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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하 20도를 웃도는 추위에 서북풍이 5-6급이란다. 서뿔리 길에 나섰다가는 동태가 되지 않으면 두망강 저편으로 날려갈판이다. 하여 오늘은 성탄절을 쇠는 기분으로 차로 드라이브를 했다. 나와 유미, 쎈, 수은화, 그리고 구호준이다. 먼저 개산툰으로 달려 거기에서 두만강을 따라 선구촌에 이르러 사이섬을 보았다. 일명 “间岛”라고 하는 지명이 이 사이섬에서 유래되였다. 한자로 “사이”가 “间”이고 “섬”이 “岛”이다. 이 사이섬의 이름을 따서 오늘의 연변지역을 사이섬 즉 간도라고 했다.
사이섬 즉 간도는 “垦土” 또는 “垦岛” 라고도 불렀다. 종성의 백성들이 건너와 개간한 땅 혹은 개간한 섬이라는데서 불리워졌는데 후에는 “间岛”로 통했다. 또 “假江”이라고도 했다. 무만강이 두 갈래로 나뉘면서 한갈래는 가짜라는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간도가 연변의 대부분 지역을 포괄하는 큰 의미의 간도로 되였다. 1904년5월2일에 함경북도 교계관 겸 경무관으로 있던 崔南隆과 중국측 연길청 리사 陈作彦이 光霁屿(광소)에서 “중한변계선후장정”을 체결했는데 그 “장정”에는 “古间岛 즉 광제욕假江의 땅은 종래로 종성의 한인들이 세맡아 경작하는 것을 허가하여 왔으므로 금후에도 예전과 같이 처리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니 1904년전에 이미 “간도”, “가강”이라는 이름이 보편적으로 불리워졌다고 보아야 한다. 간도의 뜻이 확대된것은 1909년 9월4일에 중국과 일본이 체결한 “中韩图门江界务条约”에서다. 이 조약의 附图에서는 垦地의 범위를 남족은 두만강, 동쪽은 가야하, 서쪽은 로야령, 서남쪽은 哈尔巴岭 黄沟岭 窝集岭 北甄山 红旗水岭을 지나 定界碑에 이르는 지역으로 규정하였다. 이때로부터 간도의 의미는 확대되였으며 후에는 더 커졌다.
광소촌 앞벌은 천평(泉坪)벌이라고 부른다. 1890년에 자동촌(종성외자)의 행화툰에서 가장 먼저 벼농사를 시작했는데 얼마 안되여 천평벌에도 벼파도가 일렁이였다. 한때는 천평벌의 입쌀이 풀기가 있고 밥맛이 구수하다고하여 진상품으로 선정되였다.
사이섬을 떠나 백룡방향으로 차를 달렸다. 길에서 가드레인에 걸려 꼼작달싹 못하는 소를 보고 차를 세웠다. 세살가량되는 암소였다. 암소는 가드레인을 가로타고 있었다. 뒤발 윗쪽은 가죽이 다 벗겨졌고 피가 얼어붙었다. 아마 오래동안 넘으려다가 지쳐서 포기한듯 했다. 우리는 뒷다리를 들어올리려고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소를 옆으로 미니 넘어지지 않겠다고 옆으로 움직이였다. 소도 게걸음을 할줄 알았다. 마침내 암소는 가드레인을 벗어났다. 암소는 저쪽으로 가면서 둬번 뒤를 돌아보았다. 한번 뒤를 돌아보면 본능적이라고 하겠지만 두번이나 돌아보니 분명 인사가 틀림없었다. 그 눈길을 보니 “고맙수다”하는 눈길이였다.
나는 들꽃향님이 카페에 올린 백년한옥을 찾아서 백룡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길옆에 있다는 백년한옥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달리다보니 어느덧 백룡촌을 지나 석건평에 도착했다. 옆에 앉은 쎈이 “저 앞에 백년가옥이 보인다!”하기에 보니 카페에서 본 백년가옥이 아니라 진짜 백년가옥이였다. 마을길로 차를 천천히 몰고 들어가니 마을 뒤끝 산자락에 낡은 한옥 한채가 눈앞에 나타났다. 오랜만에 보는 진짜 한옥이였다. 카페에서 본 한옥은 모조품이였지만 이는 진짜 한옥, 연변 고유의 팔간집이였다. 언제 지은 집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기와나 서까래 대들보를 보아서는 거의 100년은 될것 같았다.
