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3반 이주희.’
커다랗게 이름을 썼어요. 더러워진 흰 실내화에 검정색 매직으로 썼어요. 실내화 한 짝이 글씨로 가득 찼어요. 텅 비어 있던 실내화가 꽉 채워지니 주희 기분이 너무 좋아요. 다른 짝 실내화에도 정성껏 이름을 썼어요.
‘2학년 3반 이주희.’
이번에는 실내화에 씌어 있는 글씨들을 큰소리로 불러주었어요. 작은 방안에 주희 목소리가 꽉 찼어요. 텅 비어 있던 방안이 소리로 가득 채워지니 주희 기분이 또 좋아요. 이번에는 어디에 글씨를 써줄까. 주희는 이곳저곳 둘러보았어요. 텔레비전에는 몇 달 전에 썼고, 책가방에는 몇 주 전에 썼고, 수첩에는 며칠 전에 썼어요.
“이주희 되고 싶은 사람!”
주희가 찬장을 보고 외쳤어요.
“이주희 되고 싶은 사람!”
주희가 땅바닥을 보고 외쳤어요.
“참, 넌 이주희 됐잖아.”
주희는 글씨가 까맣게 씌어진 방바닥을 보고 활짝 웃었어요. 그렇게 한참 방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어요.
“나요.”
낙서로 가득한 벽 쪽에서 들리는 소리였지요. 아주 작지만 귓속으로 쏙쏙 들어오는 목소리였어요.
“너?”
주희가 벽에 귀를 대고 물었어요.
“너는 이주희 됐잖아.”
벽은 아닌가 봐요. 누구일까요.
“너?”
주희가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물었어요.
“넌 너무 높아서 이주희 못돼.”
주희가 입을 삐죽거리고 있을 때 다시 그 소리가 들렸어요. 아주 작지만 귓속으로 쏙쏙 들어오는 목소리 말이에요.
“나요.”
주희는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가 나는 곳을 봤어요.
“음, 너로구나.”
주희는 벽에 걸려 있던 분홍 잠바를 방바닥에 놓았어요. 분홍 잠바도 기분이 좋은지 팔을 흔들어대고요.
“잠깐 기다려. 이주희 되게 해줄게.”
주희는 다시 검정색 매직을 들고 정성껏 쓰기 시작했어요. ‘2학년 3반 이주희’야구공만큼 크게도 쓰고, 바둑돌만큼 작게도 썼어요. 글씨로 가득 채워진 잠바를 보니 주희는 기분이 좋았어요.
자, 이제 모두 나를 따라 하세요.“
주희는 방바닥을 보고 예쁘게 말했어요. 흰 실내화를 보고도 한번 말해주고요. 낙서로 가득한 벽을 보고도, 가방을 보고도, 지갑을 보고도 예쁘게 말해주었어요. 모두 글씨로 가득한 친구들이에요.
“자, 따라 할 준비 됐나요?‘
주희가 예쁘게 묻자, 글씨로 가득한 친구들이 대답했어요.
“네.”
아주 작지만 귓속으로 쏙쏙 들어오는 목소리예요.
“2학년 3반 이주희.”
“2학년 3반 이주희.”
주희가 팔짝팔짝 뛰니, 방바닥이 좋다며 쿵쿵 대답했어요. 주희가 나비처럼 훨훨 나니 분홍 잠바도 좋다며 팔랑댔어요. 저녁마다 골목길 송하네 작은방은 주희 엄마를 기다리는 친구들로 가득 찼어요. 모두 2학년 3바 이주희 글씨 친구들이에요. 열시가 넘어 주희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오늘도 이곳저곳 낙서투성이에요. 오늘도 여기저기 물건들이 널려 있어요. 오늘도 주희 얼굴은 땟물 쭉쭉이에요.
“너, 이주희! 내가 너 때문에 못살아!”
