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이 대구다
이 야만의 시대에선 지극히 인간적인 것은 모조리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단명하고 마는구나! “2009년, 하늘이 두 번 무너졌다.”는 누구의 말대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로 이어지던 지난 10년의 두 지도자를 불과 석 달 만에 모두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으면서,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울분어린 안타까움이 솟는다.
그러면서 이 야만의 한 원천이자 근본인 지역주의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야말로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정치를 지배해온 지역주의의 직접 피해당사자인 까닭이다. 특정정당의 깃발만 꽂으면 죽은 송장도 당선된다는 특정정파에 의한 특정지역 독식의 정치야말로 한국정치문화의 발전과 성숙을 막는 가장 큰 요인이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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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전 국회의장 | 내 고향이 대구다. 70년대 중반 십대 때 고향을 떠났지만 그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하필이면 3선 개헌안 변칙통과의 주역이자 지역주의의 원조라 불리는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의 지역구였다. 그는 이미 1963년 대선 때 대구 수성천변에서 “우리 대구 경북 지역은 신라 천 년 동안 정권을 잡았던 지역이다. 박정희는 신라 천 년의 재현이다. 어떻게 전라도에 뺐길 수 있느냐.”며 ‘보리문둥이 단결론’을 주창하여 지역감정에 불을 댕겼으며, 대선 때마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들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라는 등 망언을 해 왔었다. 그러나 그 당시 문학소년이던 나는 존경하고 있던 문필가이자 독일문학자인 그가 번역해 선물한 릴케의 시나 괴테의 파우스트의 미려한 문장에 흠뻑 매료되어 있었으니, 그의 그런 측면은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유신교육 속의 DJ, 그 이후..
‘반공교육’에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그 시절의 내가 박대통령 당선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어른들 사이에서 귀동냥을 하고 신문을 보며 처음으로 DJ에 대해 알게 되었고, ‘민족부흥의 영웅’으로 여겨지던 박대통령과 대등하게 겨룬 DJ라는 인물을 참 대단하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유신독재가 시작되면서 DJ는 단순한 야당인사를 넘어 빨갱이이자 민족의 반역자로 국가를 위해선 결코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되는 위험인물로 서서히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 이미지는 암울했던 70년대, 그가 정치적 망명을 하고 반정부활동을 하고 다시 납치를 당하고 하는 정치적 사건들을 언론을 통해 접하면서 내 어린 머리 속에 더욱 각인되었다.
십대 후반부터 박대통령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무엇보다 방송을 통해 만난 서남동, 김경재, 안병무 등 민중신학자들에 대해 호감을 가지며 유신정권의 폐단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면서도 그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은 변함이 없었다.
DJ를 전혀 새롭게 보게 된 것은 이십대 초반 부산에서 직접 겪은 부마항쟁과 ‘서울의 봄’ 때였으며, 특히 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그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가 87년 대선에서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야권 단일화 후보 약속을 깨고 출마하여 결국 노태우정권이 들어서게 되었을 때, 그 책임을 DJ에게 지우는데 나 역시 한몫을 했다.
하지만 이른바 3당합당이란 희대의 사건 이후 마치 옥석이 가려진 듯한 DJ의 진면목에 대한 확신과 애정은 분명해졌으며, 설사 그가 정계은퇴의 약속을 번복하고 DJP연합을 하는 등 현실정치인으로서 보여주는 모습이 적잖이 실망을 줄지라도, 그의 정치적 행보가 지향하는 바의 진정성과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고 특히 민주시대의 필요한 참된 정치지도자로서의 메시지와 정책들이 내 안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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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탈트의 편견과 오류 | 편견과 오류, 반DJ정서
DJ에 대한 영남사람들의 심리적 거부감 곧 반DJ정서는 이렇듯 까닭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출신지역에 대한 편견도 함께 했겠지만, 무엇보다 박정권으로 시작된 영남정권의 장기집권 시도에 있어 최대 걸림돌인 그를 제거하기 위한 유신정권과 5공정권의 이미지조작의 영향이 크다. 지역주의의 피해자를 오히려 지역주의의 주역인양 몰아간 그들의 지극히 비인간적이고 몰가치적인 의도적 정치행위는 역사적 심판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물론 DJ가 다른 호남출신 정치인들에 비해 특별히 반감을 사게 된 것은 영남정권의 가장 위협적인 대항마라는 점도 있지만, 그가 ‘인동초’라는 이미지 그대로 불굴의 생명력(정치력)을 지닌 자였다는 것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DJ 스스로 ‘전생의 형제’로 불렀던 노무현과 비교해 봐도 정치스타일면에서 아마추어적인 노무현에 비해 DJ는 대단히 프로페셔널하다. 그런 정치력이 그들에게 공포 어린 반감을 사게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현재와 같이 지역구도가 확실히 고착된 것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민주화시대 ‘87년 체제’의 시작인 87년 대선 때부터였는데, 박빙의 승부가 점쳐지던 그 때 대선주자들은 승리를 위해 출신지역의 지역감정을 최대한 자극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양 김이 영호남의 주자로 맞붙은 92년 대선에 오면 지역감정은 극에 달한다. 나는 물론 계속 민중후보를 밀었지만 마치 눈에 뭐가 씌우진 듯 서로를 적대시하는 영호남의 대립을 보며 마음이 참으로 아팠었다.
