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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정일권과 일본관동군 헌병대(미발표)
류연산
몇 해전 용정시 대성중학교 박물관에는 정일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한국 자유총련맹(자민련)에서 저들 당의 총재였던 정일권을 높이 기리는 충성심에서 특별히 용정에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출판된 <<세계인명대사전>>에 보면 정일권의 인생역정은 휘황찬란하다.
정일권(丁一權 1917년-) 군인, 정치가, 함북 경원 출생. 40년 일본육사 졸업, 46년 조선 경비대 대위, 육군준장(49), 육해공군 총 사령관(50), 육군중장(51)을 거쳐 54년 육군 대장, 동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56년 연합 참모총장, 57년 예편(대장)되고, 57년 터어키, 프랑스(59), 미국 주재 대사(60)를 각각 지냈고 60, 62년 유옌총회 한국 대표로 활약했다. 64 - 65년 국무총리, 66 - 67년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70년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으로 있으며 71년 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렇듯 직위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인구 20만 밖에 안 되는 용정시 자그마한 박물관에 일국의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정일권이를 모시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격을 높인 셈이라 하겠다. 그리고 학력도 출중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수료했다고 하며 말레지아, 한국 중앙대, 부산대, 아르헨티나대, 월남 사이공대, 미국 롱아일란드대, 대만 국립정치대 등에서 명예법학박사를, 태국 출라롱콘대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대만 중화학술원에서 명예철학박사를 , 남들은 하나의 박사학위를 받는 데도 외곬으로 한 생을 허비하는데 법학, 정치학, 철학박사를 두루 겸비하고 그것도 세계 만방에서 받아온 화려한 학력을 가졌다는 것은 아무리 권력 중심의 사회라고 하더라도 학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박물관 벽을 아래위로 수백, 수천을 훑는다고 해도 정일권을 초과할 인물은 없다. 군으로 보면 용정출신의 장군들도 더러 있지만 그들은 중국인민해방군 소장으로 군장 급이다. 그리고 행정 급으로 제일 높은 사람이래야 겨우 청 급이다. 한국으로 말하면 도지사 수하인물이 된다.
그러나 불과 얼마 안되어 정일권의 초상은 박물관 벽에서 사라졌다. 급으로 비기면 껨에도 안 되는 인물들과 같은 전시관에 모신다는 일 자체가 죄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따로 칸 하나를 마련하여 정중히 모셔놓고 대서특필하여도 모자랄 인물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었다.
자민련에는 미안한 일이지만 박물관에 둘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대서특필할만한 인물일지는 몰라도, 그래서 <<세계인명대사전>>에 수록할만한 공적을 쌓은 사람일지는 몰라도 연변 학계에서는 박물관에 전시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박물관 진열품은 대체로 학술연구와 사회교육에 기여될 만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걸 가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신분여하나 계급출신이 표준이 될 수는 없답니다. 윤동주처럼 당대에는 물론이거니와 후세에도 영원히 모범이 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우리 연변에서는 정일권은 그러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정일권은 연변에서는 버림받는, 찬 밥 신세의 인물로 되는 것일까?
만주에서의 정일권의 젊은 행각을 따라 가보기로 하자.
함경도 경원 태생인 정일권이 어느 해에 당시에 북간도라고 일컬어온 땅으로 이주해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용정에서 소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로 미루어서 어린 시절을 용정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비마련이 어려워서 중학진학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그만치 그의 가정생활이 궁핍했음을 알 것 같다. 그러나 천우신조 격으로 당시 용정 영신중학(永新中學) 교장이 특혜로 학교에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만치 어릴 때의 정일권은 남다른 총명과 재질을 가진 학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신중학교는 1921년 용정일본영사관에서 꾸린 학교로서 일본문부성과 외무성에서 지정한 재외학교(在外學校)였다. 같은 해 5월 일본인 日高丙子郞이 용정에 광명여중을 설립한다. 이 두 학교는 용정의 다른 중학들과는 교사, 학과목, 교육목적 등으로 보아 성격이 판연 다른 것이었다. 캐나다 기독교 선교사 富斗一박사가 세운 은진중학(恩眞中學 1920년)은 천주교를, 조선인이 세운 동흥중학(東興中學 1921년)은 천도교를, 영국인이 설립한 명신여중(明信女中 1920년 6월)은 기독교를, 그리고 대성중학(大成中學 1921년)은 유교를 교육사상으로 한 학교들이었다. 전자의 일본인 학교는 일본의 침략세력 확장을 위한 것이었다.