장갑 공장에서 돌아온 엄마는 주희 엉덩이를 마구 때렸어요. 아직 저녁도 먹지 못한 엄마가, 아직 저녁도 먹지 못하고 종일 혼자 있던 주희를 때리고 있어요. 주희는 너무 아파 소리를 질렀어요. 글씨로 가득한 친구들도 주희를 따라 아주 작게 소리를 질렀어요.
“이제 물건에 낙서 좀 하지 마. 물건도 제자리에 두고. 엄마 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 텔레비전 보면서 알겠니?”
“응.”
주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하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골목길 송하네 작은방에는 글씨로 가득한 친구들이 자꾸만 많아졌어요. 작은방뿐이 아니에요. 창밖으로 코스모스가 보이는 2학년 3반 교실에도 글씨로 가득한 친구들이 자꾸만 많아졌어요.
“너, 이주희! 내가 너 때문에 못살아!”
선생님이 기다란 매를 들고 소리쳤어요. 그럼 2학년 3반 이주희는 멀리 도망갔다가 슬그머니 교실로 돌아왔어요. 주희가 돌아오면 글씨로 가득한 의자도, 글씨로 가득한 책상도 반갑다고 속삭였어요. 아주 작지만 귓속으로 쏙쏙 들어오는 목소리예요.
“이주희다!”
“냄새 나.”
“저리 비켜!”
옆에 앉은 은솔이가 말해도, 뒤에 앉은 민호가 말해도, 주희는 열심히 글씨로 가득한 친구들을 만들어주었어요. 바로 그날 밤에 엄마는 주희 연필을 모두 빼앗았어요. 매직도 모두 빼앗고요.
“여기저기 글씨만 써놓아 내가 못살겠다. 이름밖에 못 쓰면서 무슨 낙서를 그리 해놔? 앞으로 또 낙서하면 쫓아내버릴 거야!”
엄마가 쪼글쪼글한 얼굴을 찡그렸어요. 그러고는 저녁도 먹지 않고 드러누웠어요. 어마는 다음날 해가 뜨기도 전에 공장에 나갔어요. 이제 주희는 엄마를 기다리며 할 일이 없어요. 연필도 없고, 매직도 없거든요.
“이주희 되고 싶지?” 액자를 보고 물었어요.
“너도 이주희 되고 싶지?”
밥그릇을 보고 물었어요.
아직 엄마가 오려면 몇 시간이나 더 남았어요.
“은솔이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 있대. 공장도 안 간대. 좋겠지?”
주희는 ‘2학년 3반 이주희’로 가득한 시계를 보고 물었어요. 그때 쾅! 쾅! 골목길 송하네 작은방 나무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어요.
“누구세요?”
주희는 문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어요.
“엄마면 좋겠다.”
나무문 손잡이를 꼭 잡고 말했어요. 매일 매일 혼자 있는 주희는 늘 엄마를 기다렸어요. 시계를 보니 아직 여덟시예요.
“엄마야.”
문밖에서 생글거리는 목소리가 말했어요.
“응? 우리 엄마는 공장에 있는데? 우리 엄마는 열시에 오는데? 은솔이면 좋겠다.”
주희가 손뼉을 치며 말했어요. 짝꿍 은솔이는 주희를 싫어하지만 주희는 은솔이가 좋았어요.
“그럼, 은솔이야.”
다시 문밖에서 생글거리는 목소리가 말했어요.
“응? 은솔이는 우리 집 모르는데?”
주희는 문밖에서 들리는 생글거리는 목소리가 너무 궁금했어요. 그래서 살금살금 문으로 다가가서 가만히 귀를 대보았어요. 문밖에서 생글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어요.
“문 열어.”
생글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말했어요. 주희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어요. 손에서 땀이 났어요.
“우리 엄마도 아니고, 은솔이도 아닌데?”
주희가 말했어요.
“그래도 열어.”
“무서운 사람이면 어떡해?”
