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신앙 전통으로 순교 성인 4위를 배출한 고산지방
200년 신앙 전통으로 순교 성인 4위를 배출한 고산 지방의 교우촌 중의 하나이다. 고산 성당의 전신인 되재[升峙] 성당은 1895년에 완공된 단층 5칸짜리 한옥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 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일 뿐 아니라 한옥 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첫 성당이다.1801년 신유박해 후 전라도는 전국 신자들의 피난지가 되었고, 특히 고산 지방은 1866년 박해 후에 신자들의 교우촌이 되었다.
1890년까지 기록에 나오는 고산 지방의 공소는 저구리, 넓은 바위, 다리실(천호), 차돌박이(백석), 되재를 포함하여 57개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고을에는 심산유곡의 어디에나 신도들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교우촌이 많았던 만큼 이 지역에 박해도 심했고 순교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현재 천호 성지에 안장돼 있는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손선지(1820~1866, 베드로), 정문호(일명 계식, 1801~1866, 바르톨로메오), 한재권(일명 원서, 1836~1866, 요셉/베드로) 등 순교 성인 4위와 김영오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순교자 39명이 고산 지역 출신이다.
고산 성당의 전신인 되재 성당의 역사는 1893년 4월 비에모(Vellemot, 禹一模, 1869~1950, 바오로) 신부가 차돌박이(현 백석.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거처를 정하고 전교를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비에모 신부는 다음해 초 거처를 되재(화산면 승치리)로 옮기고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동학 농민 운동으로 전라도 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일시 서울로 피신하게 되었다.
1895년에 완공된 되재 성당은 단층 5칸짜리 한옥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현 중림동) 성당(1892년 완공, 1893년 축성)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일 뿐 아니라 한옥 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첫 성당이다. 되재 성당은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나 정부와 도의 지원을 받아 2007년 말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되재 마을에는 약 40호가 거주하는 데 거의가 교우 가정이다.
실제로 되재 성당이 설립된 뒤 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성당 주변에는 큰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나, 그 후 신자들의 이주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그러던 중 제10대 서병익(徐丙翼, 1881~1948, 바오로) 신부가 1944년 신병으로 성당을 비우게 되면서 다시 공소로 바뀌었다.
되재 공소 강당 뒤편에는 되재 성당 설립 이전에 고산 지역에서 사목했던 조스(Josse, 趙, 1851~1886, 세자 요한) 신부와 라푸르카드(Lafourcade, 羅亨黙, 1860~1888, 아르날도) 신부 묘소가 있다. 프랑스인 조스 신부는 1883년 1월 서울에 도착, 1884년 9월에 부임하여 사목하다가 과로와 열병으로 안대동 공소에서 판공성사를 주는 중에 사망하였다. 라푸르카드 신부도 프랑스인으로 1887년 1월 서울에 도착하여 그해 봄에 고산 얼음골에 부임하였으며, 1888년 2월 고산 빼재(수티)로 부임하여 사목하다가 같은 해 7월 11일 과로와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1984년 12월 7일 공소 강당 뒤편에 있는 두 신부 묘소에서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 고산 성당의 120년
◆ 되재 본당시기(1893~1944)
고산 성당의 전신인 되재 성당의 역사는 1893년 4월 비에모(Vellemot, 禹一模, 1869~1950, 바오로) 신부가 차돌박이(현 백석.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거처를 정하고 전교를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비에모 신부는 다음해 초 거처를 되재(화산면 승치리)로 옮기고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동학 농민 운동으로 전라도 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일시 서울로 피신하게 되었다.
1895년에 완공된 되재 성당은 단층 5칸짜리 한옥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현 중림동) 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일 뿐 아니라 한옥 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첫 성당이다. 성당을 지을 때 화엄사와 쌍계사에서 나온 목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되재 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됐다. 그러나 되재 성당 터는 2004년 7월 30일자로 전라북도 문화재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돼 2005년부터 국가와 도 지원을 받아 되재 성당 복원공사에 들어가 2007년 말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되재 마을에는 약 40호가 거주하는데 거의가 교우 가정이다.
실제로 되재 본당이 설립된 뒤 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성당 주변에는 큰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나, 그 후 신자들의 이주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그러던 중 제10대 서병익 바오로 신부기 1944년 신병으로 본당을 비우게 되면서 다시 공소로 전락하였다.