20세기 20년대 이전 만주에 있는 조선인 학교들은 대체로 독립운동가들이 반일인재 양성소의 역할을 했다. 용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랬던 만큼 일제는 경신년대토벌에서 조선인 독립운동세력을 진압하는 수단의 하나로 학교를 불질러 잿더미로 만들었다. 하여 연변의 조선인학교들은 페허로 되었고 간신히 유지된 것은 불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선 명동학교 뿐이었다. 바로 1907년 이상설선생이 설립한 서전서숙의 연장이었던 김약연목사가 운영한 명동소학교 중학부만이 1924년까지 지탱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나타난 종교학교들은 종교적 외의(外衣)를 쓰고 반일세력을 배양하는 학교들이었다. 물론 만주사변 이후로 만주 전체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 되면서 모든 학교들은 일제의 노화교육장으로 변하고 만다. 그러나 적어도 일본의 세력권에 속하지 않았던 만큼 간도의 다른 학교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목소리를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정일권을 장학생으로 받아들인 교장은 일본인 아까다였다. 교장의 특별한 사랑을 한 몸에 지닌 정일권은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었다. 대화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한 일본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이다. 이 학교는 1934년 7월 광명중학(光明中學)으로, 1938년 1월에 간도성립 광명국민고등학교로, 1941년 간도성립 용정 제1국민고등학교로 개칭되었는데 학교 명칭이 어떻게 변하든지 정일권은 모범생으로 이 학교 학생들의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영신중학을 입학하여 학교 이름이 바뀌는 바람에 광명중학을 졸업한 정일권은 만주국 봉천군관훈련소(奉天軍官訓練所)로 직행한다. 일명 육군중앙학교라고도 불린 이 학교는 일제가 만주사변으로 동삼성을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우면서 괴뢰군 양성을 목적으로 세운 2년제 학교였다. 그는 제5기 학생이었다. 바로 정일권이 이 학교로 가기 전 해 홍사덕이 이 학교의 훈련고문으로 왔다. 홍사덕의 노력으로 제5기의 조선인 학생은 12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제4기는 10명 이하였다.
이 학교는 1939년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현재의 장춘)으로 학교 주소지를 옮겨오면서 육군군관학교로 개명이 되었고 5년제로 바뀌었다. 바로 박정희 등 한국군의 기반을 만들어준 학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신경육군군관학교인 것이다. 1941년 6월 20일 육군군관학교 개교식에 보낸 만주국 황제 부의(溥儀)의 칙서에 보면 이 학교의 건립 취지는 <<학생들은 건국정신을 발양하고 일본, 만주 일덕일심의 진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충성, 용감, 공익, 정의, 신용, 의리로 굳게 뭉쳐 공존의 임무를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학교의 전신인 육군중앙학교를 졸업한 정일권 역시 그러한 일제의 <<동아발전과 진정한 낙토를 실현>>이라는 침략의 수요에 맞게 다듬어지는 교육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정일권은 이 학교도 모범학생으로 졸업했고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추천된다.
일본에서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정일권한테 천우신조로 만들어준 장본인은 부걸(溥桀)이었다. 만주국 황제 부의의 친동생 부걸이와 동창으로 한 침실에서 기거하면서 환락을 같이 했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만치 둘은 절친한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부걸은 일본인 여인과 결혼하여 1939년에 만주국으로 돌아와 형님페하 수하에서 중책을 맡는다. 그로부터 한 해 뒤인 1940년 신경으로 돌아온 정일권은 황제의 동생 부걸의 입김으로 사관학교를 갖 졸업하면 소위가 관례이지만 일약 중위로 발탁되어 괴뢰 만주국 헌병사령관의 부관으로 임명된다.
