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연해주 지역서 구국항쟁 이끈 ‘독립운동의 대부’
Main page >경기도 ㅣ 승인 2015.07.13 저작권자 © 경기일보
[미래를 여는 역사의 門 해방 70년 京畿] 16. 항일운동 전반기 최고의 민족지도자 보재 이상설
▲용정에 있는 이상설역사전람관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 등은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끊었고 장지연은 한성순보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써서 울분을 토로했다.
최익현 등은 분연히 일제에 항의하는 의병이 됐다. 대신들은 앞 다투어 벼슬을 내어 놓고 고종황제에게 조약체결에 참여한 신하들을 벌하라고 상소했다. 그중에서도 조약을 체결하든 안하든 나라가 망할 것이라면 차라리 황제가 먼저 순사해 모범을 보이라고 일갈하는 이가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어떤 상소에서도 없었던 군주에게 먼저 목숨을 끊으라는 엄청난 상소를 올린 그가 바로 항일운동 전반기 최고의 중심인물이었던 보재 이상설이다.
■해외로 망명한 최초의 우국지사
▲보재 이상설 선생 | 이상설(1871∼1917)은 충북 진천 사람이다. 그는 24세(1894년, 고종 31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2년 만에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을 지낼 정도로 수재였다.
의정부참찬으로 있을 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경복궁 앞에서 땅에 머리를 찧으며 국권회복을 위해 총궐기하자고 호소했다고 한다.
피가 낭자하니 흐르는데도 그는 통곡하며 머리 찧기를 멈추지 않고는 급기야 실신하고 말았다. 동료들에 의해 후송된 이상설이 깨어난 것은 한 달 뒤였다고 한다.
사직으로 실업자가 된 이상설은 이동녕 등과 함께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을 떠났다. 항일지사 중 최초의 망명자였다. 이상설은 이제 확실해진 국권 상실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국외에서 나라를 되찾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연해주와 만주지역에 주목한 것은 그곳이 일찍부터 많은 조선인들에 의해 개간되고 정착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만주의 용정지역은 연해주 못지않게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는 곳이었고 조선의 영토임에도 일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1906년 여름 용정에 온 이상설은 인재양성이야 말로 국권회복의 지름길임을 알고 그해 8월 우리나라 국외 민족교육의 전형이 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게 된다. |
이상설은 스스로 숙장(교장)이 돼 학교에 들어가는 모든 경비는 물론 직접 학사행정을 총괄했다. 처음 교원 4명에 학생 23명으로 시작한 이 학교에서는 일반교육 뿐 아니라 이상설 본인이 직접 나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교육을 시켰다. 학생들은 수업을 통해 일반 지식은 물론 민족정신을 함양 받음으로써 항일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헤이그밀사 3인. 당시 해외 언론에 난 사진
처음에는 용정지역의 조선인 중심의 교육기관이었지만 차츰 망명을 떠난 모든 조선 청년들이 동경해 오던 학교가 됐다. 경기도 지역에서 조국을 되찾기 위해 만주로 찾아온 청년들에게도 서전서숙은 민족정신의 요람이었다.
당시 용정에 있던 많은 애국지사들은 이상설의 노력에 감화됐다. 그래서 서전서숙 이후 용정에 세워진 모든 조선인 학교는 이 학교의 운영모습이 곧 모델이었고 이 학교의 커리큘럼은 모든 학교의 기초 안이 됐다.
이상설의 동료였던 이회영 형제가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물론 이후 용정의 최고 지도자로 부각되는 김약연생의 명동학교, 대성중학교, 용정중학교, 동흥중학교 등 모든 학교가 서전서숙을 모델로 삼았으니 이상설의 영향이 어떻게 계승되는가를 알 수 있다.
■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역 이상설
이상설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던 고종에게 기회가 왔으니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었다.
고종은 국외에 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이상설을 떠올렸다. 헤이그에 보내는 밀사의 정사(正使)로 그보다 더 제격인 인물은 없었다. 고종은 이상설을 도와 줄 부사(副使)를 물색했다.
1907년 3월24일 밤 이준은 비밀리에 입궁해 고종의 밀명을 받았고 한 달 뒤 부인에게도 알리지 않고 부산을 거쳐 일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상설이 이미 와 있었다.
