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1 08:00 by 김삼웅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는 20여 명의 사제가 공동으로 집전하는 가운데 3ㆍ1절 미사가 거행되었다. 700여 명의 가톨릭 신자와 수십 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함께 참석하고 있었다.
3ㆍ1절을 기념하는 이 미사는 장덕필 신부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김승훈 신부가 강론을 통해 3ㆍ1절의 의의를 되새기고, 3ㆍ1절에 입각하여 천편일률적인 신문보도, 비판조차 금하고 있는 유신헌법의 억압성, 사회기강의 문란, 심각한 경제문제 등 한국사회의 제반문제들을 지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어두운 면들을 없애주기를 기도하였다. 미사를 마친 후 참석자들은 이어서 기도회를 가졌다. 이 기도회에서 3ㆍ1 민주구국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주석 1)
반유신, 반독재 투쟁의 선봉장. 암울했던 유신시대 김대중 선생과 정일형 박사 등과 함께 명동에서 유신철폐를 위한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76년 3.1구국선언 직후)(김대중 선생 오른쪽과 왼쪽에 권노갑, 김옥두 전 민주당 의원이 보인다.)
1919년 3ㆍ1 독립선언이 천도교와 기독교의 두 갈래로 시작되었듯이 3ㆍ1 민주구국선언도 두 갈래로 추진되었다. 김대중과 문익환이 각각 별도로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을 외친 3ㆍ1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구국을 선언하는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선언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2월 초순경 명동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자신이 구속되더라도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리고 22일 오후 정일형을 봉원동 자택으로 찾아갔다. 200자 원고지 20매 분량의 미리 준비한 선언문 초안을 놓고 마주 앉았다. 정 박사의 부인 이태영도 동석하였다. 정일형은 정치적 선배이고 연상인데도 1971년 대선 때 선대본부장을 맡아주는 등 남다른 관계를 유지해 왔던 터였다. 그는 국회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했다가 의원직을 상실한 기개있는 원로 정치인이었다.
두 사람은 선언문 초안에 뜻을 모으고, 문건을 정일형의 부인으로 변호사인 이태영을 통해 윤보선에게 보내어 의견을 듣도록 하였다. 당시 윤보선은 재야 민주세력의 중심적 인물로서 반독재 투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한편 문익환 목사는 김대중의 3ㆍ1절 거사의 준비 사실을 모르는 채 김대중을 찾아와 논의하고, 3ㆍ1절을 기해 발표할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하여, 함석헌ㆍ문동환ㆍ이문영ㆍ정일형ㆍ윤보선 등과 협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두 초안을 수정, 단일화하기로 합의하였다. 발표된 선언문은 문익환이 초안한 것이 채택되었다.
서명자는 민주회복국민회의 멤버들을 중심으로 하여 확보하고, 끝까지 보안이 유지되는 가운데 3월 1일 전격적인 선언문 낭독이 거행되었다. 3ㆍ1 민주구국선언 사건은 대규모적인 집회가 아니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이 모인 대규모 집회가 아닌 3·1절 기도회에서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 기도회에 대해 정부는 즉각 수사에 착수하여, 선언문을 낭독한 이우정을 당일 저녁에 자택에서 연행하고 다음 날에는 문동환ㆍ윤반웅 목사, 3일에는 이문영ㆍ안병무ㆍ서남동ㆍ은명기ㆍ문익환ㆍ이해동ㆍ이종옥ㆍ문호근ㆍ김석중 등을 차례로 연행했다.
3월 5일에는 이태영, 6일에는 함세웅ㆍ김승훈, 8일에는 김대중ㆍ이희호ㆍ정일형이 각각연행되었다. 윤보선은 전직 대통령이란 예우였는지 9일 자택에서 조사를 받았다.
전격적으로 발표된 <민주구국선언문>의 내용은 ➀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②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③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 라고 하는 세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또 결론으로서 “이 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다가오고 있는 그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위축시키고 있는가?” 라고 선언문은 묻고 있다.
구국선언문에 서명자는 김대중을 비롯하여 윤보선ㆍ함석헌ㆍ함세웅ㆍ이우정ㆍ정일형ㆍ윤반웅ㆍ김승훈ㆍ장덕필ㆍ김택암ㆍ안충석ㆍ문정현ㆍ문동환ㆍ안병무ㆍ이문영ㆍ서남동ㆍ은명기 등 정계ㆍ종교계ㆍ학계의 지도급 인사들이다.
선언문을 발표한 재야인사들과 신자들은 명동성당을 내려오면서 시위에 들어가려 했으나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그날부터 1주일 사이에 선언문에 서명한 전원이 연행됐으며, 윤보선 전 대통령만이 자택에서 조사를 받았다.
닷새 뒤인 3월 8일에 나는 ‘유신헌법에 반대’,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당국은 다른 서명자들은 물론 내 아내를 비롯하여 그날 성당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연행했다.
이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처음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선언 내용이 나중에 죄로 취급된 것은 박 대통령의 명령때문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선언 서명자 중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자 격노한 나머지 엄벌에 처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은 구치소로 끌려가서 드디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우리 피고들은 서로 협의하여 법정에서 유신체제의 불법성, 민주주의 탄압의 부당성을 호소하여 법정투쟁을 확산시키기로 했다.
우리들의 죄란 생각해보면 성명서 한 장을 대성당에서 읽은 것뿐이었다. 그 뒤 모인 사람들과 그 성명서에 대해 토론한다든지, 질의응답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성명 낭독을 들은 뒤, 모인 사람들도 우리도 그대로 각자 귀가했다.
국내 신문에는 이 선언내용에 대해서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을 정부가 커다란 문제로 들춰서 결과적으로는 전 세계에 알린 꼴이 되었다.
나는 재판 때문에 모인 피고들의 구성에 대해 조소를 금치 못했다. 전직 대통령, 한번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던 사람, 국회ㆍ야당의 거물, 기독교계 장로, 신구 양 교회의 자도자, 대학교수, 거기에 남자만 있으면 그림이 안 되니까 여성, 그리고 대학교수와 변호사들이 대거 참여해 그 풍부한 다양성으로 정말 극적 효과를 높여 주었다. 덕분에 ‘민주구국선언’사건은 저절로 큰 사건으로 불거졌고, 우리의 민주회복운동은 이것을 계기로 단숨에 달아오르기도 했다. (주석 2)
주석
1) <한국민주화운동연표>, 304쪽
2) <김대중자서전(2)>, 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