일제는 관동군 대부분을 태평양전쟁으로 내몰 계획으로 만주에서의 관동군 헌병대와 정보부의 세력을 급속도로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병대는 만주에서의 반일세력에 대한 탄압기구의 핵심적 세력으로 튼튼한 자리 매김을 하는 시점에서 헌병사령관의 부관으로 된 정일권은 당시 재만 조선인 군관학교 졸업생은 물론 재교생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광복 후 정일권은 박정희 수하로서 충신이 되었다고 한다면 당시 박정희는 정일권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설설 기어야 했다.
오라지 않아 정일권은 길림 헌병사령부 훈련처(訓練處)로 조동(調動)된다. 훈련처란 다름 아니라 장차 관동군 핵심인물들과 관동군 정보부의 첩보인원들을 전문으로 배양하는 기관이었다. 훈련처에서의 정일권의 군함은 대위였다.
당시 박창욱교수는 길림 제6소학교 학생이었다. 그하고 한 학급에는 윤씨 성을 가진 동창이 있었는데 그는 길림시에서 제일 큰 음식점을 경영하는 부자 집 도련님이었다. 하루는 윤씨가 자기의 누이가 결혼을 하는데 그 매부가 될 사람이 정일권이라고 하면서 자랑을 했다. 잔치는 신사에서 거행했다. 부걸이 하객으로 직접 왔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경찰들이 결혼식장을 수비하였다. 구경 군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때 박창욱교수는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선인 중에 부걸과 동창인 정일권을 숭배하기도 했고 처남인 동창 윤씨가 못내 부러웠다고 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였다. 이른바 <<동아의 영구한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일본은 12월 10일 필리핀을 점령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5월에 이르러 인도지나반도, 남양 각국과 서태평양의 광활한 해역을 전부 강점하고 미국, 영국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중국과의 전쟁이 결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태평양전쟁까지 끌고 나가게 된 일본으로서는 힘에 겨웠다.
<<황국을 핵심으로 하고 일본, 만주국, 중국간의 튼튼한 결합을 토대로 한 대동아 신질서>>를 꿈 꾸어온 일제한테 있어서 만주국은 일제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생명선>>으로 부상했다.
동북의 전략적 위치로 보아 북으로는 소련을 방어하는 전초였으며 남으로는 태평양전쟁을 지원하는 기지였고 서쪽으로는 중국 대륙전쟁을 조절하는 거점이었다. 동북의 풍부한 경제자원은 그 전략적 위치의 중요성을 더욱 뚜렷하게 해주었다. 특히 그때 일본군은 중국 관내에서 이미 피동에 처하고 남양 각국에서도 군사적 우세를 잃게 되어 당지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약탈할 수 없었다. ---하여 일제는 동북을 태평양전쟁의 병참기지로, 자원창고로, 공농업기지로 만들기 위해 광분하였다. --- ---
동북 각지의 관동군 헌병대와 일제 특무들은 모든 반일세력을 탄압하고 동북의 보다 많은 자원을 약탈해가도록 하기 위해 눈에 쌍불을 켜고 날뛰었다. 특히 동북 각지 반일유격대의 창건지이며 항일연군의 주요한 활동지구였던 조선인 집거지에 많은 헌병과 특무들을 배치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동북침략사>> 270 - 271페지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출판)
바로 그러한 중요한 시국에 정일권은 1943년 연변으로 파견된다. 헌병사령부 간도헌병대 대대장, 계급으로는 소령이었다.
관동군헌병대 사령부 직속 간도헌병대 본부는 국자가(1943년 국자가는 간도시로 개명, 오늘의 연길시)에 있었고 연길, 도문, 훈춘, 춘화에 헌병분대를 설치하였으며 용정, 개산툰, 조양천, 명월구, 안도, 왕청, 금창, 마적달, 두황자, 구사평 등지에 헌병분주소나 헌병분견대를 배치하였다.
