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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학교는 어떻게 지역을 바꾸나
<교육, 협동조합, 문화를 중심으로>
이번영, 그물코출판사
1장. 풀무학교와 지역
무교회주의 기독교
1958년 1월 이찬갑, 주옥로-홍성군 홍동면 팔괘리 송정마을 풀무골 뒷산
농민 자녀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자는 제안.
한국의 대표적인 무교회주의 기독교 지도자 네 사람(이찬갑 ,주옥로, 송두용, 노평구)이 설립안 최종 결정
그 해 4월 23일-풀무고등공민학교 개교 및 첫 입학식.
학생 18명, 교사 이찬갑, 주옥로 두 사람. 교실 한 칸. 학생과 교사 함께 일하며 공부 시작.
옛날부터 대장간이 있어서 이름 지어진 풀무골에 세운 학교라서 풀무학원으로 이름 지음.
제2의 종교개혁
무교회주의 기독교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는 예수의 말씀을 교회의 본질로 믿는다. 예배당,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같은 직분,선교단,성가대,헌금,십일조,세례 등 모든 형식 배격. 모든 사람이 일대일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만인 사제주의 신앙. 하루 24시간, 일주일 동안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하며 일요일은 성도들이 모여서 성서와 예수의 언행을 공부하는 날일 뿐.
무교회의 시작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일본 우찌무라 간조가 발간한 잡지에서 시작. 교회에 가지 않고 광야에서 성서를 공부하며 예배드리는 사람. 우찌무라 간조는 성서연구 집회 해산하고 《성서일본》을 폐간을 유언함. 유언 실현. 후계자 육성 안함.
-우치무라 문하생 중 한국인 김교신, 함석헌, 류석동, 정상훈, 양인성, 송두용 ‘조선성서연구회’결성 하며 들어옴.
종교를 넘어 교육과 사회 개혁으로
풀무학교가 홍동 지역을 변화시켜 온 원동력의 뿌리는 무교회 기독교 신앙에서 찾고자 함.
종교 개혁은 사회 개혁을 포함. 정치,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적폐청산. 관념이 아니라 삶의 변화이므로.
무교회의 종교 개혁, 사회 개혁은 눈에 보이는 정치 투쟁이 아니라, 조용히 신앙을 바탕으로 진리를 증언하는 방법으로 실천.
사례-1.독재 정부 아래 모순된 농업 문제에 대한 대정부 싸움이 환경농업으로 자연과 생명을 지키는 미래 농업 준비. 한국 최초의 유기농업 단체인 정농회 창립.
일본에 이어 아시아 두 번째.
2.전교조의 교육 개혁 운동에 불참. 소리 없이 참교육 실천. 현실 외면한다는 비판도.
노평구“진리에 의한 인간 내면의 변화 없이 모든 정치 활동과 교육활동은 무의미하다. 근대 유럽 문명의 개혁은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것.
풀무학교 참 신앙, 참 교육, 인간 내면의 개혁, 생태농업, 지역사회 교육 등으로 다음에 도래할 사회 준비-이웃과 더불어 실천하는 방식으로 예)한국 최초 소비자협동조합(뒤에 생협)결성, 신용협동조합 설립했으나 학교 밖에 두어 주민 스스로 결성, 운영하도록.
현재 홍동엔 조합 식 운영단체 30여개.
자본주의 양극화와 끝없는 경쟁 사회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 개척하는 협동사회로의 지향은 밑으로부터의 경제, 사회, 정치, 문화적 개혁이다. 그 개혁의 밑바탕은 신앙과 교육이라는 인간 내면의 개혁으로부터 출발, 풀무 사람들은 그 무대를 농촌으로.
일본 무교회도 학교 교육 통해 전승
우찌무라 간조 문하생 3명이 각각 고등학교 설립
기독교독립학원고등학교, 애농고등학교, 애진고등학교는 설립 정신, 교육, 목표, 방법 같음
무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입시 위주 교육을 거부하고 전인 교육,소규모 학생을 모집해 전원 기숙사 생활하는 공동체 교육, 일본 군국주의 반대하는 평화교육.
평화교육
원폭 피해지 히로시마 참상 보기-오키나와(전쟁 후 미군기지, 미군기 출격 장소) - 오오쿠노섬(국제적으로 비밀인 독가스 제조,)
평화 교육의 날 수업-2월 11일 건국기념일을 전쟁 책임의 날로. 평화헌법 공부, 일본의 잘못된 역사 공부.
풀무학교 교류 –천안 독립기념관, 제암리 교회, 3·1운동 순국 기념관, 서울 탑골 공원,안중근 의사 기념관, 서대문 형무소, 윤동주 문학관,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등 일본인들의 침략사 현장 찾아다님.
