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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7장
치유하시고 죄 용서 하시는 예수님
(찬송 424장)
2022-12-12, 월
맥락과 의미
누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1장-9:50까지는 갈릴리 지역 사역, 9:51-24장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을 떠나면서 십자가와 부활 사역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다시 둘로 나뉩니다. 9:51-19:27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중 제자도에 대해 가르칩니다. 19:28-24장은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승천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첫 부분, 갈릴리 지역 사역을 보고 있습니다. 5장에서 베드로, 마태 등 제자들을 부르시고, 6장에서 12명의 제자들을 확정하고 제자도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7장은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일을 말해 줍니다.
누가복음 6장은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에 해당합니다. 마태복음 7:28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로 끝납니다. 마태복음 8장은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일과 백부장의 종을 고치 시는 등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누가복음은 5장에서 문둥병자 고치심을 이미 이야기했기 때문에 7장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는 이야기로 바로 들어 갑니다.
누가복음 7장은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님의 말씀의 은혜와 능력을 받도록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1.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1-10절)
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11-17절)
3.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에 대해 증거하심(18-35절)
4. 눈물과 향유로 예수님을 씻으면서 회개한 여인의 구원(36-50절)
1.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1-10절)
로마의 백부장 한 사람이 왔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중대장입니다. 아주 높은 지위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 백부장을 위해 간청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를 위하여서 회당을 지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로마인이지만 구약의 하나님을 믿었고 또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노예가 죽게 되었는데 그 노예를 위하여 예수님께 와서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백부장은 또 다른 사람을 보냈습니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백부장은 그리스도께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보고 그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그분을 집에 모실 수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나가기도 감당치 못함이니다.” 자신에게 그런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에게 이 일을 해주는 것이 합당하다.”(4절)라고 했지만, 백부장 자신은 그럴 합당한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세례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했듯이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종들에게 이것을 명령하면 행하고 저것을 명령하면 행하는데, 말만 하면 복종합니다. 그러니까 말씀만 하옵소서.” 말씀에 대한 굳은 신뢰가 있습니다. 칼빈 목사님이 잘 이야기하듯이 이 사람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 정도까지 지식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고 말씀을 통하여서 능력이 나타난다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두 번째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말씀의 능력을 믿고 돌아가서 보니까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께 기도하면 병 낫는다,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적에 대한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믿음은 “말씀만 하옵소서” 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해 계시니 우리는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어야 되겠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성경이 있고 복음 전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목사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씀을 믿을 때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치유해 주십니다. 필요할 때는 육체적 건강도 치유해 주십니다.
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11-17절)
두 번째는 가난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는데 그 죽은 자를 살려 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 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에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가지고 와서 살려주십니다.
그런데 죽어 있는 사람, 시체에 대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우리 생각에는 소용없는 일 같습니다. 죽어서 듣지도 못하는데, “청년아” 하고 부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소용없는 말인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하시면서 그 청년의 몸 속에 생명의 능력을 주입해주고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가운데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 승천하여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영혼 안에 생명을 주십니다. 에스겔서 선지자가 시체들에게 말하니까 시체가 일어났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전하는 말씀은 우리 영혼을 일으키는 실제적 효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물론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기적에 대한 믿음의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의 믿음도 받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을 나타내실 때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는 너무 감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 용서 해주셨고 구원해 주시고 이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건강이나 경제적 문제 등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불평합니다. 이미 주신 좋은 것에는 전혀 감사하지도 않다가 불편한 일이 생기면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고통을 주었는지 불평합니다. 배은망덕한 시대입니다. 우리 주님 말씀만 믿고 말씀으로 힘을 얻길 바랍니다.
3.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에 대해 증거하심(18-35절)
다음 이야기는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것에서 시작됩니다. 앞서 백부장의 이야기는 3장의 세례 요한의 사역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3장에서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7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세례 요한에 대해 증거해 주십니다.
“당신이 오실 분입니까?” 시편 118편에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에 나오는 찬양 중의 한 표현입니다. 구약 성도들과 구약 교회가 계속해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실 메시아가 당신입니까?”라고 요한의 제자들이 묻습니다. 요한이 몰라서 제자들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맹인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된다.”(이사야 29:18, 35:5,6, 42:18, 26:19, 61:1)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일을 예수님 자신이 이루시고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이 영적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힘듭니다.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이루어져 갑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천국에 못 가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겸손해서 나아옵니다. 가난한 중에 교만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구성원, 특히 첫 구성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부유하더라도 자기의 가난함을 알고서 나아오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결코 복음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이시지만 의도적으로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 초라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가난하고 약한 모습으로 영광의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오늘도 영광스러운 교회와 성도들은 이미 영적인 영광에 있지만 육체적인 초라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면적 모습 보다는 참된 하나님 영광을 바라봅시다. 주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증거하십니다.