<<각지의 일본헌병들은 항일연군소부대를 미친 듯이 수색하며 여러 민족 인민의 모든 반일활동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다.>>(<<일본제국주의 동북침략사>> 제271페지)
<<괴뢰 간도성은 3개 국 국경거점에 위치한데다가 항일투쟁의 <책원지>라 하여 일제는 이 곳의 <특별간첩사업>을 특별히 강화하였다. ---훈춘현에만 하여도 280여명의 특별간첨인원이 있었다. 이러한 간첩들은 평민복을 입고 무기도 공개적으로 휴대하지 않으며 공개적인 직업을 가지고 각 기관, 학교, 공장, 기업소, 봉사항업 및 농촌에서 활동하였으며 지어는 포수나 거지로 가장하고 나서서 간첩활동을 하였다. 이자들은 저마다 비밀연락거점을 가지고 온갖 음흉하고 잔인한 짓을 다 하였다. 그들의 말 한마디면 누구나 <정치범>, <사상범>, <경제범>, <의심스러운 자>로 되어 체포되여야 했고 지어는 생명을 빼앗겨야만 했다.>>(동상서 274 - 275페지)
헌병대에 <<죄인>>으로 잡힌 사람들 중에서 <<특별호송>>된 사람도 있다는 것이 2001년에 밝혀졌다. <<특별호송>>이란 세균실험용으로 하르빈 731부대와 신경 100부대로 보내지는 것을 말한다.
1955년 원 관동군헌병사령부(지금의 길림성인민정부) 울안에서 파낸 3,600여권의 서류자료에 대해 최근에 정리하던 중 731부대와 관련된 80여권, 400여권의 서류를 발견했다고 한다. 2001년 9월 8일 길림신문에 실린 기사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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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발견된 서류에는 일본관동군 헌병대 <<특별호송>>서류와 <<731>>부대 <<방역>>서류가 포함된다. 일본관동군헌병대는 우리 나라 동북에서 항일군민과 애국인사를 탄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세균실험에서 수요되는 생체자료를 얻기 휘해 일본관동군헌병대는 우리 나라 경내에서(주요하게 동북지역) 실험용인원을 붙잡아 <<731>> 부대에 공급했다. ---
<<특별호송>>서류의 내용에는 위만 각지 일본헌병대 분견대가 애국항일인원을 붙잡기 위해 일본관동군에 올린 보고(심문상황과 처리의견 포함), 일본관동군 헌병대사령부에서 애국인원을 <<731>>부대에 <<특별호송>>할 부대의 지령, 전화기록의 메모, 부본, 각 헌병대가 관동군헌병대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특별호송인원을 할빈헌병대에 보낸 실시보고 ---등등이 포함된다. 이번에 발견된 <<특별호송>>인원은 227명인데 그 중 러시아인, 조선인들도 있다.
신문은 <<특별호송>>된 조선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국적으로 보면 러시아인 1명, 조선인 4명, 중국인 272명이었다. 그중 여성이 1명 있었고 연령은 16,7세로부터 60-70세로 부동했다. 이번 서류에서 발견된 조선인의 정황을 간략해 싣는다.
이기수(李基洙): 당시 나이 28세. 원적 조선 함경북도 신흥군 동흥면. 주소 불명. 1941년 7월 20일 일본헌병부대가 간도성 훈춘현 춘화촌 태마구에서 체포, 연길헌병분대에서 연헌고제 673호 신청에 따라 그를 <<특별호송>> 처리, 관헌고제882호령 지령에 따라 비준했다. 연길헌병대 연헌고 제752호 보고에 근거하면 이기수는 직접 <<특별호송>>으로 할빈헌병대 본부에 압송되었다.