“한국과 일본의 4개 학교는 국가와 민족을 넘어 운명적으로 주어진 과제가 있다. 바로 반시대성이다”-세이찌 독립학원고등학교 교장 연수회 개막 인사 중-
이찬갑
이승훈에 바른말하는 유일한 청년
1902 평안북도 정주군 익산면 출생. 작은 할아버지가 남강 이승훈(나라가 없이는 집도 몸도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 받을 때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 없다는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 받아 오산학교 설립, 독립선언서 작성 참가 구속, 오산학교 불태움,1920년 1년 6개월 만에 다시 개교 준비)
1921 오산 중학교 중퇴(학교의 외형적 성장에 반대, 오산학교 정신 소멸 판단)
1928 23세, 서울 피어선고등학교 입학. 교회 내부 현실 실망, 일본 빈민굴생활 결심했으나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성서조선의 글을 보고 고향 오산에서 이상촌(경제적, 문화적, 윤리적인 지역으로 모범)을 만들 결심,
“북녘은 시베리아 찬바람, 남녘은 썩어가는 뒷간”
첫 번째 일본 방문-도쿄 빈민가
두 번 째 일본 교육기관 방문-덴마크 그룬트비(신학자) 사상 전수예상.
오산학교 중퇴 후 과수원, 양계장 운영하며 농촌운동(농지 개량, 연료 개량, 협동 생산, 협동노동 및 소득 증대 운동)
1948년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그해 8월 남쪽-대한민국 정부 수립(협잡의 나라, 깡패의 나라)
북쪽-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출범.(철의 장막 속 암굴)
민족의 살 길을 농촌에서 찾을 결심.
1951년 ‘다시 새 날의 출발(새 이념의 농촌 교육)’ 부산 대연초, 여주 대신 중, 인천 해성고 강사)
초라해서 더 의미 있는 풀무학교 개교
1958년 4월 23일 풀무고등공민학교 개교 및 입학식(학생 18명, 교사 2명, 학부모 몇 명) 기성의 모든 교육과는 형상에서가 아니라 질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출발.
학교란, 이 마을, 이 민족의 생리의 지체 중 하나인 눈으로 자라나야 하는 것이고, 다시금 이 가난한 민족을 떠 이고 일층 신고하는 일군을 기르는 것.
초창기 정신 강조.
그룬트비 농촌 교육 극찬-농업 기술이나 운동이 아닌 정신 교육 강조(농업학이나 비료학 없음)
덴마크의 그것은 농촌운동이자 민족 문제 그보다 심화되어야 함을 강조“자연의 본래 의미를 찾는 새 우주관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 본래 의미를 찾는 인생관 문제로 들어가야 할 것”
새 교육은 새로운 시대의 총아일 농촌을 중심으로 한 농촌 교육, 민중 교육, 정신 교육,인격 교육으로 민족 소생시키고 인간을 새로 나게 해야“
마을 유리조각 줍는 선생
농촌 아이들, 논에서 나온 어른들 맨발.
오산 청년회결성 부엌 개량, 연료 효율화 운동이 홍동에서 아궁이에 철문 달기, 굴뚝 중간에 미닫이 차단 장치, 볏짚 넣은 황토 아궁이 만들기 시범. 벼 종자 소독
홍동면 농촌 마을은 풀무학교 학생들의 교실이며 농민 교육장(1959년 함석헌 유달영초청강연, 유달영 덴마크 슬라이드 농촌 개발에 구체적 방안 제시)
3년 풀무질 영향 60년 넘게 이어져
풀무학교 매일 아침 첫 시간 ‘훈화’-정신 교육, 인격 교육,사회 교육.
이찬갑은 역사와 민족 문제, 주옥로는 기독교 신앙, 최성봉은 농촌 문제,주호정은 국내외 시사 풀이, 홍순명은 시와 문학 강의
함석헌, 송두용, 노평구 등 이름난 인물들 수준 높은 강연
이광수, 최남선을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 비판,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 비판 학생들의 의식 바뀜.
1960.4.19. 학생 혁명 광경을 보고 온 직후 “나라가 바로 되는 판에 책상이 이렇게 비뚤어지면 어떻게 하나, 정리부터 하자.”
일화 하나-자기들이 배우는 교실 청소도 할 줄 모르는 학생을 길러내는 것보다 차라리 한 학급이 없는 게 낫다며 전원퇴학시키리로,
1960년 12월 17일 밤. 수업 준비 중 꺼진 연탄불을 방에 놓았는데 남은 가스가 새 나와 정신 잃음, 첫 졸업식을 두 달 남기고 학교 떠남.
