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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26일 화요일
[(녹)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인데, 그때에 하늘에서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4,14-19
나 요한이 14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셨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습니다.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16 그러자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셨습니다.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왔는데,
그도 날카로운 낫을 들고 있었습니다.
18 또 다른 천사가 제단에서 나왔는데, 그는 불에 대한 권한을 지닌 천사였습니다.
그가 날카로운 낫을 든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날카로운 낫을 대어 땅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들을 거두어들이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
19 그러자 그 천사가 땅 위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들이고서는,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다 던져 넣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5-11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루카 21,8). 성전 파괴가 일어나고 혼란스러운 틈에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성전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표지라면, 성전의 파괴는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과 같은 혼란을 겪게 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주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굳건하고 영원할 것 같은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고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사이비와 이단 종교와 같은 거짓 예언자들은 이런 혼란한 시기에 상처받고 약해져 있는 우리를 찾아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오류의 길로 끌어들입니다. 그들은 특히 임박한 종말론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부추기며 우리를 속입니다. 그리스도교든 사이비 종교든 다가올 종말을 말하며 회개와 새로운 삶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오늘을 어떻게 살게 하는지에 있습니다. 올바른 종말론은 희망을 주고 그 희망으로 ‘오늘’에 발붙이고 성실히 살게 하지만, 그릇된 종말론은 사람들을 불안하고 두렵게 하여 ‘오늘’을 떠나게 하고 존재하지 않을 ‘내일’ 속에서 헤매게 하면서 삶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평소에 주님과 깊은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삶의 고통이 올 때만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주님과 친밀하고 돈독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신뢰는 고통과 혼란의 시기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다가올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불멸의 성전을 건립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시기 마지막을 향해 가는 즈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 우리 눈 앞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언뜻 보기에 공포스러운 분위기입니다. 사방에서 전쟁과 환난이 일어나고, 대재앙과 함께 그간 인간이 쌓아올린 높은 탑들이 산산이 허물어질 것을 예고 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무척이나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가르침 앞에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자지러지겠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간 쌓아온 신앙의 내공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해석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성전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낡고 빈약한 성전을 허물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지상 성전의 덧없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아름다움, 청춘의 푸르름, 인생의 화려함은 절대 영원하지 않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보다 영속적이고 가치있는 대상, 불멸의 성전, 영적인 성전을 건설할 것을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전 파괴와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벌써 우리 한국 교회에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수십 수백억을 들여 정성껏 건립한 대성전, 신자들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성전들이 인구 절벽 시대에 진입하는 동시에 가톨릭 교회에 대한 호감도 급하락으로 인해 텅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불과 십 년 뒤면,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을 것이 자명합니다. 사람들은 더이상 성전에 오지 않습니다. 그나마 서구 교회는 문화재에 등록되어 볼거리라도 있어 관광객들이 찾아오지만, 우리 본당들은 그런 요소도 없습니다.
무용지물의 성전들은 애물단지처럼 방치되다가 서구의 수많은 성전들처럼 매각되어 허물어지고, 다른 용도의 건물로 탈바꿈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는 불멸의 성전을 건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충만한 한 영혼이 곧 새로운 성전입니다. 지극정성으로 성체를 영한 한 그리스도인이 불멸의 성전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주님의 성전 건립이 필요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적에 시력이 좋았는데, 20년 전부터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당시에 캐나다 토론토에 살았는데, 도로 표시판이 잘 안 보여서 시력 검사했더니 안경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2007년부터는 다초점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안경을 쓰면 멀리 있는 건 잘 보이는데, 가까이 있는 것이 잘 안 보였습니다. 시력 검사했더니 난시와 근시가 같이 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조금 어지럽지만, 다초점 안경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안경을 보내왔습니다. 지금 안경이 오래되었고, 탈색되어서 맞추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새 안경을 사용하는데 멀리 있는 건 잘 보이는데 가까이 있는 것이 잘 안 보였습니다. 알아보니 렌즈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시 안경을 한국에 보냈고, 새로 와서 지금은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경테가 좋아도, 렌즈가 좋아도 시력에 맞아야 합니다. 