연변에는 이런 팔간집이 흔하지 앉다. 삼합에 한집, 훈춘 경신에 한집. 그리고 구룡촌에서 한집 보았는데 오늘 월청에서 또 보았다. 팔간집은 한옥이기는 하나 연변의 기후특성에 맞게 지은 개량한옥이다. 한국의 한옥과는 좀 다르다. 한국은 연변보다 날씨가 따뜻하기에 집재료가 거의 모두가 나무이고 또 사랑채 안채 별채등으로 나뉘여 구조가 다양하지만 연변의 한옥은 달랑 한채다. 그 안에 방아간이며 고간이며 우사까지 있다. 정주칸에서 불을 때면 할아버지가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대통을 빨고있는 윗방까지 불길이 가 뜨뜻했다. 하지만 한국의 한옥은 온돌방이 따로 있고 밖에서 불을 땐다. 연변의 한옥은 누마루와 퇴마루가 없고 대신 집안의 온돌면적이 큰것이 특징이다.
연변에 고래등같은 한옥이 적은 것은 난방이 어려운 원인도 있지만 주요하게는 연변의 토착민들이 가난했기때문이다. 모두 가난때문에 들어왔기에 큰 집을 지을수 없고 또 간도에 들어오면서 얼마동안 살다가 언젠가는 다시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기에 큰 집을 짓지 않았다. 관리나 부자들이 간도에 들어왔지만 그들은 뜻을 품고 왔기에 학교를 세우거나 교회를 세우고 그리고 독립활동을 하느라 큰 한옥이 필요없었다. 그리하여 연변에는 한국 안동에 있는 그런 한옥은 없다. 초가삼간이면 족했다. 초가삼간은 고방 ,부억칸, 정주칸, 웃방이 한일자로 있는, 벼짚으로 이영을 이은 집을 말한다. 그리고 그때는 한옥을 지을만한 목재가 귀했다. 한옥은 소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연변에는 재목으로 쓸만한 소나무가 극히 적었다. 그때 연변의 산들에는 지금처럼 소나무가 많지 않았다.
어릴때 회막골에서 집짓는 것을 보았다. 먼저 삽으로 땅을 둬삽 깊이를 판다. 그리고 흙을 보드랍게 부신다음 그 흙으로 도로 구덩이를 메운다. 삼일이 지나서 구덩이의 흙이 움푹 들어가면 짓지않고 푸풀면 지었다. 아마 땅의 기운이 살아있다고 본것이다. 흙이 부풀면 로인들이 “허, 자손이 번창하겠는데.”하고 고기와 명태를 삶아놓고 그 자리에서 제를 올렸다. 회막골에는 한옥이 없었다. 모두가 초가집이다. 집을 지을 때 먼저 땅부터 돋군다. 다음에 흙은 다진다. 네명이 한메터되는 통나무 네고리에 바줄을 매고 통나무를 힘껏 들었다올리면서 땅을 단단하게 다지였다. 그때는 세멘트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초돌을 놓을 때는 모래와 황토와 석회를 이겨서 바닥에 폈다. 기둥을 먼저 세우고는 대들보와 서까래를 얹고 벽은 土坯를 쌓았다. 전통 한옥은 맞춤식이지만 연변의 집은 기둥과 대들보 그리고 서까래를 꺽쇠로 이어놓았다.
백룡촌에서 서쪽으로 골안을 타고 올라가면 번들령에 이른다. 번들령은 골이 깊고 지형이 복잡하다. 옛날 번들령에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는데 번들령의 남쪽 골짜기가 호랑이의 놀이터였다. 호랑이는 하루밤사이에 번들령에서 개마고원의 마천령까지 오고갔다. 과거에 백룡촌 사람들이 호랑이를 잡아달라고 정부에 여러번 호소를 했으나 정부에서도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호랑이가 워낙 신출귀몰하니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잡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백룡촌 사람들은 호랑이가 백룡을 무서워한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백룡”라고 불렀다.
거의 30년전에 조선의 농민이 갖난 호랑이새끼를 산에서 안고와 월청의 한 농민에게 팔았다. 농민은 호랑이를 김치움에 넣고 고기를 주고 밥을 주면서 약 한달가량 키웠는데 왠지 새끼호랑이 두마리가 련이어 죽었다. 호랑이를 돼지나 오소리처럼 사육했으니깐... 하여간 번들령 일광산 개마고원일대에는 호랑이가 특별히 많았다고 한다.
