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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은 어김없이 찾아 오고 광주의 봄은 서럽게 푸르다. 광주호 호수생태원 저 뒤편의 무등산은 '오월 광주'의 아비 어깨였고 어미 품이었다. |
오월 광주 앞에선 침묵해야 한다 했다. 사람과 세상을 아파한 때문에 학살당한 오월 영령 앞에선 그래야 한다고. 오월 광주를 서정적으로 노래하지 말라 했다. 오월 바람은 서정적으로 오지 않고 오월 풀잎은 서정적으로 눕지 않는다고. 광주행은 조심스러웠다. 허름한 주절댐이, 부채의식 가득한 감상이 겁났다. 그러나 잊지는 말라 했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그 말에 기대어 오월 광주행에 나섰다.
광주는 의향(義鄕)이었다. 그리고 의로움은 곧 목숨이었다. 서슬 퍼른 권력자를 향해 옳은 것은 옳다 했고 그른 것은 그르다 했다. 오월 항쟁 시민군이 그러했다. 오백 년 앞서 거짓 죄에 단호했던 의병장 김덕령이 다르지 않았다.
국립5·18민주묘지 가는 길 이팝꽃 '수북'
추모탑 뒤 오월영령 속울음 들리는 듯
억지 단장 없는 소박한 모습의 구 묘역 처연
무등산엔 임란 의병장 김덕령 전설 '가득'
인공호수 광주호, 버드나무 군락지 일품
■국립5·18민주묘지
국립5·18민주묘지 가로수는 이팝나무다. 오월이면 이팝꽃으로 길목이 하얗다. '팝'은 밥이고, 이팝꽃은 쌀밥 가득한 고봉밥이다. 옛사람은 이팝나무 만개해야 그해 풍년을 예감했다. 이팝꽃은 광주항쟁의 또 다른 이름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10일간 처절했던 광주항쟁 때 이팝꽃 닮은 주먹밥이 대동세상을 날랐다. 받은 쪽은 시민군, 건넨 쪽은 양동시장 상인이었다. 제 입에, 제 자식 입에 들어갈 쌀 아껴 꽉꽉 눌러 빚은 주먹밥. 그 밥은 허기 달래는 정성이었고 절망한 광주의 힘이었다. 매년 오월이면 광주 이팝나무에 주먹밥이 수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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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의 현장인 망월동묘역. |
이팝나무길이 끝날 즈음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이 국립5·18민주묘지, 왼쪽이 구 묘역이다. 구 묘역이 바로 망월동묘역이다. 광주항쟁 당시 금남로엔 핏빛 주검이 넘쳐났다. 그 주검은 인간 대접 못 받고 구 묘역에 가매장됐다.
장례는 참혹했다. 시신은 비닐에 둘둘 말렸고, 쓰레기차와 손수레로 옮겨졌다. 넋 달래는 제례도, 망가도 없었다. 권력자에게 그들은 그저 '폭도'였고 죽어 마땅했다. '폭도'의 명예 회복은 17년이 걸렸다. 그리고 오월 영령은 구 묘역에서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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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5·18민주묘지 추모탑. |
국립5·18민주묘지 한가운데에 추모탑이 섰다. 높이 40m. 탑신이 두 손을 간절히 모아 계란형
조형물 '난형환조'를 받들고 있다. 새 생명 부활의 염원을 담았다. 그 뒤로 오월 영령 690여 명이 저마다의 속울음을 운다. 전신 타박상에 처참했던 광주항쟁 첫 희생자, 김경철 씨. 그는 장애인 아빠였다. 터미널에서 처남을 배웅하다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았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씨. 그는 전남도청을 끝까지 사수한 '님을 위한 행진곡' 주인공이었다. 동네 뒷동산에서 놀다 총 맞아 숨진 전재수 씨. 그는 초등생이었고 찢어지게 가난했다.
영정 사진이 없어 무궁화꽃으로
얼굴을 대신했다. 문화해설사 조선미 씨 설명이다.
국립5·18민주묘지 내 '역사의 문'을 거치면 구 묘역으로 가는 길이다. 구 묘역은 살아남은 자의 한이 서린 광주항쟁 현장이다. 억지 단장 없이 소박하다. 참담했던 그때의 거친 모습이 남아 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닿고 더 처연하다. "군사정권이 한때 구 묘역을 없애려 했죠." 조 씨가 말했다. 민주 성지로 부각되는 게 두려웠던 게다. 구 묘역에서 내려오다 한 시비가 발길을 붙잡았다. '우리는 보았다/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죽어가는 것을/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그러나/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이에 우리는 부끄러워/붓을 놓는다/전남매일 신문기자 일동.' 참회는 늘 늦다. 그러나 참회하는 그 염치가 사람 사는 세상을 여는 법이다.
5·18추모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기억해야 할 5월의 민주유공자 입간판. 올해는 조일기 씨다. 서른 두 살이었고 주방장이었다. 광주항쟁 마지막 날 계엄군의 구타로 숨졌다. 영정 속에서 그는 엷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서러운 미소를 뒤로 하고 추모관 입구에서 읽은 첫 글귀. '추모는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한결같을 오월 광주의 바람이겠다.