제자들 문집에 ‘한국의 나다나엘’ 풀무학원의 시작, 초인적 심혈을 기울인 3년간의 철저한 교육 토대.
장기려 부산복음병원장 주옥로 선생을 존경해. 너무나 강직한 이찬갑과 같이 일을 해서
이찬갑 홍동에서의 3년
해방 후 한국 최초 협동조합 씨앗 뿌리고 온몸으로 참교육 풀무질, 이전 60년 역사에 앞으로 이어질 학교와 지역에 끼치는 정신적 영향 지대할 것임. 민족과 농촌과 청년에 대한 그의 뜨거운 사랑이 강직한 성격과 맞물려 홍동과 풀무에서 철저하게 실천했기에.
< 주옥로 >
1. 목사에서 무교회주의자로
- 주옥로는 1919년 12월 24일 홍성군 홍동면 팔괘리 송정마을 풀무골에서 태어남.
1938년 ~ 1948년까지 10년 동안 골수암으로 일곱 차례의 수술을 하고 병고에 시달리면서 내면적으로 성장. 1942년에 서울 감리교신학교에 입학. 1951년 제주도로 피난하면서“하나님, 살려주시면 남은 생애를 당신의 일을 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함. 1951년 홍동감리교회 목사로 부임.
- 1949년 함석헌의 YMCA일요 성서 강좌에 참석하면서 무교회주의 신앙을 접함. 1954년 교회 생활 15년, 목회자 생활 3년을 정리하고 공식적으로 무교회주의 신자가 된다. 현재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중심지가 홍동 풀무학교로 간주되고 잇는 점 등은 주옥로의 이 같은 위치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청년회 결성, 연극으로 지역 운동
- 고향 홍동에서 두 번(해방 직후, 풀무학교 설립 후)에 걸쳐 이찬갑과 청년회를 결성해 지역 동에 나섰다.
- 연극에 대해 뒤에 나타난 민중의 반응을 보면 내용이 어려워 이해를 못했다는 사람이 다수다. 부족한 준비 등 좋은 경험을 토대로 다음해부터는 대중교육을 위하여 대중 중심으로 맞춰 점차적으로 상승시키기로 했다.(주옥로의 일기)
- 풀무학교 외에 1969년 풀무신용 협동조합을 창립, 17년 동안 이사장을 맡아 농민 금고로 육성시키며 홍동을 협동조합 지역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3. 이상과 현실의 갈등
- 풀무학교가 고등기술학교 이름을 고집하며 당국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건학 이념을 살리는 교육을 60년 동안 지속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필자는 그 원인을 이상과 현실의 오랜 논쟁에서 이상이 현실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과의 문제 제기와 피나는 노력이 없었더라면 이상은 공상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60년이 지난 현재 풀무하교와 홍동 지역사회에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이상과 현실이 지속적인 논쟁과 상호 보완 관계가 상실될까 하는 점이다.
< 최태사 >
풀무학교 제 3의 설립자
- 최태사는 풀무학교 설립 초기부터 학교 운영의 기둥이었다. 풀무학교는 1977년 최태사의 일심의원 건물을 기증받아 학교법인으로 승격시켰다. 풀무학교에 재산을 출연하고 수입의 거의 전부를 학교에 보낸 이유는 오로지 이찬갑에 대한 인연과 존경 때문이다. 정주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의 영향을 받고 함석헌, 이찬갑 등과 교류하며 성장한 최태사는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자다. 최태사는 재산도 책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희생과 봉사, 인자한 모습과 평화를 사랑하는 생애 자체를 유산으로 남겼다.
< 홍순명 >
- 1936년 강원도 횡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서당 훈장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부터 김교신, 노평구, 함석헌 같은 무교회 기독교 사상가들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 20세에 고향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 23세에 풀무학교 교사로 부임하다. 이찬갑이 평안북도 오산에서 추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이상촌 건설 운동을 이어받아 홍동에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있다. 마을과 학교가 하나로 되는 지역공동체를 만든다는 지역사회학교 구상은 홍순명이 정리한 것이다.
- 1963년 고등부를 설립하자마자 국어 국정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국어 교과서부터 펴냈다. 이 교과서는‘내 고장 홍성’단원을 넣어 지역부터 가르쳤다. 풀무학교 교훈을 ‘위대한 평민’에서 ‘더불어 사는 평민’으로 바꿨다. 이밖에도 아침에 “밝았습니다”, 저녁에 “고요합니다”, 헤어질 때 “안녕히”라는 인사말, 남녀 구분 없이 선배에 대한 호칭을 ‘언니’로 부르는 등 풀무 언어 만들기는 홍순명의 몫이었다.
