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2:9-19)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뱃는다는 옛 속담처럼 사람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열광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바로 돌아서는 것이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도 보았지만 오 천명의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으로 배불리 먹었을 때는 모두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며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 증거하시자 예수님의 제자들만 남고 모든 사람이 떠나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왜 믿습니까?
여러분, 육신의 잘됨을 위하여 예수를 믿으십니까?
세상과 육신적으로 잘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예수를 믿지 않으시렵니까?
예수 믿는 것은 좋은 것만 얻고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육신에 매여 예수를 믿는다면 진정 예수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기적으로 인하여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과 나사로를 보고자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루살렘에 몰려 들기 시작했습니다.
13절을 보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 왕이시여'라고 하며 무리가 열광적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 바리새인들 조차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8절을 보면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입니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호산나 외치며 왕으로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따르는 것은 나사로을 살리신 기적처럼 앞으로도 그리하실 분이라고 믿었기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환영하지만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후 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믿은 것이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신기한 능력을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에서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섬기지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 좌절하거나 낙심하며 예배에 참석조차 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우리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본질적으로 보면 주님과의 관계 형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적인 것만 보고 추구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환영하는 무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며 예수를 믿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 실망한 적은 없습니까?
실망했다면 무엇 때문에 실망하셨습니까?
무리가 환영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오셨을까요?
이스라엘은 본래 전쟁을 위해서는 말을 기를 수가 없었긴 하지만 15절에 기록된 것처럼 구약 예언의 말씀대로 나귀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보면서 이 땅에서 하실 일을 보이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기록한 것은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겸손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교훈을 얻고자 함이 아닙니다(슥8:9, 마21:5)
예수님은 우리를 강한 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서 좋은 것을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위해 호산나를 외치지만 신자는 자신들의 죄와 허물에서 구원하시는 자로 믿을 때 진정한 호산나를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잘 살펴보십시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왕으로서 모습이 보여집니까?
오히려 얼마나 초라한 모습입니까?
여러분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시면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보면서 세상과 육신의 것들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린 것을 보고 무리가 환영하며 믿고 따랐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처럼 환영하고 따랐던 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며 어떠했겠습니까?
실망을 하고 떠나 가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자신들을 구원할 강한 메시아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무리는 더이상 예수님에게서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무리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며 외치지만 예수님은 무리의 생명을 위해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오신 것이기에 무리는 예수님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보더라도 오직 예수님만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빈들이나 궁궐이나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있으나 없으나 오직 예수님만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과 육신의 삶이 잘되게 하는 왕이 아니라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신 왕되신 주님으로 끝까지 믿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