■충장사 & 충효리
국립5·18민주묘지 맞은편이 무등산이다. 무등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무등산은 광주다. 광주 사람에게 광주가 어디냐 물으면 무등산 아래라 한다. 무등산이 어디냐 재차 물으면 광주라 한다. 동어반복은 무등산을 향한 그들의 애정표시다. 그 무등산 주인이 김덕령이다. 그들은 김덕령을 '덕령이'라 부른다. 친근하고 정겨운 호명은 역시 김덕령을 향한 그들의 애정 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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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김덕령을 모신 충장사. |
조선 중기 선비 김덕령은 임진왜란 의병장이었다. 왜적 물리친 활약이 대단했다. 최후를 맞은 곳은 싸움터가 아니라 형장이었다. 거기서 장독으로 숨져 나갔다. 사유는 내란 음모. 추문하던 선조 임금도 김덕령에게 씌워진 혐의가 거짓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김덕령이 부담스러웠다. 김덕령은 결코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엿새 동안의 고문은 김덕령의 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때 일이다. 백성은 요절한 김덕령이 안타까워
그네가
사랑하는 무등산에 수많은 전설을 덧입혔다. 무등산 전설의 90%가 덕령이의 것이다. 김덕령 사당 또한 무등산국립공원 내에 있다. 시호를 따 충장사다. 김덕령의 묘가 그곳에 자리했다. 묘 왼쪽 숲길에 자목련이 곱게 폈다. 자목련은 북향화(北向化)다. 남쪽 바라기인 여느 봄꽃과 달리 북쪽으로 꽃봉오리를 벌린다. 옛 선비들은 외롭고 자유로운 그 고고함을 귀히 여겼다. 김덕령의 삶에 어울리는 꽃이다.
김덕령의 고향인 충효리로 향했다. 원래 명칭은 석저촌이었다. 김덕령 사후 200년, 정조는 마을에 '충효리'란 이름을 하사했다. 김덕령 기린 정려비각도 내렸다. 충효리는 광주의 동북쪽 끝마을이다. 실개천인 창계천 저쪽이 전남 담양이고, 이쪽이 광주다. 창계천변에 무등산 마주하고 환벽당이 앉았다. 김덕령의 작은 할아버지, 사촌 김윤제 선생이 지은 별서. 산비탈에 평평히 터 다진 환벽당은 대숲에 둘러싸여 환벽(環碧)이었다. 대숲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사방이 푸른빛이다. 별서 주인 사촌 선생은 호남사림의 한 절정이었다. 벼슬 길 마치고 낙향해 여기서 후학을 양성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되 세상과 호흡했던 사촌 선생은 많은 제자를 남겼다. 송강 정철이 그중 한 명이다. 인연이 닿아 송강을 외손녀 사위로 들이기도 했다. 환벽당 일원의 풍치는 지난해 명승으로 인정 받았다.
충효리 앞쪽으로 광주호 호수생태원이 펼쳐진다. 광주호는 1976년 조성된 인공호수. 2006년엔 호수생태원이 들어섰다. 그곳에선 귀가 즐겁고 눈이 행복하다. 2011년과 2012년 영국 첼시플라워쇼에서 금메달과 최고상을 수상한 정원
디자이너 황지해 작가의 작품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광주호 호수생태원의 백미는 광주호 쪽 버드나무 군락지다. 봄 머금고 뻗었다 굽었다 생긴대로 우거졌다.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빛난다. 물비늘 잔잔한 일몰 정취는 또 한 폭의 예술이다. 한두 시간이 거뜬하다.
충효리 정려비각 옆 '덕령이 나무'라 부르는 왕버드나무 세 그루가 오는 세월을 버티고 있다. 예전엔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해 소나무 한 그루, 매화 한 그루, 버드나무 다섯 그루였다. 네 그루는 말라 죽고 베어졌다. '덕령이 나무' 수령은 모두 450년을 넘었다. 그 아래 그늘이 한없이 넉넉하고 선선하다. 봄바람에 아득한 전설이 실려온다.
글·사진=임태섭 기자 tslim@busan.com
TIP
■교통자동차:남해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창평IC(광주·소쇄원 방면 우회전)~창평현로 5.5㎞ 직전하다 국립5·18민주묘지 방면 우회전~민주로~국립5·18민주묘지. 국립5·18민주묘지~광주호 호수생태원 20분. 광주호 호수생태원~충장사 10분.
대중교통: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1577-8301)에서 광주종합버스터미널(062-360-8800)까지 3시간 10분 걸림. 오전 6시 10분~오후 9시 30분 출발, 40분~1시간 30분, 요금 2만 2천300원.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국립5·18민주묘지행은 518번 버스, 45분 안팎 걸림. 충장사행은 1187번 버스, 45분 안팎 걸림. 충장사에서 광주호 호수생태원행은 187번 버스 타고 금곡 방향으로 4구간 가서 하차. 시내버스 요금 1천200원. 교통
카드 하차 기준 30분 이내 환승 시 무료.
팁:광주 시내버스 앱을 이용하면 노선과 도착시간, 내 위치 정보 등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 광주버스 검색해 다운로드.
■먹을 곳
광주호 호수생태원 앞 '엄마손맛집'(062-431-5237). 옛날국수, 애호박찌개, 우렁이청국장, 한방촌닭백숙 등.
간판에 적혀 있는 그 맛이다. 임태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