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
김제간선수로 따라 걷기, 3회째를 그저께 (8월 31일) 혼자 실시했습니다.
결론만 먼저 말씀드리면, 그리 긴 거리를 걷지 못했고 피로감만 남은 날이었습니다.
아직은 낮시간이 너무 덥고 숲그늘도 없는 길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출발 at 벽골제.
그림에서 보는 연두색 경로가 지난 번 우리가 자전거로 다녔던 코스입니다.
원평천 하류에서 거슬러 올라와
벽골제공원으로 들어가서 점심을 먹고 –지평선 쌀밥이 엄청나게 맛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공원 안에서 쌍룡 조형물 보고 그 앞에서 사진 찍고, 고대국가 시절의 거대한 수문(장생거) 돌기둥 앞에서 감동 받고, 뒷문으로 빠져 나가 벽골제 뚝방 아래를 한바퀴 돌아 용골마을의 폐허지를 통과하여 돌아왔었죠.
물론 나는 사진 한 장 더 찍으려다가 일행을 놓치고 길을 반대편으로 돌아가느라고 폐를 끼친 일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벽골제공원 ‘뒷문’에서 오늘 답사를 이어갑니다.
원평천은 마치 한강 여의도처럼 작은 섬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 흐릅니다. 따라서 김제간선수로도 원평천을 두 번이나 크로스합니다. 이 대단한 공사를 해낸 조상들에게 정말 존경을 표합니다.
차를 벽골제공원 뒷문 바깥에 세우고 뚝방을 올라가 ‘포교방수문’이라 이름 붙은 곳을 들여다봅니다.
철제 펜스가 쳐져 있어 수문에 들어가거나 올라서면 경찰이 달려올 것 같습니다.
이 수문으로는 풍부하고 남는 수로의 물을 원평천으로 빼내는 역할을 하나 봅니다.
조금 더 오른쪽(동쪽)으로 걸어가서 간선수로가 원평천 아래를 통과하는 첫 번째 암거 입구를 사진 찍었습니다.
시멘트로 보강공사를 해두었는데 암거 입구에 붙어있던 돌판은 그대로 둔 것이 인상적입니다. 돌판에 ‘浦橋里潛管(포교리잠관)’이라 쓰였는데 글씨 쓴 사람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깎아내 버린 것인지 처음부터 없었는지.
나중에 안 일이지만 ‘포교’는 최근까지도 지역사람들이 ‘개ㅅ다리’라 불렀다 합니다.
택시운전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돌아올 때 택시를 불러 탔는데 “포교 갑니다” 라 한 내 말에 나이가 꽤 든 운전사가 “아, 갯다리요?” 그렇게 반문을 한 데서 증명되었지요. 운전사는 덧붙여 “옛날에는 여기까지 배가 들어왔다는 뜻이겠지요?”라며 부가서비스를 제공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마도 이 간선수로에서 가장 큰 암거일 이 암거, 물 내려가는 소리가 매우 큽니다. 쓰레기도 많이 떠 있습니다. 일부러 버리려고 버린 것이 아니라 바람에 날아와 물 위로 떨어진 것도 많겠지요. 어쨌든 국가대표 수로이고 벽골제라는 어마어마한 문화재 구역이니만큼 관리팀이 조금 더 자주 쓰레기를 제거하는 노력을 해주면 고마울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강 가운데의 모래톱 때문에 물길이 둘로 나뉘어 흐르는 곳에 두 가지 우리말 이름이 있습니다. 모래톱은 ‘뚝섬’, 나뉘어 흐르는 두 줄기 물은 ‘샛강’이라 부르지요. 한강의 뚝섬은 보통명사가 그대로 고유명사가 된 경우인데, 여의도는 이름이 왜 그렇게 붙었을까요? 옛날에도 그런 이름이었을까요?
첫 번째 샛강을 건너 원평천의 뚝섬으로 올라갔습니다.
이곳은 샛강을 수변공원으로 조성해놓고 있습니다. 강변 둔치에 꽃나무와 잔디를 심고, 나무데크와 갖가지 색의 바람개비. 뚝섬은 넓은 주차장과 ‘방문자센터’, 화장실 그리고 ‘생태농경원’이라는 이름의 공원입니다. 좀 오래된 지도에는 사랑방이라는 시설이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미 그 사랑방은 없어지고 생태농경원으로 바뀌었나 봅니다.
최근에 예초작업을 한 흔적은 있는데, 화장실도 방문자센터도 문이 잠겨 있고 운영이 그다지 활발해보이지는 않는군요.