되재 공소 강당 뒤편에는 되재 성당 설립 이전에 고산 지역에서 사목했던 조스(Josse, 趙, 1851~1886, 세자 요한) 신부와 라푸르카드(Lafourcade, 羅亨묵, 1860~1888, 아르날도) 신부 묘소가 있다. 프랑스인 조스 신부는 1883년 1월 서울에 도착, 1884년 9월에 부임하여 사목하다가 과로와 열병으로 안대동 공소에서 판공 성사를 주는 중에 사망하였다. 라푸르카드 신부도 프랑스인으로 1887년 1월 서울에 도착하여 그해 봄에 고산 얼음골에 부임하였으며, 1888년 2월 고산 빼재(수티)로 부임하여 사목하다가 같은 해 7월 11일 과로와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1984년 12월 7일 공소 강당 뒤편에 있는 두 신부 묘소에서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 비에모(Villemot, 禹一模, 1869∼1950) 신부
비에모 바오로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사제품을 받은 뒤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 해 6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1893년 전라도 고산의 차돌박이를 근거로 전라도 일대에 전교하였고, 1894년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전주에서 전교하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와 서울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전라도 지방의 모교회(母校會)격인 고산 되재(升峙) 본당을 신설, 건축하고 1898년까지 사목했다.
1898년부터 1916년까지 서울교구 당가(재정부장) 신부로 서울교구의 재정 문제를 담당하고, 1916년부터 1926년까지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 주임 신부, 1926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교구 부주교 겸 명동 성당주임 신부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부터 노령으로 일선 사목을 떠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 신부로 재직하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해 7월 북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교황 사절 번(Byrne) 주교, 춘천교구장 퀸란(Quinlan) 주교 등과 함께 평양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다시 만포(滿浦)에서 중강진(中江鎭)까지 250리의 산길을 걷는 소위 ‘죽음의 행진’을 겪은 뒤 11월 11일 중강진에서 옥사하였다.
◆ 수청 본당시기(1942~1950)
이곳은 본래 되재 본당에 소속된 공소였다. 그러다가 1942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주임으로 김영태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김 신부는 이때 기존의 공소 건물을 성당으로 삼아 사목에 임하였으며, 1944년 주임 신부의 공석으로 폐지된 되재 본당 지역까지를 관할하였다.
그 결과 되재 본당은 수청 본당의 공소로 남게 되었다. 이후 수청 본당은 제2대 서정수 신부가 재임하던 증 6.25 전쟁이 일어나 성당이 파괴됨은 물론 교우촌이 모두 불타 버렸고, 이로 인해 본당이 폐쇄됨과 동시에 삼례 본당의 공소로 되었다가 1958년 고산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 고산 본당 시기(1958~현재)
1951년 삼례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활동하던 김영구 신부는 일찍부터 관내의 폐쇄된 본당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 현재의 고산 본당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을 신축하게 되었다. 고산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58년 4월 25일이었으며, 이로써 기존의 되재 본당과 수청 본당의 공소들은 모두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고산 성당은 우선 해발 55m 언덕에 자리한 지리적 공간미를 잘 살리고 있다. 사방에서 보이는 위치에 종탑을 배치해 놓았고, 성당 전면에 넓은 광장을 두어 남서쪽 원경과 북동쪽 수려한 근경을 그대로 살려 주변 자연환경과 성당 건물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제대 벽면에 '하늘과 땅의 만남'을 주제로 한 벽화가 있다. 벽화는 무명 순교자 피와 땀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앙고백을 보여주는데 하늘과 땅, 그리고 둘 사이를 이어주는 19개 계단(지상의 12계단과 천상의 7계단)이 있고, 계단 양편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다. 천상의 붉은 빛 십자가는 한국 순교자를 상징하고, 조선시대 형구에 나 있는 7개 구멍은 7성사를 상징한다. 또 좌우 생명의 나무는 고산지방의 특산물이요 우리 농촌을 상징하는 감나무로 땅과 농촌이 우리 삶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당 네 면의 유리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 유리화는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왼쪽 유리화는'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과 기적의 빵과 물고기로 나타내고 있다. 제대 정면 2층 성가대석 뒷편에 있는 7개 유리화 창은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데 청색 주조에 붉은 색을 대담하게 배열해 강렬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제대 앞면에는 성부의 '손'과 성자의 '십자가', 그리고 성령의 '비둘기'와 함께 삼위일체의 상징인 삼각형이 양각돼 있으며 제대 좌우로 'A'(알파)와 'Ω'(오메가)가 부조돼 있다.