- 홍순명의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 꿈의 구체적 실천은 1970년대 말 갓골에서 시작된다. 복서풍이 세게 몰아치는 황량한 골짜기, 상여집 한 채만 지키던 갓골에 이 같은 공공기관 뿐만 아니라 풀무학교와 갓골 어린이집 교직원, 귀농인 등 10여 가정이 터를 마련, 집을 짓고 이주해 오면서 떠오르는 공동체 마을이 됐다. 2000년대 전공부가 들어서며 외부에서 뜻을 갖고 홍동으로 온 지식 실천가들로 활력이 붙었다. 2006년 홍순명이 지은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 이야기』는 새롭게 태어난 전래이야기, 평민들 이야기다. 이 책을 바탕으로 미륵 세상을 그린 마당극을 펼친다. 이 마당극은 홍순명의 교육이고 철학이며 이상 세계를 향한 염원이다.
“ 미륵님이여, 앞으로 천 년 백성의 설움에 눈물을 흘려주소서. 천만 백성의 고통에 그들을 대신해 불같이 뜨거워지소서. 당신의 용화세상은 우리를 해치는 모든 중생까지 해원과 상생을 하는 세상, 산과 고개를 넘어 불길, 물길을 뚫고라도 우리 백성들 마음에서 그 꿈이 사라지지 않게 하소서”
2장. 협동조합 마을
[풀무소비자생활협동조합]
해방 후 최초 협동조합 씨앗 뿌려
풀무학교 개교 다음 해인 1959년, 이 학교에 소비조합 구판장(생활용품을 공동으로 구입해서 싸게 파는 판매점)이 하나 생겼다. 가난한 풀무학교 학생과 교직원들이 학용품과 생필품을 싸게 사기 위해 출자금을 모아 소비조합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문방구로 시작한 품목은 이후 생필품으로 확대되었고, 뒤에는 낫 등 간단한 농기구와 사료까지 취급했다.
단순한 교내 구판장으로 시작한 후 정식 협동조합 모습을 갖춘 것은 10년 뒤로, 1969년에 풀무소비자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이는 해방 후 최초의 협동조합 운동의 시작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는 이찬갑이 평안북도 정주에서 벌인 협동조합 운동의 연장선에서 추진한 것으로 보이며, 우리 현대사에서 식민지 시대의 소비조합 운동의 이상을 현재까지 계승하고 있는 연속성은 기적 같은 놀라운 일이다.
풀무학교 안에서 운영하던 소비조합이 홍동 지역 주민조합으로 나오는 데는 또 다시 10년이 걸렸다. 1980년 정식 발족한 풀무소비자협동조합은 우리나라에서 지역 주민이 자발적으로 만든 소비자협동조합 1호라고 추정된다.
창립 3년 만에 경영 부실로 해산
풀무소비자협동조합은 창립 3년 만인 1983년 경영부실로 해산하는 고통을 겪는다. 실패의 원인은 개인 출자금이 부족한 채 차입금에 의존하는 재무 구조로 출발한 데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관계자들은 협동조합이 외부 지원이나 부채에 의존하는 것은 기반이 될 수 없으며, 협동조합 정신에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부실한 가게 건물도 악조건이었고, 임원 및 조합원에 대해 계속적인 교육과 홍보를 통해 협동조합 정신을 고취시키고 참여도를 높이는 노력도 부족했다.
당시 홍동에서는 여러 다양한 조합들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풀무소협의 실패경험은 다음 협동조합을 운영하는데 소중한 교재가 되었다.
주민 45명 다시 창립, 마을 순회 판매
1983년 실패의 상처를 안고 새로 풀무소비자협동조합 창립, 지역 농민 위주 조합으로 나아갔다.
분야별 전문 운영 위원회를 구성하고, 판매장을 새로 내고, 다양한 품목을 판매하며 매출실적을 올렸다. 그 후 재정, 구입, 판매, 생산유통, 교육 홍보 등 각 위원회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며 기반을 다져 나갔다.
1987년 6월부터는 생활물자 마을 순회 배달 판매를 시작했다. 이는 마을별 부녀자 중심의 자발적 모임 결성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도농 간 농산물 직거래 시작
농민이 대부분인 조합원들의 더 큰 숙제는 어떻게 하면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984년 출범한 강남소비자협동조합에서 홍성 쌀 판매 시작, 당시 소비자협동조합 간 거래는 풀무소협과 강남조합이 국내에서 처음이었다. 1989년, 한국여성민우회생협과 거래가 시작되면서 풀무소협의 도시 소비자 직거래 운동이 더욱 조직적으로 구체화 되어갔다.