첫 번째 암거의 출구부분을 바라보니 여기도 시멘트로 보강되어 있으며 돌판은 붙어있는데 꼭 같은 ‘포교리잠관’입니다. 그럴듯한 사자(四字)성어 하나쯤 기대했는데 이름만 새겼을 뿐이어서 다소 실망.
생태농경원 안을 통과하는 짧은(약 3백 미터) 구간의 간선수로 변은 풀을 깨끗이 쳤고 나무다리까지 하나 걸려 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지만요.
차를 이곳 주차장에 세워 두고, 걷기 시작.
논두렁길이라 팻말이 붙은 간선수로 옆길을 걸어 북쪽을 향하고 전진합니다. 풀 베어 눕힌 길이 걷기 편하고 풀냄새도 신선하군요.
수로를 중심으로 뚝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른쪽(동쪽)은 들판입니다.
생태농경원이라 이름까지 붙였으니 제대로 된 생태친화적 농사를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곳을 주말농장처럼 분양해서 도시민들이 쌀농사를 해보게 하는 것은 어떨까 혼자 생각해봅니다. 논을 분양하는 주말농장은 흔치 않기도 하고, 특히 김제평야에서는 쌀농사를 관광상품으로 해야 컨셉트에 맞기도 하니까.
도중, 오른쪽으로 물을 빼내는 작은 수로를 만납니다. 시멘트로 싸바른 요즘의 것이 아닌, 흙둑 그대로의 수로입니다. 옛날에는 바로 이렇게 생긴 수로로 물을 끌어댔고, 무너지거나 막히지 않도록 삽으로 보수하며 살았지요.
옆(동서 방향)으로 길쭉한 뚝섬을 종단하는 3백 미터 길이의 짧은 수로가 끝나자 두 번째 암거의 입구를 만납니다. 이 암거도 시멘트로 싸발랐는데, 돌판은 그대로 붙어 있으되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원래 새겨져 있던 글자들을 매우 정성들여서 치밀하게 깎아내 버린 모양입니다.
이제 두 번째 샛강을 건너갈 차례입니다. 처음 만난 샛강보다 강폭이 넓고, 이곳은 수변공원화 사업을 하지 않아서인지 낚시객이 많이 모이는군요. 한 사람이 대 5~6개까지도 벌여놓고 있는 데다, 뭘 해먹느라고 불을 피웠는지 시커먼 잿더미가 군데군데 보이는 강변 다리 아래 모습입니다.
29번 국도가 지나는 넓은 신덕교 그늘 아래를 빠져나가면 구 신덕교가 나타납니다. 한글로 교둣돌을 만들어 세운 아마도 첫 세대 다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60미터로 짧지 않은 구 신덕교를 건너가면 신덕마을입니다.
두 번째 암거의 출구가 바로 눈앞에 보입니다.
이 출구에는 돌판이 제대로 붙어있고 글씨도 남아있습니다. 마는… 쪼아내다가 조금 남은 두 번째 글자가 잘 보이지 않고, 세 번째 글자는 아예 다 쪼아내서 읽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잠관’ 다음에 다소의 여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름을 새겼던 공간이 깨끗이 삭제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잠관’의 이름을 알아내는 데 꽤 시간이 많이 걸렸고, 결국 ‘院坪川潛管(원평천잠관)’이었음을 겨우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 역시 너무나 밋밋한 이름이었던 것이죠.
마을입구에 옛 사람의 공덕비가 서 있어 가까이 가보았습니다.
관찰사 이호준(李鎬俊)과 (김제)군수 김선근(金善根) 두 사람의 공적을 기려 세(3) 읍민들이 세운 비인데, ‘?橋碑’라 새긴 것으로 보아 다리 공사와 관계있는 공적인 것 같습니다만, 뒷면 글씨를 많이 훼손해놓아 가뜩이나 새김이 얕은 비문을 해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비석이 기리는 두 인물은 모두 개항기 문신으로 중앙정부의 판서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고위직 인사였네요.
바로 그 앞에는 ‘신덕리’라 한글로 새긴 마을 입구 안내 돌이 앉아 있습니다.
신덕리는 망망한 들판 가운데서도 비교적 인가가 밀집해 있는 괴촌(塊村)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게다가, 북쪽을 향해 달려가는 간선수로가 동쪽으로 지선을 내보내는 분기점이 있기도 합니다.
(3-2)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