청소년 시절 한 때 내가 주위 어른들부터 들은 대로 DJ를 무조건 불온시하고 그의 사언행위 모두에 거부감을 지녔듯이, 색안경이란 그리도 무서운 것이다. 한번 박힌 편견의 골이란 얼마나 깊고도 끈질긴지 마치 트라우마처럼 우리 안에 남아 집단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받아먹는 떡이 맛있다.’고 밖에서 주입된 것들로 인식의 틀을 만들고 그에 따라 자동기계처럼 행동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편케 살아가게 할지는 모르지만 ‘삶의 진실’ 속으로 접근하고 사람다운 삶으로 뛰어들게 하는 데에는 훼방꾼일 따름이다.
나 역시 그렇게 씌어진 색안경으로 인해 한동안 DJ를 ‘있는 그대로 보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민주화와 통일을 향한 DJ의 진정 어린 열정 앞에 감동을 받으며 어느덧 비늘처럼 덮고 있던 것이 떨어지며 그 덫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실체적 진실에 눈을 뜨면 허구는 아침햇살 아래 안개처럼 사라지게 마련이다.
편견이 아침햇살 아래 안개처럼, 삶을 통해
호남인들에 대한 어릴 적 편견이 한순간에 깨어진 것도 이십대부터 사업으로 ‘대성타일종합건재상사’를 하면서 이른바 노가다판이라는 건축현장 인부의 대부분인 호남인들을 사귀면서였다. 목수와 미장공 타일공 설비기사 막일꾼 등 그들과 인간적으로 마음을 터놓고 아주 자연스레 친해지면서 호남인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깊이 깨달았다. 내가 색안경을 벗고 다가서자 그들도 진솔하게 다가와 정든 사이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그러하셨다. 사마리아인은 동족으로 여기지 않던 그 시대에 그분은 스스럼없이 그들에게 다가섰고 또 그분의 설교 주제엔 오히려 사마리아인 같은 이방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편견에서의 온전한 자유로움이야말로 그분이 바라시던 구원의 바탕이 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편견이 지닌 패악함을 누구보다 절절히 깨달았기에 그로부터 편견에 대한 도전이 내 일생의 과제요 화두가 되었다. 똘레랑스를 그렇게 중요시하는 것도 그런 연유이다. 다름에 대해 열린 자세가 되지 않고는 우리 사회의 구원은 요망하다. 끼리끼리와 패거리 문화, 집단이기주의 등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지역주의도 따지고 보면 끼리끼리 뭉쳐 자기들만 ‘잘 살아보자’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잘 살 수가 없는 것’이 사회공동체는 한 구성원만 잘 살아서는 결코 건강성을 지닐 수 없는 까닭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인터넷이 개개인 소통의 통로가 되고 있는 이 개방시대엔 더 이상 그런 허구적인 것들이 먹혀들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30여년 만에 돌아온 내 고향 대구, ‘고담대구’라는 불명예스런 이름까지 얻은 이 지역조차 최근에 깨어있는 분들을 만나고 그들의 열정적인 움직임을 보면서 그 어떤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음을 느낀다.
'공공의 적'을 극복하기 위해 영호남의 민주세력들이 대동단결해야..
이제 망국병인 지역주의와 맞서 한 평생을 동서화합과 남북통일을 위해 몸 바쳤던 두 선구자는 하늘나라로 갔다. 그들이 각각 영호남의 민주세력을 대표한다고 볼 때 이를 계기로 영호남의 민주세력들이 대동단결해 이 나라의 민주주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다시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그런 비인간적이고 몰가치적인 지역주의에 기대는 짓은 접고, 이 땅의 민주주의 회복과 그를 훼방 놓는 ‘공공의 적’을 극복하기 위해 사사로운 당파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통 큰 마음으로 연대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현 정권 들어 수십 년 전 야만의 시대로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역사의 시계’를 바로잡는 일은, 민주화와 통일의 꿈을 못다 이룬 채 하늘나라로 간 두 지도자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과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미래 그 사활이 걸려있는 우리 자신의 긴급 과제이기도 하다.
지금 상실감으로 온 국민이 아파하고 있지만 이 야만의 시대를 극복하는 길은 그렇게 지극히 인간적인 길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당하셨지만 하느님의 신적 권능으로 부활의 영광을 입고 빛으로 나타나셨듯이, 지극히 인간적인 모든 것은 그 지극함으로 인해 신성을 입게 되면서 끝내 야만을 이겨내고 아니 야만조차 부드럽게 변화시키며 부활의 빛으로 드러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부활도 그렇게 하여 올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거듭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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