그때 이준은 품에는 고종의 신임장을 꺼내 정사인 이상설에게 넘겨주었다. 고종의 신임장을 받은 이상설은 눈물을 쏟으며 일본에 강탈된 조국을 되찾아 돌아갈 것을 맹세했다. 당시 정사인 이상설의 나이는 37세, 부사인 이준은 48세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상설의 망명에는 이미 고종의 의도가 깊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 건설은 물론 지금과 같은 결정적 시기에 고종이 가장 신뢰하고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이상설이었던 것이다.
이준을 헤이그로 파견하면서 고종은 급히 또 다른 밀사를 용정의 서전서숙으로 보낸 것이다. 서전서숙을 친구인 여준(呂準)에게 맡긴 뒤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갔다. 서전서숙은 그 뒤 일제의 탄압으로 1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 사람의 밀사는 기나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5일 뒤에 러시아의 수도인 상투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전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인 이위종(李偉鍾)을 통역으로 합류시켰다.
이위종은 프랑스 생시르 군사학교 출신으로 러시아어, 영어, 불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22살의 청년이었다. | ▲만주 용정지역에 있는 ‘서전서숙’의 옛터 |
▲수분하 강가에서 한 줌의 흙을 담는 유족들
실제로 이상설이나 이준은 외국어를 구사할 능력이 없었기에 헤이그에서 정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이는 이위종이었다.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밀사들을 환영한 국가나 외교관들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과 동맹국인 영국의 방해 때문이었다.
이위종은 그들을 상대로 유인물을 만들고 또 설명하고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문서를 번역해 돌리는 등 열정적으로 일했다.
그의 열정에 반한 서양기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언론에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밀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일본의 조선침략 부당성을 부각시키지 못했고 분노한 이준 열사는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이상설의 통곡소리가 밀사들이 묵었던 숙소 밖에서도 크게 들렸다고 외신은 기록했다.
유럽에서 뜻밖의 밀사로 인해 체면을 구긴 일본은 그 보복을 고종의 퇴위로 갚았다. 아버지 흥선 대원군에 의해 왕위에 오르고 아버지의 섭정과 민비의 등장,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갑오개혁, 대한제국 선포 그리고 을사늑약까지 우리 근대사의 모든 오욕을 감당해야 했던 고종은 헤이그 말사 사건으로 이렇게 허무하게 강제 퇴위되고 말았다.
그리고 밀사 3인에 대해서는 궐석재판으로 신속하게 처리해 마무리했다. 정사인 이상설에게는 사형이 내려졌고 이미 사망한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됐다. 있지도 않는 밀사들에게 이런 중형을 내릴 정도로 일제는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이상설의 최후
한편 이상설은 귀국하지 못하고 다시 연해주와 만주 일대를 돌면서 독립군 기지를 세우는데 주력했다. 그는 이 지역의 의병들을 모아 ‘13도의군’을 편성했고 1914년에는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대표인 정통령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한 러시아 정부의 압력으로 이 정부는 곧 해산되고 말았다.
이상설은 다시 상해에서 박은식 등과 ‘신한혁명당’을 건설하는 등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을 했다.
그러나 1917년 연해주의 니콜스크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의 유언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심문을 받으며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상설이다.
이범윤 같은 의병장 1만이 모여도 이 한분에 미치지 못한다”
안의사는 이상설이 만든 13도 의군의 참모장 출신이다.
유언대로 그의 시신은 화장돼 수분하 강변에 뿌려졌다. 재라도 강물을 따라 흘러 조국 땅에 도달하길 바라는 동지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조국이 독립되고 1996년에서야 겨우 후손들이 나서서 수분하 강변의 한줌 흙을 퍼서 고향인 진천에 있는 사당 ‘숭렬사’ 뒷산에 있는 부인의 무덤에 합장을 해 드렸다.
이상설의 죽음 이후 경기도 지역의 많은 우국지사들은 그가 밟은 길을 따라서 걸었다. 특히 그가 독립군 기지로 활용코자 준비해 둔 만주의 밀산지역은 후일 대한독립군단의 결성지가 돼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일제 하 항일운동 초기의 최고 중심인물은 이상설이었다.
임형진 (삼균주의연구소)
▲연해주 이상설선생 유허비.
유허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