백성과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고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율법사들은 세례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 뜻을 저버렸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럽니까? 세례 요한은 회개를 전파하니까 “미쳤다” 말합니다. 예수님은 회개 이후에 천국의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서 정상적으로 먹고 마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고 즐거워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34절)고 비난합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가난한 심정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천국으로 들어오는 이 새로운 시대를 율법사들은 환영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들, 종교적으로 자기애가 가득한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자기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비난합니다. 다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질투하기보다는, 오직 복음만 바라보고 그리스도께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4. 눈물과 향유로 예수님을 씻으면서 회개한 여인의 구원(36-50절)
마지막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할 때의 일입니다. 죄인이었던 어떤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눈물을 흘리며 향유를 부었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그 바리새인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같이 있는 것을 보니까 이 사람은 선지자도 아닌가 보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42절에 “빚을 많이 탕감받은 자들이 많이 사랑한다.” 이 탕감이 원래 은혜 받았다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은혜로 죄용서 받은 사람”이 더 많이 감사하게 됩니다.
자기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는 사람들은 더 감사하며 헌신합니다. 자기애에 빠진 자들은 나오지 못합니다. “네 죄사함을 얻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48, 50절에 반복하여 선언하십니다. 이미 예수님 은혜로 죄용서 받은 죄인에게 다시 한 번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고 선언하며 평안히 가라고 합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주님의 기도문으로 우리는 반복해서 기도합니다. 성찬에서 반복하여 죄사함의 복음 언약을 선언해 주십니다. 믿음으로 죄사함 받은 우리에게 계속하여 복음 언약으로 도장을 찍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계속됩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죄용서의 복음을 반복적으로 들어가고 믿음으로 평안히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믿고 복종할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도록 가르치십니다. 또 하나님 나라를 행동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기적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이 기적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표적으로서 중요합니다. 기적은 예수라는 청년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눈으로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임재와 죄용서와 새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고 전달하는 표와 인인 것과 같습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만 즐긴다면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적으로 병고침 받고 죽은 사람을 살려 내는 그 기적만을 바란다면 어리석습니다. 그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주님이요 그리스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기적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7장의 기적 이야기들의 끝에 회개하며 예수님께 나오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평안히 가라.”(50절)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용서 받고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될 때, 죄가 만들어 낸 죽음과 질병과 모든 비참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이미 죄를 용서받은 성도는 병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과의 친교 가운데서 평안을 누립니다. 병과 가난이 참 성도를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늘의 영광에 걸어가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되어 갑니다. 고난과 분리된 영광이 있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들어갑니다(롬 5:3-5).
어제까지의 죄를 다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하루를 시작합시다. 그리스도의 영을 의지하여 죄와 싸웁시다. 거룩과 사랑의 열매를 맺겠다고 굳게 결심합시다.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자기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려 놓으신 그리스도의 큰 사랑과,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8:37).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오늘도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셔서 나에게 생명 주심을 믿으십니까? 인생의 질병과 고난을 겪을 때에도 주님 베푸신 죄 용서의 은혜에 감사하며 평안 가운데 거하십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세례 요한과 백부장: 감당치 못함(3:16, 7:6), 합당함(3:8, 7:7,8절)
백부장은 요한과 비슷합니다. 그 백부장은 사람을 보내 말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이카노스 7:6).” 3장 16절에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 (이카노스)”와 같은 말입니다. 백부장은 그리스도께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보고 그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그분을 집에 모실 수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한 세례 요한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백부장에 대해 말했습니다. 4절에서는 “이 사람에게 이 일을 해주는 것이 합당하다.”(악시오오). 그러나 백부장 그 자신은 말합니다. “내가 주님께 나가기도 감당치 못함이니다.”(악시오오, 7:7) 자신에게 그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3:8에서 세례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악시오스) 열매를 맺으라.”고 한 말과 같은 말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죄인됨을 고백합니다.
<참고> 38, 44절,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음”=예수님께서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 13:5)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에크-마소, 38,44)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씻기신다(에크-마소, 요13:5)에 반복됩니다. 목욕하듯이 죄용서 받고 세례받은 성도들을 우리 주님은 매일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닦듯이 계속 죄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발을 씻기시며 죄 용서하고 섬기니, 우리도 주님께 항상 감사합시다. 우리도 죄용서 받아 의롭게 되었으니, 죄용서 받고 의롭게 된 다른 성도를 바리새인처럼 정죄하지 맙시다. 모든 성도와 가족을 죄용서의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기며 적극적으로 섬기며 사랑합시다.
<참고> 42절, 탕감(카리조마이)=은혜(카리스)
이 탕감이 원래 은혜 받았다는 뜻입니다(카리조마이, 은혜는 카리스). 직역하면 “은혜로 죄용서 받은 사람”이 더 많이 감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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