초점이 틀리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글을 읽을 때도, 어떤 상황을 만날 때도 맥락을 잘 알면 이해가 쉽습니다. 군대에서 이런 맥락을 잘 모르는 병사를 ‘고문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이 쌓이면서 고문관 소리 듣던 병사도 후임병을 가르치는 똑소리 나는 병사가 됩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은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초대 교회의 박해 상황 속에서 고난받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자 기록되었습니다. 이 책은 상징적 언어와 비유, 환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을 통해 하느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새로운 미래를 드러내는 성경이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지금 현실을 두려워하라는 성경도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은 다가올 하느님의 심판을 기다리라는 성경이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은 교회의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을 말하는 성경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 묵시록의 맥락은 무엇일까요?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승리와 악의 종말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비록 세상에는 부정과 악이 존재하고 때로는 그 힘이 강해 보이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이 승리한다는 약속을 믿고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확신은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요한 묵시록은 또한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순결한 삶을 유지할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각 교회의 문제점과 장점을 지적하며 신자들에게 회개와 경각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이 내용을 통해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더 나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는 결심을 새롭게 다질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세상과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는 영적 전쟁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신앙인들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하며, 자기의 삶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묵시록이 말하는 신앙인들의 기도와 찬미는 하느님 나라의 힘이 되며, 이러한 영적 훈련을 통해 신자들은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지닐 수 있게 됩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처럼 신앙의 여정에서 겪는 도전과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교훈서입니다. 신자들은 묵시록을 통해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새롭게 다지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확실한 암호’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암호’를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한 책입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께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체험한 걸 꾸밈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감동이 있는 글들입니다.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암호’를 이웃 안에서, 내면의 부르심 안에서, 때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찾아내었습니다. 암호를 발견하기 전의 삶은 무의미하고 허망하였지만, 암호를 발현한 후의 삶은 희망과 기쁨이 계속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확실한 암호를 알고 계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차를 운전하기 전에 성호를 긋고, 기도한다면 그분은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손에 스마트 폰 대신, 묵주를 들고 버스를 타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기보다는 먼저 사랑하려고 하고, 이해받으려 하기보다는 먼저 이해하려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하늘을 날아가는 구름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또한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암호를 참 많은 곳에,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남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만나야 할,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끝에서 하느님과 대면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암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끝은 그러하리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러한 일들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
가려도
눈뜨시게나
빛이 오시니
마침내 끝은 빛이리니
막아도
나아가시게나
길이 오시니
마침내 끝은 길이리니
속여도
진실하시게나
진리가 오시니
마침내 끝은 진리이리니
갈라도
이으시게나
화해가 오시니
마침내 끝은 화해이리니
흩어도
모이시게나
일치가 오시니
마침내 끝은 일치이리니
밟아도
일어나시게나
해방이 오시니
마침내 끝은 해방이리니
얽매도
벗어나시게나
자유가 오시니
마침내 끝은 자유이리니
꺾어도
곧으시게나
정의가 오시니
마침내 끝은 정의이리니
내쳐도
보듬으시게나
사랑이 오시니
마침내 끝은 사랑이리니
죽여도
살아나시게나
부활이 오시니
마침내 끝은 부활이리니
오늘의 성인
성 실베스테르 고졸리니 (Silvester Gozzolini)
활동년도 : 1177-1267년
신분 : 설립자, 수도원장
지역 :
같은 이름 : 고촐리니, 실베스떼르, 실베스뗄, 실베스텔, 실베들
이탈리아 오시모(Osimo)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성 실베스테르는 볼로냐(Bologna)와 파도바(Padova)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곧 이를 포기하고는 신학과 성서를 공부함으로써 부친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그는 사제가 되어 고향의 대성당에서 50세까지 사목활동을 하다가 오시모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극도의 가난과 기도 속에서 홀로 지내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4년 가까이 독수생활을 하던 중, 그는 주위에 모여든 제자들을 위하여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되었다. 이것이 몬테 파노(Monte Fano) 수도원이다. 여기서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칙을 매우 엄격히 해석하여 가르쳤으며 탁월한 지도력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이 공동체는 베네딕토회 실베스테르 연합회라고 부르며, 비록 작은 회이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그는 97세의 일기로 서거하였고 로마 순교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는 1598년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베드로 (Peter)