주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작은방 나무문이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나무문에 씌어진 ‘2학년 3반 이주희’도 흔들거렸어요.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주희는 너무 놀라 온몸을 웅크렸어요. 주희가 고개를 들었을 때 작은방 나무문은 활짝 열려 있었어요. 부서진 곳 없이 아주 말짱하게 말이에요.
“어? 아무도 없네?”
주희가 문밖에 고개를 내밀었어요.
“나도 이주희가 되고 싶어.”
생글거리는 목소리예요. 조금 전에 문밖에서 들었던 목소리 말이에요.
“어디 있어?”
주희가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요.
“바로 네 옆에, 바로 네 뒤에, 바로 네 아래, 바로 네 위에.”
생글거리는 목소리가 대답했어요.
“누군데?”
주희는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송하네 작은방에 찾아온 첫 번째 손님이거든요.
“나는 바람이야.”
생글거리는 목소리예요. 바람이었나 봐요.
“바람? 그런데 이주희 되고 싶어?”
“응.”
바람의 대답에 주희는 크게 웃다가 금세 시큰둥해지고 말았어요.
“이제 안 돼. 연필도 없고, 매직도 없어.”
주희는 방바닥을 발로 찼어요. 방바닥이 아프다며 ‘쿵’ 소리를 냈어요.
“그럼 어때, 네 머리가 있잖아. 네 손가락이 있잖아, 네 발이 있잖아.”
생글거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주희 귀에 속삭였어요.
“뭐라고?”
주희는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활W가 웃었어요.
“자, 이주희 되고 싶은 사람!”
주희가 외쳤어요.
“나요.”
아주 생글거리고 귓속으로 쏙쏙 들어오는 바람소리예요.
“자 그럼 기다리세요.”
주희는 작은 손가락으로 공중에 글씨를 썼어요. ‘2학년 3반 이주희’ 어찌나 크게 썼는지 앉았다 일어섰다를 몇 번이나 했어요.
"예쁜 어린이니까 또.“
이번에는 작은 발로 공중에 조그맣게 썼어요. ‘2학년 3반 이주희’ 주희는 기분이 좋아졌어요. 아무도 없는 방안이 ‘이주희’로 가득 찬 것 같아요.
“마음에 드나요?”
주희가 크게 물었어요.
“네.”
아주 생글거리고 귓속으로 쏙쏙 들어오는 바람소리예요.
“눈에 안 보이지만 여기 이주희가 있어요. 여기도 이주희가 있고요. 하지만 눈에는 안 보여요. 알았지요?”
주희가 다시 크게 물었어요.
“네.”
아주 생글거리고 귓속으로 쏙쏙 들어오는 바람소리예요.
“내일 또 오세요.”
엄마가 돌아왔을 때 주희는 엄마한테 말했어요.
“엄마, 나 안 보이는 이주희 썼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밥만 먹고 있었어요. 그래도 주희는 기분이 좋았어요.
엄마는 설거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어요. 주희는 엄마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어요. 쭈글쭈글한 얼굴이 선생님과 달라요. 빠글거리는 머리카락이 은솔이 엄마와 달라요. 주희는 엄마 등에 가만히 손가락을 댔어요. ‘2학년 3반 이주희’ 엄마 등에 손가락으로 썼어요. 아주 크지도 않고, 아주 작지도 않게 말이에요. 주희는 엄마 곁에 누우며 속삭였어요.
“이제 엄마는 아무데도 못 가요. 아빠처럼 도망도 못 가요.”
그날 밤 ‘2학년 3반 이주희’가 된 바람은 주희 아빠를 찾아냈어요. 그리고 주희 아빠 등에 찰싹 붙었어요. 아무도 그걸 보지 못했지만 분명 찰싹 붙어버렸어요. 이제 누군가 주희 아빠를 가져다줄 거예요.
“물건에 이름을 써두면 잃어버리지 않는단다.”
2학년 3반 선생님이 분명 그렇게 말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