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독지기 인생을 살아온 부친 정학봉옹으로부터 절제와 타인에 대한 관용을 배운 정대희씨가 물레위에 놓여진 옹기를 정성스럽게 만지고 있다. 그는 장인의 기본적 정신은 자기수행과 절제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상주옹기를 만나러 갔다. 상주시 이안면 공검이안길 963-19번지, 넓은 마당 가득 크고 작은 옹기들이 쌓여 있었다.
저 옹기들은 6칸짜리 연실요, 이글거리는 불가마의 밤과 낮을 지나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들일 것이다. 단지, 항아리,
푼주, 자배기, 반상기, 뚝배기 등 일상생활에서 사랑받는 생활용기들이다. 마음 좋은 큰어머니처럼 정겹고 포근했다.
상주옹기는 그 제작방식, 과정, 생산품의 종류나 조형성 등이 전통적인 옹기제작의 기본을 충실히 전승하고 있다고 한다.
세간살이의 소중한 반려를 삼기 위해 자신을 데려갈 어느 선한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저 옹기들은 2007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25호-다’로 지정된 정학봉옹과 그의 아들, 손자, 증손 4대가 한 가마에서 구워낸 것들이다.
◆민간 사랑을 받으며 내려오고 있는 옹기
상주옹기가 있는 상주시 이안면의 옛 지명은 ‘질구지’다. 질구지는 진흙이 많은 언덕을 뜻한다. 상주옹기 터에 마련된 이안면 진흙.
유약을 바르기 전의 옹기. 상주옹기는 천연유약을 고집한다. 유약은 나무를 태운 잿물과 청정수를 일정비율로 혼합해 숙성과 정제과정을 거친다.
옹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가마에 넣고 10일 정도 불을 지핀다. 옹기를 굽기위해 마련된 화목들.
옹기를 굽기위한 가마.
정학봉옹을 대신하여 옹의 아들 정대희 선생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흙으로 구운 도자기가 빼곡하게 들어앉은 방에서 그가 만든
사발에 보이차를 우려 함께 마셨다.
옹기 대신 자기에 대해, 생활용기 대신 예술작품에 대해 그 나름의 미학
특강(?)을 하는 선생은 퍽 특이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제 흥에 겨워 현실을 망각한 돈키호테 같았고, 어떻게 보면 천진난만해서 도도하기까지 한 콧대 높은 예술가 같기도 했다. 돈키호테
이든 예술가이든 분명한 것은 그의 삶과 옹기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혈연관계로 묶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자기자랑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넋이 빠진듯한 자기자랑은 한편 감동적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 허황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 죽기 전에 뭔가를 해놓고 죽어야 하는데 그거 못하고 죽을까 봐 불안해서 후손들에게 남기고 갈 작품 벌써 다 만들어 놓았습니
다. 호사발 150점. 좋을 호(好) 호사발. 남자 여자가 붙을 정도로 좋은 사발 하나하나에 사랑하는 자식처럼 이름을 붙여주었습니
다.
호사발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지만 비밀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실물 대신 호사발 도록을 건네주었다. 도록 머리에 이렇게 쓰고
있다.
“6대를 이어 흙을 빚으며 고통과 시련 속에서 묵묵히 외길을 걸어온 날들이 오십년도 더 흘렀지만 채워지지 않은 허(虛)한 마음에
달을 벗 삼아 물레에 앉습니다. 세사(世事)를 초월하고자 마음을 비우고 해탈의 길을 찾아 떠나는 마음으로 물레를 잡은 손에 힘을
줍니다. 흙을 만지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며 사발을 빚는 것은 두꺼비 같은 내 손에 정성을 다하는 염원, 그러나 사발은 화신(火神)
의 품에서 태어나는 것이라, 사발의 숨소리를 듣고자 밤낮 칠일을 가마 속에서 불의 혼을 안고 태어나는 사발을 기다립니다. 두근거
리는 가슴의 고동소리에 붉은 숨결이 멎는 환희, 내 자식을 얻어 작명을 해주고 시를 지어주며 사해동포(四海同胞)하는 심정으로
세상에 내어 보냅니다. ”
-방송출연 53번 했는데 호사발 한 번도 안 보여줬습니다. 일본 사람이 찾아와 호사발 값을 묻길래 한 점에 100억 정도는 간다고
했어요. 그러니 살 생각은 아예 말라고, 10억 준다했지만 안 팔았습니다. 한 점도 안 팔고 150점 고스란히 후손을 위해서 대한민국
에 기증하려고.
-제가 성격이 좀 별납니다. 안 좋은걸 보고 좋다는 소리 절대 못 합니다. 아버지한테도 캅니다. 아버지는 엉터리다 이래요. 왜 엉터
리냐 하면 먹고 살라고 만들었다 하니까.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밥 먹고 살라고 옹기를 만드는 게 아니고 뭔가를 하나
남기기 위해서 만들겠다고.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후손들한테 정말 제대로 된 옹기를, 진짜 옹기를 남겨주어야겠다고.