활동년도 : +311년
신분 : 주교, 순교자
지역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같은 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성 베드로(Petrus)는 성서에 대한 탁월한 지식으로 유명하여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원의 수장이 되었으며, 300년에는 그 도시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과 오리게네스파와 투쟁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에 항거하였다. 그는 숨어서 자신의 교구를 지도하던 중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재개될 때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성 니콘 (Nikon)
활동년도 : +998년
신분 : 수도승, 선교사
지역 :
같은 이름 : 니꼰
소아시아의 폰투스(Pontus) 출신인 성 니콘은 젊어서 크리소페트로(Khrysopetro, 하느님의 돌이란 뜻)라고 부르는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엄격한 보속과 기도생활을 2년 동안 하였다. 그의 강의와 설교는 많은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였으므로 원장은 그를 주민들에게 파견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배려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크레타(Creta) 섬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는데, 이 섬은 얼마 전에 사라센의 손에서 해방된 곳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이슬람교도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수없이 개종시켰다. 그의 설교는 항상 '메타노에이테'(Metanoeite) 즉 회개하라는 말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성 니콘 메타노에이테라는 별명이 이름 뒤에 붙게 되었다. 그는 20여 년 동안 크레타 섬에서 활동하다가 스파르타(Sparta)와 그리스 등지를 여행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성 레오나르도 카사누바(Leonard Casanuova)
신분 : 신부, 증거자, 저술가
활동지역 : 포르토 마우리치오(Porto Maurizio)
활동연도 : 1676-1751년
같은이름 : 레너드, 레오나드, 레오나르두스, 레오나르드, 카사누바
이탈리아의 포르토 마우리치오에서 태어난 성 레오나르두스 카사누바(Leonardus Casanuova, 또는 레오나르도)는 바오로 히에로니무스(Paulus Hieronym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13세 때 예수회의 로마 대학에 갔는데, 그와 함께 생활하던 그의 아저씨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아저씨와 의절하고 말았다. 그는 1697년에 폰티첼리(Ponticelli)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이름을 레오나르두스로 개명하고, 로마(Roma)의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공부하여 170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1709년에 피렌체(Firenze)의 산 프란체스코 델 몬테 수도원으로 갔으며, 여기서부터 토스카나(Toscana) 전역을 다니면서 설교를 하였는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산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가 인콘트로(Incontro) 근교에 수도자를 위한 은둔소를 지었으며, 로마 지역의 선교단을 지휘하면서 6년을 생활하였다. 1736년 그가 산 보나벤투라(San Bonaventura)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나 다음 해에 이 직책을 사임하고 다시 선교 길에 올라 설교하여 거대한 청중들을 불러 모으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십자가의 길에 대한 열렬한 신심가이자 전파자였다. 또한 성체와 성심 그리고 마리아 신심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잠시 영국 왕위의 주창자인 제임스 3세 국왕의 아내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의 영적 지도자로 일하다가,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의 명을 받고 코르시카(Corsica)로 가서 설교하고 평화운동을 전교하였으나, 코르시카인들이 그를 선교사로보다는 섬을 통치했던 제노바(Genova) 사람들의 정치 도구로 보았기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751년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로마의 산 보나벤투라 수도원으로 돌아왔는데, 도착하던 날 밤에 세상을 떠났다. 43년 동안 열렬한 선교사로 활동했던 그는 1796년 6월 19일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6월 29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본당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요한 베르크만스(Saint John Berchmans)
신분 : 증거자, 수사
활동지역 :
활동년도 : 1599-1621년
같은이름 : 버크만,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요한 베르크만스(Joannes Berchmans)는 구두 수선공의 맏이로 1599년 3월 13일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의 디스트(Diest)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는 꿈을 꾸던 그는 중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간병하며 공부를 계속하였다.
13세 때 가정 형편상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가기가 어려워지자 요한 프로이몬트(John Froymont)라는 사람의 하인으로 일하며 공부를 계속했다.
마침내 그는 1615년 메헬린(Mechelen)에 새로 세워진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고, 그 다음 해 9월 예수회의 수련원에 입회하였다.
그해 12월 어머니도 오랜 병환 끝에 선종하였다.
1618년 9월 25일 첫서원을 하고 안트베르펜(Antwerpen)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몇 주 후 로마(Roma)로 가서 학업을 이어갔다. 학업 능력이 특출했던 그는 토론대표로 선발되어 활동하던 중 고열로 입원하여 병자성사를 받고 1621년 8월 13일 23세의 젊은 나이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성 요한 베르크만스의 짧고 평범한 삶은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미소한 일에서 완덕을 추구한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고 그의 근면함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심어준 것이다.
그의 사후에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1865년 5월 9일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888년 1월 15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요한 베르크만스는 복사들의 수호성인이다.
그의 축일은 1969년 로마 교회력 개정 이전에는 8월 13일이었으나, 그 후 11월 26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