◆ 고산본당 설립 120주년 기념 미사 봉헌 : 2014년 11월 1일 ◆
- 1891년 공동체 시작… 6·25전쟁 아픔도 이겨 -
어르신들은 서로 손을 잡고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로 ‘주님의 기도’를 노래했다. 맨 앞자리를 메운 ‘신앙 꿈나무’ 주일학교 학생들은 교구장 주교와 짧지만 수줍게 악수하며 까르르 웃음 지었다. 정성껏 성경필사에 참여한 한 어르신은 “열 번 읽는 것보다 한 번 써보니 그 말씀이 더욱 가슴 깊이 와 닿았다”며 사제에게 순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모처럼 양복을 꺼내 입은 어르신, 밭일을 잠시 미루고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 모두 마냥 기쁜 표정이었다. 한국 천주교 초기 박해역사와 오늘을 잇는 굳건한 믿음의 공동체 전주교구 고산본당(주임 백승운 신부)이 설립 120주년을 맞은 날 풍경이다.
본당은 설립 120주년을 맞아 1일 전북 완주군 고산면 성전에서 교구장 이병호 주교 주례와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오랜 세월 이어진 주님 사랑에 감사했다. 본당 출신 및 역대 주임 사제와 신자들이 성전을 메웠다. 신자들은 본당 전신인 되재성당에 있던 낡은 십자가와 신자들이 정성껏 쓴 성경필사본을 미사 중에 봉헌하며 설립 120년을 자축했다.
이병호 주교는 “120년 전 신앙 선조들이 온갖 환난을 겪으며 세운 역사를 오늘날 후손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써가고 있는 것”이라며 “일상에서 믿음과 일치, 사랑의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이끌어주시길 기도드리자”고 당부했다.
고산본당은 1891년 전라도에선 최초로 세워진 되재본당의 후신이다. 본당 설립일은 1891년 10월 10일지만 전주교구와 본당은 성전이 건립되던 해인 1894년 11월 1일을 본당 봉헌일로 지내고 있다. 11월 1일은 본당 주보인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이다.
고산 되재 지역은 박해시대 때부터 전라도로 이주해오는 교우들의 관문 역할을 한 곳으로,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신앙선조들은 대둔산과 천호산 일대 56곳에 이르는 교우촌에서 은둔하며 신앙생활을 이어왔다. 이명서(베드로)ㆍ손선지(베드로) 등 순교성인 4위를 비롯한 순교자 110여 명이 이곳 고산 지역에서 순교했다.
되재본당 공동체는 1891~1944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50년 6·25전쟁으로 성당이 전소된 뒤 교우들은 3년간 삼례본당 소속 공소 신자로 지냈다. 1958년 지금의 자리에 고산성당이 봉헌되면서 되재본당의 명맥을 이어받았다. 1994년 교회 전통 건축 양식인 바실리카 형식에 종탑이 세워진 독특한 구조의 100주년 기념 성전을 건립했다. 지금의 성당이다.
본당은 1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3년 전부터 준비했다. 2011년 신자들은 사흘간 농산물을 판매해 마련한 1억 원이란 큰 수익금으로 올해 교육관을 세웠다. 또 되재공소 환경정비사업을 실시하고, 되재 십자가 구역 순회기도를 펼치며 본당 역사를 깊이 되새겼다. 3년째 꾸준히 열리고 있는 신ㆍ구약 성경 통독반에는 어르신들의 성경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고 있다.
현재 교적상 신자 수는 관할 공소 13곳을 포함해 1700여 명. 주일 미사에는 신자 400여 명이 꾸준히 참례하고 있지만, 평균 연령은 60세를 훌쩍 넘는다. 고령 어르신이 많아 3년 사이 교우 40여 명이 주님 곁으로 갔다.
교구 청소년교육국장을 지낸 경험이 있는 백승운 주임 신부는 부임 후 청소년들의 신앙심을 한껏 불러일으켜 현재 주일학교에는 40여 명의 어린 신앙후손들이 주님 안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본당은 120년 세월을 담은 사진전과 교구 연합합창단과 생활성가 가수 등을 초청한 기념 콘서트를 개최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백승운 신부는 “올해는 본당 역사로 두 갑자를 지나 새로운 갑자를 여는 매우 뜻깊은 시기”라며 “소박하지만 어르신, 아이들과 주님을 힘껏 찬양하며 깊은 신앙 역사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평화신문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