먹고 살려고 만든 아버지의 옹기를 엉터리라 말하는 저 오만은 객기일까, 자존일까? 실용성이 소멸된 자리에 예술이 태어난다는
생각이 스쳤다. 정학봉옹에게 옹기는 무엇보다 생계의 방편이었다. 옹은 부친 가마터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14세 무렵부터 본격적으
로 옹기 빚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옛 옹기는 오곱(다섯 배) 장사라고 했다. 운반이 어렵고 깨지기 쉬워 이윤을 많이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부인 이은하 여사는 예천, 점촌, 상주 오일장에 전을 펼쳐놓고 옹기를 팔았다. 평소에는 상인들이 지게꾼을
앞세워 옹기를 사갔다. 옹기를 많이만 구워 놓으면 쌀, 과일, 옷, 곶감 등을 바꿀 수 있어 돈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한번 굽는데 나무가 20t 들어갑니다. 대한민국에 20t
소나무를 떼서 옹기를 굽는 사람 없습니다. 저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제 사발을 고려사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좀 미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 잠도 안
잡니다. 거짓말이 아니고 하루 한두 시간 밖에 안 자요. 흙을 오래 만지다 보니까 이상한 세계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다른 옹기장이
들 절대 안 만납니다. 모방은 안 되니까. 세상에 있는 것은 안 만듭니다. 한 개가 억울할까 봐 똑같은 건 절대 안 만들어요. 지구상
에 한 점씩 밖에 없습니다. 딱 150점.
◆천성으로 받아진 6대 가업 옹기장
정대희씨는 흙으로 두꺼비와 정호다완 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전시실 한켠에 마련된 토우와 옹기로 만든 생활용품들.
상주옹기 가마터 위에는 정대희씨가 제작한 다양한 형태의 조형물로 가득하다.
정대희씨는 자신의 작업장에 ‘흙’과 ‘혼’이란 단어를 액자에 걸어 놓고 옹기 제작 전 마음을 가다듬는다.
‘짓는다’라는 말이 있다. 옷을 짓고, 집을 짓고, 밥을 짓듯이 큰 옹기그릇을 이르는 독도 짓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옹기를 만드는 것
또한 사람의 생존과 관련되는 중요한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가마 속 불길같이 뜨거운 옹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어디로부
터 온 것일까? 그가 태어나서 자란 상주의 풍토와 그에게 피를 물려 준 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다.
상주의 흙은 알려지지 않은 보물이다. 산골짜기 곳곳에 도자기 파편을 흔히 볼 수 있어 옛 상주에는 도자기 굽는 가마가 많았으리
라 추정된다. 이안 부근에는 옹기를 굽는 가마가 많다. 운송수단이 좋지 않았던 옛날에는 주변에 좋은 흙이 없었으면 가마를 설치
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상주 토기가 있는 지역의 옛 지명 ‘질구지’는 토기의 원료인 진흙이 많은 언덕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상주지방 옹기제작과 관련해
서 세종실록지리지 상주목조에 보면 관내 ‘오사요리’라는 곳에 황옹을 만드는 도기소가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정학봉옹의 옹기장 일은 그의 고조부 때부터 시작된 가업으로 현재 6대째를 맞고 있다. 고조부부터 조부 때까지는 상주, 보은 일원
의 옹기공장에서 일하다가 옹기업으로 명성이 높았던 옹의 부친 대에 지금의 위치에 정착했다.
-우리 조부님이 충북 속리산 옹기집으로 장갈 갔습니다. 엄마 아버지도 그렇게 옹기장이 집안끼리 인연이 맺어졌습니다. 세상에
어떤 놈이 날 따라와! 옹기에 대해 뱃속에서부터 다 배웠고. 옹기장이 유전자가 피에 흐르고 있는데. 불과 흙과 물을 만지는 솜씨는
세상에서 내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한 집에서 4대가 부대끼면서 옹기를 굽는 곳은 상주토기가 유일할 것이다. 옹기장 전수자로 지정된 정대희 선생은 공기가 들어가
지 않고 부드럽고 차지게 되도록 반죽을 꼼꼼하게 한다. 흙에 공기가 들어가면 그릇 모양이 좋지 않고 깨질 수도 있다. 무형문화재
정옹은 아들의 재능을 자랑스러워한다. 타고난 손재주와 창의력이 옹기를 살아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무를 태운 잿물과 청정수
를 일정 비율로 혼합해 숙성, 정제과정을 거쳐 만든 고운 입자의 천연유약 때문에 상주 옹기가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행복하냐고 물었다. 흙을 만지면서 그 흙속에 빠져들어 흙과 대화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 주저 없이 말했다.
-숙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감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으니까 그게 즐거움이고 행복이고 뭐 그런
거겠지요. 행복하면 배가 부르다하지 않습니까. 때꺼리가 없어도 저는 배부릅니다.
선생은 손자가 4살 때 흙을 빚어 만든 두꺼비를 보여주며 타고난 솜씨를 자랑했다. 상주 옹기의 대가 끊길가봐 걱정했는데, 지금
큰손자의 흙 만지는 솜씨가 상상을 초월한다며 대견해 했다.
하늘이 운다/ 山은, 어찌 그리하지 않을까/ 권청 호사발에/천성(天聲)을 듣노라//
권청(勸請)이라는 이름을 붙인 호사발을 노래한 정대희 선생의 시이다. 흙을 빚어 만든 호사발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고 있으니
어찌 때꺼리가 없다해도 배부르지 않겠는가.
강현국
시인ㆍ녹색문화컨탠츠개발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