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끝나지 않는 세월」을 4월 3일 마지막 시사회에서 보았다. 오전에 위령제에 참석한 후 점심도 못 먹은 채 달려갔지만 1시 15분쯤에야 코리아극장에 당도했다. 놀라웠던 것은 입구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일요일이라 다른 영화를 보러 본 관객들도 많이 섞어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은 모두 3층에서 내렸고, 상영 영화관 밖은 기다리는 사람으로 움직일 자리가 없었다. 더욱 놀라왔던 것은 관객이 어린이부터 노인층에 이르기까지 연령별로 다양하고 성별로도 비슷한 것이었다. 나는 ‘아 이 영화는 벌써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아직 보지도 않았고, 평도 듣지 못한 상태였지만, 관객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성공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그 생각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리고 유족만의 영화가 아니라 어린이까지 영화를 보러 왔다면 그야말로 「세월」은 4·3을 끝나지 않은 역사로 이끌어 낸 것이다. 전문적인 영화평론가가 아닌 나로서는 관객의 수나 소감이 영화의 완성도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의 모든 자리를 다 메우고, 계단까지 채웠지만, 그래도 들어가지 못했던 관객이 있었다는 것은 「세월」이 그만큼 중요한 영화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제작발표 이후부터 쭉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난 두 해 동안 제주 4·3 연구소에서 4·3 영상을 연구했으므로 최초의 극영화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4·3 다큐멘터리는 140여 편이나 된다). 제작진의 카페인 ‘설문대영상’에도 가입했고, 첫 크랭크린에 들어간 날에도 참석했다. 카페를 통하여 제작진의 진지함은 벌써 짐작하고 있었지만, 첫 촬영 시에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감독, 스탭, 배우들 모두가 열성과 혼신을 다하여 한 장면 한 장면을 찍고 있었다. 배우들은 불편함을 참고 동굴안의 시체로 누워있었고, 횃불의 불 밝기를 조정하기 위해 몇 번씩이나 불을 새로 붙였고, 거듭 같은 장면을 찍고 있었다. 정성과 헌신이 이 영화의 바탕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기 이전에 이 영화는 예산부족으로 힘들어했고, 도민들이 후원했으며, 배우들도 유족이나 도민이었고, 무보수로 일을 했음을 듣고 있었다. 이 어려운 제작과정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도민의 목소리라고 했다. 이러한 사전 정보로 인해 나는 「세월」이 도민의 입장에 본 또 하나의 4·3 소개 영화일 것으로 추측했다. 최초의 극영화라는 점이 더욱 그러한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본 순간 나의 추측이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나는 아마도 4․3 다큐멘터리를 가장 많이 본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은 내가 익숙해진 영상과는 매우 달라서 스토리를 쫒아가느라고 힘이 들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들도 서로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저 장면은 ‘황가’의 기억이고, 저 장면은 ‘형민’이의 기억이구나’ 하는 정도도 영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였다. 형민의 아버지와 황가와의 관계도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서 나중에 인터넷에 나와 있는 설명을 통해 알았을 정도였다. 4·3을 잘 알지 못하면, 갑자기 서북청년이 왜 등장하고, 이유도 없이 병든 노인을 죽이는지, 그런 서청과 형민이의 어머니는 왜 같이 사는지, 형민이의 형은 왜 죽음을 각오하고 삐라를 만드는지 스토리를 따라가기가 어렵다. 4·3을 어느 정도 알아도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수많은 군인들이 3만 여명의 제주도민을 학살했고, 중산간 마을은 불 타 버렸다는데, 영화에서는 그런 방대한 장면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이 다 집합된 장소도 너무 협소하고, 모인 주민 수도 너무 적어서 4·3의 실체와 실제에 대한 혼란을 줄 여지도 있었다. 무장대원의 수도 적고, 활약도 적어서 민중항쟁이라 말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를 거의 다 볼 때쯤 왜 이렇게 스토리의 연결이 명확하지 않은지, 과거와 현재의 장면들이 헷갈리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선 영화의 시선이 4·3 체험자에게 맞추어져 있다. 체험한 사람들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도 4·3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공감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조금도 어렵지 않을 것이며, 이해하려고 애를 쓸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바로 자신들의 현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체험자들은 오랜 기간 외부에 의해, 또는 자발적으로 기억을 억눌려 왔다. 억눌린 과거는 어느 때고 불쑥 불쑥 상기되기 마련이다.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들은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며, 한 권의 역사책은 더욱 아니다. 시간적으로 순서대로 기억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며, 원인과 결과 등 논리적으로 설명되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기억은 자신이 겪었던 것, 들었던 것, 해석했던 것, 맞추어 보았던 것, 상상했던 것 등이 저장되고, 변형되고, 재형성된 것이다. 더구나 전쟁이나 대량학살 등 참혹한 경험에 대한 기억은 억눌리게 되고, 오래 반추하게 되며, 파편화된다. 형민과 황가처럼 사건이후 57년이 되도록 잊고 싶으나 잊혀지지 않으며, 과거의 기억 속에서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체험자의 머리 속에 불쑥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 자체가 조각나고 뒤엉켜져 있다. 