유기농업 생산자조합으로 전환
1985년 경남 창녕에서 오리농법 강연회가 열린다. 당시 홍순명 교장이 참석하면서 홍동 농민들과 후루노의 교류가 시작됐다. 1994년 홍동면 농민 주형로가 자신의 논 9천평에 오리농법 시작, 이후 해마다 홍동면 전체, 우리나라 전역으로 확산되어갔다.
홍동이 우리나라 최초, 최대 유기농업 지역으로 부상하면서 풀무소협의 사업내용과 역할이 유기 농산물 직거래 생산자협동조합으로 바뀌었다. 1993년 풀무소비자생활협동조합(풀무생협)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도시 소비자 단체들과 거래가 늘어나면서 1999년 공산품 판매를 중단하고 유기 농산물 직거래 사업만 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파산, 33년 뒤로 돌아가
2005년, 정부가 추곡 수매 제도 폐지. 지자체마다 농업을 살리기 위해 방안을 찾던 중 친환경 농업으로 방향을 잡은 농촌 자치단체가 많이 생겼다. 정부의 정책과 지자체의 투자가 늘면서 친환경 농산물 물량 증가, 전통적인 직거래가 축소되고 대형 유통업체 등대기업 시장 구조로 커가는 추세로 변화되었다.
풀무생협의 쌀이 남아돌게 되었고, 결국 남아도는 쌀을 일반미 값으로 방출하면서 손해가 발생, 2009년 사실상 파산 상태가 되었다. 풀무생협은 아이쿱생협연합에게 1년 간 경영을 위탁했고, 이후 경영 개선 방향으로 품목별 생산자 영농조합을 설립하고, 풀무생협은 소비지인 홍성 읍내로 이전, 판매장을 개설했다. 이 과정에 많은 조합원들이 풀무생협을 탈퇴하고 아이쿱으로 옮겨갔으며, 풀무생협은 홍성읍을 중심으로 조합원 배가 운동을 벌이며 협동 운동을 다각화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협동조합, 지역 주민에 의해 스스로 설립된 최초의 생협인 풀무생협은 그동안 크게 두 번에 걸친 파산 상태를 경험했다. 생산 환경과 소비 환경이 크게 바뀌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풀무생협의 앞날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풀무신용협동조합]
군사 정권도 실패한 농어촌 고리채
1980년대 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은행이나 농협에서 빚을 얻기가 쉽지 않았고, 사채 시장의 이자는 높아 서민들의 고통이 많았다. 이에 군사 쿠테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고리채 정리법을 공포했으나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이후 보완했으나 여전히 난제로 남아있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신용협동조합(신협)이 탄생됐다.
1969년 창립된 풀무신협은 학교에서 시작해 지역 주민이 주도하는 조합으로 옮겨간 점과 도시가 아닌 농촌의 작은 면 지역에서 시작한 특징을 갖고 있다.
1951년 제주도에서 피난생활 하던 주옥로가 당시 덴마크에 다녀온 후 협동조합 방식을 통해 농촌운동을 펼치던 홍병선 목사로부터 덴마크 협동조합에 대한 특강을 며칠 들으며 감명 받았고, 주옥로가 홍동에서 그 꿈을 실현하는데 17년이 걸렸다.
풀무학교 졸업생 18명, 4,500원으로 출발
풀무신협은 1969년 풀무학교 교사와 졸업생 18명이 4,500원을 모아 출발했으며, 1972년 신협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발전적 해체를 하고 특별 법인인 신용협동조합으로 다시 창립했다. 면 단위 농촌 지역에서는 풀무신협이 전국에서 처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교 안에 있어 지역 주민들의 조합원 가입이나 이용이 저조했으나, 1975년 독립해 나가며 점차 확장되었고, 1978~79년에는 지역사회 발전과 조합원 복지 문제에 한 발 더 다가갔다.
한 집 평균 2명씩 조합원 가입
18명으로 시작한 조합원은 2018년 현재 3,357명, 4,500원으로 시작한 자산은 366억 원으로 성장했다. 또한 전체 세대 당 평균 1.9명씩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건전한 재무구조와 원칙에 입각한 운영으로 1997년의 IMF 외환 위기도 흔들림 없이 지나갔다. 풀무신협은 순수 조합원 대출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낮은 금리로 대출하며 40년 동안 서민 금고 노릇을 해오고 있다.
[나래를 펴지 못한 협동조합들]
홍동면민들은 40여 년 동안 한 해에 두 번씩 모여 지방자치와 민주주의를 훈련하며 살아왔다. 홍동 사람들에게 협동은 자연스러운 삶의 방편이었으며 오늘의 홍동을 만들어 온 원동력이었다. 이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당연한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며 긴 세월 다양한 시도들이 펼쳐지고 있다.