한성진(韓成鎭): 남, 국적 조선, 나이 30세, 농민, 원적 조선 함경북도 경성. 집 주소는 간도성 훈춘현 춘화촌 도황자툰 제2패. 1943년 6월 25일 훈춘현헌병대에 붙잡혀 동년 7월 16일 간도헌병대가 간헌고 제386호 문건으로 <<특별호송>>처리 신청.
김성서(金聖瑞): 남, 원적 조선 함경북도 길주면 이하. 집 주소는 간도성 훈춘현 진안촌 마적달툰 제8패. 1943년 7월 25일 훈춘헌병대에 의해 체포, 7월 31일 간도헌병대는 간헌고 제418호로 관동군헌병대 사령부에 <<특별호송>>을 신청.
고창률(高昌律): 남, 42세, 원적은 조선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체포 당시 주소는 간도성 훈춘가 대동구 제9패, 음식업에 종사. 1941년 7월 25일 훈춘헌병대에 체포, 7월 31일 간도헌병대는 간헌고 제418호로 <<특별호송>> 신청.
상술한 조선인 4명은 벌써 <<731>>부대의 생체실험용으로 죽어갔을 것이다. 그 중에서 이기수와 고창률은 정일권이가 간도헌병대로 가기 전인 1941년에 간도헌병대에서 처리된 사람이지만 한성진과 김성서는 그가 간도헌병대장으로 있을 당시에 <<특별호송>>이 신청된 사람들이다. 자료에 의하면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적어도 3,000여명이 이 살인공장에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하니 연변에서 <<특별호송>>된 사람들이 상술한 넷 뿐은 아니었을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같이 <<특별호송>>된 사람들은 일본군 731부대와 100부대에서는 <<원재료>>로 취급하여 세균실험용으로 사용되었다. 일제는 이들 산 사람에게 세균을 주사하거나 세균을 묻힌 식품이나 세균을 넣은 물을 먹이기도 하였고 만년필식 세균권총이나 지팽이식 세균총으로 <<원재료>>를 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전염병을 옮긴 다음 <<원재료>>가 고통 속에서 죽을 때까지 여러 가지 관찰을 하기도 하고 연속 피를 뽑아다가 각종 실험을 하거나 전신을 해부하여 인체내의 각종 기관을 꺼내어 여러 가지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산 사람이 수술대에 오르기만 하면 사지만 남거나 가죽만 남았다. 그리고 몸이 허약하여 실험재료로 쓸 수 없게 되면 독약주사를 놓아서 죽여 버리거나 아니면 <<담력 키우기 특수훈련용>>으로 신입 대원들을 시켜서 몽둥이로 때려죽이게 하였다. 천황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하자 세균부대는 저들의 죄악이 탄로 날까 보아 <<원재료>>는 몽땅 살해하고 건축물들을 폭파하여 버렸다. 하여 지금까지 <<특별호송>>된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물론 정일권이가 직접 처리했다는 근거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간도헌병대에 있는 기간 주국 6위와 경운 6위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고 소령으로부터 중령으로 승급된 사실로 미루어서 결코 좋은 일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일제의 주구로서는 손색이 없었다는 것만은 단언할 수 있다.
광복이 나자 정일권은 소련군 포로가 되어 소련으로 압송되던 중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만약 소련으로 갔다고 하면 간도성장 이범윤처럼 그 후의 생사가 묘연해졌을 지도 모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상에서 서술한 정일권의 역사의 한 단락은 반공, 독립운동으로 미화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일권은 한국인들 머리 속에 독립운동가처럼 착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했으므로 자민련에서는 당당히 용정에 초상화를 보내오기도 했을 것이다. 아마 정일권의 만주에서의 행적을 알았다고 한다면 옛 간도의 중심인 용정에 친일파의 초상을 걸어달라는 주책은 부리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총적으로 정일권은 어린 시절부터 일제의 <<따사로운>> 품안에서 자란 철두철미한 주구이며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팔아 자기의 영달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광복 후 정치무대에서 승자로 나타나긴 했지만 그 역사의 치욕은 씻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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