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세계는 불황 없다
금융위기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지만 수퍼부자들의 사치품 구입은 오히려 늘었다
지난 5월 5일 크리스티의 현대 미술품 뉴욕 경매에서는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금융위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의 부호들이 모네, 로댕, 자코메티 작품을 앞다퉈 사들였다. 대부분의 낙찰가가 신기록을 수립했다.
달러 가치의 하락세를 기화로 유럽인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대거 몰려드는 바람에 미국 구매자들은 소수로 밀렸다. 크리스티의 CEO 에드워드 돌먼에 따르면 그날의 매출 2억7700만 달러(크리스티의 현대 미술 경매에서 세 번째로 높았다) 가운데 러시아 거부들도 상당한 몫을 차지했다.
억만장자 미술품 수집가 니콜라스 베르그그루엔은 자신이 매번 입찰가를 부를 때마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로댕의 ‘이브’를 비롯한 유명 작품들은 추정가의 두 배 내지 세 배에 낙찰됐다.
“금융위기가 시작된 이래 줄곧 낙찰가가 떨어지기만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베르그그루엔이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당연히 떨어져야 하지만 그럴 기미조차 없다.”
경기침체라고? 그들의 세계에는 그런 말조차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미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이 또다시 대폭 떨어지는 통에 큰 타격을 입었다. 소비자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에너지 비용이 올라가는 바람에 기업들도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일부 계층 그리고 경제의 한 부문은 그런 평범한 걱정거리를 초월한 듯하다. 바로 수퍼부자들과 그들만을 위한 비즈니스를 말한다.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에서 흘러나오는 최근 소식을 보라.
1350달러짜리 쐐기꼴 굽 샌들, 1만8400달러짜리 가죽 손가방을 파는 이탈리아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는 1분기 글로벌 매출이 31.5% 늘었다고 발표했다(2007년 전체의 매출 성장률도 49%였다).
프라다는 지난 4월 2007년 2월부터 2008년 1월까지 순익이 66% 증가했다(사상 최고의 실적이다). 에르메스도 바로 얼마 전 1분기 매출이 13% 늘었다고 발표했다(특히 미국 시장에서 23%나 증가했는데 여기엔 뉴욕증권거래소 맞은편에 들어선 초일류 에르메스 맨해튼 본점이 기여한 바가 크다).
어쩌면 최고급 럭셔리 소비자들은 세계적인 경제난으로 오히려 더욱 활기를 띠는 듯하다. 시장조사업체 프린스 & 어소시에이츠의 2월 조사에서 평균적인 미국 소비자들이 쇼핑을 줄일 계획이라고 응답한 반면 수퍼부자(1000만 달러 이상의 재력가) 가운데 80%는 럭셔리 지출을 늘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소더비 인터내셔널 리얼티의 메러디스 스미스는 뉴욕시의 대형 부동산 시장(예컨대 실내 운동실과 가사도우미 숙소를 갖춘)이 여전히 “초강세”라고 말했다. 부동산 외에도 최고급 럭셔리 소비자들은 맞춤 향수, 특급 요트, 미술품, 진정한 여행 체험 같은 편의 상품에도 기꺼이 거액을 지출한다.
럭셔리 시장의 탄력성이 커진 것은 경기둔화에 타격을 입는 미국의 일반 구매자들에 대한 의존도가 어느 때보다 줄었기 때문이다.
근년 들어 새로운 부가 세계 곳곳에서 대거 창출되면서 고가의 미술품, 런던의 저택, 한 병에 3500달러나 하는 크룩 클로 당보네 샴페인을 언제든지 구매할 준비가 돼 있는 러시아와 브라질의 부호들이 날로 늘고 있다.
포브스지의 세계 부호 리스트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세계의 수퍼부자(10억 달러 이상의 재력가)가 20% 늘어 1125명에 이르렀다(2003년에는 476명에 불과했다). 그중 모스크바에 사는 사람이 뉴욕에 사는 사람보다 더 많다(74명 대 71명).
“러시아와 중동에서 새로운 부가 너무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미술품과 부동산 구입에 미국 달러를 쓰는 사람이 크게 줄 것”이라고 베르그그루엔이 말했다. 메릴린치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100만 달러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의 수가 지난해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넘어섰다.
바클레이스의 최신 부(富) 보고서에도 “세계 부의 소재에 큰 변동이 있다”고 나와 있다. 그에 따라 부자들의 지출력에 비춰볼 때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신흥시장’이라는 용어가 불필요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퍼부자들은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산층과 ‘준(準)부자(재산 100만∼500만 달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는 동시에 명품 브랜드를 불안하게 만든다. 예컨대 티파니의 1000∼5000달러짜리 상품은 과거만큼 잘 팔리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보석 제품 하나에 2000달러를 쓸 만한 사람들이 이제는 900달러밖에 안 쓴다”고 고급 브랜드를 전문으로 하는 조사업체 레드베리 리서치의 마크 코언 이사가 말했다. 가죽 제품 브랜드인 코치도 최근의 매출 실적에 실망했다.
코치는 경제가 호조였을 때 쇼핑몰과 아웃렛으로 시장을 옮겨 큰 재미를 봤지만 지금은 그쪽 매출이 크게 줄었다.
부자들의 구매 패턴을 조사하는 럭셔리 인스티튜트의 CEO 밀턴 페드라자는 특급요트 시장이 호황이라면서도 “아무도 공개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미국에서 100만∼300만 달러짜리 요트 시장은 거의 붕괴했다”고 말했다.
그런 요트를 살 만한 사람들이 앞으로 경제가 더 나빠질지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좀 더 싼값에 살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거나 천박한 부의 과시를 꺼리기 때문이라고 페드라자는 설명했다.
“8만 달러짜리 BMW750을 13만 달러짜리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로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실제로 그럴 경우 주변의 인상이 좋지 않고, 같은 계층이나 주류 사회와 동떨어진 행동으로 느끼기 쉽다.”
어쩌면 대량해고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지 모른다.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은행들은 이제서야 서브프라임과 관련한 엄청난 손실의 여파로 몸집을 줄이면서 감원을 시작했다. 유럽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민간은행 UBS(스위스)는 5월 6일 5500명 감원에 돌입했다.
유럽과 미국의 다른 은행들도 곧 그 뒤를 따를 전망이다. “해고의 물결이 거대해지면서 모든 은행을 한꺼번에 덮칠 것”이라고 또 다른 스위스 주요 은행의 임원이 말했다.
은행 임원들이야말로 취리히와 런던 같은 곳에서 부동산을 움직이고, 최고급 차를 굴리고, 명품 시계를 차는 사람들이 아닌가?
럭셔리의 세계는 지금까지는 금융위기의 폭풍 속에서도 꿈쩍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지만 이제 흔들리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로댕의 작품을 앞다퉈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을 것이다.
With GINANNE BROWNELL in London and JAIME CUNNINGHAM in New York
STEFAN THEIL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