- 양돈 조합
1979년 홍동면 주민 17명이 양돈 조합을 구성하기 위해 모였다. 정부의 농정이 미국에 예속돼 있다고 판단하고, 농민이 살 길은 협업뿐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결의하였으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 홍동농기계이용수리협동조합
1979년 문을 열었다. 농기계를 공동으로 구입하여 사용하고 수리하는 협동조합이다. 그러나 1년 3개월 만에 운영난과 지역 내 민간 사업소 생기면서 문을 닫았다.
- 민속공예조합
1980년 발족, 민속공예 산업 육성과 민속 공예품 판매가 목적. 결실을 보지 못함.
- 홍동식품가공조합
1982년 발족. 빵과 잼류 제조부터 시작해 불량식품을 몰아내며 지역 식생활 개선까지를 목표로 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각종 농산물 가공까지 꿈을 안고 출발했지만, 갓골어린이집 간식용 빵 만드는 것 외에 사업이 지지부진했다.
1993년 풀무학교생활협동조합 결성하면서 식품가공조합 기능을 되살려냈다. 2009년 갓골유기농업영농조합법인으로 허가를 받음. 제빵실, 작은 가게를 갖추고 빵 및 지역 농산물, 가공품을 판매하고 있다.
- 홍동대체공업연구소
미국인 캐빈 갤러거가 1978년 풀무학교 영어 회화 강사로 부임하면서 태양에너지반을 만들어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 과정에 태양열을 이용한 대체에너지 개발에 성공, 기숙사 목욕물 등 실생활에 활용했다. 1979년 풀무에너지가든회사를 구상하고, 이후 홍동대체공업연구소로 명칭을 바꾸고 준비를 하여 1981년에 갓골마을에 연구소가 세워졌다. 그러나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이 연구소는 두가지 점에서 홍동지역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하나는 이 일을 처음 시작한 캐빈 갤러거에 의해 홍동의 실천 경험들이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을 일만 하는 곳이 아니라 공부하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실험하는 지역으로 만드는 시초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갓골에는 여러 개의 연구소가 설립됐다.
협동조합의 한계와 새로운 협동조합
2012년 말 협동조합기본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우리나라에 현재 7천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결성됐다. 그러나 2018년 현재 그 절반 이상을 문을 닫았다. 협동조합이 최선의 방식일까? 질문해본다. 현재 우리나라는 법과 행정기관이 협동조합을 도와주거나 안내하는 것은 전무하고 관리 감독만 하고 있다. 협동조합의 나라 덴마크에는 협동조합에 관한 법 자체가 아예 없다. 우리
나라는 왜 정부가 법을 만들어 간섭하고 통제할까?
국제협동조합연맹의 원칙에는 1966년부터 정치적, 종교적 중립 원칙이 제외되었는데, 우리나라는 모두 정관에 정치 중립 조항을 넣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 생협은 값비싼 유기 농산물 판매장으로 스스로 국한시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협동조합은 사실 폐쇄적인 조직으로 자기들끼리만 잘 살아보겠다는 조직이다. 1995년에 국제협동조합연맹이 협동조합 간 협동원칙과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 원칙을 추가로 의결하였으나 우리나라 협동조합들은 같은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협은 진정 기대할 만한 조직인가?’ 묻게 된다. 새로운 삶의 어려움에 대응하는 새로운 협동조합을 만들 때 ‘생협은 그 기대에 부응할 만한 조직이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홍동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시도들, 작은 협동조합들-동네마실방 뜰, 할머니장터조합, 초록이둥지협동조합, 타는저녁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롭게 발생하는 삶의 문제에 대응하는 새로운 협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혼자만 열심히 산다고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난제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함께 해결해야 한다.
3장. 앞서가는 문화
홍동의 풀뿌리 언론 출판문화
풀무학교 교지와 벽보, 풀무, 홍동소식, 홍동신문
1959년(개교 이듬해) 3월 <풀무> 교지 발행 후 <불꽃>, <새벽별>, 다시<풀무> 등으로 이름이 바뀌고 발행주기도 연 1회에서 월간, 계간, 격월간 등으로 변화를 하며 60년째 계속되고 있다.
풀무 1호 첫페이지
“우리가 이 교실에서 공부한 지도 벌써 1년이라는 8,790시간이 영원히 우리에게서 흘러갔습니다. 그 시간이 우리들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특히 우리들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새로운 정신교육만이 각자의 가슴 속에서 새싹처럼 되어 새 나라 전망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문집 제1편을 내게 되는 것은 그간 우리들의 정신과 마음의 성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더욱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잘 되고 잘 못되고 간에 다 실리게 된 것은 더욱 기쁜 일이며 우리 작품을 책으로 엮어서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우리들이 나누어 가지는 기쁨이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벽보와 교지 편집을 경험한 학생들은 졸업 후 지역에서 여러 형태의 간행물을 만들었다. <동녘> 서로간의 생각과 지역 소식을 담음, <흙의 사람들> 농사짓는 사람 5명이 7년간 펴낸 농업 관계 계간지, <풀무> 총동창회에서 78~85년 7년간 월간잡지, 이후 <홍동소식> 창간으로 이어진다.
