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제 4주일(성소주일) 강론 >(4.30.일)
* 나(정재성 신부)의 사제성소를 지켜본 엄마의 마음 (2015.3.29.임종하신 모친이 2007년 작성/ 2008.4.13. 문덕본당에서 처음 소개 후, 여러 본당에서 소개)
아들은 대학시절, 신학교에 가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대학 4학년 여름, 62일 간의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신학교 가겠다고 결정할 당시 남편은 비신자였습니다. 남편은 안 된다, 신학교 가려면 집 나가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졸업 후 은행에 취직이 쉽게 될 거라고 남편은 기대했습니다.
신학교 시험에 합격한 아들은 합격해서 죄송하다고 꿇어앉아 빌었습니다. 남편은 “내가 결혼을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잘못했다. 이게 다 네 엄마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방학이 되어, 아들이 집에 오면 남편은 아들을 반기기는커녕 자꾸 신학교 나오라고, 자식 대우도 않고 집 나가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으로 돌아다녀야 했던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남편은 아들에게 잡비 한 푼 안 주고, 어떻게 그렇게 매정한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고통은 말로 다 못합니다. 남편은 식사도 하지 않고, 집에 와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납니다. 그 당시엔 주님을 미워했고, 내 아들이 왜 신부가 되어야 하는지,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이 점점 풀려, 아들이 원하는 길을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5년 내내 성모당에 다니며 신학교를 바라보고, 아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묵주기도를 끊임없이 바쳤고 미사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에게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당에 가자고 남편에게 권하지 않았는데 성당에 가겠다고 결심하고, 6개월간 한 번도 빠짐없이 다니다 영세했습니다.(1994년 4월 부활절)
그런데 아들은 신학교 5학년을 마치고 유학을 떠났습니다.(1997년 2월) 대주교님의 명령으로 프랑스 리용에 유학 간다고 했을 때 마음이 너무 아팠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까마득했습니다. 신학교에서 뽑혀 가는데 좋아해야 할지, 어떻게 뒷바라지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남편은 차비를 보태주기는커녕 제게 비용을 대라고 했습니다. 신학생으로서의 유학은 경제적 문제 때문에 아들에게 너무 힘든 생활이었을 겁니다.
아들을 신학교 보낸 이후 지금까지 흘린 눈물은 강물만큼은 안 되도 냇물만큼은 될 겁니다. 남편한테 뺨을 맞아도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외국에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싫어할까봐 화장실에서 수돗물을 틀어놓고 울었습니다. 그때 남편도 내가 우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 엉엉 우니까,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느냐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멥니다. 난 왜 이렇게 마음 약하고 눈물 많게 태어났는지 나 자신을 많이 원망했었지요.
그런데 아들은 2년 4개월 만에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프랑스에서 석사 땄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정말 반갑고 기뻤습니다. 아들은 두산본당 신부님(이재명)께 전화했고, 난 아들에게 아주 힘들었을 텐데 잘했다고 격려했습니다. 그다음 날 미사에 갔더니, 본당신부님이 훌륭한 아들 뒀다고, 프랑스 석사학위 따기가 아주 힘든데 그렇게 빨리 땄는지 아주 장하다고 칭찬했습니다. 저는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습니다.
유학 때문에 동기들보다 2년 늦게 사제서품 받고, 4년 이상 보좌신부로 살았는데, 박사과정 밟으라고 또다시 유학발령 받았다고 동기신부 모친에게서 들었을 때, 기가 막혔고, 왜 아들만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지 주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이태리로 간다니 주님이 알아서 꼭 쓸 곳에 맞게 만들어주시든, 아니면 아니라고 말씀해보시라면서 하소연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사제가 되었으니까. 돈 걱정은 없겠다 싶었습니다.
아들이 외국에 있을 때 아들을 잊기 위해서 식당에서 일도 했습니다. 일할 때는 몰라도, 집에 있으면 늘 아들 생각뿐이었고, 아들이 고생하는 것이 눈에 선했습니다. 의자에 허리를 묶어 공부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더욱 조렸습니다. 그래서 난 몸이 부숴져라 본당 일을 더 열심히 해서 칭찬도 많이 들었고,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하면 나의 희생이 아들에게 좀 더 잘 되고 보탬이 될까 싶어서, 내 몸을 혹독하게 부리며 유학시간을 버텼습니다. 그런 시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들의 음성을 조금이라도 듣기 위해 리용에 전화해서 음성내용을 듣고 끊거나, 기회가 좋아서 아들과 통화하면 반가워서 웃어도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전화를 끊고도 아들이 생각나서 계속 울 때가 많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엄마 마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니 다 풀렸습니다. 매일미사 빠진 적 없고, 늘 묵주를 쥐고 살았고, 자식에게 도움이 된다면 간도 빼줄 수 있는 엄마의 마음이지요. 신학생 때 유학을 가서, 아버지의 경제적 도움 없이 잘 버틴 것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당신의 사랑과 일치시켜 주시고, 영광과 기쁨이 되게 해주소서.”
아들 있는 분은 신학교에 보내세요. 신부는 효자입니다. 아들을 쳐다보면 정말 흐뭇합니다. 마음은 아파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니 많이 보내세요. 세월이 얼마나 요지경입니까? 앞으로 자식들에게 설움당하지 않으려면 신부님 시키세요.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남편은 영세 이후 레지오 활동을 열심히 하고, 아들이 신부 된 것을 정말 위대하다 생각하고, 아들이 온다면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흐뭇하고 행복합니다.
이제 아들은 박사학위공부 후 귀국했으니 세상에 부러운 게 없습니다. 자주 볼 수 있고, 또 늘 전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사를 얻은 느낌입니다. 나이가 좀 더 젊었다면 아들을 더 낳아 신학교에 셋은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이 하나뿐이니 어쩔 수 없지요.
주님, 제 아들이 당신 사업에 늘 투신할 수 있게 건강과 열정을 불어넣어주시어 훌륭한 사제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게 이끌어주소서. 아멘.(여기까지 어머니의 글)
(포항과 청도에서 아들과 4년 살던 중에 담도암이 생겨, 9개월 투병/ 2015년 3월 29일 서거)
사제성소는 아주 소중하고 고귀한 성소이고, 사제를 길러내는 성소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각자에게 맞는 성소를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고 성장시켜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첫댓글 마음이 뭉클합니다 ~
조리자 베로니카 형님의 자상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은 하느님곁에서 신부님을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