우리는 진짜 한옥을 구경하고 계속 달려 마패까지 왔다. 마패는 월청향의 소재지였다. 그런데 정부기관은 도문시로 들어가고 촌사무실만 있다. 月晴이라는 이름은 1933년부터 불러졌다. 그 먼저 월청은 화룡현 소속의 宁远堡에 속했다. 1941년 11월에 연길현에 귀속되였고 1969년에 도문시에 넘어왔다. 해방전에 월청에서 가장 큰 마을은 석건평과 걸망동이였다.
걸망동에서 “북간도관찰사"로 있던 리범윤이 포수들로 무어진 사포대를 조직하고 훈련을 시켰다. 사포대는 중국인 관리와 부자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했는데 그 목적은 북간도를 조선의 령토안에 두기위함이였다. 이때가 1903년때다. 그때 리조 조선은 탈바꿈하여 대한제국이라고 불리웠다.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령토를 넓히려는 욕심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종 3품관 리법윤을 간도에 보내여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청정부를 핍박하여 간도를 조선의 판도에 넣으려고 했던 것이다. 청정부는 아무리 꼴끼없는 나라이기로 작은 조선에까지 굴욕을 당해야 하겠느냐하면서 吉强军통령 胡殿甲을 파견하여 림법윤을 제압하게 했다. 호전갑은 길강군과 练会라고 부르는 지방무장을 동원하여 리범윤의 부하들을 체포하고 나루터를 봉쇄했으며 간도의 쌀이 조선에 반출되는것을 엄격히 단속했다. 이리하여 식량난에 허덕이는 조선은 수그러들었다. 사포대도 스스로 해산되였다.
촌에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마패촌 서쪽 산기슭에 “모주석만세”라고 쓴 커다란 표어를 발견했다. 돌에 흰칠을 올려 표기를 한 것인데 멀리 조선쪽에서도 한눈에 안겨올듯 했다. 조선의 산기슭에서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만세”라는 구호를 흔하게 보았지만 중국측 산기슭에서는 전혀 보아오지 못했던 표어이다. 문화대혁명때에는 벽이거나 깊옆 벽보판에 “모주석만세!” “중국공산당만세!”라고 씌여있는 표어를 자주 보았지만 문화혁명후에는 말끔이 사라져 볼수가 없었다. 그런데 30년전의 표어가 다시 나타나니 놀라지 않을수 없다. 그것도 산기슭에 있으니말이다. 조선에 어떤 멧세지를 전하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마패촌에서 관광의 의미를 가지고 조성한것인지 모르겠다.
모주석은 항미원조 때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했다. 뜻은 조선을 버릴수 없고 조선을 포옹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마 이 멧세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마패촌에서 처음으로 발해시기의 유적으로 되는 “24개의 돌”을 보았다. 이런 돌이 돈화에도 있다. 마패에 별궁이 있었는지 아니면 역참이 있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24개의 돌이 기초돌이라면 별로 큰 집은 아니였을것이다. 평범한 한옥 한채를 짓는다해도 기단에 기초들이 24개쯤은 수요되니깐. 발해시기에 이 지역은 로주에 속했다. 여기에서 강을 건너면 개마공원의 동쪽 기슭이 되는데 큰 골자기를 따라 가면 함경남도와 평안도를 곧게 갈수 있다.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사이에 발해의 남경 진해부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패에는 진해부로 가는 역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역참이라면 단순히 말을 갈아타고 가는 곳이 아니라 오늘의 휴게소처럼 관리들이 잠시나마 유흥을 즐기고 가는 곳이였을수도 있다.
마패촌에는 촌 규모에 비해 꽤나 큰 기독교회가 있었다. 마침 성탄절이라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약 30명의 로인과 남성들이 율동을 배우고 있었다. 목사인지 전도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분이 신도들에게 열심히 율동을 가르치고 있었다.
연변에는 이런 교회가 많다. 90년대초에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연변에는 교회가 우후죽순마냥 일떠섰다. 연변의 교회는 낮은 곳에 있는 령혼들이 쉬여가는 쉼터로 되고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것이요…” 라는 말씀에 힘입어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난다. 교회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질서를 유지시키는데 좋은 작용을 한다. 조화로운 사회구축에 필요한 조성부분이다.
