 피크 곤돌라를 타고 건너편 블랙콤으로 향했다. 블랙콤 정상(2440m)에는 갈 수 없다. 스키에 적당치 않은 바위투성이라 리프트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00m 가까이 활강 후 글래시어 크리크(Glacier Creek)에서 식사를 했다. 산 중턱에 있는 크고 작은 열한 곳의 산장에서 먹을거리를 살 수 있다. 화장실이 없는 곳이 있으니 휘슬러 지도를 갖고 다니는 게 좋다. 글레이셔(Glacier) 익스프레스를 타고 호스트맨(Horstman) T-바로 환승 후 9부 능선격인 7th 헤븐(Heaven, 2284m)에 올랐다. 구불구불 스위치백(switch back) 코스가 이어지다 급전직하다. 왼쪽에 어깨 너머로 시커먼 블랙콤 정상이 새하얀 눈을 뚫고 새파란 하늘을 등지고 서있다. 휘슬러는 부드럽고 블랙콤은 강하다. 그래서 휘슬러는 어머니, 블랙콤은 아버지란다. 정우찬 강사는 라운드하우스에서 아들을 만나 집으로 간다. 워낙 큰 산이라 사방으로 촉수처럼 뻗은 슬로프가 그를 집앞으로 안내해 준다. 대신, 나는 다른 길로 혼자서 내려간다.
호텔에 간 뒤 노천 수영장에 몸을 담근다. 멀리 블랙콤이 보인다. 허, 이 장관이란!
정우찬 강사가 저녁 초대를 했다. 자신의 집에서 묵고 있는 한상훈(30)·김청일(28)·이지열(26)씨가 캐나다 스키 레이싱 코치 자격시험에 합격해 파티를 열기로 했다. 이 사람들, 아침에 미역국을 먹었단다. 이들은 미역국을 먹으면 시험에 낙방한다는 속설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눈길에서 잘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당히 합격했다.
휘슬러 라운드하우스 앞의 스키 보관대. 누가 가져갈 염려는 없으나 혹시나 싶으면 잠금키를 별도로 구입한 뒤 사용하면 된다.
휘슬러 정상. 스키 타러 왔다가 멀리 보이는 저 암봉 보고 암벽등반을 하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쳤다.
원주민들이 "어서 옵쇼"라는 의미로 쓰는 구조물이란다.
자, 이제 출발!
번트 스튜 트레일로 내려서는 스키어들. 멀리 기지는 심포니 익스프레스다. 이 때는 아직 본격 시즌이 아니라서 운행이 일시 중단 된 상태.
번트스튜 트레일로 스키를 타고 다시 다른 길로 고고고.
사진을 자세히 보면 스키 자국이 보인다. 정해진 슬로프 외에도 아무 곳이나 간다는 뜻이다.
피크 투 피크 곤돌라.
피크 투 피크 아래 계곡. 그 옆으로 난 크로스컨트리 코스.
블랙콤 중간을 가로지르는 스키 코스.
블랙콤 최고 높은 곳에 위치한 슬로프에서 내려오는 스키어들.
이곳이 로키산맥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코스트 산맥이 맞다.
블랙콤에서 먹은 점심.
블랙콤을 뒤에 두고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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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igher 원문보기 글쓴이: 콩준
첫댓글 한창 스키를 배울때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슬로프 뒤편의 산에 가고 싶네. 사진과 멋진 글 탱큐~~
저도 빡빡한 일정에 피곤하겠군...싶어서 망설였는데...갔다오니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ㄷ. ㅎㅎ
좋아겟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