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를 배우는 일은 믿음에 달려 있고,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진실〔誠〕에 있다. 마음 속에 진실이 있어야 대중들이 의심하지 않으며, 자기에게 믿음이 있어야 솔찍하게 남을 가르칠 수 있으니, 생각컨대 믿음과 진실은 도움만 될 뿐 하나도 손해될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진실이 한결같지 못하면 마음을 보존할 수 없고, 믿음이 전일하지 못하면 말을 실천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옛사람도 말하기를 "옷입고 밥먹는 일은 그만두더라도 믿음과 진실을 잃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셨다.
오직 선지식만이 믿음과 진실로 남을 가르칠 수 있으니,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고 일처리를 미덥지 못하게 한다면 선지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주역(周易)』에서도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 드디어는 자기 본성을 극진히 하고, 자기 본성을 극진히 한다면 다른 사람의 본성도 극진히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자신도 극진히 하지 못하고서 다른 사람이 극진하기를 기대한다면 대중들은 반드시 속이고 따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앞에서 진실하지 못했으면서 뒷사람더러 진실하라고 말한다면 대중들은 반드시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니, 이른바 "머리털을 깎다가 살까지 베이게 되고 손톱을 깎다가 손가락을 베이게 된다"라고 한 것이다.
실로 진실이 지극하지 않으면 상대가 감동하지 않고, 손해를 보지 않으면 이익도 오지 않는다. 대체로 진실과 믿음에서는 잠시도 떠나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여우찰원서(與虞察院書)』
2.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허물이 없겠는가마는 허물을 고칠 수 있으면 이보다 더 큰 장점은 없다. 예로부터 모두가 허물을 고쳐 나아지는 것을 칭찬하였지 허물이 아예 없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일을 해나가는 데 허물과 착오가 생기는 것은 바보든 수재든 간에 모두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허물을 고쳐 착한 쪽으로 갈 수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대부분 허물을 덮고 잘못을 꾸민다. 착한 쪽으로 옮겨가면 그의 덕은 날로 새로와지는데 이를 군자(君子)라 부르며, 과오를 꾸미면 그 악은 더욱 드러나는데 이를 소인(小人)이라 한다.
그러므로 의로움을 듣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일반 사람의 마음으로는 어렵게 여겨지지만 착한 것을 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따르는 것은 어질고 덕스러운 이들이 높이 사는 일이다. 그대들에게 바라는 것은 말 밖에서 서로를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문주부(與文主簿)』
3.
스승님(오조 법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큰스님(長老〕중에는 도덕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자도 있으며 세력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자도 있다. 마치 난새·봉새〔鸞鳳〕가 날면 모든 새들이 다 좋아하나, 호랑이가 지나가면 모든 짐승들이 두려워하는 것과도 같다. 이렇게 겉으로 따르는 모습은 하나로 나타나지만, 사실상 품격은 천지차이로 갈라진다"라고 하셨다. 『췌우집(贅集)』
4.
원오스님이 호구 소륭(虎丘紹隆:1076∼1136) 장주(藏主)에게 말하였다.
"총림을 다스리고 싶어는 하면서도 대중의 마음을 얻는 데 힘쓰지 않는다면 총림이 잘 다스려지지 못한다. 또한 인심을 얻는 데만 힘쓰고 아랫사람 대접에 소홀하면 인심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아랫사람 대접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훌륭하고 못난 자를 분별하지 못하면 아랫사람을 제대로 대접할 수 없게 된다. 어질고 못난 사람을 분별하는 데 힘쓰면서, 자기 허물에 대해 언급하는 자는 미워하고 순종하는 자만을 좋아한다면 어질고 못난 자를 분별하지 못한다. 어질고 지혜로운 인재라야 누가 자기 단점을 헐뜯든지 자기를 따르든지에 관계없이 오직 도를 따를 뿐이다. 이 때문에 인심을 얻어 총림이 다스려지게 되는 것이다." 『광록(廣錄)』
5.