처음에 연변의 여러 교회들은 서로 파벌싸움을 벌렸다. 서로 이단이라고 배척을 했다. 또 세상이 곧 종말된다면서 자살을 한 사람도 있었다. 이는 모두가 한국이나 미국서 온 목사들 혹은 전도사들이 그들을 현혹시켰기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목사들이라고하여 모두가 거룩한 것은 아니였다. 어떤 목사들은 사기를 쳤고 또 전도를 한답시고 과부와 처녀들을 꼬시여 음행을 저질렀다. 언젠가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온 침례교회의 목사와 집사 세명은 전도를 한다고 연길로 왔다. 그들은 연길의 작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은총이 이 불쌍한 령혼들과 영원히 함께 하기를 예수그리스토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나이다”고 하고는 헌금이 아까워서 각기 50원을 성금통에 달랑 집어넣고 돌아갔다. 돌아가서 수만딸라의 교회헌금을 자기들이 나누어가진다음 개척교회에 지원했다고 성도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부자들만이 다닌다는 이름있는 교회의 목사와 집사들이 이러할진대 다른 교회의 목사와 집사들이 모두 깨끗하다고 할수 있을가? 연길에 다녀온 집사 한분의 집은 솔로몬의 궁전보다 못지 않는 호화로운 집을 쓰고산다. 이런 목사와 집사들을 두고 궁예의 말로 욕을 한번 해보겠다. “자네들은 뒷간의 똥막대기보다 못하단 말이야. 내가 관심법으로 가만히 보니 자네들의 대갈통에는 온통 魔群들뿐이야! 마군은 철퇴로 부셔버려야 하는거야.”
도문에 들어서면서 옛날 두망강나루터였다고 하는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두망강대교가 세워지기전에 이 곳에는 조선서 도문으로 들어오는 나루터가 있어 매일 이주민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옛날 온성과 종성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나루터에서 도강하고 회령이나 그 외의 지역세서 룡정으로 들어오거나 룡정을 거쳐 도문에 오는 사람들은 오랑캐령을 넘었다.
1914년에 수월스님이 이 강가 비슬나무밑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망태에 넣고는 강을 건너 오는 이민들에게 한개씩 나누어 주었다. "아직 식지 않았구먼유. 하나씩 들고 가는겨..."
충청남도 홍성에서 온 수월은 일관산에서 신다라니대비주를 외우면서 5년이나 보살행을 살으시였다. 성격이 느리고 말투 또한 느리여 회막골에서는 "늘보 남도영감"이라고도 불리웠다. 수월은 회목고개 동쪽의 넓다란 바위에서 늘 참선에 들군했는데 그 바위가 지금도 있다.
1932년에 두망강에 다리가 개통되자 나루터는 자취를 감추고 나루터자리는 버들방천으로 변해버렸다.
도문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연길로 돌아왔다. 장사부에서 삼계탕에 인산주 두잔을 쪽-하는것으로 산행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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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솔님 성탄절 수기 참좋습니다..
여러가지로 알게되어 너무 좋습니다..감사합니다~~!!
쎄인님 함께 즐거운 산행해주어서 고마웠습니다.
성탄절도 쇨겸 멋진 드라이브로 력사 탐방도 .....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
장사부 
계탕에 인
주로 몸보신을 잘하였습니다
사진과 함께 도솔님의 설명을 읽으며 다시한번 더 연변의 지방사에 대해 학습하고 갑니다 ! 여러가지로 수고 많았습니다 !!
수은화님 쵸콜릿 감사히 먹었습니다.
박식한 도솔님의 산행수기를 잘 보고갑니다.추운날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도솔님 좋은 답사기 잘 보았습니다. 항상 자료사진과 상세한 설명을 달아주셔 공부 잘하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영하 20도 추위에 떨고 있었을 소를 구해 준 선행에 경의를 표합니다... 도솔님은 아는 게 참 많으시군요...ㅎㅎ...즐겁게 잘 읽고 갑니다.~~
늘 격려하여주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잘 보내시죠?. 한국도 많이 춥다고 하던데요. 건강 조심하십시요.
도솔님은 지리에도 밝고 역사에도 역사에도 박식하군요.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래도 이주정배는 제일 알고픈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인산주란 도태체 무슨 술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