이외 지역의 기관, 단체마다 정기적으로 나오는 회보들이 생기고 소멸된다.
홍동지역공동체 형성의 밑바닥에는 이같이 활발한 말과 글이 있다. 그 뿌리는 풀무학교의 교지와 벽보, 국어 수업 등 인문학 교육에 찾을 수 있다.
풀무학교 초창기 국어교육은 학교에서 자체 편집한 [교양국어]1,2,3권을 사용. 1학년 시와 논문, 수필 2학년 ‘내 고장 홍성’ 3학년 ‘앞날을 내다보며’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주옥로의 ‘창업(졸업)의 말씀’으로 마무리. 생활 글쓰기 실천 교육.
지역소식지 <풀무> 1978년 탄생(~1985. 홍동소식으로 전환), ‘본지는 풀무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학교와 직접, 간접으로 관계하고 있는 모든 분들의 사랑의 공동체 형성, 진리의 공동 생산을 도모하고자 출발했습니다.’ 내용은 졸업생들의 활동 소식이 주를 이루었고, 그들의 주요 활동 공간이 홍동 지역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역소식이 많이 들어갔다. “진리의 공동 생산”이라는 부제로 발행. ‘대장간’ 코너는 뉴스 뒷이야기와 국내의 시사 문제에 대한 편집자의 촌평이 수록. 졸업생 소식을 넘어 홍동 지역 전체 소식과 교양으로 지구적인 시야를 넓히는 성격의 잡지. 홍동의 역사와 문화, 세계의 지역사회, 국내외 위대한 평민 이야기들 10회씩 연재. 84년 4월, 61호부터 ‘시골문화사’로 발행처로 바꾸고 격월지 내지 계간지로 전환한다. 이는 졸업생 회보에서 출판사 잡지로 전환한 것은 ‘풀무’ 울타리를 넘어 지역사회로 활동 폭을 넓히겠다는 뜻.
‘풀무학교 졸업생들은 정직과 신앙으로 세상을 살라는 가르침을 받고 사회에 나왔으나....
개인적인 삶이 아니고 공적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받을때 모두 손잡고 함께 일하고자 맹세했지만 각자 흩어지는 우리를 느꼈습니다. ...... 소식지는 전국에 떨어져 있는 친구들의 소식을 전하고 풀무의 교육이념을 어떻게 현실에 실천되는가 지켜보았습니다. ... 판을 거듭할 수록... 요구와 사명이 추가되었습니다. ... ‘진리와 평화의 공동체 육성’은 풀무의 범주를 넓혀 지역 속에 들어가 주민과 함께 하고 풀무교육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접수하게 되었습니다....홍동소식, 출향인의 글, 연재물, 공고 등을 엮어 이웃과 하나되어 공생의 사회를 실현하는 바람직한 수단이 되고자 합니다. 풀무학교, 각 협동조합, 마을들을 중심으로 한 홍동을 무대로 하게 됨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노력들이 본지를 통해서 전달되기 바라는 바입니다.’
<홍동소식>의 창간과 강제 폐간(1985년 5월~1986년 12월)
1985년 5월 풀무소비자협동조합 회보로 시작, 처음부터 조합원 뿐만아니라 지역전체의 발전에 기여하고 소식지는 이를 수행하는 수단이 되고 <홍동소식>으로 출발한다. 창간호 권두문 중
“우리 몸의 피가 제대로 순환해야 건강을 유지하듯 의사소통은 신체의 피돌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홍동소식은 홍동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좁는 지방지 또는 지방신문처럼 꾸밀 계획입니다. 지역발전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홍동에서 늘 얼굴을 맞대고 사는 이웃이라는 사실을 바로 아는 일입니다. 이웃이 없이 내가 살 수 없고 나는 이웃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고 그런 속에서 공동체 의식과 협동은 무르익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서울과 도시의 격차는 여러 가지 있지만 견디기 어려운 것 하나는 시골에 문화가 없는 일입니다. 본지는 홍동주민이 이웃을 서로 알고 하나되게 하는데 기여하고 시골에 청신한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고정코너 제목을 보면 사설은 ‘동네사람들에게’, 칼럼은 ‘쉴참’, 독자의 글은 ‘평민의 속생각’ 등으로 붙여 사용했다. 1986년 공정하고 지역의 공기(公器)가 되기 위해 발행처를 시골문화사로 바꾸고 편집위원회를 구성한다.