주지는 대중의 지혜를 자기 지혜로 삼고 여러 사람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그 실정을 다하지 못하였는가, 일 하나라도 이치에 맞지 않았을까를 항상 염려하면서 부지런히 노덕(老德)을 방문하고 납자들을 받아들이는 데에 오로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치에 타당한가만을 살피면 될 뿐, 어찌 일의 규모를 따지겠는가. 이치에 맞다면 소비가 많다 해도 결행해야 하니, 해서 무엇이 손상되겠는가. 또한 잘못된 일이라면 용도가 작다 해도 물리쳐야 하니 그렇다 해서 무엇이 해롭겠는가.
작은 것이 쌓여 큰 것이 되니 은미한 것은 현저한 것의 싹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은 시초부터 조심하고 성인은 조심하는 마음을 간직한다. 졸졸 흐르는 물을 막지 않으면 끝내 논밭이 바다로 변하고, 작은 불꽃을 끄지 않으면 마침내 큰 들판을 태워버린다. 물줄기와 큰 불이 커져 재앙이 되고 나면 어찌해보고 싶어도 실로 어쩔 수 없다.
옛사람도 "작은 일을 조심하지 않으면 끝내는 큰 덕에 누를 끼친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뜻으로 한 말씀이다. 『여불지서(與佛智書)』
6.
원오스님이 경원 포대(景元布袋)스님에게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장로라는 직책을 맡아 부처님의 교화를 돕고 선양하려는 자라면 항상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를 실천하면서도 뽐내는 마음이 없다면 미치는 범위가 넓고 구제되는 대상이 많아진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자기를 뽐내고 능력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요행을 바라는 생각과 어질지 못한 마음이 생겨난다." 『운문암집(雲門菴集)』
7.
원오스님이 묘희(妙喜:1088∼1163)스님에게 말하였다.
"모든 행동거지에 마무리와 시초를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작에서 잘한 사람은 반드시 마무리도 훌륭하게 하니, 마무리 단계도 시작할 때처럼 조심하면 잘못되는 일이 없다.
옛사람은 `애석하다. 저고리를 만들다 말고 치마를 짓기 시작하니 백 리 길이 구십 리에서 반이 되어버렸구나'라고 하였는데, 이는 시작만 있고 마무리가 없음을 탄식한 말이다. 그러므로 『시경(詩脛)』에서도 `어디에든 처음이야 다 있지만 마무리까지 잘 해내는 경우는 드물구나〔靡不有初 鮮克有終〕' 하고 노래했던 것이다.
지난날 회당(晦堂)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황벽 유승(黃璧惟勝)스님도 대단한 납자였으나 단지 만년(晩年)에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 처음만 본다면 훌륭했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운문암집(雲門菴集)』
8.
원오스님이 불감 혜근(佛鑑慧懃:1059∼1117)스님에게 말하였다.
"백운 노스님께서는 모든 일에 반드시 옛 법도를 상고하셨는데 언젠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 법도를 상고하지 않은 일을 법답지 못하다고 한다. 나는 옛 성인들의 언행을 많이 배워 드디어는 그 분들의 뜻〔圍〕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옛것이라 해서 좋아한 것만은 아니다. 지금 사람들에게서는 본받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스승(오조 법연스님)께서 매양 `노스님은 옛것만 고집할 뿐 시대의 변화를 모른다'고 말씀하시자, 노스님은 말하였다.
`옛 도를 변질시켜 원칙을 뒤집는 것이 바로 요즈음 사람의 큰 병통이다. 나는 끝내 이런 짓은 안할 작정이다.'" 『섬화상일록(蟾和尙日錄)』
<선림보훈>
첫댓글 참으로 감사합니다. 스스로 경책 하는 시간이 되었읍니다. 나무아미타불
[진실과 믿음에서는 잠시도 떠나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