따라서 체험자의 시선에서 기억을 중심으로 만든 영화가 일반 관객에게 쉽게 전달 될 리 만무한 것이다. 두 주인공의 기억 속의 4·3은 단란했던 가족을 파괴하고, 자신의 마음까지 찢어지게 한 비극의 근원이다. 형민에게 4·3은 아버지의 행방불명과 사망, 형의 끔찍한 죽음,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배신 등 처참한 경험뿐이다. 형민은 삐라를 만들다가 도주한 형이 참혹하게 죽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던 어머니가 원수인 서북청년과 동행하고 있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황가의 4·3은 더욱 처절하다. 병든 부모와 아내의 억울한 죽음, 무장대 입대, 그러나 자신을 구해준 동료를 죽이는 고통과 죄책감이 그의 일생을 짓누르고 있다. 형민과 황가가 견디지 못해 결국 혼절해 버리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4·3인 것이다. 체험자의 4·3은 결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장면 전환은 영화의 기법이 아니라 바로 체험자의 현실인 것이다. 더구나 말 할 수 없고, 떠오르는 것조차 괴로운 기억은 현재를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있다. 그런데도 이 기억들은 체험자의 몸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 형민과 황가가 침묵해 왔기 때문이다. 침묵 속의 기억들은 형민과 황가의 마음속에 평생동안 고통의 응어리로 자리잡았을 뿐만 아니라 형민과 어머니와의 불화, 형민과 황가의 보이지 않는 갈등, 형민과 서울 친구와의 괴리, 형민과 자신의 아들과의 불협화음 등 가족간, 친구간, 도민간의 분열로 표출되고 있다. 형민은 어머니를 미워하고, 형민의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며, 황가의 며느리는 4·3에 무관심하다. 4·3의 기억이 침묵 속에 있었기에 자신이나 다른 사람과 화해하지 못하고, 젊은 세대에게 전수되어 오지도 못했다. 제작진이 보여주고 싶어 했던 끝나지 않은 세월은 4·3의 진상규명이 아니라 바로 이 침묵과 분열의 세월인 것이다. 김경률 감독은 인터뷰에서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게 일부러 맥을 끊었다.... 관객에게 4·3을 생각하게하고 공부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감독의 의도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4·3을 알고 있던 모르고 있던 적어도 한 장면이나 소리를 보고 들었다면 4·3에 대해 나름대로의 느낌이나 의미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비극, 혼란, 슬픔, 잔혹함, 고통, 갈등 등 어떠한 것이라도 4·3을 다시 생각하게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예산의 한계와 첫 극영화라는 부담감이 일부의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예를 들어 왓샤부대의 수나 총 집합한 마을주민 수가 고작 몇 십 명일 때, 4·3을 모르는 전국의 관객들은 실제와 너무 다르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가족사를 통해 4·3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오히려 4·3을 가족사로 축소시킬 위험성도 있다. 또한 너무 많은 단편적 내용들은 4·3을 다시 생각하는데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감독은 “110분에 4·3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 이라고 했지만, 아마도 첫 극영화라는 부담감이 과다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영화내용과 관객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는 우선 시사회 때 많은 관객의 관심을 끌었다. 영화내용이 어렵기는 했지만, 4·3의 기억이 조각조각 난 채 아직도 억눌려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조각난 기억들이 과거로 끝나지 않고, 가족을 가르고, 친구를 가르고, 이웃을 가르고, 세대를 가르는 현재로 이어짐을 보여주었다. 두 주인공 남성의 기억이 스토리의 중심이지만 제주여성과 관련된 기억도 여러 각도에서 비추어 보였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기억들을 드러낼 때 형민과 어머니, 그리고 형민과 황가가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시했다. 이러한 내용과 배경화면 및 음악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관객으로 하여금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영화관 밖에서 기다리던 배우가 남 같지 않아서 서로 악수를 청하며 공감을 나누었다. 그리고 관객들은 일부의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영화를 보고 목이 메었거나, 자신의 이야기 같았거나,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소감들을 남겼다. 영화가 끝나지 않고 관객의 마음속에 들어간 것이다. 이 영화는 다시 한번 더 봐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다시 본다면, 관객들은 형민이도 되고, 황가도 되어서 그 입장에서 함께 4·3의 기억들을 불러내고 싶어 할 것이다. 나 또한 아직도 억눌린 기억들을 모두 불러내는 데 동참할 것이다.
첫댓글관객이 주인공 상처의 슬픔에만 함몰되지않게 감정이 맥을 끊었다는 의미이고 영화 한편으로 4.3을 전부 말할수가 없으니까 보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자신이 4.3에대해서 알아보라는 의미로 기자하고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 부분은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장문의 소감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관객이 주인공 상처의 슬픔에만 함몰되지않게 감정이 맥을 끊었다는 의미이고 영화 한편으로 4.3을 전부 말할수가 없으니까 보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자신이 4.3에대해서 알아보라는 의미로 기자하고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 부분은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장문의 소감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주민예총 계간지 <제주문화예술> 2005.봄호(통권15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