‘우리 마을 이야기’ 15회 연재 후 마무리하는 뒷이야기 중
“가난한 농민, 평민들이 힘을 모아 이루었던 이야기나 그들의 한 시대를 살며 가치 있고 보람 있게 역사에 기여한 일들은 자료를 포착하기 힘들었다. 그들이야말로 역사의 함 주인공인데... 기록으로 남긴 것이 너무 없었다.”
<홍동신문>강제폐간은 1988년 12월 <홍성신문> 창간으로 이어짐. 최초의 지역신문.
지역민의 입과 눈과 귀를 열어 주는 길을 텄고, 지역신문 관련 법 개정(언론자유)에 기여 함.
몇 사람의 머릿속에 맴돌던 독창적인 생각이 시일과 더불어 서서히 현실에 구체화되어 역사의 한 줄기가 되는 예는 많았다고 에이리 프롬이 말했다고 한다. 아주 작은 시작이 씨앗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홍동의 역사가 그런 셈이다.
농촌문화를 생산한 갓골어린이집
3년의 준비 끝에 1981년 4월 갓골어린이집 개원.
어린이를 미완성, 미숙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세계를 가진 인격체로 보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황중심교육이란 인간 상호관계를 통하여 인간성 형성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사회적 상로 관계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날그날 아이들과 함께 교육과정을 짜서 실천하는 것.
청년들이 모이는 거점으로 농민들이 밤마다 모여 시국문제에 대한 토론, 전문가를 불러 풍물과 탈춤을 배우는가하면 시위 현수막과 대자보 만드는 장소.
금관의 예수 연극 후 세쌍의 부부 탄생. 도시와 농촌의 만남.
농촌지역 유아 교육이 전무한 시대에 농민들 스스로 협동조합식으로 설립해 미래 세대를 준비하는 갓골어린이집은 이렇게 지역의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며 사랑했다.
홍동사람들의 끝없는 상상력, 도서관운동
1965년 풀무학원도서조합 시작, 1966년 풀무도서협동조합 발족, 3년 후 재발족, 이후 4년 동안 세 번이나 시작. 1969년 도서조합, 소비조합, 신협 3개 협동조합이 정식 발족. 1979년 풀무신협에서 준비한 홍동학생도서실. 1985년 창정 마을회관, 이후 갓골어린이집을 거쳐1998년 면민도서실, 2007년 홍동밝맑도서관 건립추진위원회, 2011년10월 개관. 4년5개월동안 64회에 걸쳐 회의, ‘밝고맑은 마을’ 소식지 4회발행, 진안문화의집 견학, 서울 책읽는 사회운동본부방문, 전국 작은도서관 모델 조사, 이일훈 건축가 설계, 대지 500평, 3층 연건평 200평 건물 건축, 총건축비 6억7천여만원(토지 포함).
“책으로 벗들이 만나고 벗들이 사랑으로 실천한다.”
홍동이라는 농촌지역에 초,중,고등학교, 마을대학에 아어 평생공부하는 도서관을 갖게 된 것이다. 지역의 세 살 어린이부터 여든 살 어른까지 드나들며 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농촌, 새로운 지역, 새로운 나라를 향한 꿈과 희망의 노래가 계속되고 있다. 홍동사람들의 끝없는 상상력이 중단 없이 생산되고 있다.
오래된 꿈(맺는 글)
1978년 4월 2학년 학생들의 ‘철쭉꽃 필 무렵’ 연극, 29년 후 2008년 개교50주년 미래 상상과 실현.
뿌리가 풀무학교 교육에서 싹텄다. 설립자들이 믿었던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앙에서 그 생명력을 찾았다. 제도와 형식을 배제하고, 진리의 원형을 추구하는 신앙의 개혁성에서 사회변혁의 동력을 찾았다.
“이 세상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말고 또 하나가 있어. 협동주의야.”
“풀무학교는 훌륭한 교사가 훌륭한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 스스로가 좋은 교육을 받고 있다. 선배가 후배에게 또 그 후배에게..... 지난 60년간의 정신적 전통이 그런 교육 분위기를 반들었다.”
이찬갑선생은 “그룬트비의 농촌교육은 농업기술이나 운동이 아닌 정신 교육으로 했다. 농업학과 비료학 과목 없이 산 역사와 산 제나라 말로 혼을 불어넣었다.”
홍동에 일관되게 흐르는 한 줄기 맥은 어린이부터 대학까지 인간교육, 유기농업,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함께, 기록물 발행, 책, 국내외 교류, 새로운 이론에 대한 과감한 실험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